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58화
로뎅의 생글거리는 입가에 흘리는 침을 닦아주던 야안은 못내 아쉬워하는 아론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군대가 출정을 한 다음 날에 집에 가도록 하자. 공부도 좋지만, 쉴 때는 쉬어야겠지.”
“그 말, 정말이지요.”
다른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 면이 있어 힘든 모습을 내색하지 않는 아론이었지만, 아직 가족의 정이 필요한 때라 아론은 대단히 반기었다.
그런 아들의 모습에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던 그는 아론이 낮에 미처 하지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는 모습을 보며 몸을 돌렸다.
늦은 시간이지만 여름이라 이제 막 노을이 드는 하늘의 모습은 유난히도 붉었다.
나프롬 영지는 이제 자작의 영지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쇠약해 있었다.
지난해 한 차례 민란이 일어나 치안이 어지러워졌고, 마크 자작에 의해 거래가 끊겨 자금줄이 무너져 있었다.
그 때문에 시장은 죽어 버려 일자리를 찾는 이들이 길거리에 즐비했으며, 겨우겨우 모은 이천의 병사들은 기강이 무너져 수성조차 제대로 할 기력이 없어 보였다.
나프롬 자작은 나라에서 전쟁이 끝이 났다는 말을 들은 이후 눈을 붙이지 못했다.
눈을 붙이는 순간 마크 자작이 자신의 목을 쳐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뱃살이 넉넉했던 그의 풍만한 몸은 공포로 야위어져 그를 알던 이도 지금의 모습을 본다면 생소함을 감추지 못할 것이다.
“으흐흐흑. 으흑. 뭐라 했느냐.”
눈 밑이 짙은 그림자가 자리한 나프롬 자작은 자신에게 보고를 하러 온 단장의 말에 놀라 우는 듯이 물었다. 그 추레한 모습에 단장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 다시금 보고 하였다.
“마크 자작이 출정하였습니다.”
‘꿀꺽-’
요란하게 침을 삼키던 나프롬 자작은 앙상한 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 뜯으며 중얼중얼 거렸다.
“겨, 결국, 그놈이 나를 베러 오는 것인가.”
한참 동안 걱정거리를 중얼거리던 나프롬 자작은 혓바닥으로 입술을 축이며 물었다.
“카, 카람 백작 가에서는 연락이 왔느냐?”
그 말에 병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직,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기대 어린 시선으로 단장을 바라보던 나프롬 자작의 얼굴에 주름이 가득 일어섰다. 자신이 듣고자 하는 대답이 아니었다. 그는 조금 전보다 더 불안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고, 단장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으며 접객실을 나섰다.
현재 나프롬 영지의 모든 병력을 통솔하는 로케 단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성을 나섰다. 현재 상황은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지만, 마크 자작에 의해 큰 피해를 본 뒤 영지 내의 자금력과 물자가 떨어지면서 사기를 높이려 해도 높일 수가 없었다.
더구나 나프롬 자작이 폭정을 하는 탓에 연민이나 충성 따위를 강요할 수 없는 시점이었으니 앞서 말한 것처럼 지휘관으로서 최악의 상황에 있다고 보아야 했다.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은 무엇인가?’
수성인만큼 이 같은 상황이라 해도 짧아도 나흘은 버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전쟁은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승패가 갈라져 있는 것이었고, 버틴 다 하여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히려 덧없는 목숨만이 잃을 뿐이다.
나프롬 자작 가의 가신 가문의 후손으로 태어났으나 모아둔 재산이나 인맥이 없어 평생을 경비 대장으로 활동하던 자신이었다.
군을 맡던 지휘관들이 마크 자작에 의해 목숨을 잃게 되면서 결국 자신이 단장의 직위를 받게 되었지만, 그는 이미 나프롬 자작 가에 실망을 한 상태였다.
기력이 없는 제 병사들의 미래가 안타까워 미처 단장의 자리를 팽개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만약 나프롬 자작이 주군으로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보여주었다면 그 같은 마음을 고쳐먹었을지 모른다.
잠시 얼굴을 굳히며 말없이 자신의 처소로 걸어가던 그는 작게 중얼거렸다.
“어쩔 수 없구나.”
결심을 굳힌 그의 뒤로 뜨거운 바람이 따르며 흩어졌다.
