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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74화 (74/385)

야안 74화

하지만 그렇다 하여 그들의 공격에 피를 보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기에 야안은 방심하지 않으려 마음을 잡고는 다가오는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그렇게 마치 야안을 집어삼킬 것 같은 오크들이었지만, 야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3미터 원 안으로는 들어설 수 없었다.

야안의 어깨가 움직일 때마다 오크 한 마리가 목을 잃었고, 야안이 손가락으로 가리킬 때마다 오크는 뇌수가 터져 나갔다.

야안이 모든 오크를 다 죽였을 때에는 일부러 그러기라도 한 듯 그의 주위로 큰 원의 형태를 이룬 오크들의 시체들이 늘어져 있었다.

80에 달하는 오크들을 20분도 채 되지 않아 처리한 야안은 이내 뒤늦게 합류하다 자신의 모습에 기가 질려 도망치는 30마리 정도의 오크들의 뒤를 쫓았다.

그들이 산을 내려가 마을이나 여행자들에게 피해를 줄지 모른다 생각했던 탓이다. 야안은 도망치는 오크들을 따라 내려가며 왠지 이질적이면서도 익숙한 형태의 산 지리에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구리 폐광산과 먼 곳은 아닌 것 같군.”

그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이 무언가 놓친 것이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보다 당장 자신이 어디에 있는가가 중요했기 때문이다.

오크들이 자신을 잡아갔다는 것으로 보아 자신이 들어섰던 구리 폐광산이 아닌 것을 짐작했기에 어쩌면 알지 못하는 곳일지도 모른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야안은 그렇게 하나둘씩 열 마리의 오크들을 더 죽이며 산을 내려섰고, 다시 한 마리의 오크를 죽였을 때쯤 산에서 내려온 오크들과 전투를 펼치고 있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무장 형태는 예전 윌 백작가에서 받은 무구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야안이 그들의 얼굴을 확인하자 그제야 이들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자경단이로구나. 이들이 왜 아직도.’

떠났어도 한참 전에 떠났어야 했다. 야안은 잠시 그들에 대해 의아해하다, 이내 그제야 지금의 날씨가 자신이 떠났을 때와 비슷한 기온임을 깨달았다.

경지가 오르게 되면서 주위 날씨를 타지 않았던 탓에 눈여겨보지 못했던 점과 오크들의 토벌과 자신의 위치에 대한 의문 등 여러 가지 일로 인해 그제야 눈치를 챈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기에 이내 다가가, 오크들을 하나둘씩 목을 치고 가슴을 꿰뚫어 자경단을 도왔다.

그동안 훈련을 잘했던지 열 명밖에 되지 않은 자경단이 스무 명에 달하는 오크들을 어렵지 않게 막아서자 야안은 수월하게 오크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2조장은 자신을 도와준 그 재질을 알 수 없는 회색 가죽을 입은 사내에게 물었다.

“도와주어 고맙소. 실례지만 누구…… 아니, 총관님 아니십니까?”

2조장은 달라진 머리 형태와 야윈 모습, 기이한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거친 복장에 눈을 빼앗겨 한눈에 알아보지 못하다 이내 총관임을 알고는 깜짝 놀라 허둥거리면서 예를 표했다.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그들 뒤에 있던 2조의 대원들 또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야안은 그들의 모습에 미소를 보이며 안심시킨 뒤 말했다.

“괜찮다면 입을 수 있는 것을 구해주지 않겠나.”

그 말에 눈치가 빠른 조원 한 명이 가까이 있는 한 난민에게서 옷을 구해 가져다주었고, 야안은 가죽을 벗고 그 옷으로 갈아입었다.

이후 입고 있던 가죽을 말아 챙긴 야안은 자신에게 옷을 가져다준 조원에게 물었다.

“내가 자리를 비운 지 며칠이 흘렀는가?”

야안의 말에 조원이 다급히 손을 꼽다 말했다.

“6일 되셨습니다.”

“…….”

야안은 이 시간의 괴리감을 이해하기 어려워하다, 이내 자신이 리차드 소여가 만든 세상에 있었던 시간이 6일이었음을 깨닫고는 탄성을 흘렸다.

‘태초의 공간에서는 시간도 흘러가지 않는단 말인가?’

자신의 이 생각이 맞는다면 리차드 소여가 죽음의 지배자가 저주를 완성하기 전에 그 세상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래, 그렇지 않고서는.”

