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02화
특히 붉은 눈이 맑고 밝은 자일수록 정령에 재능이 뛰어나다 했는데, 그의 눈은 선홍빛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녀는 자신의 유물이 아들에게 남겨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는데, 이는 자신이 어머니의 유물을 받는다는 것은 더는 고른 공작가에서 살지 못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음이 따뜻한 유모에게 자신의 유품을 부탁하였고, 유모는 마키 경이 가버린 이후 노골적인 지시를 받는 자신을 마지막까지 걱정하다 어머니의 유언대로 유품을 자신에게 남겼다.
어머니의 서신에는 정령을 불러낼 수 있게 되면, 자신의 외가인 붉은 눈 부족을 찾아가라 하였다.
정령을 불러낼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그곳에서는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을 수 있었고, 자신은 그곳의 왕자이기에 어쩌면 상당 규모의 족장 자리도 넘볼 수 있을 것이라 말했다.
라진은 어머니의 서신 내용을 크게 반겼다.
아버지는 애초에 자신의 존재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성내의 하인들조차 자신과 엮이면 크게 잘못되는 것을 알기에 멀리했다.
그나마 정을 준 이는 마키 경과 유모였는데, 마키 경이 전쟁에 떠난 뒤 행방을 알 수 없고, 유모마저 세상을 떠난 뒤부터는 고른 공작가에 라진은 미련 따위는 없었다.
라진은 이후 1년간 어머니가 남긴 정령석을 이용해 정령에 관한 책을 공부하여, 한 달 전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었다.
그와 가장 속성이 맞는 하급 불의 정령과 계약을 하게 되었는데, 이후 그의 능력은 크게 향상되면서 상급 유저의 벽을 넘어섰다.
이는 정령과 계약하면서 정령에게서 그 힘을 이양받았기 때문이다.
정령과 계약한 계약자는 몸속에 정령을 키우게 된다. 이를 두고 고대어로 ‘아바타’라 명하는데 이는 또 다른 자신이라는 뜻이었다.
계약자는 정령과 계약을 하면서 얻게 된 정령의 호흡을 통해 이 정령을 키우게 되는 데 정령과 속성이 얼마나 잘 맞느냐에 따라 정령의 성장 속도가 달라진다.
그야말로 타고나야 하는 것이었고, 정령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이었다.
그가 이 하급 불의 정령과 계약하면서 얻은 힘들은 적지 않았다.
힘을 발동시키면 익스퍼트의 검의 구처럼 정령의 힘의 범위 안에 들어선 이들을 느낄 수 있게 되었고, 육체적인 능력도 상승하였다.
또한, 불에 대한 내성이 생겼고, 초급 현자의 불의 구에 해당하는 위력을 자신이 원하는 형태로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막 상급 유저 수준에 올라선 라진이지만, 하급 불의 정령의 힘을 통해 노련한 상급 유저 두 명을 동시에 상대할 수 있었다.
겨우 1년이라는 시간에 중급 유저에 불과하던 그가 그 같은 큰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라진은 이후 어머니가 주신 유품 중 하나인 푸른 눈동자라는 보석을 팔았는데, 이 보석은 오직 저주받은 숲에서만 구할 수 있는 희귀한 보석으로 어머니가 주신 것은 그중에서도 상급이었다.
이로써 상당한 자금을 가진 그는 예전 마키 경이 출정 전 말해 준 그의 친우에게 부탁하여, 호위를 부탁할 자를 구하려 했고 그는 이곳 여관 주인을 소개해 주었다.
여관의 주인은 자신이 용병 일을 하던 시절 많은 도움을 받은 분의 소개장을 가져온 라진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힘껏 손을 썼다.
하지만 전쟁이 일어나면서 용병 중 상당수가 전쟁에 참여하여 실력 있는 이들을 찾기란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웠다.
더구나 올해 몬스터 토벌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많은 용병을 잃어야 했기에 더욱 어려움이 컸다.
라진은 어머니의 서신을 통해 저주받은 숲에 들어갈 때 여러 주의해야 할 점을 알았기에, 여관 주인의 도움으로 소개받은 용병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형태에 대해 부탁을 해보았으나 역시나 성사되지 못하였다.