마크 자작이 일 만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켰지만, 사실 그럴 필요는 없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수성을 상대하는 만큼 압도적인 병력을 보여 그 피해를 줄이고, 또한 병력의 운용을 이번 전쟁을 통해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얻기 위해 이 같은 군대를 일으킨 것이다.
물론 그 외에도 밀정을 통해 나프롬 자작 영지의 무너진 치안을 바로 잡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이미 영지전을 선포한 만큼 이 영지도 마크 영지의 이름을 달게 될 것이다. 이미 전쟁 이후 어떻게 개선을 할 것인지 야안이 계획을 다 짠 상태였다.
나프롬 영지로 갈 관료들을 뽑아 놓은 상태였고, 두 영지를 잇는 도로 공사를 준비 중이었으며 새로운 군사적 요충지 또한 살펴본 뒤였다.
그 때문에 모아둔 영지의 자금이 상당 금액이 투입되어야겠지만, 미래를 본다면 이것은 절대 손해가 아니었다.
이런저런 일이 있겠지만, 마크 자작은 그 어느 일보다 자신의 손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아들을 죽게 한 원수인 나프롬 자작을 베는 일이 그의 최고 관심사였다.
‘드디어 이날이 오는구나.’
이제 한나절 거리만 움직인다면 나프롬 자작의 성이 보일 것이다. 달빛 아래에서 횃불에 기대어 준비된 공성 무기를 점검하던 그는 경계를 보던 앞쪽에서 소란스러움이 보이자 이내 고개를 돌렸다.
곧 일이 해결 된 듯 소란스러움이 사라졌는데, 나프롬 자작은 의문을 보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몬스터라도 만난 것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지웠다. 일만의 군대이다. 아무리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생각 없는 몬스터라 해도 그 같은 규모를 지닌 인간에게는 덤비지 않는다.
과연 그의 생각이 맞는 듯 이유를 알기 위해 움직인 병사는 곧 전령으로 보이는 한 명의 사내와 함께 모습을 보였다.
“누군가?”
“나프롬 영지에서 온 전령이라 합니다. 마크 자작님께 무슨 서신을 가져왔다 하더군요.”
“누가 보낸 서신인가,”
나프롬 영지에서 온 전령은 나름 검을 수련한 이라 담이 컸지만, 이곳은 별천지라도 되는 듯 그 병사들 하나하나가 보기 힘든 기백을 지닌 터라 그는 잔뜩 겁을 먹은 상태였다.
이내 왜소하지만 그 기백은 여느 장군 못지않은 모습을 보이는 마크 자작에 간이 오그라질 듯한 그는 요란하게 침을 삼키며 말했다.
“로케 단장님이십니다.”
“로케라?”
현재 나프롬 자작 가의 병력을 통솔하고 있는 자였다. 알아본바 능력에 비해 형편없는 대우를 받다 사람이 없어 이제야 군대를 통솔하게 된 인물이기도 했다.
만약 그가 아니었다면 마크 자작은 지금처럼 대규모의 군대를 일으키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가져오게.”
나프롬 자작의 말에 곧 병사가 우악스럽게 전령에게서 서신을 받아 마크 자작에게 건네었다.
말없이 서신을 읽던 마크 자작은 쓰게 웃음을 흘렸다.
“후후. 이것이 사실이라면 과연 잘된 일인지 아닌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은 왠지 쓸쓸해 보였다.
잠시 생각에 빠지던 그는 펜을 들어 서신을 작성하여 봉한 뒤 전령에게 그 서신을 전달해 주었다.
“가져다주면 알 것이다. 좋은 대장을 만났구나. 덕분에 너는 살았다.”
그 말에 잠시 멍청한 모습을 보이던 전령은 이내 덜덜 떨며 서신을 받더니 같이 온 병사와 함께 다시 외곽으로 움직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크 자작은 이내 다시 서신을 써 마크 영지로 전령을 보냈다.
다음 날, 마크 자작의 부대는 애초 계획한 것보다 이른 시간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새벽이 이르기도 전에 병력 중 삼천의 기병만을 이끌고 나프롬 자작 가로 향한 것이다.
