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85화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감히 그것을 겪고 싶지 않을 것이다. 자기 보호로 마음속 깊은 곳에 모은 오물 덩어리를 누가 보고 싶을까? 그것을 누가 감히 대면할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상상하는 것만으로 무섭고 두려운 것이었다.
어린 시절 바람에 흩날리는 커튼 뒤에서 귀신을 본 듯 덜덜거리며 무서움에 떨었던 것처럼 그 순백한 마음속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에서 겪게 된 자신의 치부를 본다는 것은 고매한 인품을 지닌 이도 꺼릴 일이다.
하지만 야안은 파머가 겪는 그 과정을 보며 느끼는 바가 많았다.
나는 나 스스로 부끄럽지 않았는가? 내가 하는 일은 정당하였던가? 나는 그들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과연 위선은 없었던가? 과연 내가 추구하는 길이 그저 내 욕심만은 아니었던가?
나는 지금 제대로 된 길을 걷고 있는가?
“아!”
야안은 짧게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그는 깊이 회상에 빠졌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 시절, 어렵게 사귄 친우가 매를 맞는 모습에도 두려워 감히 도와주지 못했다.
자신들을 위해 대신 나서주다 비참하게 굶어 죽은 농노 선배에게 끝내 품속에 든 한 알의 감자를 건네지 못했다.
그렇게 농노 시절에 가책으로 남았던 일들을 떠올리며 그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수많은 일이 있었다.
훈련한다고 양부모님에게 소원했던 일. 스승님이신 마론께서 자신에게 맡긴 일에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큰 성과를 내지 못한 것에 따른 죄송함.
자신과 가족들이 위험이 처할까 자신의 본 실력을 제대로 보이지 못해 피해를 입고만 용병들과 피난민들을 포함한 수많은 이들.
피난민들 때문에 무리하게 세금을 걷어야 했던 주민에 대한 미안함.
그 외에 수많은 일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는 이를 악물며 자신의 마음을 보호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마음속 깊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자신의 죄를 바라보며 사죄했다. 감정을 이기지 못해 그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야안이 NPC이기는 하나 또한 이방인의 능력을 지닌 이기도 하기에 그는 아리스가 제약해 둔 보호를 받았으므로 생명체를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이 덜하기는 하나 거리낌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비록 몬스터들이기는 했으나 생명을 죽인 것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그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 상태에서 벗어나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그는 가슴속 깊이 후련함을 느꼈다. 그는 스스로 외면하던 것들을 바라볼 수 있었고, 어쩔 수 없다는 말로 합리화했지만 다른 수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아니, 인정했다. 최선을 다한 것이라 생각했지만, 실상 최선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라본 세상은 새로운 세상이었고, 그는 조금씩 주신 아리스 님의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야안은 아직도 괴로움에 식은땀을 흘리는 파머의 땀을 닦아주며 마케를 다시 펼치고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시간을 같이 보내지 못한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는 집으로 향했다.
나흘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속에 여러 일이 있었지만, 역시 그중 가장 큰일을 꼽자면 한스의 주도 아래 시작된 대규모의 마을 건설도 있겠지만, 그와 더불어 영지의 새로운 수입원이 될 대리석 채굴 공사가 시작된 일을 말할 수 있겠다.
야안은 이카스티스를 겪은 후로 파머가 크게 회개하였음을 진실의 눈으로 확인한 뒤로 대리석 채굴 공사와 관련된 모든 권한을 그에게 주었다.
비록 2년간 감옥에 있었던 탓에 그 기량이 예전과 같지는 않았지만, 본래 이 일에 한해서는 천부적으로 타고났다 할 만큼 뛰어난 기량을 지닌 터라 얼마 되지 않아 회복할 것이다.
파머는 자신의 과거를 알면서도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야안의 행동에 크게 감명하였다. 오해로 시비가 붙어 옥살이를 한 자도 크게 편견 어린 시선으로 보며 일의 중심에서 배제하는데 그 자신은 그와 비교할 수 없는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던가?
