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76화
무언가 의미심장한 그림인지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책자를 덮었다.
‘그녀가 잘못 가져다준 것인가?’
야안은 자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녀에게 이 같은 고서가 또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갑자기 작은 정보 창이 그의 시야를 흩뜨리게 했고, 야안은 그 창을 열었다.
[리트담의 저서 (봉인되어 있는 비서)
등급 : C-
고대 위대한 주술사인 리트담이 남긴 유물이다. 그가 탄생시킨 함루어를 이용한 모든 주술이 담긴 책자이다. 보는 이의 재능에 따라 보는 것이 달라지는 위대한 주술이 걸려 있다.
*그대의 뛰어난 행운 덕분에 그대는 리트담이 남긴 그림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림을 바라보며 궁리하면 크게 깨닫는 것이 있을 것이다.]
그 정보 창을 통해서야 야안은 지금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야안은 서둘러 페리에게 이 보물을 되돌려주려 일어서다 이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닌 듯 말하긴 하였으나 페리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어떤 책자인지를. 그렇지 않고서는 그 머나먼 곳에서 여기까지 이 고서를 지켜왔을 리 없다.
겨우 함루어를 익히는 것이라면 그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가르치면 될 일이었으니 말이다.
야안은 잠시 고민하다 이내 그것을 보관하기로 했다. 후에 그녀의 아들 로스가 성장한다면 그때 이것을 물려주는 게 좋을 것이다.
현재 힘이 없는 그녀에게 이것은 언제 불행을 가져다줄지 모르는 독과 같았다. 만약 심성이 악독한 자가 이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이 모자는 그날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벌써 이틀 동안 야안은 그 책자에 있는 그림을 살펴보았지만, 여전히 깨닫는 바가 없었다. 다만 짐작이라도 하는 것이 있다면, 쥐가 행한 행동과 관련이 깊다는 것에 있다.
하지만 그뿐. 더 이상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야안은 궁리하다 이내 운기조식을 끝낸 후 인벤토리에서 리트람의 저서를 꺼냈다. 그리고 정보 창에서 알려 준 충고에 따라 그림을 펼쳐 자신이 놓친 것이 없는지 자세히 살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야안은 지난 시간 동안 보고 궁리하였던 것에 대한 대가를 얻을 수 있다.
천천히 환수의 독수리를 닮은 뒷발부터 시작하여 길게 이어진 원숭이의 꼬리, 굽어진 등, 매서운 곰의 앞발을 지나 생쥐의 얼굴에 담긴 그 장엄하기까지 한 그 눈빛과 부딪치는 순간 야안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멍한 시선은 천천히 그 환수가 바라보던 별로 향했고, 이내 기괴한 일들이 벌어졌다.
그곳은 그가 바라보았던 환수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자신은 그곳에서 패전한 장군이었고, 그는 그 책임을 물어 죽음을 앞두고 있었다.
‘해가 뜨기 시작하면 나의 죽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울리겠구나.’
이렇게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신의 처와 딸들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운이 좋다면 누군가의 처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사내들의 배출구가 되어 떠돌다 병에 걸려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아주 빌어먹을 일이다.’
자신은 충분히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도망친다면 패전의 책임을 자신과 일가족에만 두는 것이 아니라, 구족을 멸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는 잠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다 저 창살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날 따라 구름이 많이 끼었던지라 달도 보이지 않았고, 겨우 하나의 별만이 겨우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 하나 남은 별 모습이 처량한지라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그는 이 현실을 부정하고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분노도 하다 결국 타협도 하였다. 그러다 서글픈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저 홀로 남겨진 별을 바라보니 마치 자신의 신세를 보는 듯했다.
‘인생이란 이토록 허무할 정도로 씁쓸한 것이다.’
그는 한참이나 슬픔에 젖어 말없이 별을 바라보다 결국에 이르러 자신의 마지막을 수용하였다. 자신의 마지막을 수용하자 그는 마음이 편안해져 갔다.
치열한 인생의 끝이 이런 것은 슬픈 일이나 그 자신도 누군가를 죽이는 것으로 공을 세워 장군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아니던가?
