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121화 (121/385)

야안 121화

39. 뇌전의 정령 I

믿기지 않는 일을 해내 버린 야안은 잠시 검을 쥔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마치 조금 전 베어낸 그때의 감각을 되살리려는 듯 그는 손에 남은 여운을 되새기고 있었다.

‘이것이었군, 바로.’

그랬다. 깨달음이 있었다.

육대검식과 붉은 실을 같이 펼치다 쉽사리 나아가지 못한 반 발자국을 넘어선 것이다. 급박한 순간이 아니었다면 육대검식과 붉은 실을 같이 펼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둘 다 그 습득률이 낮았기에 가능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처럼 준비 시간이 긴 검은 실전에 쓸모가 없었다.

야안은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다. 아니, 그것은 단순히 우연적인 형태에서 생긴 운이 좋았다는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그가 올린 행운의 스탯에 의해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느슨해지면서 생긴 그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준비된 기연일 것이다.

그렇게 깨달음을 얻은 야안은 그로써 상급 익스퍼트에 온전히 들어설 수 있었다.

아니, 단순히 들어선 것뿐만이 아니라, 경지에 오른 뒤에 찾아올 미숙한 시간마저 뛰어넘게 되었다.

최소 석 달은 바뀐 육체에 적응해야 하는 시간을 넘어선 것이다.

야안은 바뀐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정보 창을 불렀다.

[이름 : 야안

레벨 : 90

직업 : 전설의 추종자

칭호 : 최초의 이방인

생명력 : 1,120

마나량 : 2,240

명성 : 500

힘 : 48(+15)

민첩 : 46(+15)

행운 : 53(+15)

지혜 : 65(+15)

신력 : 5

마나 : 104(+15)

분배되지 않은 스탯 : 8

아이템 B-급(제6감각을 가진 그대가 각고의 노력 끝에 찾아낸 검식.)

육대검식(이십사수검법에서 얻어낸 여섯 개의 검식이다. 검기를 중첩하여 날릴 수 있는 검식으로 그 파괴력은 상급 익스퍼트도 어려워할 정도로 뛰어나다.)

습득률 : 43%

이십사수검법의 초식에서 뽑아낸 힘의 흐름을 찾아 겹칠 수 있게 되었다. 습득률이 높아질수록 검기를 중첩할 수 있는 수가 더 많아질 것이다.

*습득률이 높아질수록 육대검식을 펼치는 시간이 짧아진다.

*이 육대검식에 그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있다.

*마스터하면 순간적으로 펼칠 수 있게 된다.

*이 검법을 펼치면 적은 양이지만 운기의 효과 또한 볼 수 있다.(1한 : 기초적 심법으로 1년간 운기하여 얻을 수 있는 양)

건곤대나이

습득률 : 18.2%

사량발천근과 이화접목을 마스터하면서 그 두 개의 구분이 모호해지자 시너지 효과가 일어났고 그 덕분에 얻게 된 고위 기술이다. 제6감각을 깨우친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뛰어난 힘의 묘용이기도 하다. 아직 숙련된 자에 불과한 그대에게 너무도 과분한 것으로 진정한 힘의 묘용을 얻기 위해서는 상당한 고련의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

적은 힘으로 상대의 힘의 방향을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옮기며 자신을 보호하며 적에게 치명타를 줄 수 있다.

*마스터하면 어떤 종류의 힘이든(마법이든, 물리적인 충격이든) 힘의 방향을 자유롭게 다스릴 수 있다.

*습득률이 높아질수록 한 번에 해결할 힘의 개수가 늘어난다.

붉은 실(발검술)

등급 : B-

저주받은 숲의 세 번째로 탄생된 검의 절대자가 만들어낸 검법이다. 습득률이 높아질수록 검의 구를 자유롭게 다룰 수 있다.

습득률 : 17%

*실전에서만 습득률을 올릴 수 있다.

*완성한다면 미숙한 심연의 검과 함께 펼치는 것이 가능하다.]

정보 창을 통해 그가 확인한 변화는 놀라웠다.

상급 익스퍼트에 올라서면서 힘과 민첩이 각각 4가 늘어났고, 행운이 2가 늘어났으며 지혜가 2가 늘어났다. 마나 또한 4가 늘어나게 되었다.

또한 지난번 디다들과 몬스터들을 잡게 되면서 두 개의 레벨을 올리고 그간 수많은 전투를 통해 다시 2레벨을 더 올린 야안은 이번 푸란을 잡는 퀘스트를 완성하면서 네 개의 레벨이 한 번에 올라설 수 있었다.

그 덕분에 이제 그의 여유 스탯은 여덟 개나 되었다.

