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90화
그로부터 이틀이 지나 정오가 막 지날 때쯤 마크 남작은 주위의 무언가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무엇이 달라졌는지 깨달았고 곧 16인의 기병 중 마지막 남은 조장이었다가 지금은 이 기병들의 대장인 이를 불렀다.
“주위가 너무 조용하군. 속도를 올리게.”
마크 자작의 말에 그제야 그는 풀벌레 울음소리만 있을 뿐 그렇게 귀를 어지럽히던 산새 울음소리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자책했다.
“죄송합니다. 지시를 따르겠습니다.”
그는 이내 천천히 수하들에게 말을 전했고, 이내 신호를 맞추더니 곧 말들을 다독이며 속도를 올렸다.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움직이는 그들을 지켜보며 산속에서 조용히 기회를 포착하고 있던 300에 달하던 기병은 당황했다.
그들의 수장은 어느새 마크 자작의 일행이 자신의 시야에서 벗어나려 하자 다급히 소리쳤다.
“어서 쫓아라. 빌어먹을, 역시 마크 자작이로군. 눈치가 보통이 아니야.”
그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수하들과 함께 산속을 벗어나 그를 쫓았다.
비록 자신들이 숫자가 많다지만, 그쪽은 마차가 있기에 따라잡는 것은 어렵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그런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아는 데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작 일행은 마차를 부수어 그것을 중심으로 주위의 나무 따위를 모아 엄폐물들을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 모습에 욕지거리하며, 길이 험한 산길로 들어서려 했지만, 그도 쉽지 않았다.
그 주위로 간단한 함정들이 상당수가 만들어져 있던 탓에 여기저기서 말 울음이 울려 퍼졌다. 제구실을 못 하게 된 말들이 열이 넘어서자, 그는 결국 길을 뒤로 돌아 먼 길로 그들을 쫓기로 하였다.
제국의 검은 전갈과 승리한 자.
그들은 이번 일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다시 깨닫게 되었다.
“흠.”
마크 자작은 마차에서 떼어낸 말을 직접 몰기 시작한 지 한나절이 채 되지 않아, 신음이 흘러나왔다.
몸이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이 강타했지만, 그는 표를 내지 않으려 노력했다.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나프롬 자작이 노릴 것으로 생각하여 미리 만들어둔 함정들로 반나절의 시간을 벌었지만, 추적을 준비한 기병에게 있어 그 정도의 거리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제부터는 시간과 거리의 싸움이었다.
자신이 영지의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 먼저일지 아니면 그들이 자신을 잡는 것이 먼저일지에 대한 싸움이었다.
적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다만, 자신의 기병 수가 50에 달함에도 때를 노린다는 것은 일거에 자신들을 해치울 수 있음을 뜻한다.
그렇다면, 최소 200에서 300 사이의 기병일 것이다.
그 수가 200이라면 역으로 기습을 노려볼 만하지만, 300기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평야도 아닌 좁은 산길에서 여섯 배에 달하는 기병과 맞선다는 것은 천재지변이 일어나 자신을 돕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쩔 수 없이 말이 쉬어야 할 때가 되면 수하들로 하여금 그들이 움직일 만한 곳에 수풀을 묶게 하였다. 말의 골절을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나무를 깎아 만든 암기를 설치하거나, 나무 사이에 줄을 엮어 묶어 낙마를 유도하는 함정 등을 만들게 하였다.
보잘것없어 보이나 굴곡이 많은 산길에서는 효과가 뛰어나다.
큰 피해를 노리려 만드는 것이 아니었다. 시간을 자신에게 가져오기 위함이다. 이런 일을 벌인다 해도, 애초 추적을 할 것을 각오하고 나온 기마병이라면 거리는 쉽사리 벌리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써 도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추적에 쫓긴 지 사흘째 되던 정오, 고된 행보와 더위에 지친 말들에게 휴식을 주던 때 마크 자작은 아미를 찌푸렸다.
“포위당한 것인가?”
그는 천천히 주위를 살폈다. 이내 나무 수풀 너머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크 자작은 조용히 가까이 있는 한 수하에게 정보를 전달했고, 이내 곧 50명의 기병은 포위되었음을 알고 마크 자작의 명을 기다렸다.
잠시 말없이 주위를 살피던 마크 자작은 이내 말 위에 올라타며, 남은 한 손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누구도 왜 그곳인가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 않은 채 이내 말에 올라타 마크 자작이 가리킨 곳으로 말을 몰았다.
그에 놀란 300의 기병들은 다급히 큰 말굽 소리와 함께 그들을 포위하며 들이닥쳤다.
