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08화
이들은 보통 날이 따뜻한 시절에는 땅속에 숨어 잠을 자다, 눈의 꽃이 피는 추운 시기에는 그 모습을 보인다.
눈의 꽃은 그들에게 단순히 식량 이상의 의미가 있었기에 그들은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눈의 꽃을 통해 자손을 번식하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한 곳이지만 포를란은 이곳을 선택했다. 그것은 이 눈의 꽃을 잘 피해 가기만 한다면 이 디다라는 몬스터도 위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에게 중요한 눈의 꽃 영역이 분쟁으로 짓밟히는 것을 상당히 꺼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포를란은 경험을 통해 눈의 꽃이 있는 곳을 예상하며 피해 갔고, 일행들 또한 덕분에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졌다.
무슨 이유인지 갑자기 디다라는 몬스터가 땅속에서 모습을 보이더니 그들을 향해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영문을 모르는 일에 이들은 당황스러웠으나 이내 검을 뽑아 들어 그들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단단한 껍질을 지닌 존재였기에 그들이 데려온 야쿤들은 순식간에 죽음을 맞이했고, 이들은 점차 뒤로 걸음을 물려야 했다.
로즈는 가져온 밧줄을 이용하여 그들을 넘어뜨리기 시작했다. 워낙 몸이 무겁고 빠른 몸놀림을 자랑하는지라 확실히 한 번 넘어진 디다는 쉽사리 다시 자세를 안정시키지 못했다.
라진은 디다가 불에 약하다는 포를란의 충고대로 불을 일으켜 그들을 위협하며 로즈가 쓰러뜨린 디다를 부서뜨리기 시작했다.
야안은 생각보다 많은 숫자라 한쪽 측면에 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이내 검기를 일으켜 그의 옆에 자리한 거목을 베어 넘겼다.
쿠구구궁.
거목이 요란한 소리와 함께 넘어지며 근처에 쌓여 있던 눈이 크게 일어서며 한순간 키가 작은 디다의 시야를 가렸다.
“라진, 이 나무를 태워버려.”
그제야 야안의 생각을 알 수 있었던 라진은 다급히 정령의 기운을 일으켜 나무에 큰 불을 만들어냈다.
워낙 거대한 생목이라 불을 붙이는 데 정령의 기운의 대부분을 써야 했지만, 그만큼 큰 효과가 있었다. 이로써 그들에게 삼방으로 돌격하던 디다의 한쪽을 막을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 이 정도면 해볼 만하겠군.”
라진의 말에 야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검을 빼내는 동시에 그들을 향해 나아갔다.
검기를 일으키는 야안의 검 앞에 그저 민첩하다는 것 외에 단순한 공격 형태를 보이는 디다는 크게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었다.
하지만 일행들의 사정은 달랐다.
상급 유저가 검에 무거움을 부여하게 되면서 바위와 같은 강도를 지닌 그들을 벨 수 있다고 하지만, 그 손실되는 마나는 상당했던 것이다.
그들이 디다 열 마리를 처리하는 데 마나의 20% 이상을 소비해야 했으니 긴 시간 동안 그들을 막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그런 상황에 처하자 야안은 의도적으로 눈의 꽃들을 짓밟아 그들의 공세를 자신으로 돌리게 했다.
과연 야안의 생각대로 그들은 야안이 순식간에 눈의 꽃 수십 송이를 뭉개버리자 크게 분노하며 그에게 공격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야안은 건곤대나이의 수법으로 서로서로 공격하게 하면서 또한 그 와중에도 나가떨어지는 그들의 몸의 일부를 눈의 꽃들이 있는 곳으로 떨어지게 유도했다.
마치 잘 짜인 연극을 보는 듯, 야안의 몸과 부딪치기 무섭게 그들은 하나둘씩 힘없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10분이 채 안 되어 40마리가 넘는 디다가 죽어나갔다.
“저걸 누가 믿을 수가 있을까?”
라진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200마리가 넘었던 디다가 야안에 의해 벌써 20%가 죽어나간 것이다.
처음 야안의 의도를 알고 크게 걱정하였으나, 지금의 모습을 보니 오히려 걱정하는 자신들이 더 몸을 사려야 할 판이었다.
라진은 현재 야안이 보이는 그 믿기지 않는 힘의 묘용이 어떤 식으로 펼쳐지는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그 또한 마키 경으로부터 사량발천근이나 이화접목의 원리를 터득할 수 있었지만, 그와 차원이 다른 건곤대나이의 힘의 묘용은 그의 경지로는 짐작하기 어려웠다.
적어도 중급 익스퍼트의 경지는 되어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는 고차원의 힘의 묘리였으니 겨우 상급 유저에 불과한 라진이 알아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놀라운 감정은 라진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정도 대전사와 함께 전투를 한 경험이 많은 포를란 또한 경악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거대한 회오리처럼 빨려들어 가기 무섭게, 목이 베어 죽거나 그 무거운 몸이 날아가는 그 광경은 그의 험난한 인생에서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놀라움도 잠시, 겨우 10여 마리에 점차 지쳐가자 딸에게 눈짓을 했고, 그녀는 곧 무슨 뜻인지를 깨닫고 나무에 밧줄을 날려 묶어 가지 위로 몸을 날렸다.