야안의 중얼거림에 자경단 2조는 바짝 긴장을 하였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야안은 손을 저으며 말했다.

“자네들에게 말한 것이 아닐세. 오크들 피에 다른 몬스터들이 꼬일지 모르니 서둘러 가죽을 벗기고 잔재는 태워 버리게나.”

“네, 알겠습니다.”

2조장은 부하들을 시켜 오크들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했고, 자신은 수하 한 명과 함께 다가오는 몬스터들이 없는지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이곳의 경계가 인간의 영역이라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기에 행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곳의 주인임을 자처하던 오크 부족이 사라진 지금 그의 걱정은 괜한 것이었다.

야안은 아무래도 이처럼 허름한 차림으로는 여러 가지 오해를 살 수 있다 여겨 바로 자신이 거처하고 있던 천막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가는 길에 지난 6일 동안 피난민들의 상태가 많이 좋아졌음에 야안은 크게 만족하였다.

‘챈들러가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고 있구나.’

자신이 고친 마나 홀을 수습하는 것만으로도 그 쓰이는 심력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인데, 자신의 몫을 충실히 처리하는 그가 대견스러웠다.

야안은 천막으로 가는 도중 자신을 저지하는 자경단에게 몇 번이고 얼굴을 보이며 신분을 밝혀야 했는데, 저마다 깜짝 놀라 예의를 표하였고, 그중 몇 명은 이른 시간부터 배식을 나누는 일을 지도하는 챈들러를 찾아 자리를 비웠다.

보수를 했는지 자신이 가기 전보다 훨씬 깔끔해진 자신의 천막에 들어선 야안은 자신의 짐에서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옷으로 갈아입었다.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옷은 2년 전 도회지에서 산 질 좋은 천으로 만든 것이라, 옷을 갈아입은 야안의 모습은 이제 약간이나마 촌스러움을 지울 수 있었다. 아니, 리젠으로 인해 예전의 피부를 잃고 새롭게 일어난 고운 피부를 가지게 된 뒤로는 약간의 귀티도 엿보인다.

자신의 책상 위에 그간의 상황이 적혀 있는 보고서들이 있음을 확인한 야안은 그것을 들어 살폈다.

과연 어린 시절부터 귀족 교육을 받아서인지 보고서에 적힌 내용은 하나같이 흠잡을 것이 없었다. 실전적인 용병 일을 해서인지 몰라도, 쓸모없는 부분을 비우고 꼭 필요한 내용만 적혀 있어 야안은 만족하였다.

잠시 보고서를 읽으며 이곳에서의 변화를 머릿속으로 그려보는데 누군가 그의 천막 밖에서 소리쳤다.

“챈들러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급하게 뛰어온 듯 그의 말에서 거친 호흡 소리가 느껴졌다. 야안은 이 새로 얻은 충실하고 믿음직한 수하가 자리한 곳으로 몸을 돌렸다.

“들어오시게.”

대답을 기다리는 잠깐 자신의 흐트러진 옷을 정리하던 챈들러는 주인의 허락에 크게 기뻐하며 들어섰다.

“주인을 뵙습니다. 일은 잘 해결하셨는지요?”

비록 많이 야위긴 했지만, 밝게 바뀐 피부나 떠나기 전보다 더 빛나는 눈을 보아 자신의 걱정이 우려임을 깨달은 챈들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

“물론이네. 보고서를 보니 그간 그대가 많이 고생하였음을 알겠네. 수고했네.”

주인의 그 한마디의 칭찬에 챈들러는 지난 6일간의 고생에 대한 보답을 받은 듯하여 크게 미소를 지었다.

야안은 그런 챈들러를 보며 웃음을 흘리더니 다가가 힐과 마케를 걸어주며 말했다.

“성과를 보였으니 그에 맞는 상을 주겠네. 운기를 도울 테니 준비하시게.”

그러며, 털썩 자리에 앉아 가부좌를 취하는 야안에 챈들러는 사양조차 하지 못한 채 서둘러 가부좌를 틀어 앉았다.

곧 야안이 손을 내밀었고, 챈들러 또한 손을 내밀어 부딪치더니 이내 야안이 알려준 중급 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아, 주인님의 기운이 더욱 강해지셨구나.’

챈들러는 야안의 기운이 자신의 몸에 들어서는 순간 깨달았다. 겨우 6일이라는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거칠기까지 했던 순수한 힘의 운영이 더욱 부드러워졌기 때문이다.

