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73화 (73/385)

야안 73화

22. 주술

곧 정보 창이 떠올랐고 야안은 이를 불러 그 정체를 살폈다.

[봉인된 현자의 두루마리

등급 : C-

대마법으로도 파손되기 어려운 두루마리이다. 그 이외에 다른 비밀이 봉인되어 있다.

*대현자 테무드가 제작하였다. 태초의 공간에 들어설 수 있는 마법진이 담겼다.

*자격이 되면 봉인을 풀 수 있게 된다.]

[공간 대마법진

등급 : B-

단 1회에 한해 공간을 뛰어넘는 고차원의 대마법진이다. 지금의 그대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는 마법 물품이다.

*리차드 소여가 후인을 위해 만든 물건이다.

*쓰고 나면 대마법진은 사라지지만 열일곱 개의 상급 마정석 중 두 개의 상급 마정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공간 주머니

등급 : B-

리차드 소여가 생전 사용한 물품이다. 그의 사숙인 알리가 만들어낸 물품이다. 무게와 상관없이 마차 2대 분량을 저장할 수 있다.

*주머니 안에 중급 마정석 아홉 개, 미스릴 10킬로그램이 들어 있다.]

야안은 설마 리차드 소여가 남겼다는 물건이 공간 주머니일 줄 몰라 크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공간 주머니는 100 대 1 정도만 되어도 부르는 게 값일 정도였는데 마차 2대 분량이라면 못해도 20,000 대 1에 달하는 것이기에 그야말로 왕국의 국보급에 달하는 것이었다.

단순히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물건이 대현자 테무드의 사형인 알리의 물건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면, 제국에서도 국보급의 대우를 받을 수 있을 것이었다.

그 같은 보물을 얻자 야안은 매우 놀란 표정을 짓다, 이내 그 속에 중급 마정석과 미스릴이 있음에 크게 기뻐했다. 그동안 그의 룬 조각은 재료의 부재로 정체되어 있었는데 이 같은 보물을 얻게 되니 현자로서의 도전 욕구가 들끓었다.

더구나 공간 대마법진이라는 물건에서 상급 마정석 두 개를 얻을 수 있다 하니, 이후 ‘카라’의 조각을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리차드 소여가 남긴 물건들을 확인하며 크게 기뻐하던 야안은 어느새 거인족이 펼치는 축제에 도착했다.

그는 붉은 노을의 어깨에서 내려 그들만의 음악과 춤을 같이 즐겼고, 많은 거인 전사들이 펼치는 그들의 대련을 바라보았다.

야안은 많은 전사에게 도전을 받았는데, 도전을 많이 받을수록 거인족에게 명예로운 일이라 그의 친우가 된 거인들은 그가 도전을 받을 때마다 저마다 크게 기뻐해 주었다.

하루가 지나, 축제가 끝이 날 때쯤 야안은 멧돼지를 두 마리를 더 잡아 그 회색 가죽으로 거친 옷을 만들어 입었다.

그리고 자신을 배웅하러 온 붉은 노을과 황금 주먹을 비롯한 친우가 된 거인들에게 말했다.

“저에게는 책임져야 할 4만 명에 달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아쉽지만, 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할 수 없군요.”

그 말에 거인들은 크게 아쉬움을 보이더니 저마다 이마를 툭툭 치며 야안을 바라보았다. 붉은 노을은 야안의 사정에 크게 입가에 호선을 그으며 말했다.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당연한 법이지. 약소하지만 우리 거인들이 그대에게 줄 것이 있네.”

그러며 손을 휘젓자 황금 주먹을 비롯한 많은 전사들이 마차 반 대분에 달하는 은은한 은빛의 광석을 야안에게 가져와 내밀었다.

“그것은 오직 우리 거인족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로탐이라는 금속이네. 마항력이 뛰어나고 그 강도가 미스릴에 준하는 물건이지. 다만 정제하기가 쉽지 않아 당시 드워프만이 그것을 만질 수 있었던 것으로 아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붉은빛의 무언가를 야안에게 내렸다.

“자네에게 드워프의 친우가 되었다는 표식을 내렸네. 그것은 오직 우리 거인족과 드워프만이 알던 것이지. 밖의 사정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만약 드워프를 만난다면 어렵지 않게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네.”

그의 마음 씀씀이에 야안은 크게 감격하며 주위에 자신을 배웅하는 거인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머지않은 시간에 반드시 당신들을 만나러 오겠습니다.”

