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75화
23. 리트담의 저서
배를 갈라 그 혹을 떼어내고, 귀한 약재로 몸을 보하는 등의 복잡한 치료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관의 치료 마법인 신성 마법 ‘리젠’이 있다면 그 이야기는 달라진다. 리젠은 본래 사람이 지닐 수 있는 최상의 상태로 돌아가는 마법이기에 아직 크게 위험한 상태가 아닌 이 캔설을 고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리젠.”
야안은 폐가 위치한 부분을 향해 손을 올리며 신성 마법을 행하였고, 고열에 시달리던 로스는 이내 청량한 기운이 몸을 휘감다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크게 미소를 지었다. 며칠 동안 자신을 괴롭힌 고통이 사라지자 로스는 기뻐 어쩔 줄 몰랐다.
“엄마, 엄마. 이제 안 아파.”
페리는 야안이 펼친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잠시 얼이 빠져 있다, 이내 아들의 그 말에 놀라 다가가 울먹이며 아이를 안았다.
“흑흑. 그래, 그래. 다행이구나.”
아이는 울먹이는 엄마를 꼭 안고 그녀의 등을 도닥이며 울지 말라 하였고, 페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흐뭇한 모자의 모습을 바라보던 야안이 말했다.
“크리스 또한 이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터이니, 다시 아들에게 주술을 펼치시게.”
그 말에 페리는 야안에게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며 허리를 접더니 오늘 아침 아들에게 행했던 것처럼 검지와 중지를 미간에 올린 뒤 함루어를 중얼거리며 주술을 펼쳤다.
야안은 그녀가 아들에게 펼치는 주술의 과정을 바라보다 이내 얼굴을 굳혀갔다.
‘믿기지 않는다. 어떻게 저 같은 형태로 주위 마나를 움직일 수 있는 것인가?’
마법과 달랐다.
마법은 후천적인 마나, 즉 대기의 마나를 모아 그것을 정제하여 자신의 기운으로 만들어 그것을 기반으로 자연의 마나를 움직여 마법을 펼친다.
한데 이 주술은 달랐다.
자신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일시적으로 증폭해 그것을 바탕으로 펼쳐지는 것이다. 즉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지게 되는 마나를 이용하여 자연 속에 숨겨진 생명력의 마나를 가져다 펼치는데, 야안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다.
뛰어난 발상의 전환이었다.
큰 주술을 펼칠수록 그 주술사 또한 자신의 근원적인 마나 또한 커지니, 자연스럽게 인간을 초월하는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생명력을 지닌 존재라면 태어나면서부터 자신도 모르게 응용하여 죽을 때까지 쓰게 되는 것이 생명력의 마나 성질이었으니, 인식하고 자기 뜻대로 쓸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힘보다 자유롭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아마 그런 성질을 이용하여 모습을 변환할 수 있었던 것이라 야안은 추측했다.
야안의 생각처럼 주술사는 무의식과 의식을 얼마나 잘 소통하게 하는지와, 그로써 자연에 자리한 근원적 생명의 마나를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에 따라 성장이 달라진다.
위대한 주술사는 이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모호해진 자로 마법이 아님에도 마법 같은 힘을 보이게 되며, 검을 배우지 않았음에도 검을 드는 순간부터 뛰어난 절정의 검을 가지게 된다.
또한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크게 달라져 발상의 전환이 뛰어나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게 되니 능히 그를 따르지 않는 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위대한 주술사는 어떤 점에서 보면 다른 구존보다 상대하기 까다롭다. 못 하는 것이 없는 절대자이면서, 뛰어난 지도력을 가지며 일어나는 왕이기 때문이다.
곧 페리가 주술을 끝내었던지 천천히 로스의 미간에서 손을 떼어내기 시작했다. 그녀는 오늘 두 차례나 펼치는 주술이기에 힘에 겨웠지만, 야안이 펼쳐준 마케에 아침처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는 아니었다.
야안은 아이가 모습을 바뀐 것을 보며 다시금 기이하다 생각하고는 이내 크리스를 불렀다. 곧 크리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천막으로 들어섰고, 이내 자신을 부르는 로스를 보며 다가가 힘껏 안았다.
그 또한 눈물이 흘러나오는 것을 참지 못하며, 야안에게 몇 번이고 감사의 인사를 드렸다. 야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을 진정할 수 있게 마케를 걸어주고는 말했다.
“아이가 회복되었다지만, 열흘 정도는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네.”
