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84화
26. 시장
그렇게 지원한 자가 400명이었는데, 그들의 가족 등을 생각한다면 야안이 처음 구상한 것보다 두 배 이상에 달하는 대규모의 마을을 형성할 수 있다.
야안은 생각보다 큰 마을을 건설하게 되었지만, 이 점에 대해 오히려 반기는 입장이었다. 비록 초기 비용에서 상당한 지출이 있겠지만, 그 비용은 토벌전이 예상보다 일찍 끝나게 되어 남게 된 비용으로 어느 정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대규모의 마을이 건설되면 그곳을 기반으로 야안이 생각한 것처럼 여러 마을이 자연스럽게 형성이 된다.
그렇게 되면 이번에 편입된 영지를 활성화하는 데 걸리는 시일을 대폭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야안은 잠시 생각하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지 일을 맡은 한스에게 이번 일을 맡겼다.
퀘스트로 영지를 벗어나게 될 일이 많은 야안으로서는 한스에게 제 일을 대신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했다.
지난 상행에서 한스는 능력을 보여 주었기에 야안은 자신이 어느 정도 지원해 준다면 이번 일 또한 한스가 해낼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야안이 그렇게 이번 마을 건설에 대한 지원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고민하던 중, 하인에게서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되었다.
바로 한 달 전 론에게 보낸 서신에 대한 답변이 온 것인데, 전령에게서 받은 서신에는 그만한 기량을 지닌 자를 찾았다 하였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이 있으니 한때 도박에 빠져 부패한 일로 인해 몇 번이나 감옥을 갔다 온 자라 했다.
그것은 일을 시작하는 단계에 있는 지금 상당히 꺼릴 구석이었지만 야안은 서신을 읽으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번에 얻게 된 이카스티스를 시험할 아주 좋은 기회였다.
처음에는 예전에 부패를 저지른 관리들에게 사용하여 복직시킬까도 생각했으나, 이내 현재 공포정치를 하는 상황과도 맞지 않고 이는 좋은 본보기가 아니기에 생각을 바꾸었다.
최소한 몇 년의 형벌을 더 내린 뒤에야 반성의 기미가 보이는 대상에게 이카스티스를 펼쳐 복직을 시키는 것이 절차에 맞았다.
정치에 덕을 보여야 하는 부분도 있으나, 절대 바뀌어서는 안 되는 기준을 세우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했으니.
야안은 서신에 간단한 안부 인사와 그렇게 하라는 답변을 써서 전령에게 건네주었다.
한스는 스승님이 자신에게 내어준 마을 건설에 대해 크게 고민에 빠졌다. 스승님이 자신을 믿어주는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나 과연 자신이 이 일을 그분의 기대에 맞게 해낼 수 있을지 고민이었다.
그렇게 걱정하던 그였지만 이미 그의 머릿속에는 이미 밑그림이 다 그려진 뒤였다. 야안이 건네준 자료를 바탕으로 그의 지원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 그는 하루 몇십 번이고 수정을 거치다 이틀이 지난 뒤에야 결정을 내렸다.
한스는 머리를 긁적이다 이번 일을 돕게 된 타일과 코른, 티애에게 그간 정리한 내용을 건네주었다.
타일과 코른, 티애는 한스가 스승님의 숙제를 해결한 뒤로 예전과 달리 상당 부분의 일을 맡게 되면서, 일이 많이 줄어들어 요즘 시간 대부분을 야안이 그들에게 맡긴 인재를 키우는 데 소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제자들을 키우면서 새삼 스승님의 능력에 감탄하였는데, 이는 그들과 자신이 상당히 궁합이 맞는 것도 있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기재라는 것 때문이다. 자신들도 마치 쓱 보는 것만으로 자신도 모르던 재능을 발굴했으니 그 안목만큼은 놀라울 정도이다.
최근 들어 현재 영지 내의 일들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며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모의 토의를 했는데 그 내놓는 생각이 상당히 참신했다.
나이가 어려 미숙한 점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차차 배워나가면 고칠 수 있는 점들이라 생각할 때 다들 훌륭한 관리로서의 재목이다.
요즘 들어서는 따로 가르치지 않아도 스스로 부족한 부분들을 찾아 공부하고 있기에, 상당히 여유로워진 터라 한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을 반겼다.
