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49화
애초 눈이 밝고 움직임이 가벼운 자들을 모아 훈련한 척후병들이 가져온 소식에서 이들의 제식이 무뎌졌음을 알아낸 것이다.
마크 자작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에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의 추세로 보아 시간이 더 흐른다면 지금보다 경계가 무뎌질 수 있을지 모르나, 그 이전 수장인 라테온이 그 상황을 안다면 지금까지 공들인 일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라테온의 행동 모두는 이미 자신의 예측 안에 다 있는 것이다. 일부러 그는 이런 상황을 유도했는데, 그는 보기 좋게 말려들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라테온이 지휘관으로서 상당히 재능이 있음을 말한다. 만약 그가 기다리지 않고 무리하게 강행하며 그들을 상대했다면 마크 자작은 준비해온 전술을 버리고 새로운 형태의 전술을 짜느라 진땀을 흘려야 했을 것이다.
마크 자작은 라테온이 기병을 의식하여 외곽 주위를 둘러 경계를 쓴 탓에 중심이 약해진 것을 노리고 있었다.
물론 중심지인 만큼 상당수의 병력이 밀집되어 있었지만, 그 정도는 강력한 기병을 가진 마크 자작에게 문제가 아니었다.
곧 마크 자작의 뒤로 기병과 함께 보병들 또한 움직이기 시작했다.
‘후두둑, 후두둑-’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시간에 화살비가 자신들에게 내려섰다. 이에 방패병이 거대한 방패를 들어 화살을 막아섰다.
무거운 방패병을 제외하고는 경계를 쓰는 석궁병이나 단창과 창병은 상당히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기습도 한 두 번이어야지 벌써 몇 번째인가? 이제 떨어지는 화살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아함~ 야, 화살 그치면 깨워. 나 워 잠도 제대로 못 재우게 하니 피곤해 죽겠군.”
고참인 석궁병의 말처럼 그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간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눈 밑이 검었다.
고참이 이내 잠들자, 자연 기강이 무너졌다. 형식적으로 보던 경계도 하지 않은 채 저마다 잠시 눈이라도 감으려 하던 그들은 이내 지진을 느끼며 눈을 떴다.
“무, 무슨 일이야.”
그래도 고참 이라 그런지 주위를 살피던 그는 곧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젠장! 어쩐지 다른 때보다 화살이 많이 내린다더니.”
이천이 넘는 기병이 무서운 속도로 자신들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서둘러 수하를 깨우고 석궁을 재던 그는 기병들이 던진 단창에 목숨을 잃었다.
“으아악! 사, 살려줘.”
이천오백에 달하는 기병이 던지는 단창은 말 위에서도 던지는 것이라 그런지 전문적으로 연습한 단창병 만큼이나 무서웠다.
아니, 그 이전 경계를 게을리하게 되어 거리를 좁힌 기병은 그들이 어쩔 수 있는 존재들이 아니었다.
더구나 이들은 쐐기 형태로 좁혀 몰아치는지라 장마에 얇은 둑이 무너지듯이 그들은 별다른 힘도 내지 못한 채 진형이 무너져 버렸다.
가장 앞서 돌격하는 챈들러와 그를 받치는 테리와 푸리와 부딪히는 병사들은 허수아비처럼 베어져 내렸다.
뒤늦게 붉은 물결이 정비를 마치고 그들을 맞이했지만, 이미 그 숫자는 물론이고 기세가 올라탄 그들의 돌격은 막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었다.
그래도 경계를 한 것이라 라테온이 돌격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것은 마크 자작이 가장 바라는 것 중 하나였다.
수장이 잡히면 이들을 무너뜨리는 것은 어린아이 손목 비트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었다.
“정신 차려. 너희는 자랑스러운 카람 영지의 붉은 물결이다.”
라테온 목소리에 마나를 부여하여 크게 소리치며 기세를 살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런 그를 방해하는 거대한 그림자가 있었다.
‘이히히힝-’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칠게 땅을 내려서는 존재는 다른 말에 비해 그 체격이 2배는 되어 보이는 흑마였다.
론이 라문 왕국에서 어렵게 구한 블랙라이징이라는 품종이었는데, 이는 마크 자작의 요청으로 구입한 것이다.
