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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05화 (105/385)

야안 105화

그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라진은 자신을 보며 미소를 짓는 야안의 어깨를 툭 치며 앞장서 나아갔다.

잠시 그들이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아이는 낑낑거리는 개에 이내 정신을 차리며 곧 다른 일을 주선하러 몸을 움직였다.

여관의 방은 큰 것을 잡았지만 대련을 하기에는 부족한 공간이라, 야안은 라진에게 불의 구슬의 회전 속도를 올리는 것을 연습하게 했다.

그들이 상대해야 하는 것은 저주받은 숲의 몬스터들이었고, 그들 대다수가 대형 몬스터이기에 강력한 위력이 필요했다.

라진도 그것을 알기에, 불의 구슬에 회전을 가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이나 정령의 호흡으로 불의 기운을 모아야 했을 정도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야안은 방이 협소하다지만 검 한 번 내려칠 수 있는 공간이 있었기에, 단순한 형태로 검을 펼치며 검의 기세를 줄이는 데 최선을 다했다.

식사 때 외에 대부분 시간을 수련에 힘써야 했던 그들은 다음 날 오전, 손님이 찾아왔다는 여관 종업원의 말에 방을 나섰다.

밑으로 내려오니, 검은색의 큰 두건과 망토로 자신의 모습을 감춘 자가 있었다.

그자라는 느낌이 와 그에게 진실의 눈을 펼친 야안은 그자가 사내가 아닌 여인임을 알게 되었고, 현재 그녀가 곤란한 사정에 처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로즈. 하얀 까마귀 부족의 전사 계급 아버지와 노예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이었다.

본래 부족은 노예라는 개념이 없기에, 그녀의 어머니를 첩으로 인정해 준 아버지 덕분에 그녀 또한 노예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10년 전 아버지가 다른 부족 간의 전쟁에서 크게 패하게 되어 그 책임으로 부족에서 쫓겨나면서 그녀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전쟁에서 입은 부상은 시간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고, 결국 아버지는 몸져누워야 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부족에서 쫓겨날 당시 가져온 재화는 금방 바닥을 드러냈고, 결국 그녀의 어머니가 일을 나섰다.

하지만 평생을 노예로 살던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몇 되지 않았다. 남편의 약값을 벌려 어려운 일을 자처하던 그녀는 몇 년 사이 몸이 크게 악화되어 병에 걸려 생을 마감하였다.

그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열다섯 살이었고, 그 같은 비극을 받아들이기에는 준비되지 않았다.

하지만 죽으라는 법은 없었는지, 무재가 출중해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훈련을 받았던 덕분에 하급 유저 이상의 실력을 지닐 수 있었던 터라, 곧 숲의 자식의 모임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여러 일을 완수하며 상당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대부분 그의 아버지를 위한 약재를 사는 데 들어가 정작 그녀가 쓸 수 있는 돈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녀는 지금의 상황에서도 단 한 번도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노예의 신분이었을 것이고, 어머니도 죽을 때까지 노예로서 살아가며 치욕스러운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하얀 까마귀 부족은 체만 왕국보다 여성의 지위가 낮은 곳이었다. 귀족 이상이 아니라면 여자는 그저 집안일만 하는 존재에 불과한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늦게 자식을 보았던 것 때문인지 유난히 그녀를 아꼈고, 그녀가 혼혈이기에 누군가 그녀에게 해코지할까 검을 가르쳐 주었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기이하고 재미난 이야기를 해주거나 먹을거리를 사와 그녀에게 내주곤 했다. 그 덕분에 그녀의 유년 시절은 즐거운 일들로만 가득했다. 어머니의 본래 신분이 노예라는 점은 그녀에게 문제 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시선이 어떻든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의 어머니를 아꼈고, 자신 또한 다른 집의 아들 이상으로 대해 주었으니.

어린 시절 누구보다 강한 이라 생각하던 아버지가 벌써 10년이 넘게 왜소한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계시는 것을 볼 때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했다.

치료사는 몇 년 가지 못할 것이라 말했으나, 큰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각종 좋은 약재를 구할 수 있게 되어 5년 이상을 생을 더 연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에 다다른 듯했다.

이제 의식을 차리셔도 말할 기운이 없어 그저 자신만을 말없이 바라보다 다시 잠이 드시는 게 고작이었다.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터라, 그녀는 일도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하지만 점차 돈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일을 해야 한다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큰 건수가 있다는 말에 지원하게 되었다.

저주받은 숲의 길잡이 일이었는데, 예전 아버지로부터 어디가 안전한 길이며 대처하는 방법 등을 배운 터라 무리한다면 열흘 거리도 문제없었다. 다만 아버지가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니 그녀로서는 그렇게 무리할 생각은 없었다.

