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06화
34. 하얀 까마귀 I
라진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자 놀라며 물었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소.”
그의 물음에 포를란은 여전히 몸을 숙이며 대답했다.
“붉은 눈 왕족의 피에는 고대 불의 일족의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왕족은 붉은 눈을 지니고 있지요. 제가 미천하여 작은 비술로 정령의 유무를 살펴본 뒤에야 알아보았으니 이 죄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야안은 초감각을 가진 자신도 최근 들어서야 정령의 유무를 살필 수 있었는데, 비술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자 흥미로운 듯한 눈빛을 보았다.
라진은 지금의 상황이 곤란한 듯 그들을 일으킨 후 이내 평소 걱정하던 점에 대해 물었다.
“나의 어머니께서는 붉은 눈의 공주기는 하나 나는 혼혈이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겠소?”
그의 말에 포를란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왕자님께서는 이미 붉은 눈 부족 최적의 조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붉은 머리에 진홍색 눈빛을 지니고 있으며 왕족의 마지막 조건 중 하나인 불의 정령을 거느리고 계십니다. 혼혈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이곳 체만 왕국의 헛된 지도자들의 어리석은 소견들뿐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어느 부족도 감히 부정할 수 없는 왕족이십니다.”
경건한 그의 말에 라진은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이 아직 야안에게 이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을 상기하여 그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자신이 범상치 않은 신분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고 있음에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진 바가 없었다.
그 모습이 더욱 맘에 든 라진은 크게 미소를 보였다.
“정말이지 친구 하나는 잘 사귀었군.”
작게 중얼거리던 그는 포를란에게 명했다.
“그대가 나의 신분을 인정하니 명하겠네. 우리를 하얀 까마귀 부족에게 데려다 줄 수 있겠는가?”
라진의 명에 포를란은 크게 반기며 대답했다.
“영광스러운 임무를 맡겨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좋아, 출정은 내일 오전에 하도록 하지. 준비해 주게나.”
그의 말에 포를란은 딸을 데리고 방을 나섰고, 야안은 내심 찔리는 듯 볼을 긁적이던 라진에게 말을 건넸다.
“나 또한 너에게 알려주지 못한 비밀들이 있으니 그런 비밀들을 숨겼다 해서 미안할 것 없어. 그런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해도 우리가 친구가 아닌 것은 아니잖아.”
라진은 마치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방긋 웃음을 보이며 대답했다.
“그래,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오든 우리는 친구지.”
“하하, 그래.”
이번 일로 서로의 친분을 더 쌓는 계기가 된 터라, 그들은 그날 수련을 일찍 끝내고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누었다.
다음 날, 이른 시간부터 준비한 물건들을 챙기는 것을 끝낸 야안과 라진이 식사를 마칠 때쯤 포를란과 로즈가 모습을 보였다.
그들은 야안과 라진에게 각각 예를 보였고, 라진은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그들에게 물었다.
“우리는 어디로 어떻게 이동하게 되는가?”
그의 말에 포를란은 지도의 잘못된 부분들을 수정하면서, 행로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라진이 가진 지도는 큰돈을 주고 믿을 만한 정보 단체에서 산 것이지만, 아무래도 타지 사람들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저주받은 숲이기에 지도의 30% 정도를 새로 그려야 했다.
그 모습을 보며 라진은 안도했다.
“후~ 잘못했으면 전혀 엉뚱한 곳으로 들어설 뻔했군.”
“그러게 말이야. 그 상인에게 감사해야겠군.”
그들은 한 시간가량 포를란의 설명을 들으면서 하얀 까마귀 부족으로 가려면 예상하는 시일보다 긴 한 달가량을 움직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사실 포를란은 그보다 더 짧은 시간에 도착할 길을 알고 있었지만, 인원이 네 명밖에 되지 않은 이 인원으로는 그 지름길을 이용하기보다는 돌아가는 길이 더 안전하다 판단했기에 안전한 행로로 움직이기로 했다.