그는 이 말을 챈들러에게 선사했는데, 오랜 세월 용병 일을 하면서 자연히 말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던 챈들러는 단번에 이 말의 가치를 알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그 말을 대단히 아끼며 가까이하였는데, 덕분에 그의 기마술은 라문 왕국에서도 찾기 어려울 만큼 뛰어난 실력을 지니게 되었다.
“나는 마크 가의 장수 펠 챈들러라 한다. 그대는 내가 상대해주지.”
자신을 소개한 그는 야안에게 전수받은 붉은 실을 펼쳤다.
‘콰앙-’
라테온은 단번에 상대가 자신 못지않은 수준임을 깨닫고 서둘러 검기를 일으켜 그의 검을 막아섰다. 그리고 현자의 마법이 터진 듯한 거대한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라테온이 탄 말이 그 힘을 이기지 못해 두세 걸음을 물리고 말았다.
힘의 여운을 이기지 못해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끼던 라테온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말의 갈기를 잡아채어 진정시켰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검을 휘두르는 챈들러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어째서 시골 영지라 생각하던 자작 가에 이 같은 검객이 나타났는지에 대한 의문은 그에게 없었다. 사력을 다해 챈들러에게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바빴기 때문이다.
라테온의 검은 야안이 챈들러에게 선물해 준 검만큼 뛰어난 것이었지만, 그 힘을 받치는 말에서 크게 밀렸다. 아니, 그것이 아니어도 경험에서 밀렸고, 그 수준에서도 밀렸다.
시간이 날 때마다 야안이 그에게 지도대련의 형태로 가르쳐 주었는데, 야안의 가르침은 현자의 뛰어난 머리를 기반으로 한 것으로 그에게 최적 된 검의 길을 만들어주었다.
덕분에 초급 익스퍼트에 오른 지 삼 년 만에 능숙한 단계를 넘어서 이제 끝자락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이에는 이십사수검법은 그와 상성이 잘 맞았던 것도 있었는데, 지난 야안에게서 비법을 받은 뒤 마나가 늘어난 뒤부터는 라테온은 그에게서 반수 가량 밀리는 면이 있었다.
붉은 물결의 핵심적인 존재인 라테온이 챈들러에게 막히자 붉은 물결은 학살을 당하는 피해를 봐야 했다.
마크 자작이 테리와 푸리를 기반으로 본격적인 전술을 펼쳤기 때문이다. 난전 형태처럼 보여 자신을 뒤덮는 보병들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하면서 여유 기병으로 크게 휘돌아 진형을 어지럽히며 한쪽으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밖에서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이천의 보병들이 물러서는 카람 백작 병력을 압박했는데, 몇몇 남은 백부장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포위가 된 상태였다.
반대 측에 있는 붉은 물결의 병력은 벌써 반이나 잃은 것을 보던 수석 백부장은 이내 고개를 돌려 라테온이 있는 것을 쳐다보았고, 그는 이내 고개를 떨구고 말았다.
마크 자작 측에서 데려온 기사에 의해 그가 믿던 라테온조차 무너진 것을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농노병들은 고작 삼백도 되지 않는 기병들에 제압된 상태였고, 천인장을 몰살한 탓에 제대로 된 구심점조차 없이 고작 오천이 남은 병력으로 이들을 상대할 수 없었던 그는 항복하였다.
반항을 하면 개죽음뿐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수석 백인 장이었던 그가 항복을 하자, 기세가 꺾일 때로 꺾여 버린 남은 백인 장들 또한 여기저기서 항복하였다.
“눈치가 있어 다행이군.”
마크 자작은 제 생각보다 빠르게 그들이 항복을 하자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들을 상대하여 이긴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 전투로 자신들도 많은 피해를 보았다. 앞으로 이보다 더 험한 전쟁을 해야 하는 입장에서 더 이상의 피해는 달가운 것이 아니다.
전술이 마크 자작의 생각한 대로 흘러간 덕분인지 마크 자작 측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보병의 전사자는 147에 불과했고, 기병 또한 78명 전사자와 136 마리의 말을 잃었을 뿐이다. 전사자 중 사망자의 수는 합쳐도 50을 넘지 않았으니 그야말로 대승리라 할 수 있다.
