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45화
48. 후계
아니, 챈들러와 테리 야안을 비롯해 현재 저력이 그때까지 무사히 유지된다면 그 견제 속에서 살아남을 수도 있겠지만, 문제는 이들 중 그 누구도 자신만큼 믿음을 주고 일을 맡길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후계의 문제는 그가 가장 고민하는 것 중 하나였다. 자신의 대에서 수백 년을 이어온 마크 가의 대가 끊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지난 전투의 피해로 새로운 부인을 두어 자식을 만들 수도 없는 몸이 되었으니 그의 고민에는 답이 보이질 않는 듯했다.
그런 찰나 아론을 발견한 마크 자작의 머릿속에 무언가 반짝 스쳤다.
‘이 아이라면, 능히 옛 시절의 영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옛 시절의 영광을 넘을 수 있을지 모른다. 아직 너무도 어리고 만난 지 반나절도 채 되지 않았지만, 총관을 닮아 총명한 머리와 더불어 그 선하면서도 넓은 마음씨는 대영지를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데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그 신분 또한 비상하다.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야안의 신분은 귀족이었고, 또한 왕도 함부로 하지 못할 신관이기도 했다.
대륙의 그 수가 천도 되지 않는 아리스님의 선택을 받은 신관의 자식이었다. 감히 누가 이 아이를 귀족 가에 입적하는 데 반대할 수 있을 것인가?
그 신분이며 그 재능 마음씨 어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완벽한 조건을 갖춘 게 아론이었다. 머리가 좋고 그 감각도 좋아 전술에 대한 재능도 뛰어났으니 자신이 죽은 뒤 이 영지를 받는다면 어쩌면 원수인 카람 백작도 응징할 날이 올지 모른다.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한 듯 얼굴은 살짝 불그스름해졌고, 손은 자잘하게 떨렸다. 눈은 어느 때보다 생기가 넘쳐흘렀다.
하인을 불러 식사를 물리고 가벼운 차를 내오게 한 그는 차를 마시며 아론과 이야기를 이었다.
이야기의 주체는 영지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것이 주였는데, 아론은 낭랑한 목소리로 어설프게나마 제 생각을 말했다.
여전히 치기 어린 생각도 자리했지만, 그것이야 4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마크 자작은 듣는 내내 절로 마음이 차올랐다.
노을이 질 무렵이 되어서야 누군가 접객실에 찾아왔다. 야안이었다. 하인에게서 들은 바가 있었던 그는 마크 자작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였다.
“돌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들이 자작님을 귀찮게 한 것이지 걱정입니다.”
야안의 그 말에 마크 자작은 손을 저으며 부정했다.
“그렇지 않소. 덕분에 아주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니 말이오. 아주 총명한 아이더군. 정말 자네의 아들답다, 생각하였소.”
아들의 칭찬에 야안 또한 아버지라 그 또한 미소를 보이었다.
“부족한 아들을 좋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야안의 그 모습에 마크 자작은 미소를 보이다 이내 부탁하였다.
“괜찮다면 가끔 그대 아들과 시간을 보내어도 되겠소?”
마크 자작의 말에 야안은 그가 아들을 잃은 뒤 정을 붙일 곳을 찾는 것임을 짐작한지라 크게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물론입니다. 아들이 즐겁게 지낸 것 같으니 이 아이 또한 바라는 일일 것 같군요.”
아버지의 말에 아론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네. 정말 즐거웠어요.”
그 모습에 야안은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마크 자작에게 인사를 드리고 접객실을 나섰다.
두 명이었던 접객실은 조금 전과 같은 그 온기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마크 자작은 자신의 자리까지 들어선 노을에 쓸쓸하게 웃음을 흘리며 중얼 거렸다.
“확실히 나도 나이가 들긴 했구나.”
평소와 달리 어느 무장 못지않은 그의 기백은 착 가라앉아 있었다.
* * *
야안이 최근 관심이 있는 분야는 다름 아닌 주술이었다.
