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15화
야안은 절대자의 거센 압박에서도 흔들림 없는 어투로 물었다.
“정체라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토로텐은 흔들림 없는 야안에 다시금 감탄했으나 내색하지 않으며 물었다.
“한 인간이 그 같은 재능을 모두 지니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설사 고대 엘프들의 수장이신 하이 엘프라 할지라도 그대의 재능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하니 다시 묻겠다. 그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토로텐의 말에 야안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는 아리스 님의 가호를 받은 최초의 이방인입니다.”
어렵게 꺼내는 야안의 대답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 토로텐이 되물었다.
“이방인? 이방인이라니 그것이 무슨 말인가?”
고대 시절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던 신의 예언. 아리스의 축복인 이방인.
설마 그 이방인이라고 쉽사리 매치하지 못한 토로텐 대신 묵묵히 왕의 일을 지켜보던 큰 스승 중 한 존재가 나섰다.
“왕이시여, 잠시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는지요?”
그의 등장에 야안을 압박하던 토로텐의 기세가 사라졌다. 그리고 야안은 토로텐의 위엄 속에 숨어 있던 또 하나의 절대자를 발견함으로써 전율에 떨어야 했다. 그의 초감각이 그에게 말했다.
‘그자는 진리의 끝을 앞둔 자다.’
그랬다.
그는 구존에 준하는 고위 현자 익스퍼트에 오른 자였다. 모든 큰 스승들의 스승이었으며, 왕의 스승이기도 한 또 하나의 절대자였다.
토로텐은 그가 나서자, 평소의 위엄을 숨기며 말했다.
“스승께서 말씀하시지요.”
왕의 허락에 그는 묵례를 하더니 야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대가 말하는 이방인이라는 것이 고대 전설로 내려오는 이방인을 말하는 것인가?”
그의 말에 토로텐뿐만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숨을 죽였다. 그리고 야안은 그의 말에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아!”
누군가 탄성을 질렀고, 누군가는 격정에 몸을 떨었다. 토로텐 또한 충격을 받은 듯 이마에 손을 올렸고, 어느새 라진의 몸을 압박하던 힘은 사라졌다.
몸이 풀리자 라진은 천천히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 이방인이라는 말 한마디에 경악하는 표정이었다.
그는 이방인이라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으나, 돌아가는 상황에서 야안이 심상치 않은 존재라는 것을 예측할 수 있었다.
큰 스승이라는 자는 형형한 눈빛으로 야안을 살펴보다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왕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왕이시여, 그는 왕의 질문에 충분한 대답을 한 것 같군요.”
그의 말에 토로텐은 어렵게 이마에서 손을 떨어뜨리더니 야안에게 물었다.
“듣기로 이방인은 신의 축복을 받은 자라 했네. 그대가 받은 신의 축복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
그의 말에 야안은 고민을 하다 말했다.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속으로 인벤토리를 불러냈다. 곧 책장 크기 정도의 인벤토리가 나타났는데, 그 누구도 인벤토리의 존재를 모르는 듯했다. 두 절대자조차 알지 못하는 듯하자 내심 아리스 님의 전능함에 전율하던 야안은 인벤토리에서 전설의 검을 꺼내 들었다.
“……!!”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경악스러워하였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말없이 바라보던 야안이 손이 움직이는 순간 검 한 자루가 어느새 그의 손에 쥐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 있는 이 중 강자가 아닌 자는 아무도 없었다. 왕은 야안의 그 신기에 말을 잇지 못하다 다시 야안이 손을 움직이자 검이 사라지는 모습에 호탕하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정말 최고의 날이로군. 오랜 숙원을 들어줄 뛰어난 재능을 가진 왕자와, 고대 전설의 이방인을 만나게 될 줄이야. 역대 왕들께서는 나를 얼마나 부러워하시겠는가?”
호탕한 웃음을 흘리던 그는 야안에게 작게 목례를 하며 사과했다.
“미안하네. 최근 하늘의 별이 심상치 않은 탓에 그대를 오해하였네.”
별을 보면서 천기를 살피는 붉은 눈 부족은 몇 달 전부터 대륙에 거대한 재앙이 왔음을 알 수 있었다.
아직 그 씨앗이 자라지 않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세상을 뒤엎을 재앙의 씨앗이 뿌려졌음을 안 것인데, 이에 저주받은 숲의 부족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수많은 부족인을 대륙에 파견했다.
토로텐의 말이 예사롭지 않은지라 야안이 물었다.
“하늘의 별이 심상치 않다니 그것이 무슨 뜻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야안의 말에 토로텐은 자신의 과오가 있는지라 어려움 없이 말해 주었다.
