야안 55화
17. 상행 II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는 금발이 귀찮은 듯, 대충 머리를 꼬아 귀 뒤로 넘긴 한스는 멀리서 서성거리며 수군거리는 어린 하녀들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린 하녀들은 부끄럽다는 듯이 꺅꺅거리며 요란을 떨더니 얼굴을 붉힌 채 모습을 감춘다. 그녀들이 간 자리에는 쿠키 보따리가 남아 있었는데, 때마침 온 티애가 그 쿠키 보따리를 들고 한스에게 왔다.
“하하, 자~ 여전히 인기 많구나.”
여느 평범한 시골 여자애들처럼 햇볕에 그을린 티애는 하얀 이를 보이며 웃음을 짓는다. 한스는 그런 티애를 보며 참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농노 시절 그녀의 마을에 일을 도와주러 갔을 때 당시 그녀의 웃음이 저랬는데,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웃음은 변함이 없었다.
한스가 야안과 친우인 테리를 제외하고 유일하게 그녀를 가까이하는 데에는 그녀의 이 같은 웃음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이 많아 자신을 마치 친동생처럼 여겨 주었는데, 태어나 피붙이도 없이 떠돌다 농노가 되어 여기까지 온 한스에게는 그녀가 주는 감정은 참으로 벅차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그녀의 그 친동생같이 대해주는 태도가 점차 불편해졌는데, 그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알려고 하지 않았다. 스승님이 내어준 숙제가 남아 그것에 집중하느라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 자신이 이 불편한 감정의 실체를 알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
그랬기에 그는 그녀가 다가오는 것이 좋으면서도 동생처럼 대하는 태도에는 꺼려지는 이중적인 감정을 동시에 느끼곤 했다.
더구나 이런 장면을 티애가 볼 때면 껄끄러운 감정은 더 심화되었다.
티애는 뭔가 마음에 안 들 때마다 뚱한 표정을 짓는 한스의 볼을 손으로 콕 찔렀다.
“어이구, 또 뭐가 마음에 안 들어 그런 거니. 저처럼 귀여운 소녀들이 좋아해 주는데 말이야.”
한스는 그녀가 찌른 볼을 문지르다 티애의 말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에휴~ 되었네요. 무슨 일이야. 한창 바쁜 시간대인데.”
한스의 말에, 그녀는 가져온 문서들을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다음 달에 스승님께서 상행을 떠나게 되셔서 너에게 임시로 영지 일을 맡기셨잖아. 이제 한 달도 채 남지 않았으니 예행연습을 해보라 하셔서 왔지. 이건 며칠 동안 영지에서 해야 할 일 목록들이야. 일단 보고 개선해야 할 부분에 대해 말해 줘.”
문서의 양은 상당했지만, 한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야안이 그러하듯이 훑어보더니 10분도 채 되지 않아 문서를 돌려주며 말한다.
“밀 농사 수출 쪽에 계산이 잘못된 부분이 두 군데 있어. 그리고 비료 만드시는 분들에게 이번에 여분을 구할 수 있다고 말씀드려. 지난번에 보니 그 정도 여력은 있을 것 같아. 확장하고 있는 포도밭은 아직 내가 보아야 하겠지만. 음, 공사 진척보다 자금이 너무 많이 들어가는데. 나중에 한 번 시찰하는 게 좋을 것 같아. 그 외에는 이대로 진행해도 되겠어.”
마치 외워 온 듯이 술술 대답하는 한스를 보며 티애는 작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와~ 정말 그 많은 것을 고작 10분 만에 다 보고 계산한 거야? 우리 한스 정말 대단한데.”
그러며 머리를 토닥이니 한스는 눈을 가늘게 뜨며 조금 전보다 더 뚱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런 한스의 반응이 우습다는 듯 티애는 두 볼을 쿡쿡 찌르며 장난을 치다, 이내 할 일이 아직 많이 남았다는 것을 상기하고는 ‘수고해.’라고 말을 하며 손을 흔들고는 떠나갔다.
그런 티애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한스는 긴 한숨을 내쉬며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아~ 정말 곤란해.”
* * *
야안은 자신이 상행을 떠났을 때 혹시나 생길 변수들을 계산하며 일을 진행했는데, 다행히 한스가 있어 그가 준비해야 할 일들은 많지 않았다.
다만 걱정되는 것이라면 한스는 자신이 내준 숙제를 아직 다 마치지 못했고, 농노 시절의 일 때문에 대인 관계에 여러 가지로 문제가 있다는 점이다.
그래도 다행하게도 사이가 좋은 티애가 대인 관계가 좋아 잘 보조해 준다면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영지를 비운다고 해도 큰일은 없을 것 같았다.