유피테르의 충고를 따라 주술에 상당한 시간을 쏟고 있었다. 리트담의 저서의 다음 그림은 오크와 비슷한 돼지 머리를 한 인간의 형태를 한 존재가 농부 복장을 하며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묵묵히 일을 하는 그의 모습은 그 우스꽝스러운 모습과 달리 경건하기까지 했다.
나이가 상당히 든 듯 그는 약간은 처진 볼살과 상당한 주름이 자리했다. 머리도 서리를 맞은 듯했다.
재밌는 것은 이다음 2장의 그림도 돼지와 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다음 장은 앞서 돼지 머리를 한 존재와 비슷하게 생긴 이가 뜨거운 화로 앞에서 대장장이 일을 하는 모습이었는데, 온몸이 땀으로 젖는 것도 모른 채 그의 눈은 화로 안의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의 굵은 팔뚝만큼이나 거대한 망치는 그의 단단한 손에 쥐어져 있었다. 화로에 물건이 나오기 무섭게 정련을 할 듯 그림은 생기가 넘쳤다.
이자 또한 앞선 돼지 인간처럼 상당히 늙어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라 한다면 그 체격이 아주 건실하다는 점 정도일 것이다.
다음 그림은 한 권의 책을 든 돼지 인간의 모습이었다. 그 지닌 책이나 복장을 보아 종교를 전파하는 신학자로 보였는데 그의 옆에는 낡은 오두막에 불이 켜져 있었고, 그 굴뚝에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지만 종교를 믿는 이치고는 그 복장이 상당히 낡고 남루했으며 그가 쥔 책은 아주 오래된 듯 손때가 반질반질한 채 떨어질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몸이나 체격을 보았을 때 그가 앞의 두 그림의 주인공보다 더 고생을 한 듯 보였지만 그 얼굴은 어떤 이보다도 행복한 듯 밝았다.
확실히 그 존재는 돼지머리였지만 그 표정이 생동감이 넘쳐 몬스터로 불리는 오크와는 다른 종족임을 확연히 알 수 있다.
야안은 앞서와 달리 그 그림의 주인공이 직업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자 왜 위대한 주술사인 리트담이 이 그림을 그렸는지 의문을 보였다.
첫 번째 쥐를 닮은 장군과 두 번째 원숭이를 닮은 종족의 무인 이야기와 달리 이들의 생은 평범해 보였기 때문이다.
농부와 대장장이 그리고 신학자 이들은 굳이 이 주술 그림이 아니어도 마크 영지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이들이었다.
물론 시골 영지인 만큼 이곳의 신학자들은 거창하게 신학을 연구하는 이들이 아닌, 아리스 님의 뜻을 전파하는 신관들의 이야기들을 모은 책을 주위 사람들에게 읽어주며 교훈을 주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림 속의 신학자 또한 다를 바는 없어 보였다.
야안은 말없이 그림을 바라보며 참오에 잠기었다. 지금까지 그러했듯이 그림을 참오하면서 무언가 초감각을 통해 그 느낌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직 무엇도 느끼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귀한 시간을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 같았지만, 야안은 지난 경험을 통해 세상에 쓸데없는 경험이란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일순간에 얻어지는 깨달음은 사실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오르고 오르다 마지막 산 정상에 오르게 되는 것과 같았다. 보이지 않지만, 그 지난 과정이 있어야 그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이다.
하루 종일 잠만 자며 스스로 공상에 빠지는 이조차 그 시간이 헛되다 할 수 없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일을 하는 이가 그런 그의 모습을 볼 때 게으른 자라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무언가를 얻고 있음이다.
미래에 그가 어떤 일을 하기 시작할 때 그조차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 지난 경험에서 도움을 얻게 된다.
지난 공상에서 뛰어난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것이며, 설사 그렇지 않더라도 아무런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허무하며 괴로운 일인지, 꿈이 없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한 것인지 알기에 물러서지 않는다. 주저앉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설사 그 자신이 하는 일이 잘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그 속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으며,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된다.
