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88화
3전장은 마크 남작이 예상했던 것처럼 처음 전략과 달리 다른 형식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마크 남작을 비롯해 13, 15만인대가 제국의 습격에 제대로 힘도 쓰지 못한 채 사라졌고, 그를 기반으로 쿠엔 후작 측의 병력은 마치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제국의 2만 명의 병사를 쳐 7,000을 죽이고 13,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빠진 병력을 예상하여, 친 것이라 제국 측에서도 손쓸 방법 없이 잡힌 것이다.
얼핏 2만 명을 소탕한 쿠엔 후작의 공은 대단한 것 같았으나 실상 그 잡아들인 포로들을 본다면 마일드 왕국의 손해였다.
포로들의 반이 농노병이었고, 반은 이번에 모집된 신병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마일드 왕국에서 입은 손해는 기마병 2,000에 숙련된 보병이 1만 3,000에 달했으니 전투력으로만 본다면 세 배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것이다.
힐튼 공작가는 쿠엔 후작의 치졸한 수에 크게 분노하였으나, 이미 증거 따위는 다 지워버린 터라 심증뿐이라 그들을 단죄할 수단이 없었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2만 명을 쳐 잡는 데 큰 공을 세운 자는 카람 백작이었고, 쿠엔 후작은 만인장이었던 카람 백작에게 수석 만인장의 자리를 내주었다.
쿠엔 후작 측에서는 이번 기회로 힐튼 공작 측 병력의 10%에 달하는 병력을 지워낼 수 있었기에 크게 기뻐하였다.
이로써 이 전쟁에 자신의 발언권이 다시 커진 것이다.
추악한 권력의 다툼 속에서도 전쟁은 계속 이어졌다. 쿠엔 후작이 벌인 일로 한동안 제국 측으로 전세가 기울었으나 이내 1전장을 도와주러 자리를 비웠던 라쿤 백작이 합류함으로써 다시 전장은 평행을 이루게 되었다.
중급 현자 마스터의 힘은 대단했지만, 제국에서 그에 대항하여 나타난 포툰 자작이 그를 상대하면서 다시 전세는 조금씩 제국 측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힐튼 공작은 끝없는 소모전을 보이는 지금의 실태를 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제국이로구나. 도대체 얼마나 인재가 많은 것인가?”
군사 강국이라 불리는 마일드 왕국의 60%에 달하는 전력을 이번 전쟁에 내놓았음에도 제국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상대하고 있다.
만약 제국의 세 황자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면 일곱 곳의 전장 모두가 제국에 밀렸을 것이 분명했다.
공을 세우는 것도 중요하나 그 후에 다시 시작될 황권 쟁탈전에 살아남으려면 숨겨둔 칼이 많아야 했으니 이들은 지금 전력의 반도 내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번 전쟁에 제국의 구존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은 황제의 명으로 황권 다툼에 나서지 않고 있었다.
만약 왕국 연합에 자리한 두 명의 구존이 모습을 보인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들을 희생하는 것은 왕국 연합 쪽에는 내키지 않는 일이었다.
만약 일이 그렇게 된다면 전투의 범위는 이제 탈리아 왕국의 희생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최소 왕국 연합의 30%가 이번 전쟁에서 사라질 것이다.
사실상 왕국 연합이 제국에 이긴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 전쟁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어느 정도의 선에서 피해를 감수하여 어떻게 전쟁에서 질 것인가?
바로 그것이었다. 또한, 부수적인 목표라면 이번의 일을 계기로 왕국 연합의 결속력을 단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로써 제국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운 덩치를 키운다면 이 전쟁의 가치는 차고 넘친다 할 수 있다.
힐튼 공작은 잠시 앞으로의 전장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가를 생각하다, 다급히 소식을 가져온 전령에 생각을 지웠다.
곧 전령을 들어오라 하였고, 전령은 크게 예를 보이며 가져온 소식에 대해 말했다.
“조금 전 마크 남작이 복귀했습니다.”
전령이 가져온 소식은 짧았지만, 그 속에는 큰 의미가 자리했다. 시골 영지 출신의 영주 중 하나였으나 그는 붉은 장미 기사단의 단장이 키우던 자였다.