하지만 마크 자작이 가리킨 곳으로 돌파한 그들은 변화가 많은 지반 때문에 적의 수가 많지 않았던 탓에 그들을 가볍게 물리치고 도망칠 수 있었다.
마크 자작이 움직인 곳은 길이 좁아 한 번에 많은 이들이 움직이지 못하는 곳이었다. 마크 자작은 그 사실을 알았기에 수하들을 다독이며 말을 몰았다.
이럴 때일수록 다급히 움직이려 들면, 말이 지쳐 멀리 움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그렇게 반나절을 더 도망칠 수 있었으나, 결국 노을이 지는 무렵 그들과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아니, 더 도망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고지의 한 점에서 멈춰 두 시간가량 말을 쉬게 하고 함정을 만들어 기습을 노리기로 했다.
자신의 예상대로 적은 300에 달했지만, 기습과 함정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혼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후 체력을 회복한 말을 이끌고 움직인다면 다시 거리를 벌릴 수 있을 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었다.
더는 산길을 이용해 퇴로를 막는 것은 무의미하다 생각했던지, 수장은 큰길로 움직이며 추적하고 있었다.
마크 자작은 가짜 흔적들을 이용해 신경을 분산하게 한 뒤, 이내 때를 노려 그들의 측면을 쳤다.
마크 자작과 긴 혈투에서 승리한 16인의 기병들을 중심으로 움직이던 기병들은 거대한 망치가 내려치듯 그들의 측면을 뚫고 지나쳤다.
뒤에서 요란한 비명이 울려 퍼지자, 이내 말을 돌려 그들을 쫓았으나, 이내 마크 자작이 만들어낸 함정들로 전열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은 마크 자작은 다시금 약한 부위를 내리쳤고, 그 한 번의 부딪침으로 10을 죽이고 2를 잃었다.
그는 그렇게 다섯 번을 갈라놓은 뒤에야 이제 40명밖에 되지 않은 기병들을 이끌고 도주하였다.
순식간에 병력의 50을 잃은 수장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는 혼란에 빠진 수하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저것이 영주님이 말씀하신 전장에서의 모습이던가? 무섭도다. 만약 저자가 무위마저 강했다면, 결코 도망치는 것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자신을 스쳐 지나갔던, 그 하나 남은 팔로 고삐를 잡으며 간신히 말 위에서 떨어지지 않는 그가 거대하게 느껴졌다.
오싹하기까지 하였으나 그는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이 아니면 다시 잡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조급한 마음을 버리고, 천천히 수하들을 다독이며 진열케 하던 그는 다시 추적에 나섰다.
말이 지친 터라 속력은 잘 나지 않았지만, 이제 이틀밖에 남지 않은 거리를 앞둔 그를 지금 쫓지 않으면 다른 기회는 없을 듯했다.
투레질하는 말을 달래며, 그는 수하들을 이끌고 나아갔다.
“끈질기군.”
마크 자작은 세 번째부터는 더 이상 기습이 먹히지 않자 적의 수장도 영 엉터리는 아니다 싶었다.
이제 하루 반나절 거리.
고작 그 거리를 남겨두고 잡히는 것에 대해, 그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준비한다고 했건만, 나프롬 자작의 그 특유의 철저한 준비성이 자신을 잡고 말았다.
지난 습격들 탓에 아직 200에 달하는 기마병을 앞두고 겨우 27기밖에 되지 않는 기병으로 무언가를 하기에는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답이 없었다.
분하고 원통한 일이었다.
‘이런 나를 믿고 가버리다니 무심한 녀석 같으니라고.’
불효막심한 녀석이었다.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는 것과 동시에 마지막에 가서는 자신의 충고를 받아들이기도 했으니 세상에 그만큼 씁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제자였다면 기특하다고 말이라도 해줄 것이련만. 아들이라는 이유 때문에 여태껏 칭찬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살아남는다면, 그때는.”
그는 작게 중얼거리다, 이내 점차 조여 오는 그들을 보며 수하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각 9기로 3조를 나눈다. 1, 2조가 공격을 막고 3조가 찌른다.”
그렇게 말하며 서서히 물러서게 하던 그는 뒤로 올라서기 어려운 산을 두어 배수의 진을 쳤다.
배수의 진이라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마지막 기회를 노렸다. 이 진법의 장점은 오랫동안 방어를 할 수 있다는 점과 일격에 치고 나갈 기회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마크 자작에게 오랫동안 시달렸던 적의 수장은 절대 경시하지 않았다. 병력은 거의 여덟 배나 차이가 나지만 그는 맹수가 먹이를 사냥하듯이 최선의 기량을 끌어모았다.
