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63화
야안이 여관에 돌아왔을 때를 맞춰 테리를 비롯한 수하들은 배식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식량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이 맞은 듯 구할 수 있었던 식량은 5일 치밖에 되지 않았다.
아직 목표치는 되지 않았지만 어렵게 구한 마차는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상태가 좋다는 점에 만족했다.
이 마차들은 난민 중 어린아이나 노인, 몸 상태가 좋지 않은 병자들을 싣고 갈 용도였다. 그가 가져온 바퀴들 또한 재고가 어느 정도 있으니 근처의 대장간에서 구해야 할 양은 많지 않았다.
테리는 마음속으로 주군처럼 모시고 있는 야안의 명령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자책했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 듯 야안은 테리의 어깨를 도닥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잘했다. 내일부터는 백작성에서 도움을 준다고 하니 모자란 부분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테리를 위로한 야안은 곧 그들을 따라 백작성에 나온 관리와 병사들에게 와인을 이양했고, 관리는 자작이 준비해 준, 이양받았다는 확인서를 건네주었다. 와인의 수효 확인을 끝낸 관리가 야안에게 와 말했다.
“현재 정제된 철과 구리는 지금 준비 중입니다. 길어도 한 달 안에 일이 끝날 것입니다. 또한, 내일부터 일부 정예병들과 영지에 남는 무기들을 건네주신다 하셨습니다.”
그들이 건네는 무기들이라고 해봐야 제대로 정제되지 않은 녹슨 박도 같은 것이나 창대에 꽂는 창촉 부분들이었지만 그것으로도 전력의 큰 상승을 부를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관리는 자신의 골머리를 앓게 했던 피난민들에게 식량을 나눠주러 떠나는 야안 일행들을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눈으로 바라보다 와인을 호송하며 떠났다.
야안은 막 날이 저물려 하자 서둘러 식량을 들고 움직였다.
약속된 성문 쪽에는 혹시나 하여 모여든 자경단들이 자리했는데, 그들 중에서 40대 중반 정도의 건장한 인물이 야안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챈들러라 합니다. 설마 정말로 오실 줄 몰랐습니다.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오랫동안 떠돌며 고생한 자치고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에 야안은 챈들러라는 인물에게 진실의 눈을 펼쳤다.
그러자 놀라운 그에 대한 정보들이 야안의 뇌리에 들어섰다.
용병, 자괴감, 책임, 남작, 서자, 파괴된 마나 홀, 두려움 등의 단어들이었는데 야안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그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는 본래 남작가 출신이나 어미가 천한 하녀라 환영받지 못한 서자였다. 시기심 많은 형제와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아버지로 어린 시절 큰 수모를 당하던 그는 성인이 되자마자 세상에 뛰쳐나왔다.
본래 검에 대한 재능이 남달랐기에, 용병으로서 일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용병단을 창설할 수 있었다.
귀족 출신임에도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귀족의 특권을 버린 그였기에 그는 현재 세상의 부조리함에 크게 한탄했다.
인간은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 라는 신념을 가진 그는 어려움이 있는 빈민층이나 노예들에게 도움을 주었는데, 자연 그런 사상을 가진 자인만큼 많은 시빗거리가 생겼던 터라 5년 전 어느 단체에서 그는 큰 피해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그는 초급 익스퍼트의 경지에 막 올라선 상태였지만, 그 경지를 수습하기도 전이라 대용병단을 창설하지 못해 세력이 약했다. 그런 상태에서 그에게 적의를 가진 이들이 그가 익스퍼트 경지에 올라섰음을 알자 힘을 모아 그를 친 것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키운 용병단의 반수가 죽어나갔고, 자신은 부하들을 살리는 과정에서 마나 홀을 다치게 되었다.
다행히 그전에 적장들의 목을 쳐 그들의 추적을 막을 수 있었다. 마나 홀을 잃고 예전 같은 무위를 펼치지 못하였지만, 남은 수하 중 절반 이상이 그를 떠나지 않았다.
대외적으로 수하들이라지만 그들에게 있어 챈들러는 아버지이고 스승님이셨다. 이들은 본래 빈민들과 노예들을 돕다 그의 눈에 들어 키워진 자들로 그의 사상을 열렬히 따르는 이들이었다.
아직 성인도 되지 않는 이들이었고, 수련 기간이 짧아 대부분이 하급 유저 정도였기에 소규모의 용병 일을 하며 세상을 떠돌았다.