키가 작은 탓에 순간적으로 그들의 모습을 놓치고만 디다들은 요란스럽게 그들을 상대하며 주위의 눈의 꽃들을 파괴하는 야안에게 달려나갔다.
“후~ 처참하군.”
긴 한숨을 내쉬며 라진은 답답한 심정을 토해 냈다.
겨우 스무 마리를 처리하는 것으로 체력이 고갈되어 버린 지금이 비참했다. 마키 경에게 훈련을 받았을 때 더 열심히 하지 않은 것이 후회스러웠다.
아니, 조금이라도 더 부지런히 정령술을 공부하여 일찍 정령과 계약을 하였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지난 시간이 후회스러울 뿐이었다.
옛 고언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자는 후회하는 시기가 반드시 온다 했는데, 그 말이 지금 그처럼 가슴 아프게 찌를 수 없다.
무엇도 할 수 없는 지금 그저 친구가 자신들을 구해주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로즈는 라진의 마음을 짐작하는 듯 그에게 조용히 조언했다.
“힘을 모으십시오. 라진 왕자님께서 하셔야 할 일이 있으실 것입니다.”
그녀의 말에 라진은 복잡한 심상이 사라졌다.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뜨겁던 머리가 차분해졌다.
‘지난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과거에 집착하지 말자.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면 된다.’
그렇게 생각하며 옆을 보니 그녀와 그녀의 아비인 포를란은 기회를 노리며 지친 몸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라진은 자책하며 이내 정령의 호흡으로 기운을 모으기 시작했다.
야안은 죽어나간 야쿤들과 가까이 자리한 거목에 일행들이 피해 있음을 보았다. 일행들이 무사하다는 생각이 들자, 그는 불안함의 한 점마저 지워버리며 마음껏 디다들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압도적인 무위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디다들 또한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눈의 꽃의 영역이 좁아지는 모습을 보면서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다. 결국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듯 야안을 향해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활활 타오르던 거목의 불길이 줄어들 때서야 전투는 끝이 났다. 결과는 야안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숫자가 아직도 200에 달하는 디다들이었으나, 무수히 많은 뱀파이어들과의 전투에서도 살아남은 그가 능력이 향상되었다 해도 중급 몬스터의 한 부족에 불과한 그들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단순히 검 하나만으로 상대하느라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번 전투는 야안에게 여러 가지로 의미가 있었다.
경험치가 차올라 1레벨이 더 오른 것 이외에도 상급 익스퍼트를 위한 훈련의 성과를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처럼 지독한 격전을 벌였음에도 옷 여기저기가 찢어진 것 이외에는 땀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전투를 마친 야안에 라진은 물론이고 로즈와 포틀란 또한 경이적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라진의 가문인 코른 공작가에도 이만한 신위를 보일 자가 있을 것인가?
있다면 단 하나, 자신의 아버지 코른 공작뿐일 것이다.
전대의 코른 공작가에는 58명의 형제가 있었고, 그들은 저마다 뛰어난 무재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을 압도적으로 제치고 다음 대의 공작이 된 괴물 같은 재능을 지닌 자신의 아버지였고, 다른 이라면 노후를 준비할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는 지금의 아버지라면 야안과 같은 일을 하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초 현 체만 왕국의 최강자인 아버지와 이제 스물을 넘긴 청년을 비교한다는 자체부터가 놀라운 일이다.
‘하~ 야안, 넌 도대체 어떻게 된 녀석이지.’
처음에 했던 익스퍼트 초급이라는 생각은 수정해야 했다. 못해도 중급 익스퍼트의 수준에 들어서야만 그 정도 신위를 보여줄 수 있다.
라진은 그제야 야안이 자신에게 숨기고 있다는 비밀이 바로 이것임을 알았다. 이 저주받은 숲에 들어왔음에도 내내 잃지 않는 그의 여유는 바로 이 강함에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아니, 로즈의 아버지를 고친 것을 보면 또 다른 비밀이 있을지 모른다. 그는 이 놀라운 비밀을 안고 있는 친우에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뭐 어때. 저 녀석이 나의 친구인 것은 변함이 없으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야안에 손을 올리며 다가갔다.
“여, 다친 곳은 없어?”
야안은 그가 자신의 비밀을 들켰을 때처럼 그도 자신의 비밀 중 하나를 알아차렸음에도 그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안부를 묻는 라진에 웃음을 흘렸다.
“하하, 보다시피. 그나저나, 그 말은 내가 해야겠는데.”
야안의 말에 라진은 자신의 여기저기 멍들어 엉망인 모습을 살피며 어깨를 으쓱했다.