야안은 챈들러의 몸속을 살피며 만족했다. 일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것인데, 시간이 날 때마다 자신이 닦아준 길이 무너지지 않게 운기를 행했던 모양이다.

“그대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겠구나. 지난번만큼은 아니나 고통이 있을 것이니 마음 단단히 잡으시게.”

“…….”

여유 있는 야안에 비해 중급 심법을 운기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챈들러는 무언으로 대답하였다. 야안 또한 그의 강철 같은 의지를 잘 알기에 별걱정 없이 그의 운기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메마른 대지 위로 번개가 치더니 대지가 그토록 원하던 비가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물기가 메말라 갈라진 땅속으로 들어섰고, 건조하다 못해 퍼석했던 대지는 어느 순간부터 촉촉하게 젖어들었고, 천천히 그 찬란했던 옛 모습을 찾아갔다.

시간이 흘러 곳곳에서 말라 죽어가던 나무들이 생명의 싹을 틔우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번개가 잦아들더니 그 자취를 감추었다. 어느 순간부터 하늘을 메웠던 비가 사라졌지만, 대지는 이미 충분한 양의 비를 받은 상태였다.

대지는 조금이나마 회복된 힘을 통해 자신의 대지에 싹을 틔우기 시작한 생명들을 돕기 시작했다.

뚝, 뚝.

야안의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거친 바닥에 떨어졌다.

챈들러의 운기를 도운 일이 상당히 힘겨웠던지 강철 같은 야안의 육체 여기저기서 비명을 질렀다.

야안은 스스로 마케를 펼쳐 몸의 피로를 물리친 뒤 이내 운기를 통해 소모된 마나를 채워나갔다.

‘그간의 고행들 덕분에 이제 이 일도 완벽하게 해내게 되었다.’

떠나기 전에도 이 같은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때는 자신도 챈들러도 위험할 정도로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쓸모없이 소요되는 마나도 많았으며, 자신의 그런 마나로 인해 챈들러의 내부 또한 많은 위험이 자리했다.

한데 이제는 늘어난 마나와 4개월간의 고행으로 몸속의 마나 운영이 한결 부드러워진 야안은 이제 지난번보다 뛰어난 효과를 챈들러에게 베풀 수 있었다.

아직 자신의 경지를 찾으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지만, 오늘 자신이 닦은 터를 잘 갈무리할 수 있다면 최소한 상급 유저의 힘까지는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의 그 같은 힘은 야안에게 여러 점에서 기쁜 일이었다. 경험 많은 이 뛰어난 검사는 이번 고된 여정에서 많은 활약을 할 것이고, 영지에서도 그 힘을 바탕으로 뛰어난 지휘자가 되어 군을 이끌 것이다.

또한 경험이 부족한 야안에게 그는 든든한 조언자가 될 것이니 야안은 그가 힘을 되찾은 것에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 마나와 몸 상태를 회복한 야안이 눈을 떴고, 챈들러 또한 그와 비슷한 시기에 기운을 수습할 수 있었다.

몇 차례 주먹을 쥐었다 펴본 그는 지금의 변화를 믿기 어려웠다. 지난번 주인님이 행하신 일로 인해 당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마나는 하급 유저의 수준에 불과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본래 익스퍼트의 벽을 무너뜨린 자인만큼 실제의 실력은 중급 유저 두 명을 상대할 정도는 되었다.

한데 지금 지난번의 일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마나 치료를 하신 주인님 덕분에 그가 운영할 수 있는 마나는 아직은 거칠지만, 상급 유저에 달해 있었다.

중급 유저와 상급 유저의 차이는 상당한 것이었다. 비록 익스퍼트의 벽만큼은 아니라 하지만, 상급 유저 혼자서 중급 유저 다섯 명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라 할 수 있다.

그 덕분에 챈들러는 홀로 세 명의 뛰어난 상급 유저를 상대할 수 있게 되었다. 만약 앞으로 틈틈이 이 거친 마나를 부드럽게 변화시킬 수 있다면 능히 다섯 명의 상급 유저도 무리 없이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챈들러는 겨우 일주일도 되지 않은 시간에 이만큼 회복된 자신의 힘을 믿기 어려워하다 이내 야안에게 경례를 올렸다.

“주인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야안은 크게 예를 표하는 챈들러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말하지 않았는가? 상을 내린다고. 만족한다니 다행스러운 일이네. 부디 앞으로도 나를 잘 보좌해 주기 바라네.”

