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78화
유토 산맥에 대한 지도를 필사하여 다른 조들에 나누어 주었는데 그 지도 덕분에 어디에서 언제 쉬는가를 미리 정할 수 있게 되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전령이 오고 가는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또한 랫톨의 피를 바른 약식 목책으로 중소 몬스터들의 기습이 줄어들었는데, 중간에 자경단 열일곱 명과 검사 세 명이 목책을 옮기다 독에 중독되어 크게 고생을 하기도 했다.
이후 오크 가죽을 몇 겹으로 감싸 목책을 옮기는 방법으로 바꾸었고 그 뒤부터는 랫톨의 독에 중독된 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유토 산맥의 중간을 넘어서면서 중소 몬스터들을 상대할 일이 줄어든 대신 대형 몬스터들이 간혹 나타나 곤혹스럽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자경단 열여덟 명이 죽었고, 용병단 스물한 명이 부상을 당하고 세 명이 사망했다.
또한 대형 몬스터의 살기에 노출된 피난민들이 자리를 이탈하여 죽은 게 200명이나 되었는지라 많은 이들을 슬픔에 잠기게 하였다.
그런 크고 작은 사건들을 겪으며 어느새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야안은 근 넉 달이 지나 초가을을 맞이하는 때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늦은 저녁이라 석양에 붉게 물든 마크 성을 바라보던 야안은 이제 두어 시간의 거리를 남기고 피난민들을 독촉했고, 피난민들도 드디어 그 길고 힘겨웠던 여정이 끝이 난 것에 크게 기뻐하며 어느 때보다 가벼운 걸음을 움직였다.
마치 지평선을 보듯이 마크 성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의 행렬은 끝을 모르고 계속 이어져만 갔다.
* * *
가을, 가을이다.
금빛 물결 속에 메뚜기들이 뛰어다니고, 철모르는 어린아이들은 이리저리 웃음을 흘리며 동네를 뛰어다닌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이 수확하는 농부들의 땀을 말렸고, 저 하늘에는 철새들의 울음소리가 요란했다.
1년 중 가장 바쁜 날이며 별다른 수익이 없는 시골 영지로서는 가장 기다리던 계절이기도 하다.
“아바, 아바.”
언제 깨어났는지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에 야안은 아들의 볼을 살짝 만지다 다시 가슴에 안았다. 아빠의 품속이 좋은 듯 잠시 꿈틀거리던 아론이 미소를 머금었다.
야안은 잠시 그런 아들의 엉덩이를 토닥이며 선선한 가을바람을 맞이하며 시찰을 하다, 식사 준비가 다 끝나려 할 때쯤 아들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멜리나는 식사 시간에 딱 맞춰 들어서는 야안에 혀를 내둘렀다.
“참 어떻게 부르러 가기도 전에 오는지 그것도 재주야.”
그녀의 말에 마리가 웃음을 흘렸다.
“호호, 그러고 보니 야안이 식사 때는 한 번도 늦은 적이 없구나.”
“어머니도 참.”
두 여인의 농담에 베론 가한은 담배 파이프를 물며 미소를 머금다 아들에게 말했다.
“그래, 다행히 올해는 작년보다 더 수확량이 좋은 것 같더구나.”
아버지의 말에 야안은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작년보다 15% 정도가 더 증가했어요. 이로써 본 주민들의 부담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야안이 두 달 전에 데려온 피난민들로 인해 영지민들이 내야 할 세금은 본래 세금보다 30% 정도 더 늘어나게 되었다.
그 같은 사태에 영지민들은 크게 불만을 품었으나, 지난달 한스가 벌인 일의 여파가 아직 남은 터라 누구도 소리 높여 말하는 자는 없었다. 야안은 그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려야 했다.
영지민들이 내야 할 세금이 기존 세금에서 30%가 더 늘어났다 하여도, 2년 전 그때보다는 사정이 나았기에 야안은 스스로 그것을 위로로 삼아야 했다.
아직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큰 짐을 지고 있는 아들의 모습에 베론 가한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너는 지금 잘하고 있다. 나는 이번 일로 너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단다. 스스로 의심하지 마라. 너는 그 누구보다 주신 아리스 님의 뜻을 받들고 있다.”
