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97화 (97/385)

야안 97화

31. 자코

마크 자작에게서 온 전령에게서 서신을 받은 야안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서신에는 짧은 대답이 적혀 있을 뿐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의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런 서신의 내용이 너무도 마크 자작다운 답변이었기에 야안은 이번 퀘스트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을 수 있었다.

‘이 같은 분이시라니.’

수하에게 이렇게 끝없는 믿음을 주는 주군이 어디 있을까? 야안은 그의 가장 뛰어난 점은 전술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자신의 사람을 믿어주는 점이라 생각했다.

마크 자작의 답변으로 답답한 걱정거리를 흩뜨리던 야안은 그날 저녁 가족들에게 영지의 일로 몇 달간 영지를 떠나야 한다고 말을 꺼냈다.

“……길어도 1년 안에는 돌아올 것입니다.”

마리는 야안의 그 말에 걱정 어린 얼굴로 아들을 바라보았다.

“아~ 마음이 아프구나. 이제 아론도 너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는데. 지금같이 좋은 때에 가족과 떨어지다니.”

“어머니, 몇 달 뒤면 올 것인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멜리나의 위로에 마리는 고개를 저으며 억지로나마 걱정을 떨치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떠나야 하는 아들의 발을 무겁게 해서는 안 되는 법이지.”

어머니의 미소에 야안도 미소를 머금었다.

이후 그들은 가볍게 차와 과자를 먹고 담소를 나누며 애써 이별의 슬픔을 달랬다.

그들의 이야기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건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아론은 어느새 다가와 야안의 무릎 위에 앉았다. 야안은 그런 아들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과자를 부수어 입에 넣어주었고, 아론은 까르르 웃음을 흘리며 옹알옹알하며 음식을 씹어 먹었다.

그런 아들의 재롱에 가족들은 저마다 웃음을 흘렸고, 야안은 지금의 순간을 기억하고 싶다는 듯 말없이 미소를 머금으며 가족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야안은 영지를 떠나기 전 열흘의 시간 대부분을 수련에 집중하였다.

상대가 악마라 한다면, 지금의 몸 상태로는 그를 상대하기 어렵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감각을 좀 더 날카롭게 다듬을 필요가 있다 판단했다.

하지만 평소에 여러 형태의 이미지 수련으로 실전 감각을 유지하고 있었고, 초감각 덕분에 더 이상의 감각을 다듬는 것은 짧은 시간으로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하였기에 그는 최근 들어 가장 중히 보고 있는 리트담의 저서에 빠져들었다.

처음 그림의 형태가 쥐와 유사한 모습이었다면, 다음의 그림은 외국의 기이한 동물인 원숭이와 유사했다.

다만 그 갈기는 사자를 닮았고, 꼬리는 뱀의 꼬리를 닮았다. 또한, 상체가 기이하게 발달해 있어 그가 지니고 있는 무쇠로 만들어진 거대한 철봉도 쉽사리 다룰 수 있어 보였다.

봉이라는 무기는 대륙에서 크게 쓰이는 무기는 아니었다. 그저 검술관이나 귀족가에서 어린 시절 아이들의 균형 감각을 익히게 하려고 잠시 익히는 무기였다.

한데 원숭이가 취하고 있는 자세는 그 거대한 철봉을 들고 있음에도 기묘하게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림뿐이지만, 워낙 자세하게 그려져 있는 터라 만약 이 같은 존재가 현실에 나타난다면 대단한 실력을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능히, 절정에 들어선 검객과 자웅을 겨룰 만하다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감탄을 불러일으킬지언정 그 외의 별다른 변화는 없었다. 다만, 충고에 따라 매일 일정한 시간을 그림을 살피며 무언가를 깨닫기 바랄 뿐이다.

이전 쥐의 그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 1년이 넘도록 리트담의 저서에서 별다른 진전을 보지 못했다.