그러던 중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고, 피난민들이 생겨나자 그들은 평소 사상에 따라 이들을 보호하는 데 앞장섰다.
처음 겨우 200명에 불과했던 피난민들은 점차 늘어 1,000이 넘고, 3,000이 넘더니 후작의 수작으로 2만 명이 넘게 되었다.
겨우 스무 명으로는 그들을 보호하기 어려운 터라 챈들러는 그들 중 힘이 좋고 검을 쥐어본 자들을 뽑아 자경단을 만들었다.
그 수가 500에 달해 관리하기 어려웠지만, 챈들러와 그의 수하들은 그들에게 사상과 검을 가르쳐 그들이 난민들을 데리고 다니며 만든 최소한의 규칙들을 알려주어 이를 어기는 이들이 없게 하였다.
그 규칙은 세 가지로, 도둑질을 하지 말며, 살인을 하지 말며, 식인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고기를 먹게 되면 위험하다. 인간의 고기는 중독성이 크기에 나중에는 음식이 있어도 인간을 죽여 식인을 하는 상태까지 가기 때문이다.
이런 정신이상자들의 출현은 난민들을 불안하게 하여 더욱 통제하기 어렵게 되고, 이 때문에 도둑질과 살인을 하는 일들이 빈번해지면 결국 나라에서는 그들을 토벌 대상으로 삼기에 이 규칙을 만든 것이다.
예전 용병단에서 모은 돈과 그 후에 벌어들인 돈으로 이들에게 식량을 나눠 주었지만, 2만 명이 넘는 인원들을 먹여 살리기에는 턱도 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이내 돈을 모두 써버렸던 그는 일부의 병력을 돌려 상행을 도와주어 식량 따위를 얻거나, 귀족 시절의 경험을 통해 산에서 먹을 수 있는 것들을 캐어내었다.
또한 어느 정도 합을 맞춘 자들을 모아 자신들을 노리는 오크 따위의 몬스터들을 잡아 부산물을 팔아 식량을 구입했는데, 이들의 사정을 아는 상인들 때문에 매번 변변찮은 거래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최선을 다해 힘든 나날을 버텼지만, 역시 빈곤한 식량 사정과 고된 삶으로 하루에도 수십 명씩 죽어 나가는 것까지는 어떻게 하지 못했다.
그저 전염병이 생기지 않도록 시체들을 모아 불에 태워 처리할 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관리해야 할 자들이 많았기에, 몬스터들에게 죽어나간 이들의 시체 조각들까지는 처리하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날이 추울 때는 그래도 동상에 죽어나갔어도 전염병은 일지 않았는데, 요즘같이 무더위가 시작되는 때는 전염병이 일어나는 순간 토벌의 대상이 되어 지금의 거주지에서 쫓겨나기에 챈들러는 최근 들어서는 수하들을 크게 다독여 전염병이 생길 요소들을 최대한 줄이려 노력 중이었다.
작년에는 그래도 수가 많지 않고 식량 사정도 지금보다 나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지만, 지금은 워낙 그 수가 많고 식량난이 심해 어려움이 컸다.
그러한 때에 야안이 구제에 나서기로 했으니 챈들러로서는 큰 감동이었다.
야안은 이렇게 많은 피난민이 생각보다 잘 통제되고 있음에 뛰어난 자가 뒤에 있음을 짐작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더 뛰어난 존재이자 크게 기뻐하였다.
“그대가 이곳의 대표로군. 지금 그대가 운영하는 자경단의 수는 몇이나 되는가?”
그 말에 의문을 보이던 챈들러는 이내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500명 정도 됩니다만, 지금 50명 정도가 다른 상행을 도우러 가고 300명 정도가 몬스터들을 토벌하러 간지라 지금 운영 가능한 이들은 200명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많군. 그들의 무장 수준은 어떤가?”
그 말에 챈들러는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무장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죽창과 주위 나무를 깎아 만든 나무 방패 정도입니다.”
“평균적으로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야안이 이런 쪽으로 묻자 챈들러는 걱정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혹시나 이자가 그들을 빼내 가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것이다.
야안은 그가 잠시 말이 없자 그의 걱정을 짐작하고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자네가 생각하는 일은 없으니 솔직히 말해 주게. 어느 수준인가?”
잠시 고민하던 챈들러는 지금으로서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기에 어렵게 말을 열었다.
