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24화
그리고 잠시 후 하이 엘프가 그 진에 두 손을 올려 한 손으로는 정령력을 또 한 손으로는 마나를 부여하기 시작했다.
그 정령력과 마나는 같은 크기의 힘으로 구사하였는데, 그 소모된 힘은 상위 익스퍼트급에 달하였다.
야안은 그 광경을 보며 잠시 말문을 잃다, 어느 순간 시야가 하얗게 물들어 가더니 이내 정령의 호흡이 끊기며 현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로지는 야안의 옆에서 오전 내내 그를 지키며 바라보았다.
점차 거대해진 정령의 기운을 보았고, 그 덕분에 야안의 정령의 기운의 호흡이 깊어지면서 어느새 중급 정령 익스퍼트급에 오른 것을 보며 말문을 잃어야 했다.
그리고 이후 오랫동안 시간이 지나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정령의 호흡에 빠져 있던 야안이 깨어나자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은가?”
너무 오랫동안 정령의 호흡에 빠져 있어 사마가 끼인 것이 아닌가 걱정한 로지였지만, 야안은 그 어느 때보다 맑은 정신을 가진 터라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보다, 해야 할 이야기들이 많군요. 일행분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여느 때처럼 형형한 눈빛으로 믿음직한 뚜렷한 목소리로 말하는 야안에 로지는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나. 그러고 보니 식사를 하지 않았군. 일단 요기라도 하도록 하지.”
시간이 늦어 내려간 주점에는 손님들이 없었다.
야안은 꾸벅꾸벅 선잠을 자는 하인에게 1실버를 건네주며 간단히 요기할 만할 음식들을 내오기를 부탁했고, 잠을 자다 깜짝 놀란 하인은 여타 상단의 주인들처럼 팁을 주는 야안에게 인사를 하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움직였다.
커다란 탁자 둘을 붙여 자리를 마련한 그들은 궁금증이 담긴 눈으로 야안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을 느낀 야안이 로지와 큰 스승들에게 물었다.
“혹시 정령과 관계된 어떤 일을 진행 중이십니까?”
야안의 그 말에 로지가 놀라며 물었다.
“그것을 그대가 어떻게 아는가?”
“그 정령이 말씀해 주셨습니다.”
“아~ 그렇군. 그 존재라면 가능할 일이네.”
봉인된 상급 정령이라면 이 근방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일에 대해 이해하기 무섭게 야안이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 정령이 말하기를 그것을 행하기 위해서는 최소 대현자급의 경지에 들어선 자가 아니면 불가능하다 하셨습니다.”
야안의 그 말에 로뎅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가까이 연구한 결과 현재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하지만, 고대 정령께서 그것을 대신하는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그것은 예전 엘프가 펼치던 비법 중 하나로 보였습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큰 스승님들과 로지 님과 베르뎅 님, 라콘 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해결책을 정령이 주었다는 말에 로지는 크게 흥미를 보였다. 아니, 그곳에 자리한 모든 일행이 흥미롭게 야안을 바라보았다.
야안은 그에 대해 말을 하려다, 곧 말한 음식들이 나오자 잠시 말을 끊고 음식을 나누는 것을 도와주었다.
잠시 후 음식을 주고 저 멀리서 단잠을 이루는 하인을 보던 야안이 말을 이었다.
“그것은 제 생각에 하나의 정령과 소통하는 진인 듯했습니다. 그 진에 상위 익스퍼트급의 마나와 정령력이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게 되면 성공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에 앞서 고대 정령이 저에게 말해 주었던 이야기들을 알려드려야 할 것 같군요.”
하인이 가져온 싸구려 퍽으로 목을 축이던 야안은 긴 시간 동안 정령이 자신에게 알려준 이야기들을 그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놀라운 이야기가 시작되면서 모두가 쥐 죽은 듯이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술을 좋아하던 라콘조차 술병을 든 채 손이 굳었고, 배가 고파 급히 음식을 먹던 타린의 손도 멈추었다.
로뎅을 비롯해 그 모두가 고대 시절 죽음의 지배자가 보인 그 힘이 아주 미약한 힘의 일부라는 것에 절망했으며, 이제 인간들밖에 남지 않은 지금 만약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인간만으로 그들을 모두 상대해야 한다는 것에 회의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나며 로뎅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음~ 죽음의 지배자라. 겨우 그가 만든 일개의 악마도 척살하기 어렵건만.”
그 악마조차 힘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상대를 해볼 만한 것이지, 돌아왔다면 부족 전체가 나서도 성공한다는 확신하기 어려웠다. 로뎅의 말에 동의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주억거리던 큰 스승들 중 타이카가 야안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그대가 말한 전설의 추종자라는 것이 그 전설의 현자의 뒤를 따르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스승님이신 마론 현자님께서 주신 유물들이 바로 전설의 현자께서 쓰시던 물건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전부터 여러분들이 느끼고 계시는 이것이 바로 그 전설의 현자께서 말씀하신 뇌전의 정화입니다.”
그 말은 야안 그 자신이 전설의 현자 후보임을 말하는 것과 같았다.