이번에 야안이 가는 곳은 그의 퀘스트와 관계가 깊은 영지로 윌 백작가의 영지였다. 백작이라면 고위 귀족가인 만큼 야안이 손해 볼 것 같았으나, 현재 윌 백작가의 사정이 몹시 나빠 잘하면 좋은 조건으로 거래를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야안은 생각하였다.
윌 백작가의 위치는 현재 전쟁의 가장 중심에 있는 탈리아 왕국이었다. 많은 광산이 있어, 이 나라의 반 이상이 광산 일에 종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인 탈리아 왕국은 산이 많은 대신 평지가 적고 날씨가 흐려 기호품이 귀했다.
식량 거래로도 이문을 남기겠지만, 귀족들의 애호품인 포도주는 그와 비교할 수 없는 큰 이익을 줄 것이 분명했다.
마크 남작 영지의 포도주가 아직 널리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시음하게 된다면 능히 고급 포도주에 준할 만큼 훌륭한 거래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전쟁이 있기 전, 전 백작인 윌 가주가 전쟁에서 죽지 않았다면 거래 자체가 힘들었겠지만. 하지만 윌 가주가 죽었을 뿐 아니라, 군사의 반 이상을 잃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어쩌면 이 거래는 큰일이 아닐지 모른다.
현재 윌 영지에는 철광산 한 개와 구리 광산 한 개가 있기에, 마크 영지의 포도주와 이곳의 특산품인 철과 구리를 거래한다면, 시장 형성에 도움이 될 뿐 아니라 마크 영지의 고질 문제인 금속 수입 부분을 해결하게 될 것이다.
야안은 작년에 담가놓은 것 중 가장 품질이 좋은 포도주를 선별하고, 외지에서 짐말을 더 수입하여 거래가 성공되어 금속을 가져올 수 있는 마차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일의 순서가 그렇게 되니 예비로 가져갈 마차 바퀴를 위해 대장간과 목재소에서는 망치 두들기는 소리가 끊이지를 않았다.
상행의 시기가 가까워지자 야안의 가족들은 야안에 대한 걱정에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그 상행의 목적지를 알게 되어서인데, 하필 가장 치열한 1, 4전장이 있는 탈리아 왕국이라는 것을 듣고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듣기로 고위 귀족인 백작가와 교류를 하러 간다 하는데, 때가 좋아 이 시기에 가장 좋은 거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 이 거래가 성립된다면 영지는 막대한 자원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한다.
그야말로, 영지의 개발을 10년을 앞당길 수 있는 거래인지라 영지를 책임지는 자라면 위험을 무릅쓰고 가야 할 상행이었다.
이 첫 거래만 잘 유지된다면 다음의 거래 또한 순조롭게 진행이 될 것이고, 이로써 야안이 생각한 시장의 건설 시기는 더욱 빨라질 것이다.
이러한 사정을 알기에 가족들은 걱정하면서도 그의 앞에서는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가족을 자신보다 더 아끼는 야안이 그런 것을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 때문에 야안은 어느 때보다 바빴지만, 어떻게든 시간을 만들어 가족과 함께 있는 시간을 가지려 했다.
“어이쿠, 우리 아들. 이제 제법 묵직해졌는데.”
아닌 게 아니라 타고난 근골이 좋아서인지 다른 아기들보다 배는 나갈 것 같은 무게에 야안은 기뻐 소리쳤다. 그 말에 멜리나는 한숨을 흘리며 그 작은 손으로 자신의 팔을 토닥토닥 치며 말했다.
“에휴~ 정말이야. 요즘 아들을 오래 안고 있으면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아. 너무 무거워.”
“하하, 리나가 정말 고생이 많은걸. 도와주지 못해 미안해.”
야안의 말에 멜리나는 씩 웃음을 지으며, 야안의 엉덩이를 툭 쳤다.
“되었네요. 참, 말은 잘한다니까. 이제 열흘도 안 남았는데, 바쁜 거 아니야?”
“바빠도 우리 가족들 볼 시간은 있지. 으~ 한동안 보지 못한다 생각하니 너무 가슴이 아픈걸.”
그러며 슬픈 표정을 보이는 야안에 멜리나가 다가와 까치발을 하더니 이내 길게 입을 맞추었다.
서로의 입술을 훔치고, 부드러운 혀를 나누며 숨을 공유하던 그들은 아기의 뒤척거림에 그제야 미소를 보이며 떨어졌다.
“흠~ 오랜만에 엄마와 사랑을 나누려 했더니, 아들이 방해하는데?”