로즈는 14년 만에 보는 아버지의 그 활기찬 모습이 좋아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바라만 보았다. 비록 고된 시간을 보내면서 그 모습이 많이 상하셨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말씀하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단단한 어깨를 보자면 어린 시절처럼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라진은 잠시 그런 로즈를 살펴보다 그녀가 미소를 짓는 듯 눈가에 호선을 그리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야안은 설명을 끝낸 포를란에게 세세한 것들을 더 물어보았고, 곧 그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다 성문이 열 무렵이 되어서야 만족한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포를란께서 예상한 것과 다르지 않다면 지금의 세력 구도는 80% 이상이 비슷하겠군요.”
야안의 말에 포를란은 지도의 몇 군데를 표시하며 말했다.
“이곳들은 초대형 몬스터들이 살고 있는 곳이니, 어쩌면 90%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들 대부분이 300년 이상을 살아온 호도칸급의 괴물들이니.”
야안은 호도칸급의 괴물이라는 말에도 별다른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포를란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 포를란은 야안이 어쩌면 자신이 파악한 것보다 더 뛰어난 실력자일지 모른다 생각했다.
곧 정오가 지나 성문이 열렸고, 준비를 마친 그들은 저주받은 숲 속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 * *
저주받은 숲 속은 그 불길한 이름과 달리 아름다웠다.
겨울임에도 총천연색 빛깔을 내는 식물들은 녹지 않은 눈이 뒤섞여 눈이 햇빛을 반사해 더욱 돋보였고, 종류를 알 수 없는 작은 새들 또한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 마치 행복한 동화 속 세상에 들어선 듯했다.
질리지 않는 새들의 노래를 들으며 야쿤을 몰아가던 그들은 중간 중간 포를란의 지시에 따라 길을 몇 번이고 바꾸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여섯 번 이상을 길을 바꾼 뒤에야 확신을 가진 듯 말했다.
“세력이 바뀌었습니다. 이곳을 지배하던 노란 늪지기가 누군가에게 당한 모양입니다. 그 때문에 이곳은 아직 영역 분쟁 중이군요. 아무래도 행로를 다시 짜야겠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맞으면, 이곳은 상당히 위험한 지역이었다.
당장 몬스터들을 만나 전투를 한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다.
로오통을 구해 이미 몸에 발랐다고 하지만, 세력에 밀려 떠도는 몬스터들과 조우할 확률이 높았다. 그들이 로오통의 향을 싫어한다고 해도, 생명보다 우선순위에 있지 않았다.
그는 그 점에 대해 보충 설명하며, 이틀 거리로 뒤로 물러선 뒤, 예정했던 길에서 좀 더 우회하기로 했다.
그는 부러진 가지의 위치나, 새들이 사는 터를 살피며 이곳이 어떤 몬스터들의 영역인지 알아내며 움직였다. 그 때문에 이동 속도는 상당히 느렸지만 몬스터들의 분쟁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음에도 그들의 기척을 느낄 수 없었다.
야안은 물론 라진도 그의 흔적을 보는 솜씨에 혀를 내둘렀는데, 그는 그들의 칭찬에 손을 저으며 답했다.
“이 정도는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하얀 까마귀 부족의 전사라면 이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이지요. 대전사였다면, 저처럼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입니다.”
숲에서 싸운다면 같은 경지의 기사 두 명 정도는 무리 없이 상대한다는 대전사의 존재에 대해 라진이 궁금하여 물었다.
“대전사는 어떤 존재인가? 그 수는 몇이나 되고?”
라진의 궁금증에 포를란이 잠시 멈춰 설명했다.
“대전사는 숲 밖의 인간들이 말하는 절정의 경지에 들어선 자라는 정도만 아실 것입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바로 이곳 숲의 비호를 받는 자들이지요. 그들은 이 숲의 기운을 받아 완성한 자이기에, 숲 속에서라면 여타의 몬스터들처럼 신체 능력 등이 크게 향상됩니다.”
포틀란은 숨을 잠시 고른 뒤 말을 이었다.
“또한 지혜가 크게 깊어져 대부분 작은 부족의 족장을 맡기도 하지요. 저희 하얀 까마귀 부족에서는 그 수가 일곱이나 됩니다.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어쩌면 그 수가 늘어났을지 모르지요. 제가 나서기 전에 그런 조짐을 보이는 이가 세 명 정도가 있었으니 말이에요.”