야안은 겨우 5일간의 시간이었지만 마치 몇 년을 사귄 친우를 보듯이 크게 아쉬워하며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거인들은 공간의 주머니에 로템을 넣어주는 것을 도와주며 정을 나누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저마다 다시 이마를 툭툭 치더니 주먹을 쿵쿵 쳐댔고, 야안 또한 미소를 지으며 이마를 툭툭 치더니 주먹을 모아 쿵쿵 쳤다.

곧 공간 대마법진이 발동되었고, 야안은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다시금 거인들을 바라보다 이내 그 자취를 감추었다.

* * *

짙은 검은색 머리와 밝은 갈색 톤의 피부 그리고 짙은 갈색 눈을 한 이제 일곱 살 남짓한 사내아이는 허름한 천막을 나서는 엄마를 바라보며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콜록. 콜록. 엄마, 어디 가.”

금발의 중년 여인은 기침을 하는 아들의 기침에 놀라 다가갔다.

“배식을 하러 간단다. 이런, 벌써 주술력이 떨어졌나 보구나.”

병에 걸린 이후 몸의 기운이 떨어져 걸어놓은 주술이 어느새 끝이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서둘러 아들의 미간을 검지와 중지로 누르며 이곳 대륙의 언어가 아닌 고대전쟁 이후 잊힌 함루어를 외며 주술을 걸었다.

그러자 검은색 머리는 금발로 변했고, 갈색 눈은 푸른색으로 변했으며 갈색빛이 나던 피부는 여타의 사람들처럼 하얗게 변했다.

근골도 조금씩 바뀌었던 터라 자세히 보지 않으면 조금 전 그 이국적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녀는 아들에게 펼친 주술이 힘겨웠던지 잠시 눈을 질끈 감고 이마에 손을 올리다, 이내 고개를 털며 일어섰다. 그리고 한 달 전 자신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있는 곳에서 가져온 헌 천으로 아들을 감쌌다.

“좀 갑갑하더라도, 엄마가 올 때까지 이러고 있으렴. 알았지.”

그녀의 말에 이제 백인으로 모습이 변한 사내아이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린다. 잠시 힘없어하는 아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어렵게 걸음을 옮겼다.

밖을 나서니 이제 막 동이 터오고 있었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이미 저 너머에는 마크 남작가라는 곳에서 내주는 옥수수 수프를 배식하기 위해 긴 줄을 이루고 있었다.

배식 장소는 나누어진 구역마다 달랐고, 자경단의 보호 아래 통제되었기에 별다른 문제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질서 정연하게 서 있는 줄의 뒤에 선 채 이 변화가 믿기지 않아 잠시 말문을 잃었다.

마크 남작가에서 온 베론 야안이라는 총관님이 선정을 베풀어 자신들을 돕기 시작한 지 26일 만의 변화였다. 그분이 내어주시는 하루 두 번의 식사로 사람들은 더 이상 굶주리지 않아도 되었고, 그분의 손길이 닿은 환자는 더 이상 고통에 매이지 않았다.

또한 그분이 내주신 무구들과 그분의 수하들의 지도 아래 500명의 자경단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는 힘을 가지게 되어 더 이상 오크들 따위에 시달리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장 큰 변화는 역시 피난민들의 달라진 인식들이라 생각했다.

그분의 선정에 마음이 움직였던 것인지 서로의 사정을 모른 척하며 이기적이었던 이웃들은 작게나마 서로의 아픔을 보듬어주고 달래주는 모습을 드러냈다.

믿기지 않는 일이다.

자신의 나라도 아닌 타지의 영지에서 2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구원한다니 상식이 있는 자라면 손가락질을 하며 미쳤다 할 것이다.

깨어 있는 자조차 그의 행태를 일러 지독한 위선자라 하며 욕을 할 것이지만, 자신과 아들을 비롯해 여기 2만 명의 사람들은 그런 그분의 희생을 아리스 님의 기적이라 불렀다.

자신들을 자기가 일하는 영지로 거두신다 하시니 그 희생을 어떻게 보답해야 할 것인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여름에 오들오들 떠는 아들을 생각하자 염치없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서 그분이 오셔야 아들을 치료할 수 있을 텐데.’

현재 그분이 없어도 사람들을 진료하는 이들은 많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녀 또한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자신의 치료술이 통하지 않으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그 기적 같은 치료를 하시는 그분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실까? 어서 그분을 만나야 할 텐데.’

그렇게 고민하는데 누군가 그녀를 불렀다.