야안이 리트담의 저서에서 가장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신이 쥐의 형태의 그림에서 깨달음을 얻은 뒤에도 주술에 대해 여전히 알지 못한다는 점이다.

정보 창에 의하면 고대 위대한 주술사인 리트담이 탄생시킨 함루어를 이용한 모든 주술이 담겨 있는 책자라 하였는데, 정작 자신이 알게 된 것은 주술이 아닌, 미숙한 심연의 일격이었다.

물론 심연의 일격은 그 자신에게 있어 주술을 익히는 것보다 더한 가치를 지녔기에 오히려 반겼다.

다만 야안이 고민하는 것은 리트담의 저서가 자신에게 어떤 형태로 다가오는지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 때문이었다.

야안은 약 석 달 전부터 이 그림에서 가끔 무언가를 느끼었다.

그것은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으나, 그의 초감각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야안은 그 느낌에서 자신이 이 그림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에 한동안 이 그림 속에 빠져들었으나 몇 번 그때의 느낌을 받은 것 이외에는 달라진 점은 없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야안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음을 판단했다.

그는 오랜 고민 끝에, 자신의 능력이 이 그림의 기준에 미치지 않았기에 그러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예전 심혼의 일검을 얻을 때처럼, 능력 이상의 것을 자신의 비상식적인 제6감각에서 본 것같이 이번 일 또한 초감각 덕분에 그것을 느꼈으나, 그것은 지금 자신이 능력 이상을 본 것 때문이라 판단한 것이다.

야안은 수련을 시작한 6일째 되던 날 그것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능력을 올리면 되겠군?’

그에게는 다행히 레벨이라는 이방인의 능력이 있고, 그것으로 주술과 관계가 밀접하다 판단하고 있는 행운에 스탯을 올릴 수 있었다.

그간 야안은 자신의 시간이 많아지면서, 상당수의 몬스터들을 잡아 제법 많은 스탯을 올린 상태였다.

잠시 고민에 잠기던 그는 자신의 정보 창을 열었다.

[이름 : 야안

레벨 : 82

직업 : 전설의 추종자

칭호 : 최초의 이방인

생명력 : 1,120

마나양 : 2,240

명성 : 500

힘 : 42(+15)

민첩 : 40(+15)

행운 : 36(+15)

지혜 : 60(+15)

신력 : 5

마나 : 97(+15)

분배되지 않은 스탯 : 9]

약 1년 반의 시간 동안 야안은 레벨 6을 올릴 수 있었고, 그로써 예전에 남은 3스탯과 합쳐 여유 스탯은 9나 남아 있었다.

본래 그는 이 스탯을 신력에 투자하려 했으나, 앞날이 유동적이라 스탯을 좀 더 모은 뒤에 행하려 했다.

최대한 변수를 없애기 위해 일을 미루어둔 것인데, 지금에 와서는 그런 그의 판단이 맞은 듯했다.

레벨은 악마를 처리하기 위한 여정에서도 올릴 수 있지만, 지금처럼 전력으로 수련할 수 있는 시간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야안은 잠시 생각에 잠기다 남은 스탯 전부를 행운에 투자하였다.

행운의 스탯에 갑자기 9나 투자하였던 탓일까? 무언가 기감이 확장되는 기묘한 느낌이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그런 현상은 30분간 계속되다 이내 사라졌다.

야안은 잠시 호흡을 가다듬으며, 이내 리트담의 저서를 펼쳐 바라보았다.

확실히 행운이 크게 올라가며 무의식을 발전시켰던 덕분인지, 찰나에 스치던 느낌은 좀 더 명확하게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그래도 부족한 듯 예전 쥐의 그림을 보았을 때와 같은 현상은 나타나지 않았다.

야안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이미 모든 스탯을 행운에 부여하였을 만큼, 그의 마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로써 얻는 것이 있다면 좋을 것이나 요행과도 같은 이 일을 통해 바로 무언가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린 뒤였다.

그는 그렇게 호흡을 길게 하고 눈을 반개하며 그 펼쳐진 그림만을 바라보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반나절이 흐르고, 하루가 지났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다.