본래대로 일이 흘러갔다면 자신의 소속 밑에 자리한 만인대 대장이 되어 있어야 할 자이다.
저번 일로 인해 상승세를 타고 있는 쿠엔 후작에게 제동을 걸 중요한 증인이기도 했다. 힐튼 공작은 내심 크게 반기며 전령에게 말했다.
“데려오라.”
그 말에 전령이 작게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데려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예전 대공자님께서 상으로 내리신 성수 덕분에 겨우 목숨만 붙이고 있습니다. 치료사의 말로는 보름도 넘기기 어려울 것이라 합니다.”
“흐음~”
공작은 그 말에 침음을 흘리다, 이내 자신이 가져온 성수 두 병을 라쿤 백작에게 보내어 그를 치료해 주기를 부탁했다.
라쿤 백작은 전쟁 탓에 세가 축소되었던지라 힐튼 공작가와 유대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에 그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마크 벨로치의 상태는 끔찍하였다.
팔 하나를 잃으면서 많은 피를 잃어 안색은 창백했고, 내장 또한 다치거나 손실되어 있었다. 그야말로 성수의 힘에 기대어 숨만 쉬고 있었다.
아니, 반드시 살아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아니었다면 성수의 힘으로도 숨을 붙이고 있을 수가 없었다.
2,000에 달했던 기병은 이제 열여섯밖에 남지 않았고, 그나마도 전부 크게 다쳐 한동안 전투에 나설 수가 없었다.
마크 벨로치는 악몽에 잠겨 있었다.
아니, 악몽과도 같은 지난날을 회상하고 있었다.
검은 전갈과 마크 남작의 기병들 전투는 치열했다. 기동력에서는 앞선 기병으로 치고 빠지는 형식의 전투로 검은 전갈에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지만, 검은 전갈은 본래 산악과 같은 곳에서 전투할 수 있게 전문적인 훈련을 마친 이들이었다.
근 한 달간 서로서로 죽인 숫자만으로도 1,300에 달했고, 음식이 떨어지면서부터는 상대편의 시체를 뜯어 먹는 독기를 보이며 전투를 행하였다.
검은 전갈의 수장은 그를 상대한 지 보름 만에 일리언 백작의 절대 방심하지 말라는 경고를 흘려들었던 것을 후회하였다.
한 달 만에 기병으로 검은 전갈의 30%를 데려간 그의 귀신같은 전술과 독심은 수많은 전투를 겪었던 그마저 질리게 하였으니. 그의 수하들 또한 그 심정이 다른 바가 아닐 것이다.
그는 마크 벨로치를 죽이지 않는 이상은 더 큰 피해를 볼 것임을 알았기에 무리하지만, 암살 형태로 그를 죽이는데 전력을 다하기로 했다. 다행스러운 일이라면 그 전술에 비해 그의 무재가 형편없다는 것이 이번 암살의 성공률을 높이 올려줄 것이다.
그렇게 산 너머 달이 사라지던 시간, 검은 전갈의 수장과 조장들이 직접 움직이기 시작했다. 검은 망토와 옷에 가려진 그들의 모습은 잠시 보이다 벌레 울음소리 너머로 사라졌고, 보초를 서던 기병들은 그들의 존재를 느끼지도 못했다.
그들은 기병 하나를 잡아 고문 끝에 마크 벨로치의 천막을 찾을 수 있었고, 심연 속에 들어선 물고기처럼 조용히 주위의 보초를 서던 기병들을 쓰러뜨리며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일을 끝내기 코앞까지 온 상황임에도 검은 전갈의 수장은 왠지 모르게 꺼려졌다.
그때였다. 그의 불안함에 확신을 주려는 듯 자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던 마크 벨로치가 일어나 불을 밝힌 것은.
그는 마치 자신들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느긋하게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언제쯤 암살을 하러 올 것인가 했는데, 드디어 오셨군. 이걸 운이 좋다 해야 하나 고작해야 조장 몇 명 정도가 다일 거라 생각했는데, 수장이 직접 행차하셨으니 말이야.”