마크 자작은 적의 수장이 서두르지 않고 진을 짜는 것을 보고 눈을 질끈 감았다. 진정 하늘에서 갑자기 벼락이라도 쳐 내리지 않고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기란 어려움을 안 것이다.
곧 두 집단이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 왜소한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마크 자작은 큰 목소리로 지시를 내리며 그들을 막아내었다.
창이 부딪치고, 방패가 부서지며 말이 쓰러졌다. 이내 떨어지는 병사는 적의 창날에 꿰뚫려 숨을 거두었다.
가장 먼저 무너진 것은 1조였고, 다음으로는 1조의 역할을 같이 맡게 된 3조였다.
마크 자작은 마지막 순간까지 어떻게 흘러갈지 똑똑히 보기 위해 치열한 전장을 눈 한 번 깜짝이지 않은 채 쉴 틈 없이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개미떼처럼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그들의 공격을 막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때였다.
적의 진에 변화가 생긴 것은.
그것은 가장 후미에서 시작되었고, 이내 무섭게 적의 중앙까지 파고들더니, 당황하여 고개를 돌리던 적의 수장의 목을 베어내었다.
그 일을 해낸 것은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중년의 사내였다.
그는 마크 자작을 그토록 괴롭히던 적의 수장을 아무렇지 않게 베어내더니 이내 수급을 들어 일갈을 내며 사기를 올렸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내찌르는 창들을 부서뜨리며 코볼트 속에 자리한 오우거처럼 적들을 처참히 죽여나갔다.
그 사내의 뒤를 이어 200에 달하는 기병이 적들을 감싸 안은 채 모이더니 준비된 석궁으로 기병들을 쏘며 숫자를 줄여나갔다.
이후 50명씩 넷으로 나누어 이제 120기밖에 남지 않은 적들을 가로질러 그들을 완전히 포위하였고, 결국 이들이 모습을 보인 지 20분도 채 되지 않아 적들은 항복을 하며 말에서 내려야 했다.
그것은 투박한 전술이었으나 강력한 무위를 지닌 중년의 사내가 들어서자 그것만큼 멋들어진 전술도 찾기 어려워 보였다.
‘역시 지휘자의 무위가 뛰어나면 여러 가지로 이점이 많군.’
마크 자작은 그렇게 생각에 잠기다, 이내 포로들을 묶고 살아남은 말들을 진정시키는 등 간단히 전장을 정리한 그들이 앞에 오자 이내 상념을 지웠다.
중년의 사내를 포함해 그의 뒤로 200에 달하던 기병들은 마크 자작에게서 열 걸음 남기고 전열을 갖추더니 무릎을 꿇으며 예를 표했다.
“마크 영지 제1군단 단장 챈들러 외 제1별동대가 마크 자작님을 뵙습니다.”
마크 자작은 그제야 이 눈앞의 건장한 용장이 야안이 그토록 칭찬하던 챈들러임을 알 수 있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챈들러의 무위는 마치 전장의 큰 흥망을 가로지르게 한 기사를 보는 듯했다. 인간이 갈 수 있는 최고의 영역에 들어선 자의 검.
거기까지 생각하던 마크 자작은 이내 크게 놀라움을 보이며 말했다.
“그대는 설마 벽을 부순 자인가?”
그 말에 챈들러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 주겠다는 듯 작게 묵례를 보이며 예를 차리더니 이내 검을 꺼내어 대지를 그었다.
그러며 다시 착검하는데 마크 자작은 그가 남긴, 마치 거대한 도끼에 갈라진 듯한 대지를 바라보며 잠시 말문을 잃었다.
그런 그에게 챈들러는 야안이 자신에게 건네준 서신을 바쳤다.
“총관님께서 내주신 것입니다. 읽으시면 사정을 이해하실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 절정의 검사가 있다는 것에 놀라움을 표하다 곧 그가 건넨 서신을 꺼내어 읽었다.
내용은 길지 않았으나, 그는 한참 동안 서신에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다.
대여섯 번을 읽은 시간이 지나서야 그는 서신을 접었다. 그는 챈들러가 절정의 검사였다는 것보다 더 놀라운 사실이 담긴 서신의 내용이 쉽사리 믿기지 않았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그는 챈들러에게 물었다.
“이 서신에서는 총관이 그대의 몸을 치료해 주었다 하였네. 맞는가?”
그 말에 챈들러는 경외적인 어투로 답하였다.
“그렇습니다.”
단호한 그의 대답에 마크의 입가가 일그러져 갔고 그는 잠시 고개를 숙이다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아하하하.”