그 말에 그녀 페리는 크게 감사해 하더니 고민 끝에 주술로 야안에게만 들리게 말을 꺼냈다.
“이 은혜를 갚고 싶습니다. 나중에 시간이 되신다면 찾아뵈어도 되겠는지요?”
그녀의 말에 야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긍정을 뜻하는지라 페리는 다시금 묵례를 올리며 감사의 뜻을 표하고 아들 로스와 함께 크리스를 따라 천막을 나섰다.
‘정말 기이한 힘이로군.’
예상은 했지만, 자신에게만 말이 들리게 하는 주술이라니. 야안은 진정 기이한 일이라 생각하다 시찰을 위한 준비를 끝내고 천막을 나섰다.
* * *
이틀이 지난 뒤에야 야안은 모든 철과 구리를 받아낼 수 있었다.
수레로는 일곱 수레가 더 필요하게 되었고, 수레를 끄는 말 또한 두 마리로는 어려워 세 마리로 늘려야 했다.
무게로 치자면 약 15톤에 달하는 것인데, 윌 백작성에서 후하게 쳐주었다 봐야 했다. 요즘 같은 시기에 이만한 금속의 양이라면 유명 생산지의 고급 와인에 약간 못 미치는 가격이었다.
야안은 윌 백작성에서 자신에게 많은 신경을 쓰고 있는 윌 로이스 자작을 찾아가 감사의 말을 올렸다.
그는 야안이 찾아왔다는 말에 바쁜 업무도 내려놓고 야안을 찾았다. 단순히 그가 신관이라서가 아니라, 그가 벌인 일 때문에 혼란스럽던 영지가 상당히 안정을 찾은 것이 고마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인데, 그의 골치를 썩였던 피난민들이 안정을 되찾고 다른 곳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이 떠돌자 중소 규모의 상단들이 다시 거래를 위해 윌 백작성에 방문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탈리아 왕국이 금속 생산지로 유명하다지만, 오랜 전통을 기반으로 왕국에서 손에 꼽는 좋은 철을 생산하는 윌 백작성이 가져다줄 이득은 지금 같은 대전쟁이 일어난 시기에 쉽사리 놓칠 수 없었다.
그동안은 언제 폭동이 일어날지 몰라 올 수 없었던 윌 백작가였지만 신빙성이 있는 소문이라 자연스럽게 각지에서 상인들이 모여들었다.
이내 작은 시장을 만들게 되자 이 호기를 놓치지 않은 윌 로이스 자작은 라덴에게 명을 내려 그들을 보호하게 하였다.
그렇게 작지만 시장이 일어나자 치솟던 물가는 어느 순간부터 안정을 되찾았고, 점차 일자리 또한 늘어나게 되어 조금씩 경제가 살아났다.
그렇게 되자 자연 들어오는 세금도 늘어났고, 자신의 영지에 방문한 한 중소 상인들의 대표 상인에게 이번에 얻은 와인을 거래할 수 있는 작은 물꼬를 틀 수 있었다.
또한 라덴은 그동안 눈여겨보았던 부패한 군인들을 처단하기 시작했고, 그제야 불안에 떨던 시민들은 조금씩 안정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게다가 그동안 돈이 없어 병을 고치지 못한 시민들도 백작성의 명으로 만들어진 무료 치료소에서 병을 고쳐나갔고, 이에 백작은 다소나마 떨어진 위신 또한 되찾을 수 있었다.
믿기지 않는 변화였다.
윌 로이스 자작에게 이 일은 오래된 고언이 틀림이 없음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베풂으로써 얻는다. 이것이 정치의 가장 상책이다.”
한때 수많은 갈래로 분열되었던 카리엘 제국에서 오랫동안 패권을 쥐었던 대영주 제론 백작이 하였던 말이었다.
윌 로이스 자작은 야안을 데려다 준 집사에게 그것을 가져오라 명한 뒤 접객실에 들어섰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지 이 남작가의 총관은 오히려 신색이 좋아져 있었다. 비록 고생을 한 탓인지 많이 야위어 있었지만 한 달 전에 보았던 그 촌스러운 느낌은 많이 사라지고 귀티가 은은히 자리해 있었다.
그렇게 되자 이제야 전형적인 시골가의 준귀족의 모습을 갖추는 것 같았다.
야안은 윌 로이스 자작이 들어서자 일어나 크게 예를 표했고, 자작은 한 달 전이나 지금이나 변화 없는 야안의 모습을 기꺼워하며 자리를 권하고 말했다.