하지만 야안은 여전히 조급한 모습 없이 마치 솜씨 좋은 도공이 깎은 돌상처럼 꿈쩍도 하지 않고, 앉아서 그림만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림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단 한 번 깜빡임 없이 미동조차 없었고, 호흡은 대단히 길고 얕아 과연 숨을 쉬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이 같은 일은 체력은 둘째라 치더라도 정신적으로 크게 지치는 일이다. 자칫 잡생각에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게 하려고 정신을 모으는 일은 온종일 몸을 격하게 움직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다행히도 그에 대해서 뇌전의 정화가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고, 그간의 수련을 통해 단련된 그의 몸과 마음이 받쳐주었다.

다시 하루가 더 지났다.

그의 모습은 하루 전과 변함이 없었다. 아니, 달라진 것을 찾는다면 리트담의 저서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한층 깊어진 것을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이 작은 변화는 책자 위에 조금씩 쌓이는 먼지 너머의 그림을 바라보던 야안이 반나절 전에 잡은 느낌의 끈을 놓치지 않고 붙들면서 생기는 것이었다.

그 느낌은 미지 너머에 자리한 기이한 느낌이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 금세라도 사라질 것 같았기에, 야안은 긴장의 끈을 놓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이틀이라는 시간이 더 지났다.

야안은 이틀 전에 그 느낌의 끈을 아직도 붙들고 있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약간 몸이 마른 것 빼고는 오랫동안 잠도 자지 않고, 먹지도 않은 채 고행을 한 이치고는 그의 상태는 매우 양호했다.

오히려 피부는 더욱 탄력이 생겼고, 얼굴에는 은은히 빛이 자리했다. 그것만을 놓고 보자면 긴 시간을 보양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도 아무런 변함없이 책을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날이 지나기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아, 야안은 그림이 수면 위로 올라서는 것을 보았다.

그 믿기지 않는 모습에 야안은 혹시 자신이 잠이 들어 꿈을 꾼 것이 아닌가 생각했지만, 그의 그런 의심마저 이내 하얗게 물들어 사라졌다.

* * *

대륙은 열두 개의 나라로 나뉘어 있었다.

나라마다 사는 종족이 달랐는데, 야안 자신은 그 나라 중 자코라 하는 종족으로 이들은 다른 종족에 비해 손재주가 많고, 무기를 다루는 솜씨도 뛰어난 편이었다.

야안은 그곳에서 무기를 수리하는 대장장이 일을 하였다. 그는 오가는 무인들의 무구를 수리해 주면서 살아갔지만 뛰어난 솜씨를 지닌 대장장이는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에게 수리를 맡기러 온 무인들도 그 수준이 대단치 않았고, 맡기는 무구도 볼품없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대대로 대장장이 일을 해오던 야안이었고, 그에게는 이 일 말고는 별다른 재주가 없었다.

태생적으로 힘이 좋아 한때는 그도 무인이 되고 싶어 했으나, 대를 잇기를 원하는 아버지 때문에 그는 그 꿈을 접어야 했다.

세월이 지나, 별 볼 일 없는 대장장이가 되었지만 야안은 아버지의 판단이 옳았다고 생각했다.

가끔 자기한테 무구를 맡기러 오던 무인들의 모습에서 모든 이상향이 깨어졌기 때문이다. 힘을 길러 적과 싸우는 일은 결코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꿈꾸었던 그런 이상적인 일들이 아니었다.

생과 사 사이에 커다란 압박감 속에서 버티고 살아야 했으며, 그 과정에서 몸을 심하게 다쳐 병이 들어야 했고, 알량한 실력을 믿고 쓸모없는 자존심을 내세우다 길에서 객사하거나 병신이 되는 일들이 빈번했다.

그러하기에, 야안은 비록 대장장이 일에 별다른 재미도 흥미도 없지만 그래도 땀을 흘리고 살아가는 지금이 나쁘지 않다 생각했다.