“그중 70명 정도는 정예병이라 해도 될 정도입니다. 그 외의 병력은 이제 숙련병을 막 벗어났습니다.”
어렵게 말을 꺼낸 그는 마치 재판을 기다리는 죄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야안은 그런 그에게 다가가 숙인 그의 어깨를 잡아끌어 안았다. 마나 홀을 다친 후에도 단련을 멈추지 않은 다부진 그의 몸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행동에 그는 힘없이 끌려가고야 말았다.
야안은 더럽고 냄새나는 그의 상태를 아랑곳하지 않은 채 힘껏 안고 그의 등을 도닥여 주었다.
“고생했네. 지금 같은 실정에 그 정도로 수하를 관리하였다니. 그대의 고생이 눈에 선할 지경일세. 참으로 장하네. 이제, 이제 나에게 맡기시게나.”
야안의 그 태도에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그는 이내 야안의 진심이 절절한 말들에 눈앞이 흐릿해졌다.
“으허허헝.”
그는 울었다. 마치 오랫동안 전장을 떠돌다 고향에 돌아온 이처럼 눈물을 터뜨렸다. 어린 시절 이후 그처럼 울어본 적이 없었다. 그의 큰어머니 손에 독살당해 죽은 어머니의 시체를 발견했던 그 당시처럼 눈물을 쏟아내었다.
그의 울음소리에 배식을 기다리느라 소란스럽던 피난민들은 숙연해졌고, 어린아이들도 그 무거운 분위기를 알아 자연 칭얼거림을 멈췄다. 가끔 배고파 우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만이 간간이 들려 그 숙연한 분위기를 더 무겁게 만들었다.
자신보다 훨씬 어린 자의 품속에서 위로를 받으며 울음을 터뜨렸지만, 그는 지금의 상황이 어색하다 생각하지 않았다. 부끄럽다 생각지 않았다.
어린 시절 그토록 바라기만 했던, 언제나 꿈꿔 상상했던 아버지의 품이 이럴 것이라 생각했으니.
야안은 그런 그에게 마케와 힐을 걸어 최근 걱정으로 떨어진 체력을 나아지게 하며 그의 등을 도닥였다.
한참을 그렇게 울음을 터뜨리던 그는 야안이 걸어준 마케와 힐 덕분에 진정이 되었는지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야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왜 이러는지 몰랐다. 처음 보는 자이건만 그는 마음이 크게 동했다. 가슴이 저렸다.
피난민들의 의지가 되어주었던 그였지만 정작 자신은 의지할 대상이 없었다. 외롭고 고통스러운 날들이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토록 안정이 되고 믿고 싶은 생각이 든 것은.
자신의 짐을 대신 짊어져 주는 자가 있다는 것이 이토록 든든한 것인가.
그의 입이 크게 떨리며 열렸다.
“저 챈들러, 세상을 떠돌다 이제야 마음을 맡길 분을 뵙게 되었습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그 말에 야안은 미소를 지으며 손수건으로 그의 침과 콧물, 눈물 등을 닦아주며 말했다.
“나는 마일드 왕국 마크 남작가의 총관 베론 야안이라 한다. 너를 비롯해 이곳의 어려운 자들을 구원하겠다고 아리스 님께 맹세한 바 있다. 그대는 나와 함께하겠는가?”
챈들러는 자신에게 미소를 지으며 손수 자신의 오물을 닦아주는 야안의 행동에 황송하다 생각하며 걸음을 뒤로 해 자리를 벌리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맹세하였다.
“보잘것없는 저 챈들러가 베론 야안 님을 평생의 주인으로 삼을 것을 아리스 님께 맹세하겠나이다.”
그의 행동에 야안은 잠시 크게 당황했으나, 그의 의지가 확고함을 알고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꺼내어 그의 양어깨에 툭 친 후 외쳤다.
“나, 베론 야안, 그대를 명예로 이끌 것을 아리스 님께 맹세하겠다.”
챈들러는 다행히도 야안이 자신의 맹세를 받아주자 크게 기뻐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내 평생 이처럼 기쁜 일이 없구나. 이제 저의 모든 것은 주인님을 중심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의 뜨거운 맹세에 그의 수하들은 크게 기뻐 박수를 쳐주었고, 난민들 또한 축하를 해주었다.
다만 그의 뒤에 있는 테리와 몇 명의 수하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자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