야안은 그것을 깨달았기에 이 시간 또한 특별한 의미를 굳이 부여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신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향해 그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랬다. 중요한 것은 그 자신이 그 길을 갈 수 있다. 라는 것을 깨닫는 것에 있다. 그것을 깨닫는다면 옆에서 아무리 늦었다 해도 그건 늦은 것이 아니었다.
야안은 그렇게 주술을 수련하면서 또한 로뎅이 그에게 남긴 유품인 그의 수련 일지를 살피며 자신이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나가기도 했다.
깨달은 바가 중복되는 것도 있어 빨리 습득을 하는 것도 있었지만 상반되는 개념이 아닌 다른 관점에서 살피는 현자의 깨달음은 저도 모르게 좁혀진 시야를 트이게 했다.
마법의 기초적인 부분들이 완성될수록 야안은 다양한 마법들을 접하며 그것을 응용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하기도 하고, 새로운 마법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연구하는 마법은 뇌전의 특성을 연구하여 자신의 기운을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에 대한 것인데, 그는 전해질에 대한 점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여러 다방면에 연구한 끝에 마법으로 이루어진 순수한 물은 오히려 뇌전의 기운을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깨달은 야안은 물의 구와 어스의 마법으로 분비물을 섞어 가장 높은 전해질이 될 부분을 찾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의 벽에 뇌전을 뿌리자 어느 대 마법 못지않은 효과를 보였다. 스며든 물 때문에 어지간한 마항력을 지닌 방어구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이다. 또한, 쓰는 뇌전의 힘보다 범위는 넓으면서 더욱 강력했다.
야안은 파이어 핑거처럼 뇌전의 정령력을 일순간에 펼칠 수 있도록 연습을 하기도 했다. 확실히 강력한 힘을 지닌 뇌전이라 그런지 그 위력은 야안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순간적으로 펼치는 것으로 검기보다 약간 못 미치는 위력이었지만 그 적이 사마에 들어선 이라 생각한다면 능히 검기 못지않은 위력을 보일 것임을 예상할 수 있다.
착실하게 스스로 끊임없이 단련하는 야안처럼 마크 영지 또한 그렇게 차근차근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확실히 관개수로의 공사는 상당한 자금이 들었다.
올해 얻은 수익금과 함께 그간 모아둔 영지 재산의 삼 분의 일이 기초 공사비로 투입된 것이다.
이도 제코가 나서고, 폴톤과 그의 23명의 제자가 그간 숙련된 경험을 바탕으로 도면을 꾸며서 이 정도의 비용이 나온 것이지, 잘못했다면 영지의 반 이상의 재산이 이번에 탕진되었을 것이다.
앞으로 관개수로의 공사비는 못해도 지금 쓰이는 비용의 4배 이상이 더 들어갈 예정인데, 야안은 새로 늘어난 농지나 포도밭이 내년에는 거름의 효과를 보게 되면서 그 수입이 매우 늘어날 것으로 예상한 터라 무리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더구나, 영지의 대장간에서 만들고 있는 무기와 와인은 그 수준이 점차 높아졌기에 그 수익만으로도 대단했다.
거래하는 영지가 늘어나며 내년에는 지금의 시장보다 2배 이상 늘어날 것으로 보았기에 오히려 폴톤에게 관개수로를 확장하는 방향으로 잡도록 했다.
이는 지금 관개수로를 잘 잡으면 앞으로 영지가 확전하고 발전되면서 이후 관개수로를 개선할 때 그 비용이 상당히 절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야안의 의견에 폴톤은 다시 도면을 새로 꾸려야 했지만, 불만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즐기는 듯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마지막 작품이기도 했기에 성대한 공사를 이루고 싶은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사로 자신이 키우는 23명의 제자들도 크게 성장할 수 있게 될 것이니 반길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