이것을 적절히 이용한다면 이번 악마와의 전투에서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난번처럼 의외의 일격을 선사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변화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붉은 실과 육대검식의 습득률이 대폭 상승한 것이다. 본래 31% 정도였던 육대검식은 12%나 올라 43%에 달했고, 그간의 노력에도, 2%에 불과했던 붉은 실도 15%가 올라 17%에 달했다.

조금 전 푸란의 목을 베어 넘겼듯이 야안은 그 순간만큼은 못하겠지만 육대검식과 붉은 실을 같이 사용하는 데 어려움이 없을 듯 보였다.

하지만 그 같은 변화도 건곤대나이의 변화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조금 전 푸란의 공격을 유령처럼 피했을 정도로 건곤대나이의 습득률은 상급 익스퍼트에 올라서며 대폭 상승한 것이다.

3.2% 가까이 올라섰는데, 근 몇 달간의 수련에도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 같은 상승률은 단순히 놀랍다는 말로는 부족함이 많았다.

지금 그의 건곤대나이에 ‘카라’와 ‘토네’ 그리고 전설의 검이 함께한다면 조금 전 그가 그랬던 것처럼 상대가 도칸급이라 해도 최소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게 될 것이다.

그 외에 상급 익스퍼트에 올라서며 생긴 변화를 하나 더 꼽는다면 그간 꺼린 전설의 검이 이제야 어느 정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물론 아직 맞지 않는 옷을 껴입은 듯한 느낌은 어쩔 수 없으나, 검 자체를 쥔 것만으로도 심마에 빠졌던 지난 시간을 생각한다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최소 검에 휘둘리는 시기는 지난 것이다.

“축하하네. 결국 상위 대전사의 경지에 들어섰군. 아니, 단순히 들어선 것을 넘어선 것인가? 아주 멋진 검이었네. 그것이 자네가 익히고 있던 검이었나 보군. 붉은 실에 비해 손색이 없는 검법이야.”

“정말 대단했네. 설마 푸란의 목을 단칼에 베어 버리다니.”

“음, 공격도 대단했지만, 그 유령 같은 몸놀림은 더욱 대단했지. 설마 푸란을 상대로 그 같은 공방을 펼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검을 익힌 알레한드로와 두 제자는 야안의 변화를 한눈에 깨달아 가장 먼저 다가와 축하해 주었다.

같은 길을 걷는 자인 만큼 야안이 보인 건곤대나이의 묘용은 믿기지 않는 것이었다.

상급 익스퍼트에 달한 알레한드로는 야안이 펼친 건곤대나이의 원리를 알 수 있었지만, 그것을 검에 담으려면 못해도 10년의 세월이 지나야 할 것이라 예상했다.

단순히 그것을 검에 담는 것만으로 10년이었고, 야안만큼 능숙해지려면 평생을 다 바친다 해도 어려울 것이다.

잠시 정보 창을 통해 스스로 살피던 야안은 어느새 다가와 축하를 해주는 알레한드로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알레한드로 님의 지도 덕분에 부족하나마 들어설 수 있었습니다.”

야안의 겸양에 알레한드로는 손을 저었다.

“아니네. 나는 그저 수많은 길 중 하나를 제시하였을 뿐이네. 나의 도움이 아니었어도 그대는 어려움 없이 들어섰을 것이야.”

곧, 로뎅을 비롯해 동료들이 야안에게 다가와 그의 성취를 축하해 주었다. 특히 조금 전 전투 때의 모습과 달리 푸근한 인상을 보이는 베르뎅은 들뜬 모습을 보였다.

“정말 축하하네. 그래, 오늘 아침은 근사한 것으로 만들어야겠군. 가장 큰 고비를 넘겼으니 축하하는 의미로 그래, 그동안 아껴두었던 보로챠드를 꺼내야겠군.”

보로챠드는 야쿤의 고기를 갈아 양념에 숙성시킨 것으로 그 숙성 정도에 따라 고급 음식이 되기도 집에서 흔히 먹는 음식이 되기도 했다.

이 보로챠드를 얼마나 잘 만드느냐가 요리 실력 수준을 알 수 있는 척도가 되기도 했다.

당연히 요리를 좋아하는 베르뎅의 입장에서는 이 보로챠드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로지는 그런 제자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으나, 확실히 그의 말대로 더 이상 큰 위험 요소는 없었기에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아직 뜨거운 피가 식지 않은 푸란을 바라보던 타린과 오스가 그의 시체를 해체하기 시작했고, 야안 또한 그들을 도왔다.