로지는 설마 예전 잠시 생각하고 웃어 넘겼던 정령의 왕이 있을 줄은 몰랐고, 그 정령의 왕이 야안이 계약할 뇌전의 정령임을 알자 현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나 방대한 이야기라 현실감이 나지 않는 것은 야안도 마찬가지였다.
라콘은 마음을 진정하려는 듯 급하게 술을 넘겼다. 한 병을 내리 마신 그는 중얼거렸다.
“하! 우리 인간들은 그분들께 정말 많은 것을 빚졌구나.”
라콘의 그 말은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말이기도 했다.
식어버린 음식을 떠먹으며 조촐하게 식사를 마친 그들은 내일 이른 새벽에 일을 실행하기로 하고 자리를 끝냈다.
로지와 두 제자는 로뎅의 마나에 걸맞은 정령력을 부여하기 위해 연습에 나섰고, 야안은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며 자신의 하얀 정령석을 가루로 만들어 진을 만들었다. 이후 로뎅과 큰 스승들에게 이 정령진에 대해 의논하였다.
하지만, 그들도 이 정령이 가르쳐준 진에 대해서 짐작하기 어려웠다. 로뎅은 아무래도 정령이라는 것이 다른 세계의 존재하는 것인 만큼 그곳의 진리의 길이 따로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러며, 훗날 부족으로 돌아가 왕과 연구를 한다면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시간이 지나 새벽이 보일 때쯤, 야안의 방으로 그들이 모여들었다.
알레한드로와 그의 두 제자가 혹시나 모를 외부의 일에 대해 호위를 섰고, 야안은 로뎅을 비롯한 큰 스승들과 함께 이 비법에 잘못된 점이 없는가를 다시금 의논했다. 이후 로지와 두 제자가 정령력을 부여하는 것에 대해 준비를 끝냈다.
모든 것이 준비되었다.
로뎅이 손을 올렸고, 로지와 두 제자가 그 위에 손을 올렸다.
거대한 마나와 정령력이 들어서자, 가루가 된 하얀 정령석이 요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웅웅웅.
작지만 방 안을 뒤덮는 기이한 울음소리도 흘러나왔고, 로뎅의 마나가 극에 달할 정도로 부여되고 로지와 두 중급 정령사의 정령력 또한 아슬아슬하게 로뎅의 마나와 균형을 맞추었다.
정령이 알려준 그 모든 것이 끝이 나자 방 안을 뒤덮던 빛도 사라지고, 기이한 소리도 사라졌다.
빠드득. 빠득.
그리고 그 진 위로 공간이 쪼개지더니 무언가 불쑥 모습을 보였다.
그것은 고대 책에서만 보았던 상급 정령이었다. 드래곤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던 그것은 그 등장만으로도 주위의 모든 것을 압도했다.
로뎅조차 버거워하였을 정도라, 그 존재와 가장 가까이 있던 야안의 압박감은 대단히 컸다. 상급 정령은 투명한 눈으로 주위를 살펴보며 말했다.
-참으로 수고하셨소. 이제 나에게 맡기시오.
그 상급 정령이 말하는 것은 정령의 언어였지만, 기이하게도 정령의 언어를 모르는 다른 이들도 그 내용을 알아들었다.
그는 잠시 주위의 인물들을 살피다 이내 야안을 보며 말했다.
-그대는 준비되었는가?
“네, 준비되었습니다.”
-좋소, 시작하겠소이다. 정령의 호흡을 시작하시기 바라오.
그의 말에 야안이 이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정령의 호흡을 시작하였고, 상급 정령은 야안의 호흡 속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대단히 빨랐다.
해가 뜨기도 전에 중급 정령 마스터의 숨결에 도달하더니 해가 중천에 들 때쯤 고위 정령 비기너에 달하는 숨결을 이루게 되었다.
그리고 그제야 만족한다는 듯 어느새 야안의 정령의 터는 완성된 상태였다.
정령과 계약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한나절도 되지 않아 이루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두 달을 잡았지만, 예상을 넘어서 점차 굳게 다져지기만 하는 정령의 터는 언제 그 완성을 이루어질지 예측하기 어려운 면이 있었다.
한데 그 모든 시간을 뛰어넘어 완성해 버리자 야안은 물론이고 그 사실을 깨달은 로지와 두 제자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은 아직 이른 것이었다.
이 놀라운 일을 한 봉인된 고대 정령은 마지막 남은 정령의 기운을 빌려 예전 드래곤이 가르쳐준 대로 정령의 왕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덕분에 야안은 별다른 시행착오도 없이 정령의 왕이자 뇌전의 정령이기도 한 그 존재와 마주치게 되었다.
우지직.
상급 정령이 등장하였을 때만큼은 아니나 공간이 부서지는 듯한 소리가 나며 무언가가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존재는 작은 한 점의 빛에 불과했다.
희미하게 일렁이는 한 점의 푸른빛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강력하고 순수한 뇌전의 기운을 담고 있었다. 그저 단순히 정령이라고 이야기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힘이었다.