자신만만한 그의 모습에 검은 전갈의 수장은 주위를 살폈지만, 기척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이내 마크 벨로치가 보이는 모습이 허세라 판단했다.
“겨우 생각한 것이 시간을 버는 것인가?”
그 말에 마크 벨로치는 웃음을 흘렸다.
“하하, 과연 그럴까?”
여유 있는 웃음소리에 수장은 잠시 불안했지만, 그 꿍꿍이가 무엇이든 간에 이자를 죽이는 것이 목적임을 잊지 않았다.
이내 수하들과 함께 그를 향해 몸을 날렸고,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마크 벨로치의 신형이 침대 밑으로 뚝 떨어지는 것과 동시에 천막이 무너져 내렸다.
천막이 무너지는 그 거대한 소리에 마크 라운이 기병과 함께 모습을 보였다. 마크 벨로치가 침대 밑으로 만든 통로를 통해 그곳을 벗어날 때쯤 열여섯 명의 수하 중 일곱 명의 수하를 그곳에서 잃은 검은 전갈의 수장이 단검으로 천막을 가르며 모습을 보였다.
그 모습에 마크 벨로치는 가장 중요한 수장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준비된 기병들을 겹겹이 둘러싸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일이 그렇게 흘러가자, 그곳에 자리한 검은 전갈들은 수장을 바라보았고 그는 웃음을 흘리며 마지막 명령을 내렸다.
“후후, 대단하군. 꼼짝없이 당했어. 하지만 달라질 것은 없다. 우리는 본래의 계획대로 실행한다.”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검은 전갈들은 마크 벨로치를 노리기 시작했다.
검은 전갈에서도 최정예라 할 수 있는 이들이었기에, 그들의 순간적인 움직임은 말보다 빨랐다. 이내 들고 있던 비수를 날려 그의 팔을 자르고, 다가와 단검으로 그의 갑옷을 뚫어 장기를 찔렀다.
그 모습을 바로 옆에서 바라보았던 마크 라운은 다급히 다가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검을 펼쳤는데, 상급 유저라 하지만 상대는 암살의 전문가들이라 그 또한 다리 하나를 잃고 갑옷 사이를 파고든 단검에 장기가 꿰뚫려야 했다.
마크 벨로치의 심장을 노리며 다가오던 검은 전갈의 수장이었지만, 다급히 조여 온 기병들 탓에 그 뜻이 무산되고 말았다.
수십 개의 창에 꽂힌 그는 반의 성공만을 이룬 것에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그렇게 명을 달리해야 했다.
일은 급격하게 돌아갔다.
그 짧은 시간에 두 수장의 목숨이 경각에 달한 것이다. 변변한 지혈제도 없는 지금, 기병대는 주인을 잃게 되는 것이 당연한 순서였다.
아니, 지혈제가 있고 제대로 된 치료사가 있다 해도 장기가 대부분 상해 살아남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그나마 오랫동안 검을 수련한 마크 라운은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의 그 믿어지지 않는 몰골에 분노하다, 옆에서 자신을 지혈하려 애를 쓰는 수하에게 명령했다.
“횃불을 가져와라.”
그의 목소리는 고요했다. 너무도 고요하고 침착해 그 명을 받은 수하는 잠시 지금의 상황을 잊을 지경이었다.
마크 라운의 명에 그는 서둘러 횃불을 가져왔고, 이내 그는 그것으로 자신의 상처 부위를 지졌다.
고기 타는 소리와 냄새가 퍼져갔지만, 그 속에 비명 따위는 없었다. 상처 입은 야수의 낮음 울음소리만이 들려올 뿐이다.
고통에 식은땀을 흘려대던 마크 라운은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봉합하더니, 이내 다시 명령을 내렸다. 처음보다 힘이 없는 목소리였으나 그 위압감은 배는 더 무거웠다.
“아버지를 나의 거처로 모셔라.”