타일과 코른, 티애는 자신에게 자료를 건네주고는 ‘나 잠시 잘게.’라고 말하는 한스가 좀 얄밉기는 했지만 이내 천진난만하게 코를 골며 자는 모습에 그저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한스가 건네준 마을 건설 계획들을 살피며 그들은 웃음이 사그라졌다. 자신으로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할 참신한 내용과 혁신들이 담긴 것이다.
그 내용이 하나같이 너무도 세심하게 분류되며 체계적이라 마치 일을 시작하게 되면 반드시 그렇게 될 것 같았다.
야안이 내어준 지원금을 여러 방향으로 회전하여 쓰는 터라 그 이상의 방법은 없을 듯했다.
그들은 보는 내내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점차 계획서를 넘기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약식으로 만들어낸 계획서라 내용은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한스가 복수면에서 일어났을 때쯤 내용을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음! 잘 잤다.”
그러며 하녀들에게 받은 과자를 바삭거리며 입에 쑤셔 넣던 한스는 말없이 다시 계획서를 읽는 티애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말을 꺼냈다.
“그래, 어때. 일단 그렇게 일을 진행할 생각이긴 한데. 부족한 점이 어떤 게 있을 것 같아?”
그 말에 세 명은 모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더 이상 보탤 것은 없는 것 같은데. 괜히 의견을 보태었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될 것 같아.”
“응, 나도 그래. 정말 이걸 이틀간 너 혼자 짠 거란 말이야?”
“와! 역시 한스네. 어떻게 이런 계획을 혼자 뚝딱 끝을 낸 거지?”
티애가 마치 간단하게 끝을 냈다고 하는 것 같아 한스는 낮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뚝딱 한 게 아니야. 얼마나 힘들었는데.”
투덜거리는 한스가 귀엽다는 듯 볼을 꼬집으며 달랬다.
“아, 네. 알았어요, 천재 씨. 자자, 그만 투덜거리고 이제 상세하게 일을 진행하자.”
한스는 티애가 꼬집은 볼을 매만지다 약식 계획서가 아닌 본래의 모든 내용이 담긴 계획서를 꺼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들도 수재 정도는 되는 머리인지라 한스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들었기에, 그 계획에 따라 역할을 나누었다.
반나절 가량 회의를 끝을 낸 한스는 이번에 결정된 역할들을 마저 써내며 검토를 하였고, 타일과 코른은 이번에 정한 자기 일을 알아보기 위해 한스의 집무실을 나섰다.
티애는 현장에 나가는 것보다는 사무적으로 하는 일이 많았기에, 문서를 검토하는 일들이 많아 한스에게 간간이 물으며 일을 진행했다.
한스는 티애의 질문에 움찔거리다 이내 무심한 말투로 대답했다. 어느새 시간이 흘러 그의 창 너머로 노을이 지는 것을 보던 그는 노을에 물든 티애의 모습을 훔쳐보았다.
긴 갈색 머리에 비취색의 큰 눈, 그은 피부톤이 자리한 그녀의 얼굴에 노을이 비치는 모습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한스는 잠시 숨이 막혔다.
그녀는 흘러내리는 머리를 귀 뒤로 넘기다 이내 한스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렸다. 한스는 깜짝 놀라, 황급히 시선을 돌리며 오래전에 끝낸 문서들을 보는 척했는데 티애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와! 우리 한스 정말 예쁜데. 머리만 길면 동화 속에 나오는 공주님이라 해도 믿겠어.”
그러며 자신의 어깨를 툭 치는 그녀를 한스는 질린 눈빛으로 바라보았고, 티애는 그런 한스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쿡쿡거리며 긴 웃음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웃음소리에 한스는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머금었다.
‘이유야 어쨌든 그녀가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니.’
어느 늦은 겨울 저녁, 한스는 그렇게 조금씩 그녀를 맘에 두고 있음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 * *
덜커덩. 덜커덩.
요란한 소리를 내는 짐을 가득 실은 마차 한 대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다섯 필의 말을 탄 검사들이 마크 영지에 들어섰다.
그들은 입구에서 만난 경비병에게 야안의 직인을 보여주었고, 경비병들은 이들이 저번 경비대장이 말한 그들임을 알고 서둘러 문을 열어주었다.
성문을 열고 들어선 풍경은 색달랐다. 시골 영지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대로는 잘 닦여 있었고, 시골의 겨울 모습이라 보기 어려울 만큼 사람들은 활기찼다. 지난번 내린 눈은 한쪽으로 깨끗하게 치워져 길을 오고 가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검사들은 오랜만에 오는 고향에 기분이 좋은 듯 절로 휘파람을 불어댔다. 도회지 생활도 좋았지만, 역시 마음이 가는 것은 고향이다.