한데 자신이 회개하였음을 전폭적으로 믿으며 그 같은 중책을 맡기자 그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내가 태어나 자신을 믿어주는 이에게 목숨마저 내주어도 아깝지 않다고 했는데, 그는 이제야 그 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야안은 일의 편리를 위해 한스가 세우는 마을에 그의 집을 지어주기로 약속하고, 그동안은 성에 방을 내주어 그곳에 거처를 잡게 하였다.
파머의 딸 모니카 또한 변화가 있었다. 그녀는 예전의 우울한 모습을 많이 버렸는데, 이는 바로 그의 아버지 파머의 진심 어린 사과에서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심정을 닮은 그녀는 본래 성정이 밝고 마음이 넓은지라, 누구보다 아버지의 괴로움을 알고 있었다. 비록 자신을 팔아 버렸으나, 그녀는 아버지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만약 아버지가 크게 사기에 당하지 않았다면 자신을 팔지 않았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지난 아버지의 과거에서 알 수 있었다.
술을 마시면 이성을 잃어 자신에게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고는 하지만, 이내 다음 날이면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해 우물쭈물하다 또래 아이들이 가지는 노리개 따위를 테이블에 내놓고 갔기 때문이다.
자신을 팔았을 때도 그랬다. 사창가에 팔았다면 최소 두 배는 더 받았을 것이건만, 아버지는 일은 고되나 규율이 엄격해 험한 꼴을 당하지 않는 귀족가의 자택에 자신을 넘겼다.
아버지는 그랬다.
그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16년이 지났음에도 밤이 되면 그녀만을 그리워하였고, 그녀가 남긴 작은 유품은 끝내 품속에서 떼어놓지 않았다. 그녀는 몰래 눈물로 밤을 지새우는 아버지의 약한 면을 보았기에 그를 끝내 미워하지 못했다.
그러던 아버지가 이른 새벽에 자신을 찾아와 사과하였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자신이 잘못했던 점들을 나열한 뒤 아버지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용서를 빌었고 자신은 그 모습에 여태껏 참았던 울분을 터뜨렸다.
“왜, 왜 그러셨어요. 저도 있는데. 아버지의 딸이 여기 있었는데. 왜.”
자신의 울분을 고스란히 받던 아버지는 그저 힘없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그녀는 그 초라한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도 서글펐다. 펑펑 눈물을 흘리며 울분을 표하던 그녀는 결국 아버지의 처진 어깨를 감싸 안았고, 그로부터 조금씩 그녀와 아버지인 파머의 관계는 여타의 부녀처럼 변해갔다.
내내 고개를 숙이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때의 모습은 너무도 상반된 느낌이었다. 길게 늘어진 앞머리를 끌어 올려 묶은 그녀의 모습에 처음 그녀에게 방을 안내하며 힘을 주었던 타일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체격이 왜소해 열세 살 정도 되는 어린 소녀로 알았는데, 이제 보니 자신보다 겨우 한 살 어린 아름다운 여인이었음을 알자 매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니카는 자신을 놀란 모습으로 바라보는 타일을 알아보고는 감사의 인사를 건넸고, 타일은 얼굴을 잔뜩 붉힌 채 당황하며 그녀의 인사를 받았다.
멀리서 마을 건설 관련으로 그를 찾아오던 티애는 그 장면을 보고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그 무뚝뚝하던 타일이 사랑에 빠진 것이다.
야안은 자신에게 건네준 계획서대로 일을 진행하고 있는 한스의 능력에 깊은 찬사를 보냈다. 어린 나이임에도 빠른 공사를 위해 여러 일을 맞물려 진행함에도 그 효율이 떨어지지 않으니 야안마저도 그저 감탄을 보일 뿐이다.
나이가 어려 사람을 부리는 데에는 아직 부족한 면이 있지만, 그런 것은 사무적인 태도를 지닌 타일이나 정이 많은 코른과 티애가 옆에서 얼마든지 도울 수 있는 일이다.