그는 절뚝이는 다리로는 아버지를 모실 수 없다는 것에 슬퍼하며 자신의 아버지를 모시고 앞서 가는 수하들의 뒤를 따랐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자신의 거처로 온 그는 수하들에게 나가라 명하고는, 자신의 짐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이것이라면…….”
그는 이것이라면 아버지를 살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성수, 당시 힐튼 대공자에게 이것을 받았을 때는 그렇게 큰 의미가 없었다. 그저 귀한 것을 받았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는데, 지금 이것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는 시간을 지체하면 아버지를 살릴 기회도 없음을 알았기에 이내 성수를 아버지의 입에 조심스럽게 부었다.
성수의 양은 겨우 한 모금 정도 되는 것이기에, 혹시나 흘릴까 싶어 그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아버지의 목에 부은 마크 라운은 이내 변화가 일어나는 모습에 만족의 미소를 띠었다.
감은 붕대 너머로 피가 흘러나오던 곳은 이내 굳었고, 핏기없이 창백한 아버지의 얼굴에는 옅은 화색이 보였다. 워낙 장기가 심하게 다쳐 완치는 어려웠으나, 지금의 상태라면 한 달은 버틸 수 있을 듯 보였다.
그 모습에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던 그는 혼절해 있는 아버지에게 말을 꺼냈다.
“마지막에 가서야 당신의 말씀을 따릅니다. 저의 이 결정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저의 기량으로는 복수는커녕, 이곳에서 살아남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당신께서라면 이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실 수 있지 않습니까? 부디, 부디 살아남아 주시길 바랍니다.”
마크 라운은 마지막에 가서야 자신의 아버지가 내내 경고한 성급함 따위는 버렸다. 불같은 성정도 지웠고 그렇게 그는 어느 때보다 맑은 머리로 아버지의 말을 따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을 내렸다.
이후 그는 유난히 자신을 따르던 백부장을 불렀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는 상관의 지금의 몰골이 믿어지지 않는 듯 크게 분노하고 있었다. 마크 라운은 그런 수하의 모습에 처연하게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마지막은 너와 함께 가야 할 것 같다. 그래 주겠는가?”
마흔이 넘은 그였지만, 어린 시절 책에서나 볼 듯한 용맹함을 보이는 그에게 흠뻑 빠져 있던 터라 그는 그가 내린 마지막 명령을 삶의 어느 순간보다 반겼다.
“마크 라운 님과 마지막을 같이한다면 그보다 영광스러운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의 말에 마크 라운은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대답만으로 충분했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고마움을 표하던 그는 남은 병력을 모아 그중 수석 백인장에게 아버지를 맡기며 말했다.
“나는 여기서 하루의 시간을 번다. 할 수 있다면 더 긴 시간을 벌고 싶지만, 신께서 허락하시지 않을 것 같군.”
그렇게 잠시 말을 멈춘 그는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부디, 부디 꼭 아버지를 살려주시게. 그분만이 우리들의 원한을 갚을 수 있는 분이시니.”
담담한 말투로 부친을 부탁하는 마크 라운에 수석 백인장은 격정에 잠시 몸부림치다 경례를 하고는 그의 명을 받아들였다.
떠나는 그들을 뒤로하며 나서던 마크 라운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래. 어디 주인을 잃은 개들을 청소해 볼까?”
곧, 어둠 속 산의 일부에 큰불이 일어나며 수많은 인명이 그 속에서 죽어나갔다.
그로부터 하루가 지난 뒤에야 마크 남작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살리기 위해 아들이 죽게 되었다는 사실에 큰 노여움에 젖어들다, 복수를 부탁한다는 아들의 말에 입을 한일자로 다물며 눈빛을 빛냈다.
“아리스 님에게 맹세한다. 반드시 그 아이의 뜻대로 흘러가리라.”
그는 그 시작으로 마지막 아들의 공격에 이제 50% 정도의 병력만이 남은 검은 전갈을 처리하기로 했다.
그들의 힘은 여전히 자신들의 배에 달했으나 단체 간의 전투는 무력만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상대가 머리를 잃은 몸통이라면 없애지 못할 것도 없다.
그는 더 이상 도망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사냥꾼이 되어 그들을 짓밟기 시작했다.