이틀 전에 맡긴 금이 간 방패의 수리를 다 끝내고 쉬고 있는데, 집 밖에서 상당히 웅성웅성하는 소리를 들은 야안은 궁금증이 들어 피곤한 몸을 이끌고 밖을 나섰다.

밖을 나서니 마을 사람 대부분이 나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야안이 넋 놓고 저 너머를 바라보던 친구에게 물었다.

“무슨 일 때문에 다들 이러는 거지?”

야안의 말에 그는 어이없어하다가 이내 그 상대가 야안이라는 생각이 들었던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해 주었다.

“지난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했다 하더군. 그리고 그 승리를 이끈 용사들이 우리 영지에 머문다 하니 마을 사람들이 안달이 날 수밖에.”

그의 말에 야안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마을 사람들이 이처럼 자기 일을 놓고 기다리고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남에게 무관심한 자신도 이처럼 관심이 생기니, 다른 이들은 오죽할 것인가?

지난해에 코벤과 전쟁을 벌인다는 말을 들었던 터라 과연 이길 수 있을까 걱정을 한 전쟁이었다.

현재 적국인 코벤을 이끄는 장군은 오랫동안 자신들을 곤란한 상황에 빠뜨렸던 유능한 장군이기 때문이다.

한데, 그런 장군이 있는 코벤과 싸워 이긴 용사들을 볼 기회였으니 회가 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멀리서 대지가 떨리더니 곧 1만에 달하는 용사들이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어려운 전쟁에서 승리한 용사들답게 하나같이 무위가 대단해 보였다.

그 같은 대단한 일을 벌인 자들이라면 환영하는 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보답을 보여도 좋을 텐데, 평소 대단히 군기가 강한 듯 그들은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질서정연한 모습으로 마을을 지나가기 시작했다.

야안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서 아련한 어린 시절이 떠올라 넋을 놓고 바라보다,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이와 눈이 부딪혔는데, 야안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를 알고 놀라 잠시 주춤거리며 뒤로 걸음을 물러야 했다.

그의 정체는 다름 아닌 이들을 이끌고 있는 코벤의 장군을 이기고 온 대용사였기 때문이다. 그는 황송한 마음에 고개를 숙였고, 야안을 바라보던 대용사 또한 흥미로운 미소를 보이며 수하들을 이끌고 마을을 지나갔다.

꿀꺽.

평소 담력이 세다고 자신하는 야안이었지만, 이번 일은 그런 그도 감당할 수 없는 듯 그의 손은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용사들이 사라지는 모습에 주민은 하나둘씩 자신의 일터로 돌아갔지만, 야안은 한동안 말없이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한참을 가만히 자리하던 야안은 자신의 손을 움켜쥐며 중얼거렸다.

“손이 뜨겁군.”

손이 뜨겁다. 가슴도 뜨겁다. 꼬리도 뜨거워 그도 모르게 바짝 올라섰다.

‘얼마 만이었던가? 이처럼 온몸이 뜨거워진 것은.’

어린 시절 떠돌이 무인들한테서 한두 수를 배워가며 성취를 올렸을 때가 아니었던가? 야안은 그제야 자신이 무엇을 간절히 원하는지 알았다.

자신은 강해지고 싶었다.

엉터리 무구들을 두드리며 살고 싶지 않다. 풋내나는 애송이들이 무인이라고 거들먹거리는 것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말씀하신 대로 대장장이 일은 안정된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 근방에 하나밖에 없는 대장간이기에, 별 볼 일 없는 솜씨에도 언제나 일은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에게 만족하는 삶인가? 최선을 다하는 삶이었던가? 묻는다면 자신은 벙어리가 되고 말 것이다.

무엇이라 대답해도 자신의 이 이중적인 마음을 대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그렇게 한참을 말없이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 해가 저물 때서야 대장간으로 걸음을 돌렸다.

돌아가기에는 자신은 너무 많이 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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