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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64화 (64/385)

야안 64화

특히 테리의 경우에는 그 아쉬움의 정도가 얼굴에 확연히 드러날 정도였다.

‘아! 나의 처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저 모습은 나의 것일 터인데.’

테리는 너무도 아쉬웠다. 자신이 주군으로 맹세를 하게 되면 이후 마크 남작이 돌아온 뒤 일이 복잡해질 것임을 알기에 그저 꿈꾸어 마음속에나마 주군으로 부를 뿐이었다. 그런 입장이었으니 주인이라 부르게 된 챈들러가 너무도 부러웠다.

야안은 크게 기뻐하는 챈들러를 보며 소리쳤다.

“그대의 주인으로서 명령하겠다. 그대는 수하들을 도와 배식을 하는 것을 돕도록 하라.”

그 말에 챈들러는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그동안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왔던 만큼 챈들러는 자신의 수하들을 지휘해 줄을 나누어 통제한 뒤 야안이 가져온 식량을 나누어 주었다.

챈들러는 오랫동안 용병단장의 일을 하면서 쌓은 연륜으로 야안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들까지 예측했다.

거동이 불편한 자들에게 따로 식량을 나눠주도록 하였고, 음식을 훔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성별과 나이별로 나누어 모이게 해 식사하도록 했다.

오랜만에 뜨거운 옥수수 죽을 배식받게 되자, 그들은 모처럼의 포만감에 눈물을 흘리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저녁이 되어 날씨가 사늘해지는 터라, 이 같은 뜨거운 음식은 성수와도 같았다.

혹시나 몰라 음식을 먹다 아끼는 이들이 생길까 싶어 야안이 챈들러와 테리에게 시켜 음식을 나눠주는 수하들에게 소리치게 했다.

“내일부터 아침, 저녁으로 두 끼씩 식사가 주어지니 음식을 남기지 마시오. 지금은 음식이 상하기 쉽습니다. 음식을 남기지 마시오.”

자칫 잘못했다가는 호의로 나눠준 음식이 독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옥수수의 지방은 살을 찌우기 쉬운 것이라 큰 목장을 관리하는 자들은 일부러 가축에게 먹이로 주기도 했다.

야안은 그 점을 생각해 할 수 있다면 옥수수 배식의 양을 늘리기로 했다. 이후 수하들을 시켜 모아 온 헌 천들로 임시 천막을 지은 뒤 위급한 환자들을 살피기로 했다.

야안은 수하들에게 나눠준 마케의 조각들을 모아 급한 환자들에게 이를 몸에 지니게 하고, 가장 위급한 자부터 치료를 하기 시작했다.

벌써 오늘 세 번이나 리젠을 펼친 터라, 그는 두 번의 리젠밖에 펼치지 못했는데 그 덕분에 두 명을 살릴 수는 있었지만, 야안은 자신의 눈앞에서 세 명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다.

“빌어먹을.”

비록 자작에게 신뢰를 얻어 더 많은 지원을 얻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지만, 자신에게 펼친 그 한 번의 리젠이 너무도 아쉬웠다.

그것이었다면 이 세 명 중 한 명의 목숨을 살렸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는 한탄했지만, 이내 뇌전의 구슬 덕분에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어서, 다음 환자를 들여라.”

야안은 아버지에게 배운 간단한 치료법으로 환자를 살피고 힐과 마케를 걸어주었다. 환자가 너무도 많아 야안은 새벽이 되어야 급한 환자들을 처리할 수 있었고, 결국 그날 아침은 사망자 아홉 명의 죽음과 함께 맞이하게 되었다.

몇 달 만에 한 자리 수의 사망자였다.

* * *

20일이 지나자, 더 이상 사망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간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피난민들을 살리려 노력했던 야안은 어느 정도 환자들이 정리되자 그제야 졸였던 마음을 풀었다.

야안이 20일간 치료했던 이들은 300명에 달했고, 그중 120명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 탓에 야안은 체력적인 면을 떠나서 정신적으로 크게 힘들어했다.

만약 뇌전의 정화라는 보물을 품에 두지 않았다면, 며칠 버티지 못해 자괴감에 허우적거렸을지 모른다.

그래도 120명의 사망자밖에 나오지 않은 것은 예상치 못한 행운 덕분이었다.

보름 전 야안에게 호의를 보인 자작의 명령으로 치료사들이 그를 돕기 시작한 것이다. 만약 그들이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도 한참이나 남은 환자들에 싸여 있어야 했을 것이다.

또한 용병 일을 하면서 어느 정도 약초 지식과 치료 방법을 익힌 챈들러 외 스무 명의 용병들도 그의 일을 도왔던 것이 큰 힘이 되었다.

특히 귀족으로서 교양을 쌓을 때 여러 치료 방법에 대해 공부한 바 있던 챈들러는 야안의 그 믿기지 않는 치료 효과에 놀랐다.

이에 챈들러는 크게 궁금증이 들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주인이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억지로 알려 드는 것은 큰 불충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이 믿고 따르는 분에게 그 같은 능력이 있음에 오직 크게 기뻐할 따름이었다.