힘들고 절망적인 일들도 있었지만, 그것도 시간이 지나니 추억이 되었다. 그들은 오가다 가끔 아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그렇게 기뻐하는 검사들과 달리 그들이 호위하는 마차 안의 중년 사내는 내내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다.
머리는 반쯤 벗겨졌고, 오랫동안 술을 마셔 주독이 있는 듯 코는 빨갛게 익어 있었다. 다소 왜소한 체격에 술배가 나온 그의 입은 쉬지 않고 투덜거림을 멈추지 않았다.
“아, 이 파머 님이 왜 이런 듣도 보도 못한 촌구석으로 와야 하냐. 빌어먹을, 겨우 감옥에서 빠져나가게 해준다고 그런 계약서를 쓰게 하다니. 이런 사기꾼 같으니라고. 이런 촌놈들과 같이 있어야 한다니 미치겠군.”
그의 투덜거림에 마차 한구석에 왜소한 체격으로 몸을 웅크리고 있던 작은 소녀는 움찔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그런 그녀의 눈빛을 느꼈던지 파머는 그녀의 몸을 발로 걷어차며 소리쳤다.
“빌어먹을, 뭘 쳐다보는 거야, 이 미친년아. 어미 잡아먹고 태어난 년이 이제 내 앞길도 망치는구나, 이 개 같은 년아.”
소녀는 파머의 딸로 이번에 계약에 포함된 조건 중 하나였다. 그녀는 2년 전 도박 빚에 팔려 종살이를 하다 론이 그 사정을 알고 다시 사들여 계약 조건에 넣었다.
귀족가의 종살이는 하녀 이하의 취급을 받기에 아직 어린 소녀가 감당할 만한 일이 아니었기에 이를 불쌍하게 여겨 론이 빼 온 것이다.
스승님이신 야안이라면 이 불행한 수렁에 빠진 그녀를 건져낼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차 안이 시끄러워지자, 검사 중 한 명이 마차를 검집으로 치며 소리쳤다.
“조용히 하게. 영주성이 다가오니 말이야. 앞서 이야기했지만, 만약 그분께 실례를 한다면 내 목숨을 걸고 자네의 목을 쳐버리겠네.”
으름장을 내는 검사의 살기는 상당히 지독한 것이라 파머는 이내 기가 죽어 힘들어하다 간신히 말을 꺼냈다.
“아, 알았네.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있겠는가?”
그의 답변에도 검사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한참을 눈살을 찌푸리다, 이내 다시 행렬에 맞춰 말을 몰았다.
덕분에 아버지로부터 더는 폭행을 당하지 않게 된 소녀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다 다시 잔뜩 웅크려 앉았다.
그들은 한 시간을 더 움직인 뒤에야, 영주성에 도착했는데 파머는 그 요란한 공사들에 비해 허름한 영주성을 바라보며 투덜거렸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이게 뭐야. 도회지에 흔한 저택도 이것보다 나을 것 같군. 이런 곳에서 살아야 한다니.”
조금 전 검사에게 경고를 받아 그런지 그의 투덜거림은 혹시나 마차 밖으로 들릴까 싶어 한층 낮은 목소리였다.
마차는 그렇게 10여 분을 움직이다 멈춰 섰다.
이후 성문에서 미리 온 이들에게 소식을 들었던지 나이 어린 관리인 한 명이 하인들과 함께 모습을 보였고, 그는 검사들에게 작게 인사를 하고는 파머를 데리고 움직였다.
그의 딸 모니카는 어쩔 줄 몰라 하다, 이내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동네 강아지처럼 졸졸 따라오는 그녀에게 파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려 했으나, 이내 검사의 경고가 생각나 목을 움츠리며 관리인을 따라갔다.
영주성에 들어서면서 영지 안쪽의 연무장에는 훈련 소리가 끊이지 않았는데, 창 너머로 그 모습을 바라본 파머는 검에 문외한인 자신이 보아도 대단한지라 더욱 기가 죽었다.
‘뭔 놈의 시골 영지가 이리도 살벌한 것이냐. 그 검사들도 그렇고. 이곳에서 잘못하다가는 명줄대로 살기 어렵겠군.’