잠시 말을 멈추던 그는 다시 발견된 몬스터의 흔적에 길을 바꾼 뒤 말을 이었다.
“숲에는 붉은 눈 부족의 지배를 받지 않는 부족들이 있을 정도로 수많은 부족이 존재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 약소 세력이라 그들을 제하고 볼 때, 숨겨진 자들까지 합한다면 그 수는 300분 정도가 되겠군요. 이것은 어디까지나 저의 짐작이니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 변수를 합한다 해도 그 미만은 아닐 것입니다.”
놀라운 이야기였다.
그의 말은 적어도 기사가 300은 된다는 말이다. 그 전력이면, 군사 강국인 마일드 왕국은 물론이고, 왕국 연합 중 그 세력이 중상위권에 달하는 체만 왕국과 스키티 왕국이 합세한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숲 속에서는 두 배 이상의 실력을 보인다 하니 숲 속에서 싸운다면 제국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라진은 검을 지향하는 공작가의 사람이기에 그것이 무슨 말인지를 잘 알아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대단하군. 도대체 체만 왕국은 이같이 무서운 저력이 있는 자들을 무시한단 말인가? 아무래도 체만 왕국은 큰 실수를 하는 것 같군.”
어쩌면 체만 왕국은 이 같은 사실을 모를 수도 있다 생각했다. 저주받은 숲의 부족들은 워낙 폐쇄적이니,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을 두고 자신들의 기준 아래 평가했다면 지금처럼 인식을 새겼을지 모른다.
야안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왜 그가 숲의 사람이었음을 그처럼 자랑스럽게 여기는지 알 수 있었다.
군사력이 그처럼 강해지기 위해서는 단순히 강력한 군 체제만으로는 불가능하다. 무기를 만들기 위해 금속 제련 기술이 발전되어야 했고, 전사들을 비롯해 인재들을 육성할 수 있는 복지가 발전해야 하며, 다양한 병법을 펼치기 위해 그 지닌 문학 수준도 높아야 했다.
이는 숲 밖의 어느 왕국에 못지않게 뛰어난 문화 강국임을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붉은 눈의 부족이 이곳을 다스린 지 벌써 800년을 넘어섰다 하니, 정치 체계 또한 왕국보다 더 뛰어날 것임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야안이 후에 알게 되는 일이지만, 이들의 정치 수준은 왕국과는 그 궤를 달리하면서도 합리적이었다.
이곳 저주받은 숲의 부족들은 4년에 한 번씩 족장들이 모여 회의를 한다. 세력이 약한 족장들은 그들끼리 모여 어느 적정 수준 이상이 되면 그들 중 한 명을 대표로 뽑아 이 회의 인원으로 참석하는데, 그 수가 200에 달한다.
그렇게 모인 그들은 식량을 비롯해 각종 특산물 등을 적절한 수준으로 거래하거나, 몬스터들이 크게 성한 곳은 힘을 모아 쳐 세력을 좁히기도 한다.
또는 평소 앙숙이었던 부족 간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재판을 벌이기도 하는데, 직위에 상관없이 공정하게 일을 벌이곤 했다.
하지만 그 회의에서도 해결되지 못하는 일이 있으면, 붉은 눈 부족의 절대자인 왕에게 그에 대한 판결을 받아 일을 끝낸다.
이때 왕의 판결을 사관이 남겨 후대에 누구나 볼 수 있게 하기에, 왕으로서도 섣불리 판단하지 못하였다. 어려운 경우는 각 대부족 족장들의 의견을 들어 판단하기도 하는데 이는 후대에 자신의 이름에 먹칠을 할까 두려워서이다.
이런 판결이 쌓이면서 후대는 점차 공평한 회의를 진행할 수 있었고, 왕 또한 어느 한 쪽의 세력에 기울지 않고 공평한 판단을 할 수 있다.
이처럼 이들은 최소 정치 쪽에서는 여타의 불합리적인 숲 밖의 나라보다 발전된 형태를 보였다.