“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감사합니다. 신색이 많이 좋아지셨군요.”
신색이 좋아졌다는 말에 외모에 신경을 쓰지 않았던 야안은 그저 빈말인 줄 알고는 가볍게 말을 받았다.
“그렇게 보아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리고 야안은 이내 다시 크게 예를 보이며 말했다.
“오늘 보내주신 금속들을 살폈습니다. 하나같이 질이 뛰어난 금속이더군요. 그 같은 호의를 베푸시는데 보답을 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현재 저희가 가진 게 없어 그저 이렇게 찾아와 감사의 인사를 드릴 뿐입니다.”
야안의 말에 윌 로이스 자작은 미소를 보였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사실 그대의 결심 덕분에 우리 영지 또한 많은 점에서 도움을 받았으니 그 정도의 일은 해 드려야지요.”
자작의 말이 무엇인지는 알았던 야안은 손을 저었다.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윌 백작성에서 지원을 하셨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던 야안은 그간 다듬어 놓았던 그 이세계의 회색 멧돼지 가죽이 담긴 보따리를 꺼내어 그에게 내놓았다.
자작은 야안에게서 그것을 받아 들며 궁금증을 표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궁금증 섞인 자작의 말에 야안이 말했다.
“예전 야루스 산맥에서 보게 된 희귀한 동물의 가죽입니다. 변이되었던 것인지 눈이나 다리, 털, 이빨 모두가 회색이더군요. 변변치 못한 것을 드리는 것 같아 죄송할 따름입니다.”
야안의 그 말에 자작이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보따리를 풀었다. 이내 자작은 보따리 속의 물건을 보며 감탄사를 터뜨렸다.
무두질 솜씨가 뛰어난 야안이 잘 다듬어 놓았던 탓에 거칠었던 모습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되자 모든 것이 짙은 회색 빛깔인 이 멧돼지 가죽의 그 기이한 신비스러움이 더해 세상에 보기 힘든 가죽으로 변모되었다.
윌 로이스 자작은 잠시 그 가죽을 상세히 살피다 감탄을 표했다.
“하! 정말 대단한 물건입니다.”
야안은 자작이 크게 만족한 듯하자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라 생각했다. 그 세상에서는 흔한 것에 불과했지만, 이곳에서는 다시 얻을 수 없는 것이라 귀한 것이 될 수 있다는 판단이 맞아떨어졌다.
야안의 생각처럼 사실 이 같은 귀한 가죽은 누가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천지만별로 달라진다.
특히 그 누군가가 대귀족이 되었을 때에는 가장 뛰어난 가치를 가지게 된다. 대귀족이라면, 이것을 왕실에 진상을 할 수 있게 되는 탓이다.
많은 보물이 자리한 왕실에서는 세간에서 귀하게 여기는 것보다 이같이 쉽사리 구할 수 없는 물건들을 귀하게 여겼다.
오우거와 같은 강력한 몬스터의 가죽이나 구하기 힘든 상급 마정석도 왕실에 바치는 진상품의 서열에서 중간 정도를 차지하지만, 다시 구하기 힘든 꽃이나 오래된 약초는 상급에 달했다.
그런 것을 구하기 힘들면 많은 양의 진상품을 바쳐 높은 서열에 오를 수 있다.
그러하니 자작으로서는 그것을 크게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 제국에서도 이런 물건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니.
이것이면 왕실에서 떨어진 윌 백작가의 위신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좋습니다.”
자작은 다시금 감탄을 보이다 이내 집사가 들어서자 화색을 보이며 그에게서 작은 목재 상자를 받았다. 그리고 받은 상자 안을 열어 한 장의 두루마리를 꺼내어 야안에게 건네었다.
야안은 그것이 조금 전에 말한 윌 백작성이 준비한 선물임을 알고 살피다 이내 감탄사를 흘렸다.
“이것은?”
야안은 윌 백작의 배려가 담긴 선물에 다시금 예를 보이었다.
그 두루마리에 적힌 내용은 다름 아니라 피난민들이 탈리아 왕국을 벗어나게 될 때까지의 모든 책임을 윌 백작가에서 지겠다는 서명서였다.
이것이면 위스 자작의 도움 또한 받을 수 있을 것이니, 별다른 말썽 없이 탈리아 왕국을 지나칠 수 있을 것이다.
야안은 그것이 윌 백작가에 부담을 안겨주는 것임을 알고 있었지만,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만약 이 일이 자신의 일신에 관한 것이라면 사양의 의사를 보이겠지만, 2만 명에 달하는 그들의 안위를 생각한다면 감사히 받아들여야 했다.