하지만 놀람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을 기다렸다. 그대가 이번에 나와 계약할 인간이로구나.
그 존재가 야안에게 말을 걸어왔다.
최초 하급 정령은 갓 태어난 아기와도 같음을 안다면 이 일은 기존의 모든 정령의 상식을 뒤엎는 일이었다.
야안의 그 같은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 존재는 이제 자신의 일을 끝내고 소멸하는 물의 정령을 어루만지듯 그의 기운을 자신의 기운으로 보듬었다.
-수고하였도다. 이제 쉬어라.
그의 그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있었다는 듯 봉인된 고대 정령은 한차례 대기를 일렁이더니 그렇게 모습을 감추었다.
고대 정령의 소멸치고 아주 작은 대기의 울림이라 서글프기까지 했다.
그 작은 빛 또한 야안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던지 잠시 여운을 가졌다. 빛이 일렁이던 그는 야안에게 물었다.
-태초의 법칙에 따라 그대에게 묻노니 그대 나와 계약을 맺겠는가?
그 웅장한 울림에 잠시 귀가 먹먹한 야안이 대답했다.
“태초의 법칙에 따라 저 베론 야안은 그 계약을 맺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이 나자마자 작은 빛을 중심으로 대기가 일렁이었고, 이내 그 작은 빛은 야안의 미간으로 파고들었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야안은 그 뇌전의 정령의 말을 마지막으로 기억하며 정신을 잃었다.
그들은 그날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에야 그들이 탈 조건과 맞는 배를 찾을 수 있었다.
운이 닿았는지 전쟁 물품을 거래하는 케온 대상단의 상선을 찾을 수 있었는데, 이들의 배에 탈 수 있다면 그들의 목적지인 제2 전장까지 번거로움 없이 도착할 수 있을 듯했다.
최근 전쟁으로 호화 물품들을 실은 상선이 많아지면서 해적들이 번성한지라, 상선에 오르려는 용병들의 수는 크게 줄어들어 있었다.
이 때문에 케온 대상단에서도 부족한 호위들을 구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여관에서 일하는 하인에게서 이 이야기를 들은 야안은 아주 좋은 기회임을 알고 그와 접촉을 시도했
다.
현재 이번 상행의 책임을 맡은 케온 대상단의 제2 지부장 밀리는 자신들이 원하는 수준의 용병들이 구해지지 않아 곤란해하다, 수하로부터 뛰어난 솜씨를 지닌 이들을 구했다는 말에 반기며 물었다.
“어디의 용병들이더냐.”
그의 물음에 이 소식을 알린 수하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용병이 아닙니다. 한 분은 마일드 왕국의 귀족이시고, 다른 분들은 저주받은 숲의 부족들이십니다.”
그 말에 밀리는 아미를 찌푸렸다. 호위도 중요하지만 부려 먹기 힘든 자는 상단주의 입장에서 꺼리는 점이 많다.
더구나 타지의 귀족이라지만, 왕국 중에서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마일드 왕국의 귀족은 아국의 귀족보다 상대하기 어려웠다. 자칫 자신이 속한 상단에 피해가 올 수 있는 일이다. 자존심과 체면으로 먹고사는 귀족들의 존속이라 그랬다.
그뿐이라면 좋으련만 그 외의 일행이 숲의 부족이라는 점이 입속에 가시가 박힌 듯 껄끄럽기까지 하다. 이들 부족은 좋지 못한 소문이 도는지라 이들을 배에 태웠다가 선원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까 두려웠다.
오랜 시간을 바다 위에 있으면 아무리 정신이 강한 자라도 약해지게 마련이다. 이 이름도 형체도 없는 괴물은 항행을 하는 이들의 마음속의 약점들을 끊임없이 두들기는데, 밀리는 그 점을 우려한 것이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수하에게 물었다.
“그래, 어느 수준인지 알겠느냐?”
수하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자신이 본 그 믿기지 않는 무위에 대해 말했다.
“그 귀족이라는 분은 잘 모르겠고, 같이 온 두 명의 부족민은 익스퍼트에 오르신 분들 같았습니다.”
그 말에 밀리는 선뜻 이해되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고, 그 모습에 자신도 그 마음을 안다는 듯 다시 말했다.
“확실히 익스퍼트에 오르신 분들 같았습니다. 같이 있던 경비대장도 옆에서 지켜보다 그가 보인 무위에 깜짝 놀라더군요. 처음 보았습니다. 검이 닿지도 않았는데, 단단한 땅이 무너질 듯 갈라지는 모습이라니.”
꿀꺽.
밀리는 수하의 그 믿기지 않는 말에 흥분하며 일어섰다.
“어서, 그분들이 있는 곳으로. 그분들께 실수하지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가장 좋은 접객실에 안내했습니다.”
그 말에 잘했다는 듯 수하의 등을 툭 친 밀리는 지금 말하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서둘러 방을 나섰다.
조금 전 타지의 귀족이나, 저주받은 숲의 부족이라는 것 때문에 꺼렸던 모습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