포를란 덕분에 그날은 몬스터를 만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변수가 많은 몬스터 분쟁 지역이라 다음 날 이른 오전 결국 그들은 카카라는 중형 몬스터들을 만났다.
카카는 원숭이와 생태가 비슷하면서 그 덩치는 오크의 두 배나 되어 무시무시한 힘과 몸놀림을 자랑했다.
그들은 대형 몬스터들 중 악명 높은 오우거조차 상대하기를 꺼리는 몬스터들인데 이들은 숲의 영향으로 발달 된 머리의 영향을 받은 덕분에, 단순히 치고받는 형태가 아니라 무리를 지어 나무 등과 같은 엄폐물을 잘 사용하는 뛰어난 사냥꾼들이었다.
간단한 무기들도 만들어 쓰는데, 이들이 날리는 나무창은 오우거들의 두꺼운 살을 꿰뚫을 정도로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또한 원숭이처럼 나무 위를 휙휙 날아다니며 이동하는지라, 야쿤은 물론 말로도 그들을 따돌리기가 어려웠다. 천천히 힘을 빼, 하나씩 잡아채며 숫자를 줄이는데 그 움직임이 은밀해 마치 유령을 상대하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했다.
지난 카이스탄 왕국의 병력들은 이들을 하얀 악몽이라 불렀는데, 그 이유는 이들 카카의 외형이 눈만 감으면 모든 것이 하얗게 변할 정도로 흰 털로 덮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눈이 많이 오는 이곳 숲의 특성상 눈과 동화되기 쉬워 은신을 하는 그들을 잡는 것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이들 때문에 병력의 7%가 힘없이 사냥당해 마치 집에서 훈제하는 햄처럼 나무 곳곳에 시체를 걸어놓아 병력의 사기를 크게 떨어지게 하기도 했다.
유저 이상이 아니고는 그들의 움직임에 반응하기가 어려웠고, 셋이 넘으면 중급 유저도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저주받은 숲의 몬스터들은 대개가 이런 특성이 있었기에, 단순한 병력의 수보다 질을 선호했다.
포를란은 상대가 카카라는 사실을 깨닫자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까다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한 번 먹잇감으로 잡으면 쉽게 포기하지 않는 특징을 지니고 있어, 차라리 오우거 같은 대형 몬스터들을 만나는 게 더 나을 정도이다.
“조심하십시오. 지금 이 주위에 있는 이들의 수는 최소 여든은 넘을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딸을 바라보았고,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품속에서 로오통을 갈아 만든 분말 통을 꺼냈다.
통은 모두 아홉 개였는데, 포를란은 라진에게 부탁했다.
“로즈가 이것을 던질 때마다, 부숴주시면 됩니다. 지금은 위치가 좋지 않으니 이동한 뒤에 신호를 보내겠습니다.”
“알겠네.”
그들은 야쿤을 채찍질하여 달리기 시작했고, 곧 그와 함께 주위의 수풀이 스산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만은 기억을 더듬으며 자신들에게 유리한 곳을 찾았다. 그가 찾는 유리한 위치는 주위에 엄폐물이 없는 곳이었다.
곧 상당한 범위의 넓은 길이 어디에 있었던지 기억한 그는 그곳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카카들도 그들이 무엇을 노리는지 알았는지, 나무창을 던지며 그들의 진로를 방해하려 했지만, 포를란이 그를 비켜 치거나, 라진이 정령의 힘으로 나무창을 부서뜨리는 덕분에 큰 피해 없이 원하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막 좁은 길을 벗어날 때 포를란이 소리쳤다.
“지금입니다.”
미리 아버지에게 신호를 받은 로즈는 그가 손가락질하는 곳을 향해 로오통 분말 통을 던졌고, 라진은 실수 없이 로오통 분말을 허공에서 맞혀 부서뜨렸다.
퍼벅, 퍽.
불꽃에 맞아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부서진 로오통 분말은 대기 속에 녹아들기 시작했고, 곧 ‘우키키킥’ 하며 카카 특유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확실히 로오통은 그들을 크게 자극하는 듯 그 울음소리만으로도 그들이 상당히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