단순히 항마력만을 따진다 해도 중급 익스퍼트 수준의 마법은 거뜬히 물리칠 수 있을 정도라, 이것이면 상당히 귀한 갑주를 만들 수 있을 듯했다.

아니, 마법뿐만 아니라 초급 익스퍼트의 검기에 대한 피해라면 50% 이상 막아낼 수 있을 듯했다.

푸란의 가죽을 벗기느라 진이 빠진 타린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확실히 재료는 좋지만. 이것으로 누가 갑주를 만들 수 있을지 모르겠군.”

“그러게 말이네. 만들기만 한다면야 대단한 보물이 나올 것 같지만. 우리 부족의 대장장이들도 손을 못 댈 것 같은데.”

그들의 의문에 야안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다행히도 이런 쪽에 손재주가 있는 터라. 이 방어구라면 악마와의 전투에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군요.”

야안의 그 말에 그들은 머리를 긁적이며 미안해했고, 야안은 재차 괜찮다며 그들의 마음을 달랬다.

곧 베르뎅이 식사가 준비되었다며 그들을 불러들였다.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모닥불 위로 보로챠드 특유의 강한 향이 식욕을 돋우고 있었는데, 좋은 안주에 회가 동한 듯 라콘은 어느새 술병을 따 잔을 채우고 있었다.

어느새 새벽의 미명은 모닥불 연기와 함께 모습을 감추었다.

칼벨라그 영지.

체만 왕국의 두 번째 중심지라고도 불리는 이 영지에는 거대한 항구가 있다. 체만 왕국에서 거래되는 상품의 40%가 이곳에서 거래될 정도로 엄청난 물자가 오가는 곳이기도 하다.

현재 이곳 영지의 주인인 칼벨라그 후작가는 체만 왕국에서 벌어들이는 세금의 20%를 내놓을 정도로 부유한 곳이었다.

이들 칼벨라그의 초대 후작은 물의 상위 정령사였다. 본래 신분은 남작가의 사람이었으나, 정령사가 된 이후 자작으로 승격되었고 이후 전쟁에서 공을 세워 백작으로 다시 승격되었다.

왕국에서 40년을 일을 돕던 그는 이후 상위 정령사의 벽을 넘어서게 되었고, 그때 다시 후작으로 승격된 전형적인 자수성가의 인물이었다.

그는 왕국에서 내주는 영지 대신 본래의 남작 영지의 서쪽에 자리한 몬스터의 영역을 물리치고, 지금의 대규모의 항구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지금도 칼벨라그 영지 규모 자체는 백작 영지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대신 항구를 끼고 있어 무역 이외에도 상당한 양의 물자를 바다에서 얻어 생산력에서도 다른 후작가에 비해 월등한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기이한 기벽이 있었다.

홀로 자수성가하여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영지를 놀라울 정도로 발전시켜 말년에는 왕국의 세금을 30%까지 책임졌던 수완가였지만, 후작가에 어울린 규모의 성을 짓지 않으려 한 것이다.

본래 남작가의 성이 화려했거나 고풍스러운 면이 있다는 등의 외적으로 뛰어난 미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그 성에 특별한 사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흔한 시골 남작성 측에도 들지 못할 정도로 허름한 성이었다.

만들 때 당시 급하게 지었던지 여기저기 갈라진 흠이 생겼고, 토성처럼 그저 성으로의 역할만을 다한 것이 고작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지 초대 칼벨라그 후작은 새로운 성을 짓는 것을 반대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오히려 후대의 자손들에게도 새로운 성을 짓지 말라고 명했을 정도였다.

그렇다고 그가 짠돌이여서 그런 것이라면 이해라도 할 수 있을 터이지만, 그도 아니었다.

그는 선정을 베풀기로 유명했고, 떠도는 유민들에게 새로이 집을 짓거나 왕성 도시에 못지않을 만큼 거대한 도로를 만들어 상인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기도 했다.

이 때문에 그 성에 무슨 비밀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가 했지만, 그가 죽은 후 후손들이 그 성을 살핀 결과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결국 그의 그 같은 남작성에 대한 애착은 그의 후손이나 영지민들에게 있어 그만의 기벽으로 남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후 다음 대의 칼벨라그 후작은 아버지가 애착을 가지셨던 성인 만큼 보존하기로 한 채, 그곳이 아닌 번화가의 가운데에 후작가에 어울리는 규모의 후작성을 지어 올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남작성은 칼벨라그 영지와 거래하는 대상단의 소유로 넘어가게 되었는데,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은 탓에 대상단의 하급 인부들이 머무르는 곳이 되었다.

이후 대상단에서 남작성을 칼벨라그 영지의 대지주에게 싼값에 넘겼고, 그는 이 성을 여관으로 만들었다.

