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61화 (61/385)

야안 61화

19. 구제

이 세계에 신은 오직 유일신 아리스만이 자리했다. 하지만 그 수많은 사람 중에서도 신관의 수는 매우 적었다.

마일드 왕국에서도 겨우 열 명밖에 되지 않는 존재였고, 카리엘 제국에서도 100을 넘지 못했다. 전체적으로 그 수를 헤아려도 1,000을 넘기기 어려웠다.

그만큼 이들의 존재는 매우 귀한 것이었는데 이들이 이처럼 적은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신관이 되기 위한 조건이 아주 까다롭기 때문이다. 어느 특정 단체에서 내려주는 것 따위가 아니었고 스스로 되고 싶다고 하여 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세상을 자애롭게 보는 자에게 내리는 아리스의 축복이었다.

성력은 고결한 마음에서만 얻을 수 있었다. 끝없는 희생을 받아들이고 그 인격이 능히 성자에 달해야 그 자격을 가질 수 있으며 희생과 노력으로 성력을 늘릴 수 있다.

그렇기에 신관이라는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기에 감히 한 나라의 왕이라도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왕도 결국 한낱 인간이라, 신 앞에서는 그 직위도 무용지물이었다. 그에 반해 신관은 아리스의 선택을 받은 그분의 종이었으니 그를 대하는 태도가 조심스러워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귀족들 또한 자신에게 크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는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지원해 주었다. 결국, 그들이 하는 일은 세상을 위한 옳은 일이었으니 그들을 지지하는 것만으로 귀족은 큰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현 구존 중 하나인 모든 신관의 정점에 있는 성자는 완성된 인격체를 가진 자였다. 그러하기에 그 누구도, 그 어느 단체도 그의 앞에서 오만한 태도를 보이는 자가 없었다.

또한 같은 구존도 그와의 충돌이 있는 곳은 먼저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들이 기피하는 이유가 그의 인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성자는 공격에는 약하지만, 방어에서는 오래전 대현자 테무드만큼이나 강력한 방어력을 펼칠 수 있다.

바로 아이기스를 펼칠 수 있었다. 아이기스는 신화시대의 언어로 신의 방패를 뜻한다. 모든 공격을 되돌린다는 이 아이기스는 성자로서도 무리한 방어 형태이지만 펼치면 능히 구존의 모든 공격을 되받아칠 수 있다.

야안은 자신의 머릿속 어딘가에 자리한 그 성스러운 기운에 젖어들다 새로운 정보 창에 간신히 깨어났다.

[리젠

성수만큼은 아니나 단번에 상태를 30% 이상 복구하는 신성 마법이다. 아직 미숙한 그대로서는 하루에 다섯 번밖에 펼치지 못한다.]

“리젠…… 이것이 신관님들이 펼치신다는 기적의 힘인가.”

현자의 마법과 그 궤를 완전히 달리하는 기적의 힘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신성 마법이었다.

야안은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두려워하며 바라보는 그녀의 어미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렸다.

“리젠.”

수식도 없었다.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그저 그녀를 낫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과 리젠이라는 짧은 한마디가 놀라운 기적을 만들어냈다.

* * *

오래된 이야기책에서 나오는 것처럼 요란한 빛 따위는 나오지 않았다. 그저 언젠가 따스한 봄에 느낀 훈훈하고 미약한 바람이 그녀의 전신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 과정에서는 갑작스러운 회복에서 느끼는 고통은 없었다.

가슴에 막힌 무언가가 뚫리는 듯한 상쾌한 기분이 전신을 쓰다듬었고, 그것은 그녀의 머릿속을 간질이며 사라졌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때만큼은 피난민도 아니었고 누군가의 어머니도 아니었다. 그저 모든 짐을 내려놓은 어린양일 뿐이다.

고질이었던 기침이 멈추었고, 욱신거리던 무릎의 고통도 사라졌다. 못 먹어 한 점의 기력도 없었던 자신이 이제 이 어린 딸을 안아 들 수 있을 만큼 기력이 생겨났다.

이 놀라운 이적을 행하신 분을 말없이 바라보는데 그분이 자신의 딸에게도 축복을 내렸다. 그러자 딸 또한 그 기적을 받았는지 활기가 돋아났고 그 흐릿한 눈에 초점이 또렷해졌다.

“아, 아리스시여.”

