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77화
몇 시간의 수련 끝에 야안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검을 접었다.
‘빠르군. 이대로라면 위스 자작에 도착할 때쯤이면 완벽하게 바뀐 신체에 적응할 수 있겠어.’
잠시 운기행공을 하던 야안은, 다시금 초감각에 걸리는 느낌에 이내 가부좌를 접고 불 당번을 쓰는 케이 용병 대원에게 말했다.
“코볼트다. 동료들을 깨워 준비하시게.”
그러며 검을 수련 중이던 수하들에게 다가간 야안은 코볼트가 나타날 곳을 가리키며 지시를 내렸다. 검사들은 주위 환경을 살피며 오방 검진을 펼칠 자리를 찾았고, 깨어난 용병들은 곧 주위의 나무들에 불을 붙여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곧 저 멀리서 수풀이 부스럭거리더니, 몬스터 특유의 분비물 냄새가 코를 자극하였다. 이내 ‘크키키’ 하는 코볼트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숫자는 많지 않았다. 60마리 정도였는데, 아마 낮에 자신들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밤에 기습을 하려던 모양이었다.
신중하게 움직이는 코볼트가 모습을 보인 만큼, 성과를 가져가려 많은 준비를 하였던 것이 분명하였는데 곧 야안이 케이에게 말했다.
“자네는 병력의 반으로 저쪽 후미 쪽을 지켜주게. 아무래도 이게 다가 아닌 것 같네.”
케이는 야안이 상당히 촉이 좋고 주위를 살피는 데 능력이 뛰어난 것을 알기에 별다른 궁금증을 보이지 않고, 그를 따랐다.
곧 60마리의 코볼트들이 환한 불에 괴로워하다 일순간에 치고 들어왔다. 그 갑작스럽게 나무들을 쌓아 올린 약식 목책을 부수며 들이닥치는 그들의 저력은 매서운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 뒤에 자리한 검사들과 용병들에 의해 막히고 말았다. 이미 오방 검진을 펼치고 있는 검사들의 합격진과 준비된 석궁과 활시위에서 나간 볼트와 활에 그들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하나둘씩 숨을 거두었다.
“키이이익.”
요란스러운 코볼트들의 비명이 고요한 밤을 울리기 시작했고, 그 울음소리와 함께 후미 쪽에서 30마리의 코볼트들이 약식 목책을 부수며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이미 야안에 의해 지시를 받고 기다리는 케이와 용병대원들에 의해 이들 또한 별다른 힘을 쓰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
중형이나 대형 몬스터도 아니고, 인간처럼 가죽이 얇고 무장도 형편없는 코볼트라면 이렇게 준비된 상황에서는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만큼 쉽게 처치할 수 있다.
그들이 이처럼 코볼트를 맞이하는 동안 야안은 어느 순간 어둠 속에 녹아들듯 수풀 속으로 들어가더니 이내 대기를 하고 있던 코볼트 족장과 코볼트 70마리를 학살하고 있었다.
그랬다.
학살. 지금 야안과 그들 사이의 전투에서 그만큼 잘 어울리는 단어가 어디 있을까? 어느 순간 족장의 목을 베어 넘기고 도망치는 코볼트 다섯의 미간을 꿰뚫어버린 야안은 검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중얼거렸다.
“어둠 속에서도 움직임이 어렵지 않구나.”
낮처럼 환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감각의 이능에 의해 어둠 속에서도 야안의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었다.
한 점의 피조차 몸에 묻히지 않은 야안은 이제 전투가 끝나 몬스터의 부산물을 얻어내고 있는 곳으로 산에서 내려갔다.
지루하면서도 고된 시간이 지나갔다.
건장한 장정조차도 힘겨워할 만큼 고된 행군이었다. 장정들도 힘겨워할 정도이니 그보다 체력이 떨어진 여인이나 어린 소년들로서는 이를 악물고 버티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 같은 일상에서도 그들의 얼굴은 밝았다. 이유는 단 하나이다.
희망, 희망이었다.
저분이 있는 영지로 가면 잘살 수 있다는 희망이 그 힘든 여정을 버티게 하였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의 작은 시련이 끝이 나려 하고 있었다.
야안은 전령을 보내어 위스 자작에게 서신을 보냈다. 미리 전령을 보내어 이야기하였듯이 피난민들이 잠시 쉴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데 대한 양해를 구하는 내용이었다.