시선을 달리하여 죽음과 삶 사이에 자리한 그 아슬아슬한 선에 들어선 그는 그렇게 불현듯이 깨달음을 얻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둔 상태에서 얻은 그 깨달음에 그는 그저 짧은 감탄사만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아! 죽음과 삶은 본래 하나로구나.”
어느새 야안이 펼쳐놓은 생쥐를 닮은 환수의 그림은 사라져 있었다. 그리고 깨달음에 감탄사를 터뜨린 야안은 온몸을 떨어대며 희열 속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일순간 예전 무의식과 의식이 공존된 상태로 들어서더니 이내 자신의 모든 검을 바라보았던 그때를 회상했다.
그때를 회상하던 야안은 어느새 일어나 자세를 취했고 멍한 눈빛 가운데 강렬한 빛이 일순간 터지더니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은 두 손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쳤다.
그렇게 야안은 그 공존된 의식 상태에서 벗어났다.
정신이 든 야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어느새 그저 꿈속에서만 그리던 그 일검이 자신의 몸에 각인되었음을 깨닫자 소름이 돋았다.
마치 한바탕 꿈을 꾼 것같이 현실감마저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이내 때가 되지 않았음에도 일검을 억지로 몸에 각인시킨 부작용으로 그의 온몸의 근육이 파열되고 신경이 끊어져 비명조차 내기 힘든 고통을 느끼며 쓰러졌다.
“으으음.”
예전 바론의 지옥의 불에 맞아 온몸이 화상에 당했을 때만큼이나 끔찍한 고통이었다. 야안은 숨을 헐떡거리다 입을 달싹거렸다.
“리, 리젠.”
머릿속부터 일어나는 청량한 바람을 느끼던 야안의 신체는 신성 마법의 도움을 받아 회복되기 시작했다. 다만 그 고쳐지는 과정에서 상당한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겨우 10% 정도의 회복만을 보이며 끝이 났다.
야안은 회복의 과정을 걸쳤음에도 오히려 더 심한 고통을 느꼈다. 이는 끊겼던 신경이 연결되며 미처 느끼지 못한 근육통이 가세하면서 생긴 현상이었다.
그는 똑바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가까스로 인벤토리를 열어 뇌전의 정화를 꺼냈다. 그제야 그는 머릿속을 하얗게 불태우던 고통을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재차 마음을 모아 리젠을 스스로 펼칠 수 있게 되었는데 무려 세 번의 리젠을 펼친 뒤에야 그 영혼마저 불태울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리젠.”
마지막으로 남은 리젠을 스스로 펼친 야안은 멍한 머리를 뇌전의 정화의 영향으로 차갑게 식히며 운기행공에 들어갔다.
이내 야안의 천막을 환하게 비추었던 뇌전의 정화가 빛을 잃었고, 야안은 운기삼매경에 빠져들었다.
깊은 수중에 빠진 듯 그의 내면 깊은 곳에 들어서던 야안이 정신을 차리며 눈을 떴을 때는 이미 반나절이 지난 뒤였다.
밖에서는 벌써 준비를 하느라 여기저기서 소란스러웠다. 그래도 다행히 아직 새벽의 미명조차 보이기 전이라 두 시간 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다행이다 생각이 들었던 야안은 천천히 달라진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는 마치 새로운 세상을 보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에 젖어 있었다. 마치 조금 전의 고통이 거짓이기라도 한 듯이 날아갈 것같이 몸은 가벼웠고, 머리는 맑았다.
야안은 자신의 눈을 어지럽히는 창들을 확인할 겸 달라진 자신의 상태를 점검했다.
[미숙한 심연의 일검
등급 : B-
본래 그대가 펼칠 수 없는 절대적 일검이다. 현재 그대로서는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영역이었으나, 리트담의 저서를 통해 얻은 주술의 힘이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다만 이것을 사용하기에는 그대의 능력이 너무나 낮아 미숙한 형태로밖에 펼치지 못한다.
*절대적인 일검인 만큼 상당히 몸에 무리가 간다. 한 번 펼치면 상태 이상에 빠지게 되며 한 달간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한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펼칠 수 있는 횟수가 늘어나거나 그 스스로 가해지는 피해가 적어진다.]
