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67화
그 같은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 되돌아보았고, 그 과정에서 육체의 작은 미세한 부분 하나하나가 새롭게 다가왔다.
숨을 쉬고 내뱉는 과정도, 음식물이 침과 함께 섞여 목구멍을 넘어가는 과정도 발을 바닥에 붙이고 다시 떼는 과정도 모든 것이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 하루 한 끼의 식사를 한다 해도 한 달도 채 버티기 어려울지 모르는 상황까지 다가왔지만 더 이상 음식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피난민에 대한 것도, 가족도, 영지도 모든 것에 대해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이 지친 행로 속에서 걷고 또 걸으며 즐겼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결코 그런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고행자가 발견한 새로운 진리를 향한 걸음이었다.
그리고 두 달이라는 시간이 더 흘렀다.
음식이 떨어져 이제 물만으로 버티며 덤덤히 걸음을 옮기던 야안은 어느 순간 처음으로 무언가를 발견했다.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던 아주 미약한 한 점의 바람이었다.
야윈 모습과 달리 뇌전의 정화의 도움을 받아 크게 성장한 야안은 스스로 시각을 지우는 ‘파’를 걸어 기감을 올렸다.
마치 실처럼 야안의 주위를 돌던 그의 기감은 천천히 확장하며 그 한 점의 바람이 있었던 곳을 찾기 시작했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 무언가 그의 제6감각에 잡혔고, 그것은 작은 파동들이었다. 저 하늘 높은 곳에서 일어나는 파동이었고, 그 밑에서 일어나는 기괴한 파동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그 두 곳의 파동이 부딪치는 곳에서 그가 느꼈던 아주 미약한 바람이 들어오고 나갔다.
야안은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저곳이 자신이 찾던 그곳임을.
그는 현재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공격을 준비했다. 한 점을 노리는 것이라면 육대검식이 나았지만, 그 파동에 맞부딪치려면 그가 아는 가장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는 불의 벽의 마나 유동을 한 점으로 모은 파이어 피스트를 준비했다.
그간의 고된 정신적 수행이 이곳의 농도 짙은 마나로 복잡한 마나 유동의 수식을 할 수 있게 하였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마나를 부여하였고, 그 엄청난 힘의 파동에 아슬아슬하게 쥐어진 그의 주먹이 미친 듯 떨어댔다.
그리고 천천히 그의 주먹이 비틀리며 나아갔다.
마치 끝없이 높은 허공에 괜한 힘을 쓰는 듯한 그의 어른 머리만 한 파이어 피스트는 야안이 느낀 어느 한 곳에 크게 부딪히더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깨어졌다.
쿠르르르릉.
처음으로 하얀 하늘에 티끌만 한 회색빛이 보였다. 짙은 회색이었기에 멀리서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것은 ‘피슈슉’ 하며 요란한 소리를 일으키더니 이내 모든 것을 흡수하는 바람을 불러일으켰고, 야안의 몸 또한 힘없이 허공에 떠올랐다.
잠시 당황한 기색을 보이던 야안이었지만, 이내 마음을 잡아 그곳에 손을 펼쳤다. 그가 만들어낸 그 작은 구멍이 닫히려고 했던 탓이다.
10미터, 5미터, 2미터, 1미터를 앞두고 야안은 아슬아슬하게 닫히려는 그 공간에 손이 닿을 수 있었고, 이곳에 올 때 그러했듯이 야안은 그 자취를 감추었다.
조금 전만 해도 야안이 있었던 그 세상은 그가 오기 전에도 그러하였듯이 아무것도 없는 백색의 공간만이 자리할 뿐이다.
회색의 세상이었다.
하늘도 회색이고 대지도 회색이었다. 나무도 회색이며, 돌도 회색이며, 대지도 회색이었다. 작거나 큰 동물들도 회색이며 이름 모를 땅에 너부러진 잡초조차 회색이었다.
그곳은 온통 회색이라 모든 것이 타버린 잿빛 세상을 보는 듯했다.
하지만 그 잿빛 세상에도 다른 색을 지닌 두 종족이 있었다.
한 존재는 몸이 5미터에 달하고 투박한 금속으로 이루어진 황금빛을 내는 거인이었고, 한쪽은 하나같이 화려하고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을 지녔으나, 흘리는 기운이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존재들이었다.
황금빛을 내는 거인족의 임시 수장을 맡은 황금 주먹은 두 달 전 기습을 한 뱀파이어 종족에게 크게 으르렁거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의 울음소리에는 삿된 기운을 흩뜨리게 하는 힘이 있어 힘이 약한 하급 뱀파이어들이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려댔다.