“페리, 오늘은 일찍 나왔네. 로스는 좀 괜찮아?”

그녀, 페리에게 말하는 이는 작년 겨울 동상에 걸린 발을 치료해 주었던 자경단의 한 사내였다.

자신보다 다섯 살 어린 30대 후반의 장년으로 본래 체격이 좋아 가장 먼저 챈들러 님의 눈에 띄어 자경단에 입단한 이였다.

젊었을 적 멋모르고 용병 일을 하다 몇 년간 호된 경험을 하고 고향에 돌아왔다 하는데, 그때의 실력이 녹슬지 않았던지 자경단에서 조장을 맡은 자였다.

페리는 그의 출현을 반기다 이내 표정을 웃는 표정을 고치며 고개를 젓고는 물었다.

“크리스 씨, 오늘은 그분께서 오셨나요?”

그녀의 말에 자경단 8조장인 크리스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그러지 말고 치료사분들에게 데려가 보는 게 어때?”

“그분들은 저희 아들을 못 고친답니다.”

페리의 말에 크리스는 안타깝다는 듯한 표정을 보이다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직 이곳에서 그만이 그녀의 그 뛰어난 치료 솜씨를 알기 때문이다.

작년 겨울 오크들의 습격을 막아서다 그들의 몽둥이에 맞아 기절을 하고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의 왼발을 보며 절망하였다.

아무런 감각이 없는 그의 왼발은 이미 치료 시기가 늦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상당한 치료 상식을 아시는 챈들러 님께서도 자신의 발을 보고는 가망이 없으니 잘라버려야 한다 말씀하셨기에 당시 그의 심정은 절망의 구덩이 속에 빠진 듯했다.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병신으로 살아야 한다니.’

누구보다 건강하고, 뛰어난 실력을 지녔던 만큼 발을 잃는다는 것에서 오는 절망감을 생각조차 하기 두려웠다.

절망에 빠져 힘들어하던 그에게 페리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그녀는 그의 다리를 보며 말하기를 자신이 그 동상을 고쳐준다면, 이 겨울 아들이 먹을 식량을 줄 수 있는지 물었다.

갑작스러운 이 지저분한 중년 여인의 제안은 그 신비성이 매우 낮았지만,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던 그는 그 제안을 수락했다. 어차피 잘라내어야 할 것이라면 그녀의 말을 믿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그리고 행해진 그녀의 치료술은 참으로 기이한 것이었다.

하루 반나절 동안 산에서 뽑아 온 매운 냄새가 나는 잡초 달인 물에 자신의 발을 담그고, 기이한 말을 중얼거리며 지압을 하더니 3일이 채 되지 않아 자신의 발을 낫게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새끼발가락 하나를 어쩔 수 없이 잘라버려야 했지만, 목발을 짚고 다녀야 했던 것에 비하면 피해라 할 것도 없었다.

그는 크게 감사해하며 인사를 하려다, 이내 자신의 발을 치료하다 지친 그녀를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는데 이는 그녀의 변화된 모습 때문이었다.

금발 머리는 검은 머리로 변했고, 투박하고 거친 하얀 피부는 고운 주름을 지닌 갈색 빛이 감도는 피부로 변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침을 삼키게 하는 이 고운 이국적인 중년 여인의 모습에 크리스는 감사한다는 말도 잊은 채 넋을 놓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잠시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며 두근거리는 심장 위에 손을 올리던 크리스는 이내 눈을 비비적거리며 몸을 돌리더니 무뚝뚝하게 말했다.

“하암~ 잠이 오는군. 이거 너무 눈이 침침한데. 이만 가겠소. 내일 약속대로 식량을 가져다주겠소이다.”

그녀의 비밀을 지켜주기 위해 그는 서둘러 천막 문을 나섰고, 그는 그날 밤 마치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페리의 모습이 아른거려 밤잠을 설쳐야 했다.

그 일이 있은 지 벌써 반년 넘게 그녀를 짝사랑하던 그이기에 며칠 전부터 그녀의 아들이 아프다는 말에 보통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용병 일을 하면서 여자에게 배신을 당한 이후 여자라면 크게 질려 혼자 살고 있었던 그는 사랑하는 페리와 그녀의 아들 로스에게 가족 같은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스 또한 상행을 도와주고 오는 길에 아이들이 좋아하는 군것질거리를 주고 재밌는 옛날이야기를 해주는 크리스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페리는 그런 그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녀 또한 어려운 시기에 힘껏 도와주는 그에게 마음이 기울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본래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이곳 대륙의 사람이 아니었다.