“네, 고마워요, 아버지.”
자신의 부담을 줄여주려는 아버지의 마음을 느꼈던 탓에 야안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음식이 차려지고 멜리나는 칭얼거리는 아들을 달래며 이가 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이나 소젖에 부드러워진 빵을 먹였다.
응얼거리며 입가에 음식물 묻히며 잘도 먹는 아론 덕에 야안뿐 아니라 그의 부모님과 멜리나도 즐거움이 가시질 않는다. 멜리나는 헝겊으로 아들의 입가를 닦으며, 등을 어루만지며 소화를 시켰고 야안은 그런 아내가 기특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들이 배가 불러 더 이상 먹기 싫다는 의사를 표하자 그제야 먹는 둥 마는 둥 하던 식사를 시작했는데, 야안은 일부러 아내와 같이 먹기 위해 천천히 식사한 터라 심심해하는 아들을 달래며 같이 식사를 마쳤다.
음식을 치우고 가벼운 차를 한잔하며 소소한 이야기들을 나누다, 배가 불러 잠이 든 아들을 요람에 내려놓았다.
시간이 흘러 해가 완전히 저물자, 야안은 아기를 데리고 옆집으로 건너갔다. 아론이 입가에 흘린 침을 닦아주며, 자신의 방에 있는 요람에 내려놓은 야안은 아내의 투정 섞인 애교를 받으며 촛불을 껐다.
지난 두 달간 마크 영지는 많은 일이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2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을 받아들이는 일이었고, 그로써 시작된 영지 개혁과 관련된 공사들이었다.
한스가 생각한 것보다 터를 잘 닦아놓았던 탓에 스물세 개에 달하는 장소에 2만 명에 달하는 피난민들이 흩어져 임시로 천막을 쳤다.
야안은 가장 시급한 것이 그들이 살 집을 만드는 것이라 판단했다. 마크 영지는 외지인 만큼 겨울이 혹독한 탓이었다.
자경단을 제1군단으로 만들고 챈들러를 수장으로 삼았고, 야안이 키우고 있던 검사 중 하급 유저 이상의 실력을 지닌 이들을 제1별동대로 삼았고 아직 실력이 미치지 못하는 검사들은 제2별동대로 나눈 뒤 1, 2조장에게 각 부대장의 자리를 주고 테리에게는 공식적으로 별동대장직을 내주었다.
이후 그동안 임시적으로 피난민 중에서 뽑았던 1,000명의 장정들을 제2군단으로 삼은 뒤 훈련을 시작했다. 이번 겨울에 몬스터들의 영역을 침범할 생각이기에 하는 조치였다.
그렇게 편성된 현재 주력인 제1군단 500명과 별동대 600명을 동원한 야안은 한스가 약식 목책을 쳐두었던 곳을 중심으로 몬스터들을 사냥하며 영역을 넓혔다.
야밤에 야안이 먼저 대형 몬스터들을 추살하였고, 낮에는 군대가 밀어붙였는데 그동안의 여정을 통해 경험을 쌓은 터라 별다른 피해 없이 한 달 보름의 시간 동안 자신이 생각한 범위까지 땅을 넓힐 수 있었다.
그렇게 넓힌 땅에 피난민들을 동원하여 힘이 없는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돌을 고르게 하여 돌을 모았고, 체력이 많이 회복된 장정들과 소년들은 벌목을 하여 집을 지을 자재를 만들게 했다.
이후 무성한 수풀에 불을 놓아 화전을 하였고, 도로를 공사 중이던 농노들을 돌려 그동안 넓힌 영역에 임시로 목책을 세웠다.
목책을 세우는 동안 군대를 3분대로 나누어 보초를 서게 하였다. 목자재가 어느 정도 확보되자 장정들에게 목책을 세우게 하였는데 확실히 일꾼들이 많아지자 만드는 시간이 줄어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일을 끝낼 수 있었다.