[초감각(로 단계)
아리스가 남긴 숨겨진 축복이다. 운 스탯을 끊임없이 발전시킨 현명한 자에게 이 축복을 남긴다.
운 스탯을 50 이상을 올린 자에게 생겨나는 능력이다. (제6감각에서 발전되었다. 무의식과 의식의 경계가 한층 가까워지면서 얻은 능력이다. 제6감각보다 한층 더 예리하고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명칭처럼 감히 오감을 초월한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운 스탯을 더 올린다면 그대는 이 운 스탯의 수치에 맞는 숨은 비밀을 알게 될 것이다.
*스탯으로 변화된 몸에 적응하는 기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게 되었다.
*아직 그대의 초감각의 수준은 가장 낮은 단계이다. 다음 초감각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지혜와 행운이 일정 수준을 뛰어넘어야만 한다.]
[이름 : 야안
레벨 : 72
직업 : 전설의 추종자
칭호 : 최초의 이방인
생명력 : 1,020
마나양 : 1,940
힘 : 36(+15)
민첩 : 33(+15)
행운 : 36(+15)
지혜 : 55(+15)
마나 : 82(+15)
분배되지 않은 스탯 : 0]
정보 창에서 보았듯이 예상처럼 무의식과 관련되었다고 생각한 행운이 이 일로 5스탯이 올라갔다. 그 덕분에 자신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던 제6감각이 발전하여 초감각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었다.
반나절 전만 해도 자신의 바뀐 신체에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던 야안은 이미 많은 부분에서 적응되었음을 느꼈다. 이는 정보 창에서 알려 주었듯이 이번에 얻게 된 초감각에 의한 변화였다.
이것은 전설의 반지 퀘스트로 인해 많은 전투를 하게 될 야안에게 큰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이 덕분에 전투 위기 시 사용할 스탯의 폭이 넓어졌으니 말이다.
몸의 적응 기간을 반으로 줄이게 되었다는 것은 그에게 그런 큰 의미가 있었다.
현재 초감각의 단계 중 가장 낮은 단계이니만큼 다음 단계에 들어선다면 그보다 더 빨리 적응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그에게 큰 기연인데 제6감각에서보다 확실히 발전된 형태라 느꼈던 만큼 그의 기감은 두 배로 늘어났고, 또한 밖에서 움직이는 수하들의 모습들이 확연히 머릿속에 예상되었다.
“초감각…… 이것만으로도 놀랍건만.”
하지만 이런 대단한 능력을 얻게 된 야안도 리트담의 저서를 통해 얻은 심연의 일검에 대한 놀라움에 미치지 못했다.
미숙한 심연의 일검. 그것은 인간이 갈 수 있는 마지막 경지인 절정의 경지에서는 결코 얻을 수 없다 단정하게 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힘이었다.
그 명칭처럼 현재 자신으로서는 완전히 펼쳐질 수 없으나, 그것만으로도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론이나 황금 갈기 오크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 뒤에 있는 충고처럼 자신은 한 달간 절대적인 안정을 취해야 하겠지만, 신성 마법 리젠과 스탯의 힘이 함께한다면 빠른 시일 내에 회복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다 해도 최소 나흘간 고통 속에 고생해야 할 것이다. 검을 들지 않고 약식으로 펼친 것만으로 리젠을 다섯 번을 펼치고 반나절에 달하는 운기행공을 해야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이 같은 필사의 한 수를 가졌다는 것만으로 여벌의 목숨을 가진 것과 다름없었다.
‘그야말로 아리스 님의 말씀처럼 행운 스탯이라는 말이 그토록 잘 어울릴 수 없구나.’
이제 주술과 행운이 관계가 깊다는 것을 안 이상 야안으로서는 예전보다 이 스탯의 비중을 높일 수밖에 없었다.
야안은 뇌전의 구슬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다 다시 인벤토리에 이를 집어넣은 뒤 분주하게 바쁜 수하들을 지휘하기 위해 천막을 나섰다.
주인 없는 낡은 천막 위로 새벽의 미명이 스러져갔다.