전령에게 백작가에서 내준 두루마리와 중급 몬스터들의 가죽들을 같이 가져가게 하였으니 여러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곧 반나절 거리를 앞두고 쉬고 있던 야안은 위스 자작에게서 회답을 받아 온 전령을 맞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을 보고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는데, 국경 밖의 성문 쪽에 공간을 내주겠다는 내용 때문이었다.
국경 안과 밖의 성문의 위험도는 차원이 다르다.
국경 안쪽에서의 몬스터들은 잦은 토벌을 통해 그 수가 적고 나타나는 몬스터도 소형 몬스터가 주를 이룬다.
하지만 인간의 영역에서 벗어난 국경 밖의 지역은 나타나는 몬스터의 종류도 다양했고, 그 수도 적지 않아 언제 어떤 위험이 일어날지 모른다.
‘자작성이라 해도 2만 명은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고개를 털어내던 야안은 그 정도의 호의도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야안은 자작성을 크게 둘러 지나가야해 일정을 빠듯하게 잡아야 했다. 자신의 뒤를 따르던 네 개의 조에게 전령을 보내어 바뀐 일정을 알린 뒤 피난민들을 독려하여 다시 이들을 이끌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반나절이 지난 뒤에야 자작성을 지나칠 수 있게 되었다. 다행히 위스 자작이 자신들이 지나갈 수 있게 병력을 동원하여 여러 엄폐물을 치워 길을 넓혀놓은 상태였다.
그 일에는 호의도 있었으나 또한 피난민들이 자신의 영지에서 말썽을 부리지 않게 하겠다는 위스 자작의 우려도 담겨 있었다.
야안은 그들의 호위 아래 다시 세 시간을 더 움직여서야 국경 밖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그곳에 가지고 있던 약식 목책을 준비해 뒤에 올 이들을 위해 경계를 쳐 놓기 시작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되어서야 모든 피난민과 병력이 도착했다.
야안은 병력을 두 개로 나누어 밤낮없이 경계하게 하였고, 고단하게 지친 이들에게 자작 영지에서 구해 온 음식들을 풀었다.
뜨거운 옥수수 수프와 야채와 밀가루 따위를 넣어 끓인 한 그릇의 국이 다였지만, 뜨거운 음식이 들어가자 원정에 지친 고단함을 조금이나마 달래주었다.
그 모든 일이 지난 뒤에야 야안은 그간의 일정에서 몸이 약해진 자들과 병에 걸린 이들을 찾아 진료를 하였다.
다행히 노환 이외에는 병에 걸린 이들은 별로 없어 그것이 야안의 수고로움을 덜어주었다.
이후 짐을 정리하며, 몬스터들에 대한 피해를 막기 위해 목책과 가까운 곳에 천막을 쳐 주위를 살피며 그날을 보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낸 뒤에야 야안은 마크 남작가에서 보낸 전령을 만날 수 있었다. 투레질을 하는 말을 뒤로한 전령은 야안에게 서신을 건네었다.
“한스 님께서 보내신 서신입니다.”
그 말에 곧 편지를 열어본 야안은 서신을 읽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좋군, 생각보다 한스가 일을 잘 처리했구나.”
서신에는 그간 마크 영지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야안이 우려대로 피난민을 데려온다는 말에 영지는 술렁거렸다. 1, 2천이라면 모를까? 무려 2만에 달하는 피난민이라는 말에 영지민들의 동요는 심했다.
이제야 부유한 시골 영지의 주민들처럼 살게 되었는데, 그들이 온다면 2년 전의 그 힘든 시기로 돌아가리라 판단한 것이다.
영지민들의 그 같은 술렁거림의 배경에는 그동안 야안 때문에 힘을 쓰지 못한 지주들의 공작이 있었다. 그들은 이 기회를 삼아 야안의 세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작은 회를 결성하였고, 이후 여러 가지로 공작을 벌여 그들의 동요에 불을 지폈다.
일이 그렇게 되니 그간 안정적이었던 영지가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하였고 관리자들 또한 불안함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같은 실정임에도 야안에게서 임시 총리직을 맡은 한스는 태평하였다. 현재 한스를 도와 영지의 대소사를 맡고 있던 롬, 타일, 코른, 티애는 그런 한스에게 여러 번 충고를 하였으나 한스는 그저 미소만을 띨 뿐 귀 기울이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야안의 명대로 피난민들을 돕기 위한 준비와, 그들이 잡을 터를 닦아내는 일만을 진행할 뿐이다.
그런 한스의 실태에 지주들의 행보는 더욱 대범해져 갔다. 영지 성에 뇌물을 찔러 넣어 정보를 캐내고, 대규모의 눈에 띄는 공작을 벌이기도 했다.