그 많은 일을 끝내는 데 두 달이라는 시간이 넘게 걸렸는데, 야안은 아직 이 확보된 땅이 불안한 곳이라 이곳에 경험이 많은 1군단의 부대장을 맡은 칸타에게 300의 군사를 내주어 지키게 하였다.
이후 피난민들을 동원해 스물세 군데에 새로 마련한 피난민들의 마을에 집을 짓는 공사를 시작했다.
그동안 토벌을 통해 집을 지을 주자재들을 확보하였기에 재료가 부족하지는 않았다.
야안은 이번 공사에 참여하는 장정들에게 한 달에 2실버에 해당하는 식량과 헌 천들을 내어주었고, 그 밖에 소소한 일거리를 맡게 된 여인들과 어린아이에게는 50브론즈에 해당하는 식량을 내줬다.
영주민들 또한 이 일에 참여하였는데, 이번에 올라간 세금 때문이었다. 10대 후반의 소년들도 이 공사에 참여하여 공사 기간을 앞당겼다.
피난민들은 지금 짓고 있는 집들이 자신들이 살 곳임을 알기에 누구도 요령을 피우지 않고 감독관의 지시를 잘 따랐다. 그 덕에 시작된 지 보름도 되지 않아 10%에 달하는 기초 공사를 끝낼 수 있었다.
야안은 이렇게 마련된 집들을 이후 10년간 세금의 20%를 더 추가하여 값을 치르기로 하였다.
확실히 인구가 많으니 무슨 일이든 동원되는 인부의 숫자가 많아 그 진행 속도가 빨랐다. 주택 공사가 끝이 난 후 다음 도로 공사 확장과 겨우내 군사들을 동원해 영지 확장 이후 성을 짓는 등의 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나 며칠 전에야 오랜만에 여유가 생긴 야안은 집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사랑스러운 아내의 옆에서 단잠을 이루었던 야안은 이른 새벽 아들의 우는 소리에 잠이 깨었다.
가보니 배변을 한 것이라 마른 천으로 오물을 닦고 옷을 갈아 입혀준 뒤, 아들의 등을 도닥이며 잠을 재웠다. 그렇게 한참 동안 아들을 달래어 요람에 눕힌 야안은 어제 밤새 괴롭혔던 탓에 깊은 잠에 빠진 아내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 집을 나섰다.
가을이라 새벽의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하지만 주위 환경을 타지 않는 야안이었기에 새벽의 미명 속을 가로지르며 자신의 수련장이 된 폐쇄된 던전에 들어섰다.
야안은 그곳에서 운기행공을 한 뒤 인벤토리를 열어 공간 주머니를 꺼내어 중급 마정석과 미스릴을 꺼내어 그간 시간이 없어 만들지 못했던 파의 주머니를 만들기로 했다.
벼락 맞은 소나무의 조각에 소켓을 파고 미스릴 덩어리에서 실을 뽑아내던 야안은 예전 짰던 마법진 그대로 만들기로 했다.
이번에 만드는 파의 주머니는 전보다 만드는 시간이나 마나 활용 등 여러 면에서 쉬웠는데, 두 번째로 만드는 물건이란 것도 있지만, 초감각에 의해 룬 조각의 습득률이 향상된 것이 주된 이유였다.
[룬 조각
습득률 : 17.052%
초감각으로 룬 조각이 더욱 정교해졌다. 그 덕분에 본신의 능력에 맞는 마법 물품을 무리 없이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습득율이 높아질수록 룬 조각의 완성도가 높아진다.
*훌륭한 재료를 바탕으로 그 재료 이상의 제품을 만드는 경우 습득률이 대폭 높아질 수 있다.]
초감각 습득 이전 11%에 달했던 룬 조각 습득률이 6% 이상이 올라선 것이다.
예전 긴 시간 끝에 노력과 운이 더해져 만들었던 카의 조각은 당시 1.2% 향상시킬 수 있었는데 이후 조금씩 여러 마법 물품을 만들었지만 변변찮은 재료와 부족한 시간으로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했기에 이 변화를 야안은 크게 기뻐하였다.