황금 주먹의 울음소리에 뱀파이어 종족이 있는 곳에서 수백 마리의 작은 박쥐들이 기이한 파동을 울리며 모습을 보였다.
그것들은 허공의 한 지점에 모여 찰흙처럼 뭉쳐지더니 이내 40대 중반의 중후한 모습이 크게 매력적인 뱀파이어로 변했다. 그는 호쾌한 웃음을 터뜨리며 나타났는데 그 과정은 괴기스럽기 그지없다.
“하하하, 무거운 엉덩이를 떼어내는 듯싶더니, 노망이 든 것인가? 그 병력으로 전쟁을 선포하다니.”
그의 말처럼 황금 주먹이 데려온 황금 거인들은 그 수가 3,000에 달했지만, 뱀파이어 종족의 1만 8,000 병력에 비하면 미약한 규모였다.
본래 거인족은 인간과 유사한 종족이지만 성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매혹이 통하지 않는 황금 거인들이었기에 초기 전쟁에서 뱀파이어들은 그들과의 전쟁을 꺼렸다. 매혹을 통해 전투력을 약화시켜 크게 우위를 점하던 것이 그들의 전쟁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어도 뱀파이어들은 인간보다 타고난 힘이 몇 배나 강하고 그 몸놀림은 비교의 대상이 될 수 없을 정도로 빨랐다.
하지만 정작 그들의 주력은 암흑 마기를 이용한 뛰어난 공격 마법과 늑대와 박쥐로 둔갑하여 싸우는 형태였다.
거대한 늑대로 변해도 거인들보다 힘이 미약했고, 흡혈 자체를 할 수 없는 존재이기에 박쥐로서는 도망을 치거나 공격을 회피하기 이외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죽음의 지배자에게 축복받은 암흑 마기를 이용한 마법도 이 거인들에게는 잘 통하지 않았다. 온몸이 금속으로 된 만큼 파괴하기도 어렵고, 직위가 높을수록 항마력이 뛰어나 강력한 마법이 아니고는 피해를 주기도 어려웠다.
하지만 불사의 종족인 뱀파이어들이었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전쟁은 뱀파이어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1,000년 전 이곳에 등장한 황금 거인 전사들이 세월을 이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면서 생긴 일이다.
이후 뱀파이어들은 기습으로 그들의 시신에서 자라나는 어린 황금 거인족을 사냥하려 하였고, 황금 거인들은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방어적인 태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현 황금 거인 족장 대리를 맡은 황금 주먹은 1,000년 전 그들의 왕을 따르던 대전사의 다섯 번째 자식이었고, 현재 황금 거인족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다.
그는 점차 노쇠해져 가는 자신에 대해 크게 걱정하였다.
자신이 죽고 만다면 마땅히 뒤를 이을 족장 대리가 없는 현 황금 거인족들이 크게 위험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뒤를 이을 만한 자가 없었다는 것은 그만큼 초기에 뱀파이어들의 기습이 성공적이었음을 뜻한다.
이런 사정을 알기에 뱀파이어 종족도 치열한 전쟁을 피하며, 기습적인 형태로 어린 거인족들을 노릴 뿐이다.
사태가 시간이 흐를수록 악화되어 가자 황금 주먹은 결심하였다.
어린 거인족을 숨기고 최소한의 전사만을 남긴 채 황금 거인 전사들과 함께 그들의 진지를 먼저 치기로.
300년 만에 시작된 거인족의 습격이었다.
개인으로는 황금 거인들의 전투력이 우세하지만, 그 압도적인 수에서 나오는 힘에서만큼 그들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 차이를 어느 때보다 단호한 의지에서 메꾸려 하였다.
황금 주먹은 자신에게 소리치는 그를 향해 모든 힘을 개방하며 달려들었다.
“바론, 너만은 반드시 찢어 죽이리라.”
소리치며 달려가는 그를 이어 3,000의 황금 거인들이 움직였다. 육중한 무게가 실린 걸음에 지진이 일어났고, 회색 먼지가 뿌옇게 일어났다.
그들은 하나하나가 숙련된 전사들이었다. 그 거대한 몸에 맞지 않게 바람 같은 몸놀림을 자랑하는 그들은 땅을 박차며 뱀파이어들과 거리를 좁혔다.