항복한 이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그들이 데려온 마차를 개조하여 무구들을 실었다. 백작 측에서 만들어 무구의 질이 좋았는데, 이것은 영지의 대장간에서 손을 봐 라문 왕국과 거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한 것보다 포로의 수가 상당했다. 포획한 농노가 삼천이 넘었고, 항복한 병사가 오천이 좀 안 되었으니 합쳐서 팔천에 달하는 포로를 얻은 것이다.
“총관이 좋아하겠군.”
봄이 되어 언 땅이 녹으면서 마을 건설을 비롯해 목책 공사와 관개수로 공사를 하려면 일꾼들이 상당히 필요했다. 한데, 이번 일로 팔천에 달하는 건장한 일꾼들을 얻었으니 한시름 놓은 것이다.
더구나 오천에 달하는 병사들은 본래 정예병이라 할 만큼 그 체력이 대단했으니 일꾼으로서도 고급 인력이라 할 수 있겠다.
마크 자작은 지난 자신이 데려온 나프롬 자작 가 측의 포로들을 야안이 회유책으로 끌어들이는 것을 보고 이번에도 상당수의 그 같은 방법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물론 나프롬 자작 가 병사들과 상황이 다르니 회유가 어려울 것이지만 사람을 다루는 데 천부적인 능력이 있는 야안이라면 일부는 회유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이번에 지원된 농노 또한 어린 사내들이 많았는데, 마크 자작은 이들 중 일부는 훗날 자신의 병사가 될 것으로 예상했기에 이들을 더 챙기었다.
방해로 그 움직임이 느렸다고 하지만 라테온이 지속적으로 마크 영지로 가고 있었던 덕분에 포로 이송에 큰 시일은 걸리지 않았다.
인원이 많은 덕분에 움직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긴 했지만, 열흘이 채 되지 않아 성공적으로 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이후 야안은 마크 자작의 도움을 받아 포로들을 노예로 바꾸어 그들을 갈가리 찢어 놓아 그 힘을 무력화했다.
이들 중 위험 분자나 억센 이들은 위험 지역 쪽으로 보내어 성벽 공사를 시켰는데, 오려는 일꾼들이 없어 곤란해하던 관료는 그들을 대단히 반기었다.
구천이 넘는 포로들이 들어섰지만, 본래 농노들과 합치면 육 만에 달하던 마크 자작 가였기에 무리 없이 그들을 수용할 수 있었다.
새로 땅을 개관하여 밭을 만들어 이번에 노예가 된 포로들의 식량을 마련하도록 했다. 현재 마크 자작은 쓰고 있는 땅보다 개관해야 할 땅이 많았기에 그 정도의 땅을 내 주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카람 백작 측에서는 이 같은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
검은 전갈의 일을 보아 마크 자작의 능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 봐야 시골 자작의 세력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일 것으로 생각했다. 큰 지출을 각오하고 내 보낸 정예병 칠천과 맞서 잡아내었으니 충격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더구나 이 일로 인해 카람 백작가의 기사 일곱 중 하나를 잃게 되었다. 라테온이 초급 익스퍼트이긴 해도 충분히 중급 익스퍼트까지 노려 볼만한 인재였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정예병 칠천이 죽은 것보다 더한 피해라 할 수 있다.
전장에서 그 소식을 들은 카람 백작은 어이없어 잠시 말문을 잃어야 했다. 그는 치가 떨렸으나 언제까지 화를 낼 수만은 없었기에 아쉬운 일이지만, 자신이 데려온 기사 한 명과 병력의 일부를 영지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전장에서 자신의 위치는 줄어들 것이 분명했지만, 이 기회를 놓칠 티온 백작 가가 아니기에 행한 조치였다.
“반드시 이 일에 대한 복수를 해주지.”
카람 백작은 지금 당장은 복수할 여건이 되지 않은 터라 그 말을 되새기며 분노를 되 삼켰다. 지금 당장은 새롭게 병력을 뽑아 훈련을 시켜야 했기에 쉽사리 움직이지 못했다.
덕분에 마크 자작 가의 입장에서는 성장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마크 자작의 최종 목표는 기병의 수를 2배로 늘리고 보병 또한 최정예로 돌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