무역 도시로 유명한 만큼 많은 이들이 방문한지라 언제나 방이 모자란 탓에 여관이 망하는 일은 없었다.

대지주는 허름한 성이라 해도 방이 수백 개인 것을 눈여겨보아 구입하였는데, 그의 예상대로 성 형태의 여관이라는 사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흥미를 가져 이곳에 머물곤 했다.

“이런, 여기도 방이 없으면 곤란한데 말이야.”

“그러게. 벌써 몇 번째인지. 배도 구해야 하는데, 방부터 못 잡고 있으니.”

거대한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무리 중 유난히 크고 작아 도드라진 두 사람의 말에 가장 선두에서 걷고 있던 이 또한 동감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곳마저 없으면 근처 지주에게 부탁해 집을 빌리는 수밖에 없겠군.’

외국인 신분이라지만 준귀족에 달하는 그의 신분과 적당량의 돈이라면 일행들이 머물 거처를 빌릴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가정집이다 보니 불편한 점이 많을 것이 마음에 걸렸다.

아마 일행이 수하나 친우였다면 벌써 그렇게 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곳의 기준으로 치면 하나같이 귀한 신분들이라 그렇게 넘기기에는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게 많았다.

곧 사람들이 말한 이곳의 명물이라고 하는 여관으로 바뀐 성으로 간 그들은 유난히 오래된 철문을 열며 들어섰다.

끼이익.

그 수가 열이나 된 그들이었지만, 들어선 순간 열 명 정도의 일행이 섞여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백 수십에 달하는 이들이 자리를 잡은 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성의 입구 쪽에 자리한 연회장을 통째로 주점으로 만든 것인데, 오가는 하인들만 10여 명이 되었고, 테이블도 반이나 남아 있었다.

“음~ 활기차고 좋은데. 그나저나 정말 특이한 곳이군. 낡긴 했지만, 정말로 성을 여관으로 사용하다니 말이야.”

“호오~ 저건 처음 보는 술인 것 같군.”

베르뎅과 라콘의 말에 야안은 미소를 보이다, 곧 중앙에 자리한 책임자에게 다가갔다.

넉살 좋은 인상에 머리가 반쯤 벗겨진 중년의 사내였는데, 그는 그 일행이 열이나 된 것에 크게 반겼다.

비록 두건을 깊게 눌러쓴 탓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비록 지저분하나 입고 있는 옷이 귀한 것으로 보아 평민은 아닌 듯해 예를 보이던 그에게 그들 중 가장 어린 사내가 두건을 걷으며 다가왔다.

“방이 있는가?”

“물론입니다. 어제 마침 대상단 일행들이 대거 빠진 덕분에 방이 제법 남아 있지요. 손님 같은 분들이 쓰실 방들도 넉넉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야안은 주인의 그 말에 안도하며 품에서 30골드를 꺼냈다.

“가장 좋은 방들로 안내해 주게. 식사를 하고 싶으니, 알아서 좋은 것으로 내어주고.”

“네, 알아서 모시겠습니다.”

30골드는 그 같은 대도시에서도 큰돈이라 책임자는 크게 반겼다. 지난 몬스터의 부산물들을 팔아 치운 뒤 상당한 돈이 남은 터라, 그 정도의 금액은 무리가 없었다.

야안은 자신들에게 방을 안내하며 앞서 가던 하인에게 1실버를 건네며 물었다.

“스키티로 가는 배편을 알고 싶은데 혹시 아는 게 없는가?”

좋은 방을 내주는 터라 귀한 손님들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그같이 공돈을 얻게 되자 입이 귀에 걸린 하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루에 오가는 배가 많은 터라. 내일까지 알아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부탁하네. 기왕이면 큰 배면 좋겠군.”

“네, 알겠습니다.”

방이 넉넉하여 각자 개인실을 잡았는데, 야안이 들어선 곳은 본래 손님용 방으로 쓰였던 것인지 천장도 높았고, 크기도 다른 여관들보다 배는 넓었다.

장식품들도 바뀐 지 얼마 되지 않아 단정한 편이었고 고급 방이라서인지 청결한 편이었다.

욕실이 딸려 있어 그간의 땀을 씻어낸 야안은 누군가 자신의 문을 두드리는 것을 들었다.

“안에 있는가?”

베르뎅이었다. 마음이 맞아 그간 상당히 친하게 지내게 된 인물 중 하나였는데, 여정 중에 정령에 대해 여러 가지로 조언을 해준 인물이기도 했다.