조직에서 요구한 대로 나흘 거리까지만 안내해 주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조직에서 선금을 받을 수 있다 했으니 모아둔 돈과 이번에 받을 돈을 합치면 성수를 살 수 있을 것이다.

지난번 치료사가 가망 없다고 준비해야 한다 말할 때도 성수의 힘을 기반 삼아 지금까지 버텨왔으니 이번에도 명을 이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녀에게 있었다.

험난한 삶을 버텨온 그녀에게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버팀목이 되기에, 그녀는 이번 계약을 반드시 따낼 각오를 하고 있었다.

라진은 두꺼운 옷과 얼굴 대부분을 가린 두건을 한 자에게서 음습한 느낌을 받았다. 생각보다 체격이 왜소하다 생각했는데, 이내 그가 다가와 인사를 하자 잠시 놀람을 표했다. 여인이었을지는 몰랐던 것이다.

그녀가 여인이라는 것을 몰라 의뢰인이 놀라는 모습을 자주 봐왔기에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자신을 소개했다.

“13호입니다. 검은 중급 유저 수준이며 특기는 단검과 응급치료입니다.”

야안은 이미 그녀의 실력을 알아차렸기에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다 라진을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넌 어때?”

절정의 경지에 도달한 야안이 인정한지라 라진 또한 인정하려 했으나, 두꺼운 옷과 두건으로는 정확히 그 실력을 측정할 수 없기에 말했다.

“야안 너 정도면 보면 알겠지만, 나는 그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고. 실력을 확인하고 싶은데 괜찮은가?”

그녀는 라진이 자신보다 상위의 실력자임을 알고 있었지만, 별다른 어려움 없이 승낙했다.

비록 그가 상급 유저라 하지만, 그녀는 벌써 10년 동안 살기 어린 전장을 뛰어다녔기에 그 경험을 기반으로 상대한다면 어느 정도 선까지는 맞설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장소는 여관 주인에게 부탁해 마구간 옆의 빈터에서 대련을 하기로 했다.

야안의 중재 아래 시작된 대련은 로즈 그녀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힘겹게 흘러갔다. 라진은 불의 정령과 계약을 하면서 일반적인 상급 유저보다 신체 능력이 우수해져, 그녀의 그 살기 어린 경험도 그 압도적인 힘 차이 탓에 번번이 통하지 않았던 것이다.

더구나 라진 또한 오랫동안 마키 경에게서 훈련생들과 다름없는 거친 지도 대련을 해왔기에 이미 경험은 풍부한 상태였다.

결국 그녀는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 있는 단검들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10분을 채 버티지 못하고 제압되고 말았다.

라진은 그녀의 목 근처에 둔 검을 검집에 집어넣으며 만족한 듯 미소를 보였다.

“음~ 역시 야안 말대로 이 정도 실력이면 충분하겠는데. 좋아, 계약하지.”

그러며 돈을 가져오기 위해 자리를 비웠고, 야안은 지친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선금의 70%를 달라고 했는데, 이유가 무엇이오.”

로즈는 지친 숨을 가다듬으며 야안에게 되물었다.

“그 이유를 알 필요가 있습니까?”

“사실 70%를 선금으로 준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부담이 되는 일이오. 더구나 우리는 이곳에 초행이기도 하니 그대 조직이 우리를 속이는 건지 어찌 알겠소. 타당한 이유가 있다면, 알고 싶소만.”

야안의 요구는 무리한 것이 아니기에 로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지인이 중한 병환이 있어 그렇습니다.”

그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던 야안이 잠시 생각하는 척하다 말했다.

“무슨 병이오? 나 또한 고향에서는 대단한 치료사로 이름이 높았소. 괜찮다면 한 번 그 병환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소.”

야안의 말에 그녀는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경계하며 물었다.

“왜 그 같은 호의를 보이시는 겁니까?”

“이유는 하나요. 생각한 것보다 그대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이오. 만약 지인의 병환이 아니라면 더 긴 시간을 안내해 줄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소?”

명확한 야안의 이유에 그녀는 경계를 풀고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으시기만 한다면, 열흘 거리까지 책임질 수 있습니다.”

“좋소, 그럼 계약은 성립되었군.”

곧 라진이 선금을 가져왔고, 야안은 그에게 지금의 사정을 설명하며 그녀와 잠시 나갔다 오겠다고 말했다.

그 말에 라진은 그 사내에게서 받은 청동 패와 선금을 내주며 말했다.

“좋아, 그럼 같이 가지. 계속 방 안에서만 있었더니 갑갑하기도 하고 말이야.”

“그래, 다만 치료 과정에는 사정이 있으니 자리를 비켜주면 좋겠어.”