한스 특유의 빠른 계산 능력 덕분에 열흘도 안 되어 마을이 들어설 면적과 도로가 들어설 부분에 필요한 자재 예산 책정을 끝내고 이제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되고 있었다.
한스는 이번에 대리석 채광 공사도 염려하여 마을 건설을 시행하였는데, 덕분에 가까운 곳에서 공사를 시행하던 파머는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야안은 이번 토벌전에서 남편을 잃은 미망인들을 모아 마을 건설과 대리석 채광 공사, 성벽 공사들을 하는 곳 근처에 술집을 운영하게 하였다.
판잣집으로 간단히 만들어낸 이 술집은 하루 임금의 20% 정도면 안주와 술을 적당하게 먹을 수 있었는데, 이는 영지에서 지원해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값이 싸고 미망인들이라 해도 젊은 여인들이 운영하는 곳이라, 고된 일을 끝낸 인부들은 술집이 생기기 무섭게 자리를 가득 채웠다.
야안은 생각보다 술집이 인기가 좋자, 판잣집을 더 지어 넓히고 미망인들을 더 고용하여 사용하는 데 무리가 없게 하였다.
인부 입장에서는 부담 없는 값에 술을 즐길 수 있어 좋았고, 미망인들 또한 상당한 목돈을 쥘 수 있어 좋았다.
더구나 인부 중에는 총각이나 전쟁에서 처자식을 잃고 혼자가 된 사내들도 많았기에 그들 중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 새로운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술집을 만들기는 했으나,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것이 아닐까 우려한 것과 달리 시간이 지날수록 일의 능률이 올라갔다.
이는 임금의 20% 이상은 영지에서 지원하지 않아 피로를 풀 정도의 적당량의 술만을 즐기기 때문이다. 또한, 농노들처럼 조를 나누어 우수한 조에게 성과급을 내리기에 최근 사는 재미를 느끼고 있는 그들로서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경쟁이 치열했다.
야안은 10일쯤 뒤에 도착하기로 한 상인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히기 위해 파머에게 다음 거래에 쓰일 수 있게 여러 종류의 대리석 조각들을 준비하라 명했다.
그리고 최근 들어 대장간에서 나오기 시작한 상질의 무구에 지원하여 넉넉하게 그 수를 맞추도록 노력했다.
이미 어느 정도 상인들이 들어설 시장의 터는 완성되었고, 그들이 불편 없이 쉬고 갈 여관들도 마련해 놓았다.
와인을 비롯해 몬스터 가죽들 또한 다듬어놓은 상태였기에 이번에 그들과 거래할 품목은 적어도 네 개나 되었으니, 이번 거래를 잘 마친다면 자신의 영지로 상인들의 방문이 번번해질 것이다.
야안은 그렇게 영지에 큰 자금을 끌어 올 수 있는 초석을 닦아갔다.
그로부터 5일이 지난 저녁, 말 두 필이 이끄는 마차만 네 대에 고용된 하인이 스무 명이 넘는 총 80에 달하는 상단이 마크 영지에 모습을 보였다.
상단을 호위하는 이들은 용병단이 아닌 상단이 지원하는 검술관에서 나온 검사들이었는데, 하나같이 오랫동안 정심히 수련한 듯 몸이 호리호리하고 말 위에서도 흔들리는 모습은 없었다.
중급 유저의 수만 20이 넘었고 하급 유저의 수도 40명에 달했다. 검술관에서 그만큼의 제자들을 지원하였다는 것은 상단의 규모가 소상단 따위가 아님을 말한다.
야안은 론에게서 이번에 자신의 영지에 오게 될 상단의 정보를 얻었던 터라, 이들이 어느 상단인지를 알 수 있었다.
이들은 로리아 상단으로 본래는 곡물을 운용하던 상단이었으나 상단의 주인이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아들인 벨이 이를 물려받으며 현재는 와인과 마일드 왕국의 특산품인 실크 천을 주거래 물품으로 잡고 있었다.
현재 로리아 상단의 상단주인 벨은 소규모의 상단에서 시작해 지난 13년간 가파르게 성장해 중소 규모 이상의 상단으로 자리 잡은 만큼 시세를 보는 눈이 뛰어난 이였다.