예상할 수 없는 그의 전술로 인해 뒤를 쫓던 검은 전갈 쪽은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이렇다 할 머리가 없어지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효율적으로 병력을 이용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름간의 치열한 전쟁이 시작되었고, 결국 살아남은 이들은 마크 남작과 16인의 기병이 다였다.
수많은 동료들의 희생 끝에 얻어낸 승리는 결코 달콤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숨을 쉬고 있는 자들이 자신이라는 것에 그들은 순순히 기뻐하였다.
크게 눈물을 흘리는 수하들을 무표정하게 바라보던 마크 남작은 이내 수하들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가기 시작했다.
배신을 당한 지 한 달하고도 보름 만의 일이었다.
마크 남작이 정신이 들었을 때 그가 처음 본 이는 눈빛이 청명하고 은발과 긴 수염이 인상적인 자였다.
낯이 익은 터라 잠시 생각에 잠기던 그는 이내 예전 먼 곳에서 보았던 라쿤 백작임을 알 수 있었다.
‘쿠엔 후작 때문에 밀리던 세력을 라쿤 백작이 메운 모양이구나.’
물론 제국에서도 그와 같은 힘을 지닌 자를 내놓았겠지만, 오랫동안 야루스 산맥에서 전투 경험을 닦은 라쿤 백작만큼 노련한 자는 아닐 것이다.
마크 남작은 이내 지금의 상황을 이해했다.
혼절하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몸에 기운이 넘쳤다. 칼로 생살을 찌르는 듯한 고통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치료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직 불편한 몸으로 감사의 인사를 올린 마크 남작에게 라쿤 백작은 작게 감탄하였다.
지금의 상황을 이해한 듯한지라, 라쿤 백작은 크게 돌려 말하지 않았다.
“내가 그대를 살린 이유는 쿠엔 후작이 벌인 일의 증인이 되어달라고 하기 위해서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그가 없었던 동안의 일들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고, 그는 잠시 생각에 빠지다 고개를 저었다.
“증인이 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저의 증언만으로는 쿠엔 후작의 보잘것없는 세력만이 떨어져 나가는 게 고작일 것입니다.”
마크 남작의 말에 라쿤 백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바라는 게 그것일세. 그 정도만 되어도 쿠엔 후작은 더 이상 세를 불릴 수 없을 것이야.”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이던 마크 남작은 라쿤 백작에게 말했다.
“그것을 원하신다면 얼마든지 뜻에 따르겠습니다. 다만, 청이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이내 밖의 수하를 불러들였고, 곧 수하는 마크 남작이 깨어나기를 기다렸다는 듯 네모난 상자를 가져와 그에게 바쳤다.
마크 남작은 그것을 열어 백작에게 보이며 말했다.
“이것은 검은 전갈 수장의 수급입니다. 저희는 이번 전투에서 검은 전갈을 만났고, 그들과 싸워 이겼습니다. 이 공을 인정하여 저의 작위를 올려주시고 명예롭게 제대해 주기를 부탁드립니다.”
그의 말에 라쿤 백작은 믿기지 않는 듯 신음을 흘렸다.
만약 그의 말이 맞는다면 그의 부탁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니다. 검은 전갈이 없다는 것만으로 전략의 범위가 늘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끼고 있는 숲을 이용하면 지금처럼 제국이 자신의 진형을 유린하기가 어려워지고, 자신은 숲을 이용해 퇴로를 크게 확보할 수 있다.
이는 병법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싸움할 수 있음을 말하니, 좋지 않은 지금의 상황을 타파하는 데 큰 힘이 될 것이다.
“그대의 말이 사실이라면 힐튼 공작가에서 그대에게 자작의 신분을 내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네. 또한, 그대의 몸은 이제 뿌리를 잃은 형태라 잘 보양한다 해도 5년을 넘기기 어려운 상태이니 그대가 원한다면 명예로운 제대 또한 당연한 일이네. 이만 쉬게나. 확인되는 대로 소식을 알려주겠네.”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밖을 나서는 라쿤 백작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마크 남작은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겨우, 5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