그들은 그만큼 자신만만했다. 이제 16세가 되려는 소년이 자신들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겁을 먹었다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 판단이 잘못되었음을 아는 데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한스는 야안에게부터 서신을 받는 순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친우인 테리에게 말하여 겉으로는 피난민들을 보호할 병력 훈련을 하게 하면서 조심스럽게 진압 훈련을 하게 만들었다.
이후 하인들을 포섭하여, 지주들이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공작한 뒤 그들에게 줄 정보들을 가르쳤다.
역공작을 펼친 것인데, 한스는 덕분에 별다른 힘을 들이지 않고 그들의 규모와 벌이는 일들을 자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지주들은 하인들로부터 받은 정보들로 대규모의 출정을 하려 하지만, 현재 영지에서 피난민들을 위해 벌인 일로 인해 자금이 없어 출정 준비가 제대로 되지 않음을 알고 숨겨둔 재산을 꺼내어 한스에게 바쳤다.
그 덕분에 한스는 출정 시기를 앞당겼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쓰일 일들을 위해 재산을 비축하는 일까지 할 수 있었다.
한스는 그제야 그동안 참고 있던 테리에게 말해 거사를 벌였다. 이들이 숨겨진 재산을 꺼내던 때를 이용해 반란을 일으키는 지주들의 재산을 모두 파악하였으니 더 이상 그들의 악행을 참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새로 뽑았던 500명의 농노들은 지난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상당한 훈련을 거쳐 하급 유저에 들어선 이가 70명에 달했고, 그 외의 병력도 정예병에 달하는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병력이 500이었으니 늦은 밤, 기습적인 습격을 통해 공작들을 벌인 지주들을 손쉽게 잡아들일 수 있었다.
그 후 그간 역공작을 벌인 하인들에게서 얻은 정보들을 증거로 그들을 재판하기 시작했는데, 그 증거가 너무 뚜렷하여 처음 크게 반발하던 지주들은 결국 선처를 호소해야 했다.
하지만 한스는 예전 야안이 그러하였듯이 인정사정을 두지 않았다. 파악한 그들의 모든 재산을 압수하고, 10년의 노역 생활을 명령하여 공포정치의 모습을 보였다.
하루아침에 천지가 바뀐 듯이 기고만장한 수많은 지주가 영지성에 잡혀가자 영지 내의 사람들은 크게 두려움을 가졌다.
또한 저마다의 마을과 내성에 그간 그들이 벌인 일들이 적힌 공지를 붙이자 한때 지주들과 공모하려 했던 사람들은 자신도 그런 벌을 받을까 싶어 숨죽이며 입장을 바꾸었다.
이로써 한스는 2만 명의 피난민들이 최소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는 최소한의 자금을 확보하게 되었다.
그는 옥수수를 재배할 장소들을 살피고 확장 공사를 할 대로와 성 보수 일 등을 할 기반을 준비하였다.
그 후 지주들에게서 얻은 정보들을 바탕으로 공모자 중 문제가 많은 이들을 잡아들이며 인심을 얻었다.
야안은 제 생각보다 훨씬 일을 잘 처리한 한스가 기특하기 그지없어 미소를 짓다. 이후 다음 서신에 적힌 내용을 기반으로 영지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파악한 야안은 전령에게 물었다.
“병력은 언제쯤 도착하겠는가?”
“테리 대장님의 말씀으로는 오늘 저녁에 도착할 수 있다 하셨습니다.”
생각보다 병력이 빠르게 도착하는 것이라 야안은 잠시 감탄을 흘렸다. 서신을 통해 파악한 병력은 테리를 비롯하여 400에 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말이 부족한 관계로 마차를 이용해 이동 중이라는 말을 전령에게 듣자 이해가 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내일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 하니 지금부터 준비해야겠군.’
야안은 마크 영지에서 온 병력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지 고민했다. 400에 달하는 병력이라면 현재 마크 영지 병력의 대부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 나프롬 자작가와의 평화협정서가 1년 반밖에 남지 않은 지금 그들의 밀정이 움직이기 시작할 시점이니 빠른 시간에 복귀해야 했다.
챈들러를 불러 내일 이른 시간에 다시 여정을 떠나니 준비를 하라 명한 뒤, 자신은 피난민들을 열 군데로 나누어 그 이동 시간을 단축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보호해야 할 피난민들이 2,000명에 달했지만, 이미 긴 여정을 겪었던 그들인 만큼 잘 따라준다면 생각보다 더 빠른 시일로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잠시 고민을 하던 야안은 다시금 자신의 감각에 불안함을 주는 무언가에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감각에 걸린 곳으로 다가가자 점차 그 불안함의 정체가 명확해져 갔다.