아직 그에게 자신이 아리스 님의 사제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기에 하는 말이었다.

비밀은 아는 자가 적을수록 가치가 있었다.

후에 그가 부족에게 인정을 받은 뒤 그곳에서 자리를 잡게 되면 그때 자신의 비밀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라진은 야안의 말에 별다른 의심 없이 알겠다고 말을 하며, 앞서 가는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집은 여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약값으로 대부분을 써버렸기에, 집은 허름한 편이었는데 문을 열자마자 약재 냄새가 그들을 먼저 반겼다.

로즈는 치료사 이외에 타인을 자신의 집에 데려온 것은 처음이라 어색했으나 곧 아버지가 뒤척거리는 것을 보자 다급히 다가갔다.

“아버지, 일어나셨어요.”

그녀의 말에 그는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야안과 라진을 바라보았다.

“저분들은 먼 곳에서 온 치료사분이세요.”

그녀의 말에 야안은 그에게 묵례를 하며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앙상한 팔을 잡아 몸을 살폈다.

잠시 말없이 그의 몸을 살피던 야안은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나쁘지 않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기대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로즈에게 말했다.

“완치는 어렵겠지만, 후에 성수를 사용한다면 완치는 가능할 정도까지는 낫게 할 수 있겠소.”

“그, 그것이 정말입니까?”

야안의 말이 믿기 어려운 듯 그녀는 몇 번이고 물었고, 야안은 고개를 주억거리며 답했다.

“물론이오. 그대는 앞서 계약한 것을 지켜주기만 하면 될 것이오.”

그 말에 그녀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원하신다면, 그 이상의 거리도 안내해 드리지요.”

“좋소. 그럼 치료를 시작할 테니 자리를 비워주지 않겠소? 사정이 있어 그러하니 이해해 주길 바라오.”

확신에 찬 야안의 눈이었기에, 로즈 또한 잠시 걱정 어린 눈으로 아버지를 바라보다 곧 자리를 비켜주었다.

야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내에게 마케와 힐을 걸어 몸을 편안하게 만들었고, 이내 사내는 몸이 노곤해지는 것을 느끼며 어느새 잠이 들었다.

잠이 든 사내의 머리에 손을 올린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리젠, 리젠.”

두 번의 리젠을 펼쳐 굳어진 그의 뇌혈관 부분에 펼쳐 막힌 부분을 순환시킨 야안은 다시 손을 내려 그의 병의 문제가 되던 부분들을 하나하나 고쳐나갔다.

그렇게 야안은 약 두 시간에 걸쳐 치료를 했고, 여덟 번의 리젠을 펼친 끝에 자신이 약속한 것 정도로 상태를 호전시킬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리젠을 전체적으로 펼친 그는 그제야 손을 떼어내며 작게 한숨을 흘렸다.

마크 남작과 비교한다면 사내는 양호한 편이지만, 오랫동안 병상을 지켰기에 그 정도의 상태를 만드는 데 상당한 심력을 소비해야 했다.

확실히 야안의 치료가 빛을 보는 듯, 그의 거친 숨소리는 길고 고른 형태로 바뀌었고, 창백한 그의 얼굴에는 은은히 홍조가 흘렀다.

더 이상 식은땀도 흘러내리지 않았으며, 오랜만에 편안히 잠든 듯 입가는 살짝 올라가 있었다.

야안은 그가 마지막으로 성수를 섭취한다면 예전 전성기 때의 50% 정도의 힘을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비록 오랜 병상 생활로 근육이 약화되었으나, 그는 야안의 치료를 통해 탁기가 사라지고 성수를 마시면서 근원적 힘을 복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로써 잠재되어 있던 상급 유저 수준의 마나를 다룰 수 있을 것이니, 야안의 생각처럼 본래 신위의 50%가량의 기량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이후 몇 달간 몸을 정양하고 시간이 더 지나 수련을 통해 줄어든 신체 능력을 되찾을 수 있다면 80% 이상의 기량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생각한 대로 좋은 결과를 보여서 다행이군.”

그는 그래도 완치가 된 것은 아니기에, 다시금 그에게 마케를 걸어주고, 밖에서 초조하게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기 위해 방을 나섰다.

라진은 두건 사이로 약간은 검은색 피부에 검은 눈과 회색 머릿결 일부만을 보이는 로즈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의 그 무뚝뚝한 눈빛이 아닌, 걱정 어린 한 여인의 눈이 자리하고 있었다.

몸을 가린 망토 사이로 완연하게 드러난 여인의 체형을 볼 수 있어, 처음 왜 그를 사내로 생각했는지가 의문이었다.

그는 걱정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 예전 노환에 매번 침대에 누워만 있던 유모 때의 일이 생각나, 말을 꺼냈다.