왕의 말을 말없이 듣던 야안은 점차 그가 말하는 재앙의 씨앗이 자신이 받은 퀘스트의 악마 파란토임을 직감하였다.
야안은 왕의 말이 끝나자 정리를 하는 듯 잠시 멈칫거리다 이내 그에게 묻고자 했던, 아니, 도움을 얻고자 했던 것에 대해 물었다.
“왕께서는 라타샤에 대해 아시는지요?”
퀘스트의 도움을 얻기 위해 라타샤 마을을 찾으러 온 야안은 근 4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난 끝에야 이에 대해 물을 수 있었고, 그 질문을 들은 왕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잠자코 있는 왕을 대신하여 야안에게 질문하였던 큰 스승이 대신 물었다.
“그대가 라타샤에 대해 어찌 아는 것인가?”
그 절대자의 말에서 그가 라타샤에 대해 알고 있음을 안 야안은 반기며 자신이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는지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에 대해 설명을 하려면 저의 또 다른 신분에 대해 말씀드려야겠군요. 저는 최초의 이방인이자 또한 스승이신 마론 현자님의 뒤를 이은 전설의 추종자입니다. 전설의 시대에 존재했던 진정한 현자의 자취를 좇는 자이지요.
불굴의 의지를 가지신 스승께서 평생을 찾아 물려주신 유물 중 하나로 왕께서 말씀하신 재앙의 씨앗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존재는 바로 1,000년 전 대현자 테무드께서 봉인한 악마 파란토라는 존재로 제국 절반의 힘을 가진 왕국을 멸한 존재이기도 하지요.”
야안의 말은 놀라웠다.
“이 유물이 이방인의 손에 들어가면 아리스 님께서 그것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도와주시곤 합니다. 그분의 충고를 따르자면 그 악마가 힘을 되찾는 데 지금으로부터 약 8개월의 시간이 남아 있으며, 고대 엘프의 피를 이은 라타샤 마을에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면 그 악마를 척살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분의 충고를 따라 저주받은 숲에 들어섰고 다행히도 이곳까지 오게 되어 그들에 대해 여쭈는 것입니다.”
야안의 그 말에 큰 스승이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과연 이방인이란 말인가?”
왕족을 비롯해 소수의 존재만이 아는 사실을 아리스 님의 충고로 알게 되었다는 야안의 말은 오히려 이방인이라는 사실 때문인지 신비했다.
야안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토로텐이 야안이 알고자 한 사실을 대답해 주었다.
“그대가 찾고자 하는 라타샤의 마을은 다름 아닌 바로 그대가 서 있는 이 왕성을 말하네. 그리고 고대 엘프의 피를 이은 라타샤는 우리 붉은 눈 왕족을 말하는 것이지.”
그렇게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놀라운 것이었다.
라타샤는 고대 시절 죽음의 지배자의 손에서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엘프의 이름이었다. 당시 하이 엘프와 엘프 사이에 태어난 하이 하프 엘프인 라타샤였기에 여타의 엘프들보다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존재였다.
아니, 단순히 지닌 재능만을 따진다면 하이 하프 엘프라 할지라도 따라가지 못할 재능을 지닌 존재였다.
그는 그 재능을 바탕으로 상급 정령을 마스터하였으며 동시에 상급 현자 익스퍼트에 올라서기도 했다.
단순히 힘만으로 따진다면 하이 엘프를 뛰어넘는 능력을 가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하이 하프 엘프에게는 단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후손을 번식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에 라타샤는 고민에 빠졌다. 만약 자신 이외에 엘프가 있다면 그는 고민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하이 하프 엘프는 하이 엘프를 대신하여 엘프를 보호하고 대륙의 난을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몫을 다하는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자신은 하이 하프 엘프이기에 살아남을 수 있던 대륙의 마지막 남은 엘프였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엘프답게 그는 엘프라는 종이 멸하는 것에 대해 아쉬워할지언정 슬퍼하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테무드와 그 일행 그리고 모든 엘프들의 희생으로 죽음의 지배자를 봉인한 것이 그저 미봉책임을 아는 그는 이대로 자신이 사라진다면 대륙의 미래는 끝이라 판단하였다.
낙후된 문명으로 돌아간 인간들만으로는 절대 죽음의 지배자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결국 고민 끝에 본래 엘프들이 살았던 숲을 기반으로 테무드의 숨겨진 제자들과 함께 이전에도 이후에도 없는 거대한 마법을 펼쳤다.
그것은 고대 시대에 금지되었던 마법이었다.
바로 키메라 마법으로, 저급한 형태의 실제 살을 뜯고 붙이는 형태가 아니라 생명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부터 바꾸는 대마법이었다.