낭랑한 그의 웃음은 저 산 너머까지 울려 퍼져갔다. 아들이 죽은 뒤 작은 미소조차 보이지 않았던 그가 박장대소하듯이 웃음을 터뜨리자, 긴 시간을 같이한 이제 열두 기밖에 남지 않은 기병들은 매우 놀람을 표했다.
마치 그간의 울분이 담긴 듯 그의 웃음은 한참을 그렇게 메아리쳐 갔다.
타닥, 타닥.
불똥이 흩날리며 모여든 날벌레들을 태워나갔다.
모닥불과 가까이 자리하던 마크 자작은 더 이상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여전히 육체적으로는 크게 고통스러웠으나, 그를 가장 힘겹게 했던 정신적인 고통은 많이 가셔 있었다.
저녁이라 해도 한여름이었다. 거기에 불과 가까이 있는 마크 자작이었지만, 최근 5일간의 무리한 도주에 그의 육체는 망가져 있어 오한에 떨어야 했다.
그는 몰려오는 잠을 쫓아내며, 무뚝뚝하게 자신의 옆을 지키는 챈들러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야안이 탈리아 왕국에서 피난민 2만 명을 데리고 오던 것에 대한 것이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이야기 속 주인공의 일들을 듣듯 그는 그 내용마다 감탄을 터뜨렸다.
“하! 과연 아리스 님의 신관으로서 부족함이 없군.”
그는 그저 ‘과연.’이라는 말만을 연신 중얼거렸다.
서신에 적혀 있는 내용은 놀라운 것이다. 그가 피난민들을 데려오는 과정에서 그분의 종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그로써 본래 익스퍼트 경지였던 챈들러의 무위를 회복했고, 수많은 이들의 중병을 회복했다 하였다.
그러며 말하기를, 아직 신관으로서 부족한 면이 있으나 어쩌면 마크 자작의 몸을 회복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말했다.
그는 이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로서는 남은 생이 5년이라는 시간의 장벽에 부딪혀 살아생전 어쩌면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다.
이 5년이라는 시간도 몸을 무리하지 않고 정양하여야만 가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지난 며칠처럼 몸을 무리하게 움직인다면 언제든 죽을 수 있는 것이 그의 현 상태였다.
하지만 신관의 능력이라면. 아리스 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고매한 의지를 지닌 신관의 신성 마법은 그야말로 기적 그 자체이다.
그 힘의 과정은 너무도 신묘하여 진리의 길을 걷는 현자도 그 현상을 밝히지 못했다. 마법이라고 하지만, 사실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들이다.
그 힘이라면 중급 현자 마스터인 라켄 백작도 포기한 이 몸조차도 최소한 완치는 어려워도 수명을 늘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매틀 요한, 그대가 아니었다면.’
그는 처음 야안의 출사표에 마음이 흔들렸던 자신을 붙잡아 주었던 전 총관을 기억하였다.
묵묵히 15년을 넘게 총관 일을 한 뒤에 마지막에 가서 자신의 남은 생명의 불꽃을 지펴 야안을 남긴 그가 그리웠다.
신세를 진 이는 그만이 아니다. 그의 아들 매틀 카이는 어떠한가?
전쟁에서 자신을 위해 죽음을 맞이한 여러 가신들처럼, 그의 고결한 희생은 아름답기까지 했다.
‘하~ 복수에 미쳐, 나는 잊고 있었군.’
시간이 없다는 것에 흔들려 시야가 좁아졌다. 그들의 희생에 대한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 후에야 복수를 이야기해야 한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야 한다.’
생각을 정리하던 그는 챈들러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 결국 밀려오는 수마를 이기지 못해 잠이 들고 말았다.
챈들러는 자신의 망토를 벗어 잠이 든 마크 자작의 몸에 덮었다. 마크 자작이 왜소한 체격인 탓에 그의 망토는 마크 자작의 몸을 다 덮는 데 큰 무리가 없었다.
그는 잠시 그를 바라보며 자신의 주인 야안에 대해 생각하였다.
그간 그의 주인은 자신에게 숨기고 있는 것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하였다. 그럼으로써 챈들러는 주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놀라움에 젖어들었다.
주인은 자신으로서는 감히 다가갈 수 없는 경지에 오른 검사이면서, 또한 중급에 도달한 현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가 짐작한 것처럼 신관이시기도 했다.
그처럼 놀라운 능력을 한 몸에 지녔음에도 그는 스스로에 대해 크게 부족하다 여겼다. 이는 고대의 비밀을 탐험하던 스승으로부터 무거운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