우연히 군부에 와인을 납품하다 마크 영지의 와인을 알게 된 그는 단번에 이 와인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지금은 고급 와인에 비해 약간은 부족한 면이 있다 하나, 시간이 흐른다면 능히 명가의 와인 생산지로 자리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 자신이 거래할 단계는 아니라고 그는 여겼다. 지금의 상태라면 못해도 10년은 더 지나야 자신이 거래할 수준에 이를 것이라 여긴 것이다.
하지만 뛰어난 잠재력이 있는 것은 확실하기에 눈여겨보던 그는 시간이 흘러 평소 잘 알고 지내던 호넬 상단 주에게서 론을 소개받으며 다시 마크 와인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론은 야안에게서 와인을 챙겨 받았는데, 론은 그것으로 마크 영지를 홍보도 할 겸 친목을 나누었다. 그들은 처음 생소한 와인 상표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지만 와인의 맛을 본 이후에는 깜짝 놀란 모습을 보이며 그 영지의 잠재력을 인정하였다.
그 반응은 벨 또한 다르지 않았는데, 그는 론이 건넨 와인이 예전 자신이 눈여겨본 와인임을 알고 반기다, 이내 그 와인의 맛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미 와인은 여타의 고급 와인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특유의 짙은 풍미가 있어 어떤 점에서는 무척 뛰어난 면이 있었다.
와인을 거래하는 만큼 와인을 평가하는 데에도 매우 뛰어난 그는 그 사전 지식 또한 많았기에 지금의 이 변화가 믿기지 않았다.
그가 마크 영지의 와인 맛을 본 것은 겨우 2년 전이었다. 한데 고작 2년 만에 그 풋풋함마저 나던 와인이 이제 성숙한 여인을 보는 듯했으니 그의 놀라움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내 론에게서 자신의 영지에서 이 와인을 거래하고자 하는 상단을 찾는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는 두말할 것 없이 자신의 상단이 거래하겠다 말했다.
이후 그는 론에게서 여러 상인이 마크 영지와 거래할 것을 약속받았다는 말을 들은 터라, 다른 일을 급히 마무리 지어 다른 상인들보다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현물도 좋지만, 이번에 마크 남작가가 탈리아 왕국의 윌 백작가와 거래를 하였다는 말에 어떤 정책을 펼치려는지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기에 실크 천을 통해 물물 거래를 하는 것이 서로에게 이득임을 알았다.
벨은 야안의 관점을 달리한 시국을 보는 눈에 감탄하였기에 크게 호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정당한 방법으로 많은 돈을 모은다는 것은 상인의 입장인 자신이라 해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는 이곳에 들어서며 여타의 시골 영지와 다른 잘 닦인 도로나 깨끗한 정관에 놀라다, 이내 지나가는 사람마다 활기 넘치는 모습에 감탄을 보였다.
여러 공사가 진행 중인 듯 수많은 인부가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영지에서 운용하는 마차를 타고 오가고 있었는데 이는 그만큼 영지에서 인부들에게 많은 신경을 쓰고 있음을 뜻한다.
영지의 일이라 해도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라, 이처럼 영지민을 중히 여기면 앞으로 여러 정책을 진행하기 쉬워진다.
그들은 상인들을 위해 준비했던 여관에서 짐을 풀게 되었다. 이후 벨은 영지에서 마련한 시장에 좋은 자리를 잡아 물건을 풀었고, 곧 영주성에 사람을 보내어 거래의 의사를 알렸다.
야안은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예측한 것보다 이른 시간에 온 것이라 서둘러 거래를 위한 준비를 하였고, 곧 그들이 보낸 전령을 만날 수 있었다.
전령을 통해, 그들이 실크 천과 와인을 물물 거래를 하고 싶다는 의사에 야안은 고민하다 이내 허락했다.
탈리아 왕국보다 거리가 멀기는 하나 상행이 가능할 거리인 라문 왕국과 거래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본 것이다.