한나절이 넘는 시간을 투자하며 크게 심력을 소모한 뒤에야 겨우 완성할 수 있었던 파의 주머니를 이제 세 시간도 되지 않아 끝낼 수 있었다.
완성된 파의 주머니에 뇌전의 정화를 넣은 뒤 아내에게 부탁해 미리 만들어 두었던 헝겊 주머니 안에 부착했다.
지난 몇 달간 신경 쓸 일이 많아 마음이 어지러웠던 야안이었으나, 이제 다시 뇌전의 정화를 몸에 지니게 되었으니 그 사실만으로도 마음의 부담을 줄어드는 듯했다.
이후 야안은 파의 주머니를 만드느라 소모된 마나를 채우기 위해 운기조식을 한 후 아침 식사를 준비할 시간에 맞춰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다른 이들에게는 바쁘기 그지없는 추수 동안 동원되는 인부의 부족으로 야안이 할 수 있는 일이 줄어든 덕분에 가족들과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야안은 그렇게 가족들과 안락한 시간을 보내며 중간 중간 시찰을 나가거나 영지의 간단한 서류들을 작성하는 등의 일을 하며 이후 해야 할 일들이 차질이 없는지 몇 번이고 검토하기도 했다.
시간이 흘러 추수가 끝이 나기 무섭게 야안은 계획된 일을 진행했다.
현재 영지민들이 내야 할 세금은 수확량의 50%에 달했는데, 야안은 이 밀을 타지에 팔고 옥수수나 사탕수수 같은 값싼 곡류를 대신 사들이기로 했다.
그 과정에서 이번 윌 영지에서 가져온 금속들을 내보이며 여러 상인들과 교류를 하기로 했는데, 밀정들을 보내어 알아낸 결과 요즘 상인들 사이에서 새롭게 떠오르는 상단 중 호넬 상단이 있음을 알고 크게 반겼다.
호넬 상단의 호넬은 평소 상인들에게 많은 인덕을 쌓았던 터라 따르는 상인들이 많았고, 그 덕분에 거래가 순조롭게 진행되어 이번 전쟁에서 많은 이득을 얻어 준대상인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야안 또한 호넬의 그 인자한 인품을 잘 알기에, 그라면 이 금속의 가치를 제대로 쳐주며 그 과정에서 많은 상인과 안면을 익힐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다.
큰 거래를 하는 것이라 안면이 있는 야안이 직접 움직여야 했지만, 석 달 뒤에 있을 몬스터 토벌을 위한 준비와 성벽 공사, 주택 공사 등이 남아 있는지라 사람을 상대하거나 상재에 재능이 있는 론에게 그 일을 맡기기로 했다.
론은 하인으로부터 야안이 부른다는 이야기를 듣자 펜대를 바로 놓고 다급히 야안의 집무실로 움직였는데, 그 태도로 론은 야안을 예전처럼 상관이나 스승으로 대하는 것이 아닌 생명의 은인 이상으로 대하는 변모된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그 같은 변화는 평소 론의 형인 쟌의 사정을 크게 안타깝게 여겼던 야안이 그의 망가진 머리를 고쳐준 뒤부터였다.
두 달 전. 론은 야안이 이번에 외국에서 얻은 약으로 형을 치료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말하자, 잠시 이해할 수 없는 듯 한참이나 말없이 야안을 멍청하게 쳐다 보다 이내 눈물을 뚝뚝 흘렸다.
만약 치료가 되지 않는다 해도 마치 아버지처럼 자신을 배려하는 야안에 크게 감명을 받은 것이다. 야안은 그런 론을 달래며, 곧 그의 형을 성으로 불러들였고 여전히 멍청한 눈빛으로 아둔하게 인사하는 그를 안타깝게 여기며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치료는 야안이 예상한 것보다 험난했다.
머리는 다른 곳보다 복잡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신성 마법인 리젠으로도 쉽사리 손대기가 어려운 점이 많았다.
그런지라 첫날은 뇌세포가 살아나면서 생기는 괴리감에 쟌은 크게 몸부림을 쳐야 했다. 야안은 다음 리젠을 펼칠 수 있는 시간까지 그를 편하게 하려 미리 준비한 마취제를 복용시키며 힐과 마케를 수시로 펼치는 등 그를 안정시키기에 바빴다.