“어머, 애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 우리 엄마가 한 번 보재. 자기 주신다고 옷을 한 벌 지으신 것 같아.”
“그래? 어머니도 내 옷을 짓고 계시던데, 이러다 옷 장사를 해도 되겠어.”
실없는 야안의 농담에 멜리나가 웃음을 흘렸다.
“어쩜 농담을 그렇게 재미없게 하는지. 그것도 대단한 재주야.”
부인의 말에 야안은 자신의 농담이 그렇게 재미가 없었나 싶어 잠시 고민에 빠졌다.
곧 아기가 깊은 잠이 들자 아기 요람에 눕히던 그들은 야안이 가져온 포도주를 따 마시며 이런저런 잡담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 * *
열흘이 지났다.
이날 마크 성에서는 상행 준비를 마무리 짓느라 이른 시간부터 바빴다. 이른 시간에 나가야 그만큼 몬스터들을 만나는 일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오크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몬스터가 야행성이라, 해가 떠 있는 낮에 빠르게 이동이 되어야 한다.
건량과 마실 물들을 정비하고, 포도주가 담긴 마차 다섯 대의 안전 문제를 다시 검토하였다.
이번에 첫 실전을 하게 될 스무 명의 정예 검사들도 자신들이 탈 말을 살피고, 검과 방패를 점검했다.
이들의 방패는 얇은 철판에 나무와 오크의 가죽을 덮어씌운 것으로, 비교적 가벼워 빠른 검을 펼치는 이들의 몸놀림에 크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특히나 오방 검진을 펼칠 때 방어적인 요소가 많은 만큼 여러모로 큰 도움이 되는 물건이었다.
물건을 관리하는 하인들 열 명도 자신이 몰아야 할 예비 마차 바퀴 등을 살피며, 수효를 세어보았다.
야안은 전체적으로 지휘를 하다, 점검이 마무리되자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을 앞으로 오랜 기간을 같이할 수하들과 함께 나누며 담소를 나누었다.
하지만 길게 나누지는 못했는데, 그 이유는 자신을 보러 온 가족들 때문이었다. 어제 이미 인사를 나누었건만, 걱정이 되어 밤새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해 나온 것이라 생각하자 가슴 한편이 울렁거렸다.
야안은 아들과 부인을 껴안아 주었고 장인·장모에게도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그리고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자신을 자애롭게 바라보던 어머니와 아버지를 꼭 안아주며 아쉬움을 달랬다.
“그래, 내가 듣기로 국경선 넘어가는 유토 산맥에 대형 몬스터가 나타나지 않는다지만, 종종 코볼트나 오크들이 모습을 보인다 하니 조심하여라. 너의 실력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크게 걱정하지 않겠다. 그래, 이렇게 훌륭하게 장성했는데 내가 더 무어라 말하는 것도 그렇지.”
“아버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무사히 돌아올게요. 제가 누구 아들인데요.”
야안의 대답에 베론 가한은 껄껄 웃음을 흘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초조함이 없지 않은지, 담배 파이프를 입에서 떼어내려 하지 않았다.
그런 야안의 대답을 옆에서 듣던 마리는 아들의 얼굴을 몇 번이고 쓰다듬었다.
“그래그래, 이 모습 그대로 돌아와야 한다, 아들아.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알았니.”
“네, 어머니. 그럴게요.”
밤새 잠을 자지 못하셨는지 충혈된 눈을 한 채 오직 자신만을 걱정하는 어머니의 모습에 야안의 코끝이 찡해진다.
다시 한번 어머니를 안아 드린 그는 밤새 아기를 돌보느라 피곤해 졸린 눈을 비비는 멜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선물 사 올게. 그때까지 아프지 말고. 알았지.”
“응, 당신도 아프지 마.”
그렇게 부인과 마지막으로 해후를 나눈 야안은 자신의 또 다른 아들 같은 제자 한스를 보며 말했다.
“우리 가족들을 잘 부탁한다. 혹시 위험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알겠지?”
야안의 말은 예전에 알려준 폐쇄된 던전을 말하는 것이라, 한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 누구보다 스승님의 실력을 잘 알기에 크게 걱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부디 거래를 잘 끝내고 오시기 바랍니다.”
“하하, 그래, 믿음직스럽구나.”
한스의 흐트러짐 없는 말이 기특하여 머리를 쓰다듬어준 야안은 다른 제자들에게도 작별의 인사를 한 뒤 이내 상단을 이끌었다.
시골에서는 보기 힘든 대규모의 상단이었기에, 성내의 사람들은 요란한 소리에 이른 시간부터 잠이 깨어 마중하듯 일행의 뒤를 지켜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