큰 배로 보름을 향해야 나온다는 융 제국이 지배하는 대륙의 사람으로 그녀의 아버지는 본래 융 제국 너머에 사는 소수 부족의 한 부족원이었다.

이들 부족은 리트담이라는 고대 시절 위대한 주술사의 후손들로서 그는 잊힌 고대 주술 언어인 함루어의 맥을 잇고 있었다.

주술은 마법의 종류처럼 그 맥이 수없이 많이 갈라져 있었다. 마법 나라라고 불리는 융 제국에서는 그들의 주술을 또 다른 마법의 형태로 생각했는데, 이는 전해 내려오는 와중 융 제국의 마법에 의해 변질되어 버린 주술 때문에 그런 착각을 하는 것이었다.

전통적인 주술은 마법보다는 자연의 기운을 통해 인간의 한계를 몇 번이나 넘어서는 검사들과 비슷한 점이 많았다.

주술의 기본 목적은 인간의 잠재력을 일깨워 한계 이상의 힘을 쓰는 것에 있었다. 그로써 그들의 공격은 야수 같은 형태를 띠기도 하고, 또한 마법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강력한 방어를 보이기도 한다.

이들의 주술은 무의식을 일깨워 의식과 동조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신체를 다루어 발전시키거나, 주위 마나의 흐름을 자신의 통제하에 내려놓아 마법으로써 하기 어려운 일들을 펼친다.

주술사 앞에 ‘위대한’이라는 말이 붙은 자는 이미 현 구존과도 같은 힘을 발휘하는지라, 융 제국에서는 이 위대한 주술사가 나타나지 않게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같은 무의식을 일깨우는 데에, 앞서 말했듯이 주술은 수많은 맥이 갈라지는데 그녀의 아버지는 그중 함루어를 통한 언어의 힘으로 주술을 펼쳤다.

그녀 또한 그의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라 주술을 배웠는데, 그 재능이 뛰어나지를 못했다. 그녀는 지혜롭고 눈치가 빨랐지만, 주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뛰어난 머리나 타고난 신체 능력 따위가 아니었다.

그것은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고, 일반인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우며 오직 주술사만이 그것을 알 수 있었다.

가끔 이것을 분류할 수 있는 일반인도 있었는데 그들은 일반인 중에서도 촉이 좋은 자라 할 수 있겠다.

그의 부족은 소수 부족 중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해 대부족을 만들 수 있는 여건이 있었는데, 이는 부족의 족장이 위대한 이라는 이름 바로 밑의 경지인 대주술사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융 제국은 그와 그들 부족을 멸하기 위해 대병력을 움직였고, 그들 부족은 대부족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멸족되어야 했다.

그녀 또한 그곳에서 가족들을 잃었는데, 족장의 희생으로 그녀는 그곳을 벗어나게 되었다. 족장은 그녀에게 자신의 손자를 맡겼고, 그녀는 전쟁에서 잃은 아들을 대신하여 로스를 자신의 아들로 삼았다.

로스는 위대한 주술사를 바라보던 자의 손자답게 타고난 재능이 아주 뛰어났다. 아직 나이가 어려, 주술을 펼치지 못하지만, 소년이 되었을 때에는 지금 페리의 경지를 뛰어넘을 것이다.

그녀는 수많은 고생 끝에 그들을 적대시하는 융 제국을 벗어나 이곳 대륙에 올 수 있었지만, 이곳 대륙 또한 융 제국만큼은 아니나 그들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보지 않았다.

아니, 그들을 일반적으로 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취급하였기에 그녀는 항상 아들과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했다.

그런 이유로 그녀는 크리스의 마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크리스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본다면 멸시할 것이라는 오해 때문인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크리스로서는 언제나 그녀가 보이는 거리감에 막혀 가슴앓이해야 했다.

그는 잠시 그녀와 말을 나누다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는 수하의 말에 다급히 그곳을 떠났다.

거인족들의 배웅을 받으며 공간 대마법진에 들어선 야안은 그 괴리감을 이기지 못해 혼절을 하게 되었다.

몇 시간이 지나 그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더러운 감옥 안이었다.

오물 냄새가 고약한 그곳은 철 나무로 만든 보잘것없는 감옥 형태였는데, 야안은 오크 특유의 비린내에 이곳이 오크들이 살고 있는 마을임을 알 수 있었다.

야안은 현재 자신이 처한 상황이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저어댔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운이 없다고 해야 하나.”