* * *
2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을 이끌며 시작된 긴 여정은 시작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되었다. 우랄 산맥을 지나가는 대규모의 인간들에게 영역을 침범당한 수많은 몬스터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크는 물론이고, 코볼트도 있었으며, 성인 남성을 통째로 먹어치우는 움직임은 느리나 트롤만큼이나 힘이 센 야톨이라는 희귀 몬스터도 모습을 보였다.
우랄 산맥에 사는 대형 몬스터가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나흘간 다섯 번의 전투를 치른 1조가 잡아낸 몬스터들의 수는 400을 넘어섰다. 오크가 170에 달했고, 코볼트가 300에 달했으며, 야톨을 비롯한 중급 몬스터는 수십 마리였다.
그렇게 험한 전투를 펼쳐야 했지만, 피해는 크지 않았다. 열여섯 명의 검사들은 야톨을 상대로도 약간의 경상을 입은 것 외에는 다른 피해는 없었고, 케이 용병단장을 비롯해 120명에 달하는 용병들도 두 명의 중상자와 40명의 크고 작은 경상자 외에는 없었다.
그 많은 수의 몬스터를 상대했음에도 한 명의 사상자도 나오지 않았는데, 이는 예측 능력의 범위가 더 넓어지고 예리해진 초감각 덕분이었다.
야안은 열여섯 명의 검사들을 시켜 몬스터들이 오게 될 행로를 마차나 주위에 너부러진 나무 따위로 방해하게 한 뒤 가장 앞장서 그들을 맞이하였다.
그 뒤를 케이 용병대가 받쳤는데, 그들 중에서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나서 가장 앞장선 야안과 검사들이 몬스터들에게 둘러싸이지 못하게 하였고, 일부는 석궁과 활을 쏘며 나머지는 긴 장대로 견제를 하였다.
그것은 지난 보름 동안 합을 맞춘 것으로 덕분에 이 같은 놀라운 결과를 보이게 하였다.
용병단장 케이는 생전 보지 못한 놀라운 합격술을 펼치는 16인의 검사들의 장대한 모습에 크게 감탄하였다. 스물도 되지 않는 병력으로 그에 몇 배는 되는 힘을 보이는 절묘한 합격 검술에 어떻게 감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노련한 경험을 쌓은 상급 유저에 달한 자신이라도 저들의 합격술에 걸린다면 몇 번 검을 막지도 못한 채 순식간에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처음 그 수많은 피난민을 데리고 가장 앞서 간다 하여 많은 걱정을 했던 것과 달리 이들의 합격술을 접할수록 그 우려는 사라져갔다.
케이가 놀란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제 용병 생활 20년에 다 되어가는 자신보다 능숙하게 몬스터들을 상대하는 야안에 놀라워하였다.
듣기로 변방 영지의 남작가의 총관이라 하는데 그 검의 노련함은 웬만한 대영지의 경비대장만큼이나 뛰어났다.
또한 합격술에 통달하여 검사들이 펼치는 합격술 속에서 벗어나고 들어서는 것이 자연스러웠는데, 그로 인해 몬스터들의 움직임이 크게 축소되었다.
하지만 케이가 가장 놀란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야안의 몬스터를 상대하는 노련한 대응책이었다. 그의 검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았다.
몬스터의 공격을 받아치던 그의 검은 그 반발력을 이용하여 어느새 옆의 몬스터의 목을 날렸고, 이내 다시 다가오는 몬스터의 공격을 반걸음으로 피하더니 어느새 그의 검은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사량발천근이나 이화접목을 저토록 부드럽게 쓸 수 있다는 것은 꿈에서도 상상치 못한 일이다. 마치 몬스터들이 흩날리는 피조차 이용하는 듯 보이니 숨이 턱 막힐 지경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신천지를 보는 듯했다.’
케이는 그렇게 자신의 감상을 남겼다.
오히려 사망자가 나온 쪽은 피난민들 쪽이었다. 몬스터들에 겁을 먹은 이들이 통제에서 벗어나다 죽게 된 것이다. 그렇게 죽은 피난민들은 스물일곱 명에 달했는데, 다섯 번째 전투에 들어서야 피난민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간의 전투를 통해서 자신들을 보호하고 있는 이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처럼 야안이 속한 1조가 고생을 하였을 때, 각 반나절 거리로 따라오는 2, 3, 4조의 경우는 그나마 양호했다.