그는 불의 정령에게 전투나 수련에서 도움을 얻기보다는 음식을 만들 때 더 많은 도움을 얻었는데, 그의 정령인 셀리엄 또한 미세한 불 조절에 따라 미묘하게 달라지는 요리를 즐기는 편이었다.

아무래도 계약을 맺은 베르뎅의 영향을 많이 받는 정령이라 더욱 그런 모양이었다.

“네, 있습니다. 지금 내려가시는 것입니까?”

“그러하네. 자네에게 말할 것도 있고 해서 말이네.”

그의 말에 야안이 궁금증을 떠올리며 짐을 챙긴 그는 서둘러 방문을 열었다.

“그럼 먼저 내려가서 자리를 잡도록 하지요. 다른 분들은 시간이 좀 걸릴 듯하니 먼저 가볍게 술이라도 하시겠습니까?”

“하하, 이미 사형께서 내려가 계시네. 이미 먼저 드시고 계시겠지.”

“아! 술이 떨어지셨다고 답답해하시더니.”

야안의 말에 베르뎅은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예상대로 라콘은 가벼운 안줏거리와 함께 제법 독하다고 소문난 브랜디를 물처럼 마시고 있었다.

목을 태우는 듯한 얼큰함이 좋은 듯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는 그의 모습에 베르뎅과 야안이 웃음을 흘렸다.

베르뎅은 그의 옆에 앉으며 농을 뱉었다.

“어째 사형은 취해 있을 때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끄윽~ 어허, 누누이 말하지만, 이번 여정에서는 취할 때까지 마셔본 적은 없네. 하아~ 어서 이 일을 끝내고 거하게 마셔야 할 텐데 말이야.”

그의 말에 야안이 웃음을 참으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이 일만 잘 끝낸다면 제가 거하게 사드리지요.”

야안의 말에 베르뎅이 손을 저었다.

“이런, 자네 말을 취소해야 하네. 사형이 얼마나 많이 드시는데, 재산을 탕진해도 나는 모르네.”

“껄껄, 사내가 말을 무르면 안 되는 법이지. 약속했네.”

“하하, 약속합니다. 베르뎅 님도 그때는 같이 고급 음식들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그간 일정을 줄이기 위해, 지난 20일 동안 제대로 식도락을 즐기지 못한 베르뎅으로서는 야안의 말에 기뻐했다.

“하하, 그것을 위해서라도 이 일이 무사히 끝나기를 빌어야겠군.”

곧 자신들에게도 나온 브랜디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다 야안은 조금 전 베르뎅이 말한 것이 생각나 물었다.

“한데 저한테 말씀하실 것이 있으시다고.”

그 말에 베르뎅이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아! 그래, 자네는 모르겠군. 나도 스승님께서 말씀해 주신 뒤에야 느꼈으니 말이야.”

그러며 운을 띄운 그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기이한 일이지만, 이 성 밑에 고대 정령이 잠들어 있는 것 같네.”

야안은 믿기지 않는 말인지라 베르뎅에게 되물었다.

“고대 정령이 잠들어 있단 말입니까?”

야안의 물음에 라콘이 답해 주었다.

“그러하네. 고대 정령이라고는 말했지만, 사실 어느 시대의 정령인지는 모르겠군. 하여튼 상당한 힘을 지닌 정령이 봉인된 것은 확실하네.”

정령의 봉인.

그것은 고대에서도 몇 되지 않은 일이었다.

정령의 봉인은 상급 정령 마스터에 달한 이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생기는 일 중 하나이다.

계약자에 의해 이미 성장을 마친 정령은 다른 여타의 정령과 달리 두 가지의 길을 선택할 수 있다.

바로 정령계로 돌아가 천천히 정령계의 일부로 화하는 것과, 스스로 봉인하여 이곳 인간 세계에 남는 것, 둘로 나뉘는 것이다.

봉인을 하면 자아는 살아 있는 상태로 오랜 세월을 인간의 세계에서 살아갈 수 있다. 상급 정령이니만큼, 봉인된 뒤에도 그의 힘의 영향은 대단히 크다.

그의 영향이 자리한 곳에서 정령사가 수련할 경우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니만큼, 가끔 이 상급 정령이 봉인된 곳을 찾게 되면 그들은 가문의 비밀로 삼게 된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상급 정령 비기너에 들어선 정령사가 아니면 알아차릴 수 없기에 대부분 말년에 들어서야 자신이 수련한 곳이 고대 정령이 봉인이 된 곳임을 알게 된다.

보통의 경우 계약을 끝낸 정령은 정령계로 돌아가게 되지만, 가끔 계약자와 친분이 짙은 정령은 그 기회를 버리고 이처럼 남게 되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