그런 와중, 누군가 자신에게 다가왔다.
“저는 베론 야안이라 합니다. 저주받은 숲에 갈 용병을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만 맞습니까?”
그 말에 놀라 라진이 고개를 들어 올려 상대를 바라보았다.
“아!”
라진은 야안을 보자마자 작게 감탄을 터뜨렸다. 자신을 베론 야안이라 소개한 사내는 약간은 촌스러운 모습과 달리 그 기세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본 가문의 기사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웬만한 상급 유저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실력을 지닌 것 같았다.
아니, 자신이 온 힘을 다해도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생각하지 못한 강자의 출현에 라진은 반색을 보였다. 오늘 처음 본 자이지만 느낌이 좋았다.
야안은 진실의 눈을 펼쳐 라진에 대해 알아보다 그가 정령사임을 알고 놀라워했다.
정령사는 보기 힘든 존재이다. 그들은 현자보다 더 희귀한 존재였다.
그 비율이 현자와 비교해도 10%도 되지 않기에, 나라에서는 정령사가 나타나면 준귀족의 작위는 물론 일정 지원금을 내주었다.
이는 단순히 정령사가 희귀한 존재여서만이 아니라, 그 상성에 따라 다르나 최소 중급 정령 마스터까지는 무난히 성장할 잠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구존 중 고위 정령사가 세 명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정령사의 성장력은 가장 독보적이다.
야안은 워낙 숫자가 적고 대부분 왕성에서 일하기에 지금껏 단 한 번 마주치지 못한 정령사를 만난 것을 순수하게 반겼다.
현자로서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정령의 힘을 다룬다는 정령사의 정령의 호흡이란 어떤 것인지, 정령사가 펼치는 힘은 어떻게 적용이 되는지 등 여러 가지로 궁금한 점들이 많았다.
하지만, 그가 정령사인 것만큼이나 놀라운 것은 그의 출신 성분이다. 그가 붉은 눈 대부족의 왕자이며, 또한 고른 공작가의 자제라는 사실이었다.
비록 진실의 눈에서 얻은 정보를 조합해 보면 고른 공작가에서 압박을 견디지 못해 나온 비운의 귀족 자제였으나, 저주받은 숲에서 왕과 같은 권력을 가진다는 붉은 눈 대부족의 왕자의 신분은 공작가의 자제만큼이나 대단한 출신 성분이었다.
야안은 이 기이하고 대단한 배경을 가진 사내에 크게 흥미가 돋았다.
그가 알아낸 것이 정확하다면 이자는 뒤늦게 자신의 재능을 알아차린 정령에 한해서는 천재적 소질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비록 정령사에 대해 그다지 아는 바가 없으나, 상식적인 선에서는 알고 있었다.
그가 아는 상식으로는 재능이 뛰어난 자도 고작 1년도 되지 않는 시간에 정령과 계약하는 일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보통은 3~5년을 공부하며 수백 차례 계약을 시도해야 했고, 늦는 경우는 10년을 넘기는 경우도 허다했다.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정령과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까다로운 조건이 성립되어야 한다. 재능이 뛰어난 자가 가장 정령의 축복을 많이 받는 어린 시기에 뛰어난 스승 밑에서 공부한다면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나이가 20대 후반에 달하고 별다른 스승도 없이 정령에 대한 간략한 책자 하나를 들고 스스로 공부하여 1년도 되지 않아 정령과 계약했다는 것은, 고대 엘프들이나 가능한 재능이었다.
그야말로 구존의 재목이라 해도 무방한 존재이다.
그 스스로는 검을 중히 여기는 고른 공작가에 살아 자신의 재능이 얼마나 괴물 같은 것인지 모르는 것 같지만.
‘저 같은 재능을 지닌 자라면, 붉은 눈 대부족의 왕자로서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붉은 눈 대족장이라면 그의 가치를 한눈에 알 수 있으리라.
일이 그렇게 된다면 라타샤 마을에서 도움을 얻는 일이 그가 생각한 것보다 더 쉬워질지 모른다.
야안은 그에게 다가가 이미지 마법을 걸어 호감을 끌어냈다.