“염치없는 일이지만 백작가에서 보인 배려를 사양하지 않고 받겠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야안이 자신들의 선물을 크게 반기자 윌 로이스 자작은 크게 미소를 보이며 담소를 나누었다. 곧 미리 이야기를 한 듯 하인들이 준비된 음식들을 내놓기 시작했다.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해 준비하였습니다. 들면서 남은 이야기를 나누도록 하지요.”
윌 백작가의 요리장의 솜씨는 대단한 터라 음식은 하나같이 화려하면서도 그 맛이 깔끔하고 담백하여 외국 음식임에도 속이 거북하지 않았다.
귀족들이 즐겨 찾는다는 살찌운 거위의 간으로 만든 푸아그라를 썰어 먹던 야안은 그 풍미를 즐기며 자작과 담소를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가벼운 차로 입가심을 하던 자작이 야안에게 물었다.
“하면, 언제 움직이실 생각이십니까?”
“내일이면 길을 정찰하러 떠난 이들이 도착할 것이라 아무래도 모레 새벽에 길을 떠날까 합니다.”
그간 여러 일이 있었던 야안이 그렇게 떠난다는 말에 자작은 작은 아쉬움을 보이다 말했다.
“부디 무사히 도착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다음에도 이 같은 거래를 나누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저희 윌 백작가가 바라는 일입니다.”
내온 차가 식을 때쯤 야안은 자작과 인사를 나누고 접객실을 벗어났다. 예상치 못한 수확을 얻었던 터라 그의 발걸음은 가벼워 보인다.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정찰을 나갔던 병사들이 돌아왔다.
야안은 그들의 보고를 받으며, 어느 지점이 위험하며 어떤 몬스터들이 주를 이루고 있는지를 기반으로 행로를 정했다.
한 번에 다 움직일 수 없기에, 4,000명씩 나누어 움직이기로 하여 다섯 개 단위로 나누었고 그에 맞춰 병력 또한 다섯으로 나누었다.
야안은 자신의 검사들과 용병대를 1조로 만들어 가장 선두로 나아가기로 했다.
선두는 여러 점에서 중요하였다.
뒤에서 따라오는 후속 부대를 위해 어느 곳이 안전한지 어디가 위험한지를 파악해야 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디에서 쉬어야 하는지를 생각해야 하며, 도착한 뒤에도 위스 자작에게 부탁하여 양해를 구해 피난민들이 쉴 곳을 찾아야 했다.
그뿐만 아니라 가장 많은 몬스터를 만나는 자리이기도 했다.
마지막 조는 선두 다음으로 위험한 조이기에 챈들러에게 맡겼고, 그 외의 세 개의 조에는 챈들러를 오랫동안 따르고 있는 경험이 많은 용병에게 이를 맡겼다.
금속의 운송은 움직임이 빠르고 여러 가지 일들을 수습해야 하는 1조가 가장 적게 가져갔고, 2, 3, 4조에게는 80%를 맡긴 뒤 마지막 5조에는 마차 한 대 분량만을 맡겼다.
다음 날 이른 새벽에 움직인다고 미리 난민들에게 말을 했던 탓인지, 그날은 이른 저녁부터 불이 켜져 있는 곳이 드물었다.
야안은 내일 호송되는 물건들을 재차 검사하고, 노약자들을 위해 마련된 마차들의 점검을 끝낸 뒤에야 자신의 천막에서 몸을 수련했다.
어떤 위험이 있을지 모르기에 하루빨리 변해버린 육체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이제 굳이 탈론 훈련 방식을 따르지 않아도 스스로 신체를 통제하여 자신이 원하는 부위의 근육에 힘을 가할 수 있기에, 야안은 자신의 걸음으로 세 걸음의 정도의 공간 안에서 그 훈련을 할 수 있었다.
단순히 검을 내려치고, 찌르는 형태의 기본 검식이 전부였지만 마치 그 홀로 시간이 느려진 듯 천천히 움직이는 야안의 몸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지극히 느린 움직임은 작은 미세 근육 하나하나까지 통제하는 것이라 그의 모든 근육이 활성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훈련 방법은 상당히 도움이 되어 앞으로 지금 정도의 훈련량이라면 20일 정도가 지난다면 자신이 생각하는 것의 70% 정도의 완성을 이룰 수 있을 듯했다.