챈들러는 주인의 말에 다시금 작은 예를 표하며 대답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에게 있어 그보다 더 큰 상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말을 하는지라 야안은 그의 대답에 기꺼워하였다. 곧 챈들러가 묵례를 하고 천막을 나섰고, 야안은 다시금 그간 검토하지 못한 보고서와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을 정리하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보아하니, 자경단의 사람으로 보였는데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는 듯 한참을 자신의 천막 근처에서 왔다 갔다 했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 사정이 있는 듯한 것을 느낀 터라 야안이 그를 불렀다.

“고민하지 말고 들어오시게.”

자신의 말에 흠칫 놀란 그는 망설이더니 이내 천막으로 들어와 엎드렸다.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였고, 예전에 챈들러의 소개로 알았던 8조장 크리스였다.

성정이 밝고 지닌 무위도 뛰어난 터라 야안 또한 눈여겨보는 이였는데, 평소 행동과 달리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안타까워 야안이 다가가 그를 일으키며 말해 주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어려워하지 말고 부탁하시게.”

야안의 그 말에 크리스는 크게 감사해 하며 몇 번이고 허리를 접히더니 무겁게 말을 꺼냈다.

“제가 아들처럼 여기는 아이가 있습니다. 한데 그 아이가 지금 중병에 걸려 크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염치없는 일인 줄은 아나 나리께서 그 아이를 살펴봐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러며 눈을 질끈 감는 크리스에 야안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난 또 무엇이라고. 그런 일 정도는 어렵지 않네. 한데, 아직 치료사들이 이곳에서 진료를 보고 있음을 알고 있네만 데려가지 않았던 것인가?”

야안의 말에 크리스가 기뻐하다 이내 잠시 눈을 굴리며 말했다.

“그, 그것이 그분들도 어렵다 하시는지라.”

크리스의 말이 거짓임을 알 수 있었지만, 야안은 아이가 아파한다는 것은 사실임을 알았기에 고민하지 않고 수락했다.

“알았네, 정오 때 시찰을 나갈 생각이니 그전에 데려오게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총관님.”

그렇게 말을 하던 크리스는 서둘러 아이를 데려오기 위해 천막을 나섰고, 야안은 다시 업무를 진행했다.

크리스는 서둘러 페리의 집으로 달려갔다. 평소 잘 단련된 그의 몸 덕분에 마치 건장한 준마가 달리는 듯했지만, 그는 오늘따라 느린 자신의 몸에 불만을 느꼈다.

곧 20분이 채 되지 않아 페리가 사는 천막에 도착한 크리스는 숨을 헐떡이다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천막 안에는 옥수수 죽을 먹다 이내 속에서 받질 않아 토해 낸 로스의 토사물을 치우고 있는 페리가 있었다.

그녀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걱정스럽게 아들을 바라보고 있다 갑자기 모습을 보인 크리스에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크리스는 그런 페리에게 다가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페리, 슬퍼하지 마. 총관님께서 오셨어. 그분에게 부탁하니 흔쾌히 들어주시더라. 자, 어서 로스를 데려가야 돼. 어서.”

페리는 크리스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을 짓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더니 로스를 크리스의 품에 안겨주었다. 이내 간단한 옷가지를 챙기던 그녀는 크리스를 따라나섰다.

크리스는 숨을 헐떡거리는 로스를 안타깝게 바라보다, 힘겹게 자신의 걸음을 따르는 페리를 보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 그분은 이곳에서 수많은 기적을 보이신 분이야. 로스의 병도 어렵지 않게 고쳐주실 거야.”

그 말 속에서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급하기만 한 자신을 진정시키려는 크리스의 의도를 알아낸 페리는 이 바보 같기만 한 사내가 너무나 고마웠다.

‘감사해요. 고마워요. 그리고 사랑해요, 정말. 정말…….’

아버지를 잃고 남편을 잃고, 아들을 잃고, 그렇게 부족을 잃고 난 뒤 그 어디에도 의지할 곳이 없었던 그녀에게 어느새 자신의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된 그의 존재는 놀라운 또 다른 기적이었다.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던 자신의 삶이었는데…….

이토록 순수하기 그지없는 사랑을 받아본 여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 것인가? 모든 것을 잃게 한 아리스 님이 한때 그토록 원망스러웠건만, 그가 자신의 인생에 나타나자 원망은 녹아내리고 그저 감사하다는 마음만이 자리하였다.