그는 감옥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계약서를 쓴 것이 잘못이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그 지독하게 부려 먹던 노역 일을 기억해 내고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주독과 엉망으로 일그러진 생활 탓에 망가진 몸으로 더 이상의 노역을 하였다가는 일에 지쳐 죽었을 것이다. 죄인의 신분이라 치료는커녕 일을 안 한다고 매질만 하니, 이 추운 겨울 그곳에서 몇 개월을 못 버틸 것이 분명했다.
그는 자신의 팔자가 왜 이렇게 사나운가에 대해 불만을 토해 놓다 관리인의 말에 고개를 들었다.
“여기가 총관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을 하더니 소녀, 모니카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나와 함께 가자. 방을 내줄 테니. 일단 그곳에서 쉬려무나.”
상냥한 그의 말씨에도 모니카는 차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조아리며 작게 대답했다.
“네…… 네, 알겠습니다.”
바들바들 떠는 모니카에 그는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 이내 총관님에게 파머가 왔음을 알리고 그를 들여보냈다.
파머는 겁을 잔뜩 먹은 터라, 미처 총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고개를 조아리며 들어섰는데 먼저 인사를 건네는 총관의 목소리에 놀라움을 보였다.
“이런, 몸이 많이 상하셨군요. 저는 현재 마크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총관 베론 야안이라 합니다. 론에게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파머는 자신의 예상보다 너무 젊은 목소리라 놀라 고개를 들었는데, 이제 스무 살쯤 되어 보이는 총관의 모습에 속으로 매우 놀라다 이내 허둥지둥하며 인사했다.
“아, 네. 말씀 낮추십시오. 저는 파머라 하고, 예전 힐튼 공작가의 대리석 산맥에서 15년간 근무했습니다.”
그는 말을 하는 내내 겁을 먹다, 어느 순간부터는 몸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고 이내 조금이나마 두려움이 사그라졌다.
그제야 주위의 집무실을 살폈는데 그가 가본 준귀족들의 집무실보다 방은 상당히 넓고 고풍스러운 모습이 있었지만, 실제 쓰는 물건들은 책이나 여러 실생활에 필요한 도구뿐인 것을 알고는 상당히 소탈한 이임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내 야안의 안내로 미리 준비해 둔 차를 마시며 자신의 경력과 대리석 산을 어떻게 운영하여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야안은 그의 설명을 듣는 내내 진실의 눈을 통해 본 정보로부터 그가 생각보다 악행을 저지른 자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그가 살던 마을에 역병이 돌아 가족들과 사별하게 된 그는 그의 삼촌 내에서 얹혀살게 되었다. 그의 삼촌은 술을 마시면 난봉 짓을 하는 망나니였기에,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몸에 멍이 가실 때가 없었다.
그러다 열다섯 살 무렵에 삼촌이 떠돌이와 시비가 붙어 죽고 말았는데, 그는 그때야 집을 나와 나이를 속이고 노역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을 떠돌다 모아둔 돈을 하급 관리인에게 뇌물로 주어 대리석 채광 일을 배우게 되었다. 다행히 손재주가 좋아 인정을 받게 된 그는 점차 경력을 쌓아 관리직을 얻게 되었는데, 그때가 그의 인생에 가장 아름답던 시절이었다.
자신보다 일곱 살이 어리지만, 누구보다 현명하고 아름다웠던 부인을 맞이한 시기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그의 아픔을 잘 보듬을 줄 아는 여인이었고, 그 덕분에 파머는 인생의 참다운 행복을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도 사랑했고, 아름다운 시절을 함께 보냈던 그녀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다.
그와 그녀 사이에 얻게 된 아기가 출산 당일 거꾸로 서버린 것이다. 둘 중 한 명도 장담하지 못하던 때에 그녀는 산파에게 자신은 어찌 되어도 좋으니 아기만은 살려달라 부탁하였다.
다행히 그녀의 뜻대로 아기는 살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별다른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그 때문에, 파머는 진정 절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 가족을 잃었을 때는 죽음이라는 것이 무언지 잘 몰랐다지만, 한때 자신의 어머니이자 누이이기도 했던 부인을 잃게 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의 인생은 그때부터 다시 곤두박질쳐 갔다. 처음 몇 년간은 아기의 모습에서 그녀를 찾아 잘 해주려 노력도 했지만, 그 아픔은 더욱더 깊어져 갔다.