야안은 네 시간이 지나서야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내렸다. 그리고 가부좌를 하고 운기행공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운기행공을 하면서, 이틀 전 자신을 찾아온 페리에게 얻었던 고서에 대해 궁리하였다.
이틀 전, 그날도 수련을 마치고 운기행공을 하던 야안은 제6감각에 걸려든 기이한 인기척에 눈을 떴다.
하지만 그의 인기척과 달리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는데, 야안은 어느 한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만 나오시게.”
그렇게 말하며 야안이 바라보는 곳은 촛불과 가까운 밝고 숨을 곳이 없었으나, 갑자기 공간이 흔들리더니 이내 한 여인이 모습을 보였다.
갈색 피부에 갈색 눈을 가진 이국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중년 여인이었다. 야안은 그 모습이 페리의 본래 모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크게 예의를 표하더니, 품속에서 오래된 책자를 꺼내어 야안에게 바치며 말했다.
“저는 발하족의 마지막 생존자이며 본래 이름은 야율수라 합니다. 이것은 저희 부족에 내려오는 물건으로 함루어가 정리된 책자입니다.”
야안은 그녀가 건네준 책자를 받은 채 잠시 바라보다 궁금증이 들어 말했다.
“한데 이것을 나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인가?”
주술은 브라운인들 중에서도 소수의 사람만 얻을 수 있다고 들었기에 하는 말이었다. 그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린 야율수가 말했다.
“은인께 주술사의 자질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비록 아리스 님의 의지를 대신하는 신관님이시며 진리의 길을 걸으시는 현자인 것도 알고 있으나 미약하나마 이 주술을 익히시면 그 하고자 하시는 일에 많은 도움이 되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을 마친 그녀는 이내 주술이 왜 야안에게 도움이 되는지에 대해 설명하였다.
“융 제국에서 많은 뛰어난 현자들을 탄생한 배경에는 바로 저희 같은 부족들에게서 빼앗아 간 이 주술이 있습니다. 주술은 무의식을 자극하여 인간의 잠재 능력을 향상시키기 때문에 아슬아슬하게 재능 미달인 자들도 현자로 만들 수 있으며, 그 경지를 올리는 편법으로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부디 은인께서는 미천한 저의 작은 성의를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녀의 그 말에 야안은 브라운인에게 나쁜 인식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 융 제국의 그 같은 횡포 때문일 것이다.
야안은 잠시 자신에게 건네진 주술이 적힌 책자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에게 큰 의미가 담긴 물건일 것인데, 이렇게 마음을 써주어 고맙네. 절대 나쁜 일에 쓰지 않겠네.”
그녀는 자신의 성의를 받아주는 야안에 다시 감사의 말을 보였다.
“이렇게 받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함루어의 글자는 룬 문자처럼 뜻 문자라, 그 밑의 자구를 통해 익히신다면 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함루어의 의미를 곰곰이 곱씹으시다 보면 어떻게 무의식을 자극하는지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야율수가 보기에 야안의 재능은 그녀의 아들 로스만큼이나 뛰어나 보였다.
다만 확신은 할 수 없었는데 이는 야안이 이미 스스로 힘을 숨기는 경지에 들어선 탓이다. 그녀로서는 자신의 눈으로는 쉽사리 파악되지 않아 야안을 시험해 보았고, 그 결과 제 생각보다 더 뛰어난 재능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은인께서 아직 연세가 어리신 만큼 그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아 어쩌면 위대한 주술사까지는 아니어도 그 밑의 대주술사에는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은인께서 현자의 길이 아닌 주술에 매진하였을 때의 일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던 그녀는 이내 스스로 주술을 걸어 모습을 변환하고는 이곳에 왔을 때처럼 천천히 자신의 모습을 지우더니 밖을 나섰다.
야율수, 아니, 이제 페리가 된 그녀가 자신의 거처에서 나간 후 야안은 그녀가 건넨 고서를 펼쳤다. 하지만 야안의 예상과 달리 고서에는 기이한 형태의 그림들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한 자구 따위는 보이지 않았고,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환수들이 해학적으로 그려져 있었다.
그 가장 첫 장에 그려져 있는 그림은 생쥐와 비슷하게 생긴 환수로 원숭이의 꼬리가 달렸고 그 손은 곰의 앞발을 닮았으며 뒷발은 독수리의 발톱을 닮았다.
눈빛이 맑고 부리부리하였는데, 그 생쥐를 닮은 환수는 그 부리부리한 눈으로 먼 곳에 그려진 작은 별 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