“야안, 그 녀석은 비록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지는 못했지만, 결코 자신이 지키지 못할 일을 말하는 녀석이 아냐. 그 녀석이 치료할 수 있다고 했다면 반드시 그렇게 될 거야.”

걱정 어린 그의 말에 로즈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아무런 말 없는 그녀에게 다시 무어라 말을 하려 했지만, 그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자신도 유모를 치료하기 위해 몇 명이고 치료사를 불러 그녀를 고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를 겪으면서 희망 고문이라는 것이 얼마나 지독한 것인지 잘 알았기 때문이다.

잠시 어색해하던 가운데, 시간을 흘렀고 곧 방 안에서 야안이 모습을 보였다. 힘든 치료였는지 평소 흘리지 않던 땀자국이 남은 야안을 보던 라진은 이내 그가 미소를 보이자 그 또한 미소를 보이며 그를 반겼다.

“다행이다. 수고했어.”

마치 제 일처럼 기뻐하는 친우의 모습에 야안은 그의 어깨를 툭 치더니,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다가가 말했다.

“약속한 일은 끝났습니다. 이제 그쪽이 약속을 지키시기만 하면 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녀는 흑요석 같은 검은 눈동자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고, 라진은 그녀의 그 모습에 잠시 말문을 잇지 못했다.

라진은 그녀가 아버지가 있는 방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쉽사리 눈을 돌리지 못하다, 이내 야안이 앞서 나가자, 그제야 정신을 차려 이내 고개를 저으며 야안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그로부터 사흘이라는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녀가 모습을 보였다. 단순히 그녀만이 아닌, 그녀의 아버지 또한 같이 찾아왔는데, 성수를 마시고 회복하였는지 안색이 좋아 보였다.

하얀 까마귀 부족 특유의 어두운 피부 톤과 회색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당당히 보이는 그는 야안이 생각한 것보다 그 무위가 상당 부분을 회복했는데, 이는 저주받은 숲 부족의 비술 때문이었다.

근육의 양이 그 짧은 시간 사이에 20%가 증가해 본래 무위의 70% 이상을 회복한 듯했다.

그가 대부족의 유망한 전사였던 것을 상기한다면, 그 치열한 전투 경험 덕분에 지금이라도 웬만한 상급 유저와 맞먹는 무위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딸에게서 은인인 야안을 소개받은 그는 왼손을 주먹 쥐고 그 위에 손바닥을 펴 올리며 무릎을 꿇었다.

저주받은 숲 부족의 은인을 만날 때 보이는 최고의 예법이었다.

“포를란이 은인께 감사의 인사를 올립니다.”

경건한 그의 인사를 받아들이던 야안은 서둘러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며 말했다.

“그저, 계약의 조건이었을 뿐이니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야안의 말에도 상당히 고지식한 인물인 듯 포를란은 세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겨우 길 안내에 대한 대가로 치부하기에는 받은 은혜가 큽니다. 딸아이보다 숲의 길은 제가 잘 알고 있습니다. 원하시는 곳까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포를란의 말에 야안과 라진은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는 일이다.

특히 로즈에게 진실의 눈을 통해 알아낸바 그가 본래 하얀 까마귀의 전사였음을 아는지라 하얀 까마귀 부족까지 가는 데 큰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보았다.

“그렇게만 해주시면 감사할 일이지요.”

야안의 말에 포를란은 자신이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 작게 안도하다, 이내 물었다.

“한데, 무슨 일로 저주받은 숲으로 가시는 것입니까?”

그 말에 야안이 라진을 바라보았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해 줘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대답했다.

“붉은 눈 부족을 찾아가고자 합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포를란은 크게 놀랐다.

붉은 눈 부족은 하얀 까마귀 부족이 모시는 부족이기 때문이다. 저주받은 숲의 절대자가 사는 부족에 찾아가고자 하자, 비록 버림받았다 하나 가슴 깊이 전사로서의 자부심이 강했던 그는 경계를 보이며 물었다.

“붉은 눈 부족은 아무나 만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나, 포기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의 말에 라진은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붉은 머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정령과 계약 이후 더욱 선명해진 진홍색 눈이 드러났다.

포를란은 붉은 머리의 사내가 선명한 진홍색 눈빛을 보이자 깜짝 놀라 뒤로 걸음을 물리다, 이내 무언가 중얼거리더니 곧 주저앉듯이 무릎을 꿇으며 라진에게 대례를 표했다.

“숲의 일족이 왕족을 뵙습니다.”

그렇게 예를 표하는 것은 포를란만이 아닌 로즈도 마찬가지인 듯 그녀 또한 자신의 아버지를 따라 대례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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