결국, 친우의 꼬임에 넘어가 도박에 손을 댔고, 그때부터 그는 전형적인 부패한 관리가 되었다.
위에서도 그 사실을 알고는 있었지만, 워낙 재주가 뛰어난지라 그저 쉬쉬거리며 정도를 넘지 않는 한 내버려 두었다.
하지만 사기 도박꾼에게 걸려 점차 큰돈이 필요하게 되자 그는 정도 이상의 돈을 받아 챙기기 시작했고 결국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이고 감옥을 오가던 그는 그래도 그 재주 때문에 먹고살 길은 있었는데, 그것도 마지막에 크게 돈을 잃어 딸을 팔고 물건을 빼돌려 돈을 막으려다 결국 걸려 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그러다 론에게 구제를 받게 되었고, 그는 자신이 팔아버린 딸과 함께 이곳 마크 영지로 오게 된 것이다.
야안은 거듭되는 불행과 잘못된 선택으로 크게 꼬여버린 그의 인생을 불쌍하게 여겨, 이카스티스를 펼치기 전 리젠을 펼쳐 그의 지친 육체를 회복해 주었다.
파머는 갑자기 머릿속에서 청량한 바람이 부는 듯하다, 약간의 희열 속에서 놀라울 정도로 몸이 나아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그 같은 편한 상태는 20년 만이라 크게 즐기다 이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일어난 아련했던 무언가를 맞아들이던 그는 크게 괴로움에 몸서리를 쳤다.
“아…… 아.”
그것은 지독한 경험이었다. 마치 끝없는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악몽이었으면 하였다. 그는 지금 순백의 양심이 일어선 상태에서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기 시작했기에 지금 느끼는 심정은 악몽 그 이상의 것을 겪는 듯했다.
삼촌이 죽은 뒤 자신만큼이나 불행했던 어린 사촌들을 버리고 간 일부터, 소소하게 일상생활에서 한 작은 잘못. 이후 도박에서 사기를 친 일이나, 공갈·협박이나 곤란한 인부들에게서 돈을 뜯던 일. 그리고 자신과 아내의 사랑의 결정체였던 딸에게 몹쓸 짓을 했던 일들을 양심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는 내내 비명을 지르며 눈물을 흘렸다.
그의 비명은 야안의 집무실 너머 내내 들려왔지만, 이미 야안이 미리 이야기한 바가 있어 야안의 집무실에 그 누구도 들어서는 이는 없었다.
심적 고통에 그의 육체는 크게 지쳐갔다. 만약 야안이 리젠을 펼쳐주지 않았다면 그는 혼절하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리젠으로 인해 이미 주독을 몰아낸 상태고 몸도 어느 정도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라 건강한 그의 신체는 그 지독한 고통을 내내 견디게 해주었다.
그는 어느 순간부터는 괴로움 속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중얼중얼했는데, 그 중얼거림 속에는 자기가 죄를 지은 이들에 대한 원망도 있었고, 사정을 빌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에 이르러서는 광기 어린 목소리로 크게 사과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이 마약에 중독된 자와 유사했다.
야안은 그 괴로워하는 모습에서 진정 이카스티스의 면목을 볼 수 있었다. 옆에서 바라본 그의 모습만으로도 예전 뱀파이어들이 펼친 질 낮은 매혹 마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고차원적인 마법임을 알 수 있었다.
설명을 보아 알고는 있었지만, 그 회개의 과정은 정말 놀라운 것이다. 고매한 인품의 사람이 한 사람을 바른길로 이끄는 데 아무리 짧게 잡아도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다. 그도 그 대상자가 어느 정도 의지가 있어야지 가능한 일이다.
한데 그 긴 과정을 짧은 시간에 압축했으니 야안의 놀람은 당연하다.
그렇게 파머는 이카스티스에 의해 한나절을 발버둥치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결국 이기지 못해 혼절하고 말았다.
야안은 눈과 코, 입에 묻은 오물 따위를 닦아주고는 자신의 침대에 그를 데려다 눕혔다. 그리고 힐과 마케를 펼쳐 지친 그의 육신의 회복을 도와주었다.
그는 꿈속에도 회개의 과정에 있는 듯 내내 그의 감은 눈에서는 참회의 눈물이 흘러내렸고, 입에서는 진심 어린 사과가 내내 흘러나왔다.
야안은 그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입술을 깨물며 자신에게 이카스티스를 펼쳤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무모한 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