약식 목책이 부서진 곳 쪽이었는데, 중소형 몬스터 따위에서 느낄 수 없는 살기가 은은히 자리하고 있었다.
‘대형 몬스터인가 보군.’
곧 야안의 판단대로 야행성의 습성을 지닌 랫톨이라는 대형 몬스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 힘이 오우거만큼 세지 못하나 그 몸놀림이 빠르고 외피가 단단한 몬스터로 눈이 사방에 하나씩 달려있어 기습이 어려웠다.
네발로 움직이며 신장은 3미터에 달했는데, 오우거처럼 소수로 움직이는 몬스터였다. 공격 형태는 날카로운 두 개의 발톱을 이용하는 공격으로 그 앞발에 걸리면 오우거의 두꺼운 가죽도 단번에 베이는 매서운 공격력을 보였다.
나타난 랫톨의 수는 두 마리로 저마다 상처를 입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영역 싸움에서 패하고 산에서 내려온 길인 모양이었다.
그 와중에 살이 야들한 수많은 먹이를 보았으니 체력을 채워야 하는 그들에게 있어 보물단지와 같았다.
야안은 대원들을 불러 경험들을 쌓게 할까 고민하다, 자신의 명에 분주하게 피난민들에게 소식을 알리는 것을 보고 자신이 처리하기로 했다.
곧 목책을 넘어 나선 야안은 바람처럼 움직여 이제 해가 지고 찾아온 어둠 속에 숨어 눈빛만을 번쩍이는 랫톨에게 다가갔다.
그는 대형 몬스터의 살기를 쬔 사람들이 한동안 심리적으로 크게 불안해하는 것을 알기에 빠르게 처리하기로 했다.
이내 육대검식을 펼쳐 검기를 중첩하여 날렸고, 이내 여러 부위에서 상처를 입고 있던 두 마리의 랫톨은 그 단단한 갑주에도 힘없이 몸이 산산이 조각나는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그들의 검은 피가 대지에 흘렀는데, 피부를 자극하는 것이 랫톨의 피에 상당한 독성이 있다는 것이 사실인 듯했다.
그러다 스승님이신 마론이 남긴 책자에서 랫톨의 피를 이용해 중소형 몬스터들의 접근을 막는 방법이 생각해 낸 야안은 대원 몇을 불러 이들의 피를 약식 목책에 바르도록 명령했다.
독성이 있기 때문에 다루는 데 주의를 하라 명했는데, 과연 야안의 판단대로 다음 날 새벽까지 자신들을 귀찮게 했던 코볼트들은 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달이 중천에서 넘어설 때쯤 되어서야 한 무리의 인원들이 어둠 속에서 모습을 보였다. 그 수가 400명에 달하고 타고 온 마차가 20에 달하는 대병력이었다.
그들은 저마다 눈빛이 날카롭고 정연하고 날이 선 움직임을 보여 그 자체만으로도 보는 이를 움츠리게 하였다.
목책에 만들어놓은 임시 문을 지키던 검사 다섯은 경계를 하다 이내 마크가의 깃발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 문을 열며 반겼다.
“고생하셨습니다. 총관님께 소식을 전하였으니 곧 모습을 보이실 것입니다.”
목책에서 경계를 서고 있던 1조 조장의 말에 테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인사를 받더니 이내 손을 저어 400명의 수하들을 마차에서 내리게 하였다.
이후 마차들과 함께 온 식량들과 무기들을 뒤늦게 도착한 자경단에게 이양한 후 야안을 만날 준비를 마쳤다.
목책과 가까이 있던 터라 야안은 이내 모습을 드러내 힘겨운 여정을 거쳐온 수하들을 치하하였다.
“수고들 하였네. 내 미리 음식들을 준비하라 하였으니 식사들부터 하시게. 내일 이른 시간부터 움직여야 하니 그동안 휴식을 취하도록 하게.”
곧 400명의 병력은 따뜻한 음식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고, 테리는 야안에게 자신들이 가져온 물건들을 보고하고, 유토 산맥을 넘어서며 만들어낸 지도들을 꺼내어 야안에게 바쳤다.
지도는 정밀한 수준이었고, 곳곳에 몬스터들이 보였던 곳이 표시되어 있어 앞으로의 행로에 크게 도움이 될 듯했다.