“하~ 이것이 일반적인 거야. 보통 이 정도의 규모로 전투를 펼친 뒤에는 이런 몰골이 정상인 거지.”
그러며 힘들다는 듯 자신의 어깨를 툭툭 치는 라진에 야안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보다 어떻게 할까? 저쪽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모양인데 말이야?”
야안의 말에, 포를란은 의아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이 정말입니까?”
그의 말에 야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서북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있군요. 아무래도 디다가 우리를 기습한 이유는 그들 때문인 것 같습니다.”
야안의 말에 포를란은 땅에 귀를 기울여 눈을 감았다. 그리고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비술을 펼쳤는데, 2분가량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는 눈을 떴다.
그는 몹시 놀란 눈으로 야안을 바라보며 말했다.
“은인께서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저 너머에 상당수가 전투를 벌이고 있군요. 아무래도 이곳 근처에 사는 부족민인 것 같습니다.”
“그럼 돕기로 하지요. 모르는 사정이면 모르지만 이제 확실히 알았으니 도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상당한 거리라 몬스터들끼리의 전투가 아닐까 생각했는데, 그것은 아닌 것을 알자 야안이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러지. 네 덕분에 우리도 몸을 회복한 상태이니 말이야.”
이미 그들은 디다라는 몬스터의 핵에 해당하는 작은 구슬들을 어느 정도 모은 뒤라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이 작은 구슬들은 눈의 꽃만큼이나 상당히 귀한 물건이었다.
그 수가 모일수록 주위의 마나가 풍부해지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단번에 디다의 목을 쳐 잡지 않고는 이 구슬들은 소멸되기 쉬웠다. 그들은 여기저기 훼손된 것을 빼고 78개 정도를 모을 수 있었다.
야안은 로즈에게서 그 구슬을 건네받으며 그 쓰임을 듣고 상당히 기뻐하였다. 이것을 마법진에 적용한다면 예전 태초의 공간에서만큼은 아니겠지만, 마나의 농도를 두 배에 달할 정도로 만들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이것이면, 자신의 제자 테리와 한스, 그리고 자신을 주인처럼 모시는 챈들러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특히 한스의 경우에는 비술을 펼칠 수 있는 시기를 빨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고대 마법을 익힌 덕분에 상당히 빠른 성장을 보이는 한스라면 자신의 마법진 덕분에 3년 안에 초급 현자 마스터에 도달할 수 있을 듯했다.
뒤늦게 자신에게 맞는 중급 마나 심법을 익히는 챈들러는 여타의 기사들보다 마나가 부족했는데, 이것의 도움이 있다면 2년 안에 지금 가진 것보다 많은 마나를 추가로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현재 마크 자작의 밑에서 여러 전술을 배우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는 테리 또한 이것으로 번번이 힘겨운 수련에 고갈되던 마나의 어려움에서 벗어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 생각했다.
물론 상급 익스퍼트를 향해 가고 있는 자신에게도 이것은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아니, 굳이 그것이 아니어도,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마나는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야안은 앞서 가는 포를란의 뒤를 따라가며 잠시 상념에 들다, 이내 그의 귀에 울리는 전투 소리에 상념을 떨쳐내며 앞장서 나갔다.
“먼저 가겠습니다.”
야쿤의 등에 메었던 짐을 나누어 들었던 탓에 상당한 무게를 등에 지고 있음에도 야쿤이 달린 만큼의 속도를 내며 가는 야안의 모습에 그들은 감탄했다.
“휴~ 대단한데. 어서 우리도 부지런히 가지.”
그리 말하며 속도를 올리는 라진에 포를란과 로즈 또한 서둘러 그의 뒤를 따랐다.
탁, 타닥.
야안은 치열한 전투가 한참인 곳의 진행을 살펴보기 위해 근처에 자리한 거목 위로 올라섰다.
포를란의 말대로 이곳 부족민들이 디다들과 전투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부족민들의 전체적인 수준과 현재 1,000에 달하는 디다들의 힘은 거의 백중세를 이루고 있어 그 피해가 상당해 보였다.
부족민들은 하얀 까마귀 특유의 회색 머리가 아닌 노란빛의 머리에 짙은 검은 피부를 지니고 있었다.
포를란이 말하는 대전사로 보이는 자가 족장으로서 그들을 이끄는 것을 보아 대부족이 아닌 중소 규모의 부족인 듯했다.
야안은 잠시 전장을 살펴보다 디다들 중에서도 그 색이 유난히 더 선명한 한 디다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가 바로 이들 디다들의 수장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힘을 보자면 호후도칸급이었는데, 아무래도 숲의 힘의 영향 덕분이라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저 녀석을 잡아야 되겠군.’
인간이든 몬스터든 머리를 잃으면 쉽게 와해가 된다. 조직적인 모습이 약화되고 효율적인 병력의 응용이 어려워지니 개개인의 역량은 둘째 치더라도 군대로서의 역량은 최악으로 떨어지니 병법을 아는 자라면 그처럼 손쉬운 상대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