그래서 그녀는 두려웠다.

그 사랑이 가져다줄 그 쓸쓸함에 대해 그녀는 두렵고 또 두려워하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점차 간절해지는 이 마음을 그에게 보여줄 수 없었다.

언젠가 마지막 숨을 쉬게 되는 그때 자신은 틀림없이 후회하고, 또 후회하겠지만, 자신은 그때에서도 생각할 것이다.

그 일은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또한 아주 잘한 일이라고.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자신의 심정을 숨기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 고마워요.”

안정을 찾은 페리의 모습에 크리스는 작게 미소를 띠며 그녀가 무리 없이 따라올 수 있을 정도의 움직임을 보이며 앞을 나섰다.

야안은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환자를 데려온 크리스의 모습에 미소를 지었다.

“수고했네. 그래, 이 아이의 어머니 되시는가?”

페리는 야안을 보고 믿기지 못한 무언가를 발견한 사람처럼 눈빛이 흔들리다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네, 네. 그렇습니다. 치료를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게 떨며 말을 하는 그녀에게 야안은 손을 저어 마케를 걸어주었다. 그간 아이 때문에 크게 걱정을 했던지 그녀의 몸속의 기운이 흐트러졌기에 바로잡아 주기 위해서였다.

“몸이 많이 상했군. 너무 걱정하지 말게나.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다 행해볼 터이니.”

야안은 그렇게 말하며 아이의 손목을 잡아 기운을 흘렸다. 아이의 병이 어느 형태인지 알아보기 위한 것인데, 무언가 야안의 기운을 방해하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 겪는 형태의 일이었다. 아이의 몸속의 기운은 정상적이지 않았다. 만약 자신이 그간 겪었던 고행이 아니었다면 무시하고 지나갔을지도 모르는 아주 미약한 것들이었다.

야안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이내 아이의 손목에서 손을 떼어내더니 진실의 눈을 펼쳤다.

그리고 진실의 눈을 통해 얻어낸 정보에서 믿기지 않은 일을 깨달아 그도 모르게 작게 신음을 흘렸다.

“흠~”

야안은 혹시나 하여 그녀에게도 진실의 눈을 펼쳤는데, 페리는 자신에게 마법이 행해졌음을 알았던지 움찔거렸다.

야안은 그 모습에 눈을 빛내다 곧 그녀에게서 얻은 정보를 통해 그녀의 비밀을 알아낼 수 있었다.

야안은 그녀와 아들을 바라보다 침을 꿀꺽 삼키며 바라보는 크리스에게 말했다.

“치료를 할 수 있겠네. 다만, 많은 심력이 소모되는 일이니 외부의 접촉이 없어야 하네. 또한, 이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하겠군. 그대는 천막 밖에 나가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게.”

치료를 할 수 있다는 야안의 말에 크리스는 크게 기뻐하더니 감사하다는 말을 꺼내고는 이내 야안의 명대로 천막 밖을 지켰다.

크리스가 나가자 야안이 다정한 목소리로 페리에게 말했다.

“그대가, 브라운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네. 또한, 모습을 바꾸는 주술을 펼친 것도 아네.”

야안의 말에 페리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앞으로 있을 일들을 안다는 듯이.

하지만 뒤를 이어 꺼내는 야안의 말에 페리는 천천히 눈을 뜨며 야안을 바라보았다.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이 아이의 주술을 풀어야 하네. 모습을 변화하게 하는 주술은 나의 치료에 악영향을 줄 수도 있네.”

그 말에도 페리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는데 야안은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그 고단한 삶을 읽을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말게나. 자네의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니. 그 때문에 크리스도 천막 밖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야안의 그 섬세한 배려에 페리는 눈물을 흘렸다. 마치 하늘에 계시는 그분처럼 이분께서는 어린양을 다루듯이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 계셨다.

“감사합니다.”

그녀는 격정 속에서 어렵게나마 그 말만을 꺼내더니 아들에게 걸어놓은 주술을 풀어놓았다. 그러자, 로스는 본래 모습인 브라운인 특유의 갈색 피부를 가진 어린아이로 모습이 변했다.

“아이가 귀엽군. 그래, 이제야 알겠군.”

야안은 아이의 폐에 자리한 기괴한 혹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캔설이라는 것으로 아주 뛰어난 치료사가 아니면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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