그러면서 정중히 예를 보였는데, 그 또한 상급 유저 경지에 오른 자라 자신이 은연히 흘리는 기운을 알아본 듯했다.
라진은 잠시 나이에 맞지 않은 야안의 무위에 놀라다 이내 자신의 실수를 알고 인사하였다.
“죄송합니다. 라진이라 합니다. 혹시 용병이십니까?”
라진은 야안이 몇 년간 영지의 총관 일을 하게 되면서 시골 귀족의 분위기를 자연스레 가지게 되어 묻는 것이었다.
그 말에 야안은 고개를 저었다.
“용병은 아닙니다. 다만, 저 또한 저주받은 숲에 볼일이 있던 중 이야기를 듣게 되어 동행하고자 합니다.”
“저주받은 숲에 볼일이 있으시다는 말씀이십니까?”
라진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야안의 그 어투를 통해 다른 왕국의 출신임을 알고 있었기에 저주받은 숲에 볼일이 있다는 야안의 말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저주받은 숲과 붙어 있는 체만 왕국에서도 약간의 거래 이외에는 교류가 없다. 한데 다른 왕국 사람이 저주받은 숲에 무슨 용건이 있을 것인가?
라진의 의문을 짐작하기라도 한 듯, 야안은 화답하였다.
“선대의 일로 인해 한 마을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붉은 눈 부족의 혼혈 출신이라 들었습니다. 여건이 되신다면 호위의 보답으로 저의 일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야안의 말에 라진은 잠시 고민하다 말했다.
“저 또한 붉은 눈 부족을 찾아가는 일은 처음입니다. 제가 그대의 일을 도와줄 수 있을지는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여건이 된다면 그대의 일을 돕도록 하겠습니다.”
라진의 말에 야안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야안의 허락에 라진은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대 같은 강자가 동행해 준다니 정말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용병들을 설득하러 나갔다 오던 여관 주인은 일이 생각보다 잘 풀리지 않자 찡그리며 여관을 들어오다, 어제 본 푸른색 방의 손님과 라진이 대화하는 것을 보고 반기며 다가왔다.
“라진 씨, 혹시 이야기가 성사된 것입니까?”
그의 말에, 라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렇습니다. 야안 씨와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공증을 부탁합니다.”
여관 주인은 라진이 막연히 상당한 강자라 생각하던 야안과 일이 성사되었다 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은인에게 겨우 체면치레는 한 것이다. 물론 최소 두세 명의 실력자를 더 구해야 하겠지만, 야안과 같은 강자가 합류한 것으로 지금보다 이야기가 쉬워질 것이다.
“물론입니다. 계약서를 가져오죠.”
여관 주인은 잠시 후 준비된 계약서를 가져왔다. 계약서에는 상당한 금액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는데, 야안과 라진은 미리 이야기한 바가 있어 그것을 지우고 붉은 눈 부족 마을에 도착한 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야안이 하고자 하는 일을 돕겠다는 것으로 계약 조건을 바꾸었다.
곧 그들의 계약서에 공증인으로서 사인한 여관 주인은 계약이 성사되었음을 크게 기뻐하며 종업원에게 소리쳤다.
“이봐, 내 방에 있는 위스키를 가져와. 통으로 말이야.”
주인의 말에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통으로 말입니까?”
그의 방에 있는 위스키는 외국에서 가져온 상질의 위스키로 평소 그가 좋은 일이 있을 때만 꺼내 마시는 것이었다.
한데 그것을 통으로 가져오라 말하니 종업원은 확인차 다시 묻는 것이다. 여관 주인은 그의 말뜻을 알고 호쾌하게 말했다.
“그래, 이같이 기쁜 날이 아니면 언제 먹을까?”
아직 대낮이었지만, 흥이 돋은 여관 주인은 제대로 술판을 열 생각인 모양이었다.
곧 종업원이 위스키와 안주들을 가져왔고, 여관 주인의 주도 아래 야안과 라진은 그날 늦은 저녁까지 술을 마시며 서로 친분을 다졌다.
불의 정령사인 라진은 야안만큼이나 술이 강한지라, 여관 주인은 그 괴물 같은 주당들에 혀를 차다 꼬꾸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