이들 각 조는 자경단 100명에 식량을 통해 몸이 많이 회복된 장정 1,000명 중 각 조 250명이 함께하고 있었다.
이들 250명이 가진 무기라고는 널린 나무로 깎아 만든 나무 방패와 죽창이 전부였지만, 그들의 목적은 직접적인 전투가 아닌 후방에서의 견제였기에 큰 피해는 없었다.
다만 정예가 아니었던 탓에 그간 다섯 명의 사망자와 스무 명의 중상자가 나오게 되었다. 그나마 20일간 고된 훈련을 통해 간단한 명령들을 숙지시킨 덕분에 이 정도의 피해였지, 그렇지 못했다면 몇 배는 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가장 후미에 위치한 챈들러가 이끄는 5조는 생각한 것보다 앞선 3개조보다 안정적이었다.
5조는 노약자들이 많았고, 앞선 조들이 흘린 몬스터들을 만나야 했으나, 이제 완전히 상급 유저 수준의 마나를 회복한 챈들러의 활약에 그 피해는 미비했다.
그 마나가 상급 유저 정도라 하지만 그 운영 능력 면에서는 중급 심법에 의해 익스퍼트에 달했기에 중급 몬스터 야톨도 그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마치 예전의 실력을 회복한 모습이라 그와 같이 힘든 시간을 보낸 용병들은 눈물을 흘리며 반겼다. 아버지처럼 따른 그의 추락을 누구보다 슬퍼하였는데, 이제 힘을 되찾은 듯하니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것이 아니어도 뛰어난 실력을 지닌 수장이 있는 단체는 그것만으로도 사기가 오르고 그 전투력이 향상되었다. 300여 명의 장정 또한 그 사기에 취해 두려움을 뒤로한 채 열성적으로 싸웠기에 피해가 작었던 것이다.
또한 피난민들도 오랫동안 챈들러의 보호를 받아 의지하였기에 앞선 조들처럼 동요의 움직임이 적었다.
야안은 하루에 두 번 전령을 통해 소식을 받았는데 이 같은 위험 속에서도 큰 피해가 없는 것에 안도를 표했다.
저녁이 되어 옥수수죽으로 식사를 함께한 야안은 이후 부상자들의 치료와 피난민들의 상태를 살핀 뒤에야 구석진 곳에서 검을 수련했다.
불침번을 하던 케이를 비롯한 용병대원들은 이 같은 고된 행로 속에서도 결코 수련을 멈추지 않는 야안을 존경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케이는 그 같은 뛰어난 검을 지녔음에도 기본 검식을 반복 수련하는 야안에 혀를 내둘렀다.
그 자신도 기본 검식을 수련하는 것이 실전에 상당한 도움이 되는 것은 알고 있으나, 그것은 눈으로 확인할 수 없을 만큼 성과도 미약하며 단순한 검로에 지루하기 쉬워 큰 인내심이 필요했다.
한데 그는 이 고된 여정에서도 그 같은 수련을 멈추지 않으니 같은 검의 길을 가는 자로서 존경스럽기 그지없다.
“어…… 저분들도 시작하시는군.”
“도대체 잠을 언제 자는 거야. 저러고도 낮에는 생생하게 움직이니 신기한 일이야.”
대원들의 말에 케이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언제 일어났는지, 검사들이 야안을 따라 하듯이 기본 검식을 연습하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기본 검식 외 자신이 부족한 점들을 고찰한 끝에 내린 결론이 맞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복수면에 익숙해져 있는 상태였다. 여정에 쌓인 피로는 운기행공으로 풀며 지냈는지라, 이처럼 밤에도 시간을 내어 수련을 쉬지 않았다.
많은 실전을 겪은 그들의 검은 상행을 떠났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발전되었다. 생사의 순간을 넘나들면서 검에 살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그것은 검에 의지를 담는 가장 기초적인 형태였고, 가장 가파른 길로 검을 수련하는 단계이기도 했다.
어제와 오늘 펼친 검이 다르니 당연히 재밌게 마련이었고, 이제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검을 닦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