라문 왕국은 왕국 연합에서 외지에 속한 곳이라 문화 수준이 떨어진 곳이다. 그곳이라면 마일드 왕국의 특산품이기도 한 실크 천을 거래한다면 많은 이득이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평야가 넓어 말의 생산지로 유명한 곳이기도 해 야안은 현재 공사로 부족한 말들을 이곳에서 메꿀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것이 아니어도 적지 않은 훈련된 군마를 구할 수 있을 테니, 전략적인 면에서도 이득이었다.
야안은 내일 오전에 만나기로 약속이 적힌 서신과 그 밖에 영지 거래에 내야 할 세금과 더불어 지켜야 할 상황들을 적은 문서들을 봉하여 전령에게 건네었다.
창 너머로 전령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잠시 생각에 잠기던 야안은 작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실상 거래에 필요한 물품 확보는 거의 마무리되었고, 최근에 맛본 와인은 관리를 잘한 덕에 그 향이 더 풍성해져 그를 만족하게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서류를 점검한 뒤 집으로 돌아가며 내일 거래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에 대해 생각에 빠졌다.
다음 날 오전.
벨은 자신들이 가져온 실크 천 20필을 가지고, 영주 성을 방문했다. 이미 이야기가 되었던지, 로니아 상단이라는 말에 경비원은 별다른 제지 없이 그들을 통과시켰다.
곧 그들은 자신들을 맞이하러 온 인상이 좋은 관리인과 하인들의 안내를 받게 되었다. 성안은 최근 공사 때문에 수많은 서신이 오고 가거나, 병사들의 훈련 소리가 들리는 등으로 활기가 넘쳤다.
현재 벨의 호위를 맡은 상급 유저이자 톰 행크 검술관의 1대 제자인 자론은 성 창 너머로 훈련받고 있는 병사들의 수준을 보고 크게 놀라움을 표했다.
“대단하군요. 정말 저들이 영지에서 키우는 자들입니까?”
약 100명의 사내가 훈련하는 모습을 보던 자론이 자신들을 안내하던 관리인에게 물었다.
그의 물음에 웃는 얼굴이 매력적인 그가 자랑스러운 듯 고개를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우리 영지의 자랑인 별동대 대원들입니다. 이번 몬스터 토벌에서 큰 성과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자론은 대단하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내밀며 웃음을 흘렸다.
“하하, 훈련도 훈련이지만 저 같은 인재들을 발굴하기란 쉽지 않은데 대단하십니다.”
재차 감탄하는 자론에 벨이 궁금하여 물었다.
“하~ 그대가 그처럼 놀라워할 만큼 대단한 수준인가?”
그간의 상행에서 자론의 뛰어난 실력을 잘 알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벨의 의문에 자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보시면 아시겠지만 다들 이제 막 성인이 된 앳된 자들입니다. 한데 그들 중 반 이상이 하급 유저에 들어서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검을 들었다고 본다면 당연한 일이지요, 정작 놀라운 것은 지금 보이는 저들의 합격 훈련입니다.
세 명이서 교묘하게 다른 방위에 서 있어 사방의 적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공격 시에 저 변환되는 방위 덕분에 쉴 틈 없이 검을 찌를 수 있게 됩니다. 이는 자신보다 실력이 뛰어난 자들을 제압하는 데 상당히 뛰어난 합격술이라 할 수 있지요. 어느 정도의 위력인지 짐작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우리가 저들과 전투를 벌인다고 가정한다면 양패구상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 고작 병사 100명으로 자네들과 전력이 비슷하다니 믿을 수 없군. 비록 그 수가 두 배에 가깝긴 하지만, 실전적 검술로 이름 높은 그대들이 말일세.”
검술관의 제자들은 자부심이 대단하여 칭찬에 인색한 편이다.
다만 자론의 경우는 그 성격이 호탕하여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편이었는데, 다만 빈말을 못 하는 성품이라 오해를 종종 사기도 했다. 그런 사정을 알기에 벨은 자론의 말을 더 넣고 빼고 할 것이 없다 판단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