“대단하다. 이런 것을 만들려 했다면 지난한 일이었을 것인데.”
야안의 치하에 테리는 고개를 조아렸다.
“아닙니다. 한스에게서 지도 제작법을 배워놓기는 했으나 익숙지 않은 관계로 많은 시간을 허비해 일정을 늦추어 죄송할 따름입니다.”
테리의 말에 야안은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 일정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안정일세. 자네는 충분히 공을 세웠네.”
그렇게 말하던 야안은 무엇을 상으로 줄까 고민하다, 이내 그의 검을 봐주기로 했다. 테리는 스승이자, 속으로는 주군으로 여기고 있던 야안이 자신의 검을 봐준다 하자 쑥스러워하면서도 들뜬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이내 평소 궁금하던 검의 무리에 대해 묻기 시작했고, 야안은 잠시 생각하다 테리에게 자신이 가르쳐준 이십사수검법과 기본 검식을 펼쳐보라 하였다.
그 말에 테리는 설레는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며 검을 들어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검은 그간의 실전들을 통해 중급 유저와 상급 유저의 경계선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검에는 중급 유저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자리하고 있었다.
야안은 테리가 펼치는 검에서 본래 타고난 힘이 대단하고 머리가 명석하며 근기가 있는 만큼 여러 가지를 시도했다는 흔적들을 발견하였다.
잠시 그것들의 흔적들을 통해 어떻게 지도할 것인지 길을 찾아낸 야안은 검식을 마친 테리에게 말했다.
“천천히 검을 펼치되 마나 운용은 지금보다 반 배가량 빠르게 운용하여라.”
그 말에 테리가 이십사수검법을 펼치려 준비를 하자 야안이 고개를 저었다.
“그 검법은 지금 무리다. 기본 검식으로 바꾸어라.”
이내 야안의 충고대로 테리는 이십사수검법의 기수식을 접고 기본 검식인 삼재검법과 팔방검법을 펼쳤다.
그리고 그는 이내 왜 야안이 이십사수검법은 지금 무리라 하였는지 알 수 있었다. 마나 운용을 반 배 빠르게 하자 손발이 어지러워 제대로 된 검법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차라리 그 마나 속도에 맞게 검을 빠르게 펼친다면 큰 어려움이 없으련만, 검은 느려지고 마나 속도는 빨라지니 테리의 몸은 점차 통제하기 어려워 크게 갑갑함을 느껴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흐르고, 두 시간 흘러 계속 삼재검법과 팔방검법을 펼치던 테리는 불현듯이 깨달음을 얻었다. 그렇게 머리는 멍해지는 가운데 마치 제 몸이 아닌 것같이 몸은 검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테리는 잠시나마 스스로 몸을 관조하다 깨어났는데 그 관조 이후 그는 예전과 차원이 다른 마나의 힘이 검에서 뻗어 나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중급 유저까지는 마나를 길게 둘러 움직여 소모되는 부분이 많았다면 상급 유저에서는 마나의 길이 짧아져 소모되는 부분이 적게 되어 본래의 마나 힘을 활용하게 되면서 일어나는 변화였다.
테리는 그 변화에 희열에 떨다, 야안의 말에 정신이 들었다.
“이제야 제대로 이십사수검법을 펼칠 기반을 닦게 되었구나. 이제 기본 검식을 거두고 이십사수검법을 펼쳐보아라.”
야안의 말에 테리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십사수검법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과연 테리의 검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조금 전만 해도 그저 날카로운 것이 다였다면, 이제는 날카로움 속에 거암의 무거움이 자리해 부딪히는 모든 것을 찢어버릴 듯했다.
이 같은 무거움이 실린 검은 익스퍼트에 들어선 자들도 부딪히기 꺼리는 것이라 익스퍼트를 상대할 때 상급 유저가 있고 없고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야안은 테리에게 상급 유저에 오른 것을 크게 축하해 주며 앞으로 테리가 걸어야 할 길을 충고해 주었고, 테리는 야안의 말을 한마디라도 놓칠까 귀를 기울였다.
테리는 배운 바를 마음속으로 되새기다 곧 감사의 말을 올리고 야안의 천막을 나섰다.
다음 날, 새벽이 오기 전에 배식을 시작한 피난민들은 배식 과정에서 열 군데로 나누어졌고, 해가 뜨기 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무 대의 마차가 늘어난 덕분에 체력이 약한 이들을 더 태울 수 있었기에 전보다 빠른 움직임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