그런 그를 운기행공을 끝내고 잠시 눈을 붙였던 야안이 불러들였다.

챈들러는 자신을 부른다는 말에 황급히 치료하던 환자를 수하에게 맡기고 야안의 천막 안으로 들어섰다.

천막 안에는 그간의 그 힘든 일 속에서도 여전히 청명한 눈빛으로 자신을 반기는 주인이 있었다.

“주인님, 더 쉬시지 않으시고. 이제 위급한 환자들이 없으니 충분한 휴식을 취하셔도 될 것입니다.”

그 말에 야안은 웃음을 지었다.

“하하, 이 정도로는 끄떡없으니 걱정하지 마라. 내 너를 부른 것은 너에게 묻고자 하는 것이 있고, 너에게 해주고 싶은 일이 있어서이다.”

야안의 말에 챈들러는 깊이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었다.

“하명하십시오.”

귀족의 버릇이 아직 남았던 탓에 그의 공손한 태도가 부담스러우면서도 야안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잠시 챈들러를 말없이 바라보던 야안이 말했다.

“예전 너에게서 마나 홀을 다쳤다 들었다. 마나 홀을 다치기 전에 너의 경지는 어떠했느냐.”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정확한 상태를 몰랐기에 묻는 말이었다. 주인의 말에 챈들러는 잠시 기억을 회상하다 대답했다.

“당시 저의 경지는 익스퍼트에 들어선 지 두 달이 좀 못 되었습니다. 검기의 흐름이 바르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제 경지보다 제가 가진 심법의 질이 낮아서입니다.”

야안은 그의 경지에 대해 예상은 했지만 심법의 문제는 생각지 못했기에 그에게 심법에 대해 말해 보라 하였다.

그의 말에 다른 이 같으면 주저함이 있었을 것이지만 그는 잠시의 주저함도 없이 심법에 대해 풀어 말해 주었다.

야안은 잠시 그의 심법을 듣고 오랫동안 생각을 하다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초급 심법에 불과하구나. 대단하다. 겨우 초급 심법으로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서다니. 그의 무재가 나쁘지 않구나.’

초급 심법이라면, 익스퍼트의 경지를 수습하는 데 큰 불편함이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중급 심법은 되어야 익스퍼트를 수습할 수 있을 것이니.

잠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던 야안이 눈을 빛내며 챈들러에게 말했다.

“그간 너의 행동에서 네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았다. 그에 너에게 나의 비밀을 말하니 이에 대해 다른 자에게 말을 하지 마라.”

어려운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자 챈들러는 가슴에 손을 두어 번 치며 낮게 대답했다.

“만약 이 일을 말해 주인님께 누를 끼친다면 스스로 목을 쳐 버리겠습니다.”

단호한 그의 말에 야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얼마 전 나는 감히 아리스 님의 뜻을 이어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 덕분에 신성 마법인 리젠을 펼칠 수 있게 되었으니 이제 너의 마나 홀을 고쳐줄까 한다.”

그 말에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야안을 바라보던 챈들러는 이내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런 놀라움도 잠시, 야안이 검을 꺼내 보이는 모습에 말문을 잃어야 했다.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땅이 베이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무형의 검인 검기를 뜻하는 것이기에 그의 놀라움은 컸다. 예사로운 분은 아니라 생각했지만, 설마 익스퍼트에 들어선 검사라니.

그렇게 자신의 경지를 보여준 야안은 놀란 챈들러에게 말을 이었다.

“또한 보았듯이 나는 너에게 길을 안내해 줄 것이다. 너에게 하나의 심법을 알려줄 것이니 치료가 끝이 나면 이것을 바탕으로 몸의 기운을 잘 인도하라.”

“아…… 감, 감사드립니다.”

놀라 뒤늦게야 대답을 한 챈들러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높은 경지에 오른 자일수록 추락의 무거움은 더한 법이었다. 그는 세상의 수많은 검사의 목표인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랐다가 떨어졌기에 더욱 그 추락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만약 그에게 지켜야 하는 신념이 없었고, 그를 믿고 따르는 아들과 같은 수하들이 없었다면 오래전부터 고통과 절망 속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마나 홀을 복구할 수 있고, 또한 자신의 스승이 되어주신다 하니 그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할 것인가?

그는 그저 몇 방울의 눈물로 자신의 마음을 비쳤다.

야안은 그간의 경험으로 리젠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알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구제를 했으면 하는 마음이 구체적일수록 그 치료의 힘이 발휘되었기에 야안은 마음을 모아 챈들러의 마나 홀이 고쳐지기를 크게 바라며 낮게 소리 냈다.

“리젠.”

과연 신성 마법이라 할까?

야안의 그 구체적인 소망을 들어주었던지 챈들러의 깨어진 마나 홀이 복구되기 시작했다. 챈들러는 아련한 추억 속에 잠긴 듯 몽환적인 감정에 빠지다 천천히 깨어났다. 그리고 그제야 예전과 다른 자신의 몸을 발견할 수 있었다.

금이 가 지난 5년간 제 역할을 하지 못한 마나 홀이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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