엘프가 남기고 간 숲의 모든 정령의 기운과 마법의 기운을 기반으로 삼아 숲의 중심을 바탕으로 100년의 세월이 걸려 대마법진을 만들어냈다. 그는 마지막으로 자신을 제물로 바쳐 그 대마법을 성공시켰다.
그리고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숲 자체에서 돌연변이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엘프를 대신하여 살고 있던 인간들에게 그 변화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는데, 그중에서도 대마법진의 가장 중앙에 자리했던 인간들에게 기묘한 능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쉽게 지치지 않는 체력을 가지게 되었으며, 정령에 대해 뛰어난 재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들이닥친 능력에 놀라 이 변화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 떠돌다 라타샤의 유물을 찾게 되었다.
이후 사정을 알게 된 그들은 라타샤의 능력을 가장 많이 이어받은 자신들을 라타샤의 후인이라 칭하였다.
그리고 라타샤가 자신을 제물로 바친 곳을 중심으로 마을을 형성했는데, 50년의 시간이 흘러 자신들만큼은 아니나 라타샤의 능력을 이어받은 부족들이 여기저기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를 기점으로 몬스터들 또한 변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는데, 라타샤의 후인이라 칭한 그들은 다른 부족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몬스터들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또한 라타샤의 사연을 알게 된 뒤 발전시킨 여러 힘을 가르쳐 주었는데, 큰 은혜를 입은 부족들은 그들 라타샤를 모시기 시작했다.
라타샤들은 그들의 도움으로 고대 라타샤가 남긴 유물을 찾다, 자신들의 마을 밑에 엘프들의 성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바로 지금 붉은 눈 부족의 왕성이 그 엘프의 성인 것인데, 그들은 자신에게 도움을 받은 부족들과 힘을 합쳐 대지를 파기 시작했고 그 땅 밑에서 발견된 유품들을 기반으로 지금의 문화를 이룰 수 있었다.
그러니 야안이 찾고자 했던 라타샤의 마을은 붉은 눈 부족의 왕족을 뜻하는 것이었고, 자신은 이미 그 마을에 도착해 있었던 것이다.
야안은 처음 사귄 친구가 자신이 찾던 라타샤 마을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되자 속으로 웃음을 흘렸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군. 그때 이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와야 했을 것이야.’
야안은 아리스 님께서 보살펴 주시지 않고는 일이 이처럼 풀릴 리가 없다고 생각하여 아리스 님에게 감사하였다.
라진 또한 그 모든 상황을 알게 되면서 야안을 바라보며 미소를 흘렸다. 그 또한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라 생각한 것이다.
곧 붉은 눈의 왕 토로텐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은 야안이 말했다.
“왕께서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는지요.”
그 말에 토로텐이 미소를 보였다.
“당연한 일이네. 우리는 라타샤의 뜻을 이은 존재. 대륙의 미래를 위해 희생한 그분을 위해서라도 나서야 할 일이지. 오히려 이방인인 그대가 우리의 일을 대신해 주는 것 같아 고마울 따름일세.”
왕에게 스승으로 불리던 큰 스승은 예전 읽었던 고서에서 파란토라는 악마에 대한 것이 무엇이 있었던 것인가 잠시 생각에 빠지다 이내 기억한 듯 왕에게 말했다.
“고대 기록서 중 악마에 대한 기록이 있었던 걸로 기억됩니다. 다만, 그 악마의 이름이 파란토인지는 알 수 없군요. 당시에 사람들은 그를 절망의 악마라 불렀습니다. 생명체가 절망에 빠져 죽을 때 생기는 마나를 즐기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수많은 이들이 혼란에 잠겨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지요.”
“…….”
“성격은 교활하여 속이는 것을 즐기며 장난기가 많아 행동을 예측할 수 없다고 합니다. 죽음의 사제라 불릴 정도로 그의 마법은 죽음에 쉽게 이르는 형태가 많은데, 마나를 다루지 못하는 일반인들은 스치기만 해도 심장이 파열되어 죽어 나갑니다.
그의 마법 중 언데드라는 저주 마법은 주위의 시체들을 재구성하여 괴물을 만들지요. 그렇게 구성된 괴물은 시체들의 수가 얼마나 많은가, 살아생전 시체의 무위가 어떠하였는가에 따라 그 위력이 호도칸에서 도칸급 사이를 오간다 하더군요.
또한 그가 가장 즐기는 마법 형태는 어둠의 그림자라는 것으로 어둠의 마나를 이용하여 예측할 수 없는 형태의 공간을 물질적으로 다룹니다. 점에서 면이 되기도 하고 크게 입체적으로 변하기도 하며 사라졌다, 나타나는 것이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의 말이 끝이 나자, 야안은 그의 전투적인 형태를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그 형태는 일정한 모습으로 남지 않았다.
막연하기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