혼절하였기에 반항을 하지 않자 자신을 살아 있는 채로 먹으려 감옥에 보관한 것 같았는데, 몬스터들이 가득한 산속에서 혼절한 것치고는 운이 좋다고 할 수 있다.

제법 오랫동안 덩굴로 자신을 꽁꽁 묶어 놓았는지 팔다리가 저렸던 야안은 몸의 기운을 모아 덩굴을 끊어내었다.

이후 인벤토리에서 검을 꺼내어 감옥을 부순 야안은 밖을 나서다, 제법 많은 인간의 해골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생각을 바꿔야겠어.”

그는 처음에는 오크들이 가져갔을 것이라 생각되는 상급 마정석만 챙긴 후 조용히 몸을 빼내려 했으나, 인간들의 시신을 보자 마음이 바뀌었다.

감옥 속의 해골들만 보아도 그들이 인간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오크들을 내버려 두면 수많은 인간이 고통 속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야안은 감옥을 나와 조심스럽게 근처의 높은 나무 위로 올라 오크 마을을 살폈고, 다행히 규모가 작은 부족임을 알게 되었다.

사실 야루스 산맥의 오크들이 아니라면, 일반적으로 부족의 수는 100~300 정도였고, 사는 형태나 영역을 보았을 때 이곳은 그 중간인 150 정도의 오크들이 모여 있을 듯했다.

이 정도의 규모라면 족장이라 해보았자 잘해봐야 전사 오크 중에서도 하급 수준이었다. 야안은 이 규모라면 무리 없이 해치울 수 있음을 알았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스탯을 올리며 변화된 신체가 익숙하지 않은 상태였기에 방심하지 않고 야안은 먼저 이들 족장부터 처리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상급 마정석 또한 그 족장이 가지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전사 오크 수준이라면 상급 마정석의 힘을 모를 리가 없기 때문이다.

잠시 기척을 죽이며 주위를 살펴보던 야안은 오크 특유의 거북한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갔고, 그곳에서는 화가 난 오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쿠루룩. 인간. 도망……. 이 쓸모없는 쿠룩.”

족장으로 보이는 그는 인간이 도망쳤다는 말에 매우 화를 내며 보고를 하러 온 오크들에게 거칠게 폭력을 행사하였는데, 철저한 계급사회의 오크들답게 변명 한 번 흘리지 않고 족장의 폭력을 고스란히 당했다.

야안은 그들의 모습을 보다 이내 상급 마정석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상급 마정석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오크 족장이 맨 목걸이에 달려 있음을 알고 헛웃음을 흘렸다.

‘전사급도 되지 않는 놈이었군.’

기운을 다스릴 수 있는 오크 전사라면 그처럼 허술하게 상급 마정석을 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야안은 이곳 오크들의 수준이 상당히 낮음을 확인하고는 이내 나무 틈 사이로 파이어 핑거를 펼쳐 그의 뇌를 꿰뚫었다.

갑자기 자신을 패다 말고 뒤로 쓰러지는 족장에 의문을 보이던 오크는 놀라 소리치려다 이내 야안에게 목이 베여 컥컥 거리다 죽음을 맞이했다.

쓰러진 족장에게 다가가 상급 마정석을 챙겨 인벤토리에 넣어둔 야안은 본격적으로 오크들을 토벌하기 위해 족장의 집을 나섰다.

동족들의 피 냄새를 알아서일까?

마을의 오크들은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야안은 소란을 피우고 있는 오크들이 사는 스무 채의 나무와 오물로 만들어진 집을 향해 손을 뻗어 수십 개의 불의 구를 펼쳤다.

상당한 마나가 실린 불의 구는 어설프게 지어진 나무집에 닿자마자 큰불을 일으켰고, 그 속에 있던 오크들이 비명을 지르며 모습을 드러냈다.

야안은 천천히 그 중심에서 비명을 지르는 오크들을 족족 검으로 목을 베고 파이어 핑거로 심장과 뇌수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스무 마리 이상의 오크들을 베어낼 때쯤 곧 요란한 굉음이 울리더니 불에 타들어 가는 집을 쳐부수며 오크들이 모습을 드러냈고, 그들은 야안이 벌인 일에 크게 분노하며 괴성을 지르더니 이내 달려들었다.

그 수가 80에 달했기에 오크들의 사기는 크게 올라가 있었지만, 이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많은 전투를 겪은 야안에게는 그들의 질서 없고 무식한 공격 형태는 위협거리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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