지금은 전쟁의 여파에 사라졌지만, 한때 한 영지의 집사 일을 하신 아버지 덕분에 글을 깨우치고, 많은 것을 들어 알았던 로즈는 그분이 행한 이적이 마법임을 알았다.

다만 그 마법이 신성 마법인 것은 상상치 못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 세상에 겨우 1,000명도 되지 않는 신관이 펼치는 마법을 자신에게 부여했을 것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렇게 놀라는데 그분이 소리쳤다.

“나는 마크 남작가의 총관 베론 야안이다. 아리스 님을 대신하여 그대들을 거두어들이겠다.”

그렇게 말한 그분이 저 멀리서 자신들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자경단의 한 사람을 불러들였다.

“오늘 해가 질 무렵 이곳에 그대들의 책임자들을 모아 데려오라.”

그렇게 말하던 그분이 자신에게 말했다.

“지켜라, 이 아이는 너의 희망이다.”

“알겠나이다.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그 말에 야안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오히려 덕분에 깨달은 바가 많다. 다시는 희망을 놓지 마라.”

그렇게 말하던 야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고 두 모녀는 그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묵고 있는 여관으로 온 야안은 오지 않은 자신이 걱정되어 밤새 기다린 수하들에게 미소를 머금더니 말했다.

“결심했다. 그들을 우리의 영지로 데려가겠다.”

앞뒤 없는 말이었지만, 테리도 그랬고 그 외의 수하와 하인들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걱정스러운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것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었다. 그의 주군께서 결정하신 일이었으니 자신들은 그분의 의사를 존중하고 따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알겠습니다. 그럼 주위의 식량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야안은 자신의 말을 대번에 알아듣는 수하들을 기쁘다는 듯이 바라보더니 품에서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었다.

“1,000골드이다. 이것으로 옥수수 가루를 사 모아 오후에는 이것을, 오전에는 내가 주는 파래라는 것을 배식하게 하라.”

1,000골드로 옥수수 가루를 사들인다면 능히 피난민들이 먹을 한 달 치 식량을 사들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이곳에서의 일을 끝내는 시간밖에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밀가루 1,000포대에 달하는, 어쩌면 그것을 넘어서는 양인 파래가 있다. 이것을 같이 나누어 준다면, 그 양은 물론 영양 면에서도 여러모로 좋을 것이다.

다행히도 현재 이곳 영지는 옥수수를 주식으로 삼고 있었다. 본래 옥수수는 단위 면적당 얻을 수 있는 수확량 중 최대 수확량을 자랑하는 곡식이다.

그럼에도 옥수수를 키우지 않고 상대적으로 수확량이 적은 밀을 키우는 것은 옥수수보다 밀을 키워 파는 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었다.

탈리아 왕국도 전쟁 이전에는 옥수수보다 밀을 선호했지만, 지금은 전쟁으로 큰 식량난이 일어나자 대부분의 농지에서 옥수수를 키우고 있었다. 덕분에 지금은 옥수수를 구하는 것이 크게 어렵지 않게 되었다.

야안은 이내 테리에게 다시 500골드를 건네주었다.

“이것으로 이곳 도시에 남아 있는 마차와 헌 천을 사 모아라.”

자신의 남은 비상금을 테리에게 건네준 야안 또한 식량을 알아보기 위해 여관을 나서려고 했으나, 성에서 온 전령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거칠게 말을 몰고 온 전령은 말에서 내려 공손하게 야안에게 서신을 바쳤다. 야안은 그 서신을 읽으며 미소를 지었다.

“음~ 허례허식이 없는 분이시구나. 생각보다 좋은 거래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야안은 자신의 결심으로 앞으로 있을 거대한 손실들을 이번 거래에서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을지 모른다 생각했다.

그랬다. 피난민 2만 명.

그 숫자는 현재 영지민의 수보다 더 많은 숫자였다. 그들이 영지로 온다면 비료의 개발로 풍부해진 자원들도 이내 게 눈 감추듯 자취를 감출 것이다.

아니, 그들을 받아들인 것 자체만으로 영지는 2년 전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것은 암울한 이야기였다. 영지민들에게 더없이 미안한 이야기였다.

현재 마크 남작가가 운영 가능한 영지의 크기는 다른 남작가 영지의 80%에 불과했다.