새벽 너머 어둠 속을 뚫고 나타나는 삼천의 기병은 오금을 저릴 만큼 두려운 것이었다. 마치 성을 통째로 무너뜨리게 할 듯한 기세라 로케의 명을 들은 바 있던 경비병들은 두려움에 떨며 성문을 열기 시작했다.
도르래가 요란스럽게 움직이며 무거운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말없이 열리는 성문을 살펴보던 마크 자작은 테리에게 손을 저었다. 철갑마라면 혹시나 함정이라 해도 큰 피해는 없을 것으로 판단해서이다.
곧 삼천의 기병 중 500에 달하는 철갑마가 유난히 무거운 소리를 흘리며 성안으로 들어섰고, 그들은 자신들의 문을 열어준 경비병들을 묶어 포위하고는 수하들을 풀어 주위를 살피게 하였다.
여기저기 처소에는 요란한 말굽 소리에 놀라 깨어나 횃불이 피우는 것을 살피던 테리는 함정이 아닌 것을 확신하고 신호를 올렸다.
곧 신호를 본 마크 자작은 이내 남은 기병들과 함께 성으로 들이 닫혔다.
삼천에 달하는 기병들이 성에 들어와 마치 노한 해일처럼 쓸어버리기 시작하자, 경계를 보던 병사들은 오줌을 지렸고, 저마다 무기를 던진 채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수도 많은데다 말을 탄 기병을 상대로 도망을 친다는 것을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미 해는 떠오르고 있었고, 밝아진 하늘 아래 그들이 갈 곳은 없었다.
거대한 원진을 펼쳐 적군들을 잡아 한쪽으로 몰아넣기 시작한 기병들에 그들은 눈물을 흘리고 고통에 비명을 흘렸다.
일부는 이성을 잃고 덤비는 이들도 있었지만, 애초 유저 수준의 그들에게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미 마크 자작에게 들은 명령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인명살상을 줄이던 기병들은 두어시간이 걸려서야 나프롬 자작의 병사 90% 이상을 잡아들일 수 있었다.
한바탕 요란한 소란이 끝이 날 때쯤에서야 로케가 모습을 보였다.
검은 물론이고 갑옷마저 벗어버린 그는 완벽하게 무장을 해제한 채 몇몇 수하들과 함께 항복했다.
그를 거칠게 다루려던 기병들에게 손짓을 하여 물리게 하던 마크 자작은 잠시 로케를 살펴보다 감탄을 흘렸다.
마크 자작은 그에게서 예전 전장에서 보았던 몇 되지 않은 맹장과도 같은 뛰어난 기량을 볼 수 있었다.
무인이 아니기에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지만, 부리부리한 눈빛과 한일자로 굳어진 입술, 그리고 은은히 흘러나오는 그의 기질을 살펴보자면 그는 타고난 맹장이었다. 다만 고집이 있고 바르지 않은 길은 쳐다도 보지 않아 소인배들과 마찰이 심했을 것 같다.
‘이런 이가 지휘관이라. 운이 좋았군. 만약 이자의 여건이 조금만 좋았다면 그와의 전쟁은 상당히 치열하게 흘러갔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던 마크 자작은 이내 이 같은 인재를 고작 경비대장으로 썼다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런 점을 생각하자, 마크 자작은 새삼 총관이 대단하다 느껴졌다.
애초 마크 영지와 같은 시골 영지에 제대로 된 인재가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신분을 막론하고 인재를 뽑아 키우더니 십 년도 채 되지 않아 지금의 마크 영지에는 수많은 인재가 자리하게 되었다.
젊은 나이에 그만한 능력을 지녔다면 교만할 법도 한데, 그 인품도 신께서 인정하는 신관이었으니 만약 자신의 속 좁은 아량에 그를 다른 곳에 보냈다면 천추의 한으로 남았을지 모른다.
그 사실을 생각하자 나프롬 자작이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는 게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인간은 황금을 앞에 두고 구리 덩어리를 쥔 손을 놓지 못하는 존재라 하였던가?’
어리석은 이일수록 그 같은 일을 벌이는 법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지혜로운 자를 가까이하려 한다. 그들의 충고는 쓰고 쓰지만, 자신의 손에 구리 덩어리 대신 황금을 쥐게 해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로케는 하나같이 자신 못지않은 기량을 보이는 마크 자작의 병사들에 감탄을 크게 보였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