그다음 날이 되어 다시 리젠을 펼칠 수 있게 된 야안은 그제야 겨우 그 상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었다. 머리가 찢어질 것 같은 고통에서 벗어나게 된 쟌은 그로부터 5일을 내리 잠들어 주위의 걱정을 샀다.
크게 걱정하는 론에게 야안은 이 현상이 몸이 좋아지면서 생기는 명현 현상임을 알려주어 그의 불안을 덜어주었다.
야안의 장담대로 쟌은 6일째 되던 아침 그동안 잠이 들었던 것이 거짓인 것처럼 그 어느 때보다 건강한 모습으로 일어섰다.
오랫동안 악몽을 꾼 듯 머릿속이 멍해서 머리를 재차 흔들던 쟌은 잠시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멍한 표정을 보이다, 어린아이처럼 서럽게 눈물을 흘리고 있는 론을 멍하니 바라보다 물었다.
“너는 누군데 이렇게 우는 거니. 그러고 보니 낯이 익구나. 그래, 마치 너는, 너는…… 아!”
눈앞의 얼굴이 자신이 알고 있던 어린 시절의 론의 모습과 겹치는 순간 쟌은 한겨울 얼음 호수에 빠진 듯 강렬한 충격과 함께 지난 시간을 떠올릴 수 있었다.
욕심을 부리다 감나무에 떨어진 이후의 일들을 기억해 낸 것이다.
바보처럼 부지런히 일하면서도 멸시당하며 형편없는 대가에 불만 없이 크게 감사하던 일. 죄책감에 빠져 울고 있는 동생 앞에 바보처럼 울던 자신.
어린 여동생이 동네 애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것을 그저 말없이 바라보던 자신. 자신에게 들키면 자신이 슬퍼할까 봐 이를 악물며 눈물 밤을 지새워야 했던 론.
‘그래, 나는…… 나는 내 동생에게 정말 못 할 짓을 하였구나.’
쟌은 떨리는 손을 론의 얼굴에 가져갔다.
론이 흘리는 뜨거운 눈물이 그의 손아귀를 타고 흘러내렸고, 그는 뿌옇게 흐려지는 이제 성인이 된 동생을 바라보며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론, 론. 아…… 이, 이 멍청한 형 때문에…… 고, 고생이 많았구나.”
그는 론보다 더 크게 눈물방울을 뚝뚝 흘려대며 론을 바라보았다.
예전과 달리 보통 사람들처럼 의사를 표현하는 쟌의 모습에 론은 너무 기뻐 눈물을 흘리면서도 크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형, 형, 울지 마. 이렇게 기쁜 날에 왜 그렇게 우는 거야. 이럴 때는 웃는 거야. 나처럼 말이야.”
“크헝헝, 미, 미안해. 엉엉, 미안하다.”
쟌은 동생의 바람대로 해줄 수 없었다. 그저 크게 울음을 터뜨리면 간간이 미안하다는 말로만 자신의 심정을 표현할 뿐이다.
론은 쟌이 자신에게 계속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뇌자 론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형이 왜 미안해하는 거야. 내가 미안한 일이야. 내가, 내가 미안해, 미안해.”
론과 쟌은 마치 버릇처럼 서로 자신이 미안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하며 마음속의 응어리를 풀어놓았다. 그 보기 드문 뜨거운 형제애에 이를 바라보던 주위 사람들도 눈가를 훔치곤 했다.
특히 평소 론의 사정을 잘 알고, 여러모로 신경을 써주다 어느 순간 그를 연모하던 티애는 말없이 뒤에서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그녀의 옆에 있던 한스는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눈을 질근 감다 방을 나섰다.
이후 쟌은 며칠 동안 몸을 요양하다, 야안의 추천을 받아 경비대에서 일을 얻을 수 있었다. 이는 리젠을 통해 그간 고생했던 몸 상태가 호전되어 예전의 실력을 어느 정도 되찾은 덕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