본래 왕국에서 내어준 마크 남작가의 영지의 크기는 그보다 대략 두 배는 넓었지만,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실제로는 이 정도밖에 쓰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꼭 마크 남작가가 아니어도 일반적으로 남작 영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영지민은 2만 5,000 정도가 최선이었다. 그 이상은 그 영주가 특별나게 수완이 좋지 않고서는 무리한 일이다.

살 곳을 만드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별다른 자원도 없는 시골 영주로서 그 이상의 인원은 영지민들 전체를 가난하게 만들 뿐이다. 또한, 통제하기 어려우니 치안을 유지하기도 어렵다. 문제는 많았다.

그러하니 남작가가 비료로 상황이 좋아졌다지만 갑자기 2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유입된다면 현재 야안의 수완이 좋다 해도 큰 피해를 입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전령이 가져온 이 서신의 내용은 그에게 큰 의미가 되었다. 만약 백작이 소문처럼 옹졸한 자라면 거래가 크게 어려워질 것이다. 잘해봐야 이번 단기 계약으로 끝이 날 것이고, 자신은 다시 다른 곳으로 상행을 떠나야 했다.

가세가 기울어졌다 해도 백작가였다. 고위 귀족이고 한때 탈리아 왕국의 대귀족이었던 만큼 거래에서 그들이 여기저기를 트집 잡는다 해도 자신이 어떻게 할 위치가 아니었다.

피난민의 일로 당장 큰 자금이 필요해진 야안으로서 부디 이 거래가 잘 끝나기를 소망했다. 부디 자신의 생각대로 되기를 바랐다.

야안은 전령을 필두로 두 명의 검사들을 수행원으로 삼아 그를 따랐다.

대귀족이 머물던 백작 성은 과연 멀리서 보던 것보다 더 거대하고 화려하였다. 회색 거대한 돌벽으로 성을 지지하고 고풍스러운 옛 멋이 담긴 백작의 성은 그 자체만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마치 어느 거대한 거인이 오랜 세월을 버티고 있는 듯해 위압감마저 줄 정도였다. 이 앞에서 마크 영지의 남작 성은 성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지경이었다.

야안은 그 모습을 보면서 2년 전 도회지에서 자신의 일로 바빠 미처 보지 못한 왕성이나 카람 백작 성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다.

그 충격은 야안보다 그의 수하들이 더했다. 그들은 저마다 약간 넋이 나간 채 주위를 살폈는데, 그 모습에 야안은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이나 수하들이나 시골에서만 살던 촌놈들이라 이런 문화적 충격에는 영 면역력이 없는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때였다면 그런 수하들의 모습을 기꺼이 지켜보았겠지만, 현재 돌아가는 상황이 좋지 않아 그들을 깨웠다.

“정신들 차려라. 여기는 타국의 백작가이다.”

야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은 그들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작게 묵례를 했다.

내성 앞까지 도착한 야안 일행은 그곳에서 이미 기다리고 있던 집사의 안내를 받았다.

집사는 예전 그의 정치 스승이었던 매틀 요한이 생각이 날 정도로 나이가 든 자였는데, 그 기백이 대단해 노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겉으로 보았던 것보다 백작 성의 내부 구조는 더 넓고 복잡해 야안 일행은 한참을 돌아 몇 개의 계단을 올라선 뒤에야 한 거대한 문 앞에 멈출 수 있었다.

“이쪽입니다. 들어가시지요.”

그러며 문을 열어 그들을 안으로 들였고, 안에는 여러 명화와 장식품들이 자리한 거대한 공간이 있었다.

단순한 접객실이라 생각하기에는 워낙 넓고 화려한 터라 연회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하게 만들었다. 야안은 집사의 안내로 접객실 한쪽에 자리한 긴 목탁의 한쪽에 앉았고, 그의 수하들은 그의 뒤에 자리를 잡았다.

이내 준비한 듯 홍차와 약간의 간식거리가 들어왔다.

“곧 윌 로이스 자작님께서 오실 것입니다.”

집사는 그렇게 말을 하고는 가벼운 목례와 함께 접객실을 나섰다. 야안은 접객실 한편을 그 비싸다는 투명한 유리로 채워 안에서도 밖을 볼 수 있게 만든 백작의 저력에 감탄했다.

그것만을 보더라도 예전 백작의 위세가 눈앞에 선하게 보이는 듯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