뱀파이어들은 설마 황금 거인족들이 먼저 치려 할지 몰랐기에, 제대로 된 방어 태세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들도 어둠의 전투 종족이었기에, 고위 뱀파이어들의 지휘에 따라 급이 낮은 뱀파이어들이 모여 달려드는 황금 거인들과 맞서기 시작했다.
전쟁은 치열하였다.
그 수는 적어도 황금 거인들은 이번 전장이 마지막이라는 다짐을 하고 있기에 끈질기게 뱀파이어들을 물고 늘어져 어느 쪽으로도 승기는 기울어지지 않았다.
특히 그들의 수장인 황금 주먹과 뱀파이어들의 군주인 바론의 대결은 다른 차원의 전투를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거대한 마법들이 펼쳐지고, 손으로 그 마법들을 쳐내며 내지르는 주먹은 천년 거암도 부술 듯한 위력을 보인다.
황금 주먹은 수백 년을 전투만을 위해 살아온 이답게 필요 없는 움직임이 없으면서도 기회가 있을 때는 과감하게 몸을 던지기에 빠른 몸놀림으로 현혹하는 뱀파이어에게 까다로운 상대였다.
하지만 1,000년간 뱀파이어들을 이끌며 거인족들과 싸워왔던 뱀파이어 수장 바론 또한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몸의 부분 변환으로 늑대의 팔을 만들어 황금 주먹의 공격을 받아치며, 박쥐로 변해 그의 공세를 흩뜨리더니 이내 뒤에서 모습을 변환해 마법을 날렸다.
그가 대수롭지 않게 펼치는 마법 하나하나의 파괴력은 경악스러울 지경이지만, 대전사인 황금 주먹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못했다.
바론 또한 그 점을 오랜 전쟁을 통해 알기에 낙심하지 않았다. 예전 그의 아버지와 겨루었을 때처럼 그는 조금씩 피해를 주며 그의 움직임을 제한해 나갔다.
끝이 없을 것 같은 이들의 전쟁은 열흘간 계속되었다.
그 과정에서 거인족의 전사가 반 이상이 죽어 나갔고, 뱀파이어들 또한 8,000의 전사자와 3,000의 부상자가 나왔다.
병력의 차가 여섯 배나 되었고 그 여섯 배라는 숫자가 십이나 백의 단위가 아닌 천에 달하는 단위였기에 이 결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동안 수가 적은 황금 거인족들을 우습게 보았던 뱀파이어들은 이 전쟁에서 크게 경각심이 생겼다.
열흘간 총 스물한 번의 전투가 이루어졌고, 자신 또한 그동안 모았던 힘의 3분의 1을 날려야 했던 바론은 회복을 위해 수하들의 심장을 뽑아 먹으며 중얼거렸다.
“정말 끝을 보자는 것인가? 하기야 지금으로서는 그놈에게 다른 선택권은 없겠지. 일이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어.”
그는 자신들이 큰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여유 만만한 모습이었다.
피해를 많이 입었을지는 몰라도 비율로 따지면 오히려 더 유리해졌다. 병력의 수만 따져도 일곱 배에 달했고, 단순한 힘의 비교에서는 더 차이가 났다.
살아남은 황금 거인 중 정예 전사들이라 할 수 있는 서른 명 중 스무 명이 사지를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강력한 육체의 힘으로 싸우는 그들이 사지 중 하나를 쓸 수 없다는 것은 전력이 반 이하로 내려갔음을 의미한다.
팔다리를 잃어도 자체 치료가 가능한 뱀파이어와 달리 사지를 담당하는 핵 부분이 부서지면 움직이지 못하는 그들이기에 사정은 크게 곤란스럽다.
바론은 그 길고 길었던 천 년 전쟁이 이렇게 끝이 난다 생각하자 무섭도록 아름다운 미소를 보이며 중얼거렸다.
“너무 오랫동안 전쟁을 해서 머리가 이상해진 것인가? 좀 아쉽기도 하군, 하하하.”
그렇게 말한 그는 아주 재미난 농담이었다는 듯이 크게 웃음을 터뜨리더니 마지막 남은 심장의 잔재를 우적우적 씹어 삼키며 일어섰다.
그의 주위에서 매혹적인 미녀들이 교태를 부리며 바론을 유혹하고 있었고, 그는 자신의 자식이자 성노들인 그녀들을 짓밟으며 거칠게 범해갔다. 전장의 한복판에서 오랫동안 수십 명에 달하는 여인들의 교태 소리가 끊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