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69화
사육사들은 그 말을 보자마자 대단히 흥분했는데, 이 백마는 블리자드라는 이름을 가진 말로 블랙 라이징보다 반 단계 격이 높았다.
힘이 대단히 뛰어나 800Km를 하루 만에 돌파하는 저력을 가지고 있다 하는데, 확실히 그 진창에서도 이 말만은 그 움직임이 범상치 않았다.
야안에게는 그 못지않은 품종인 블랙 라쿤이 있기에, 이 말을 테리에게 내줄 생각이었다. 현재 들려오는 소식 속에서 그가 혁혁한 공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였으니, 그 보상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본래 철갑마였던 만큼 철갑 기병대를 이끄는 테리에게 있어 아주 좋은 보물이었다.
데론 자작의 군대는 산중에 자리한 한 평야에서 멈추어섰다.
테리가 이끄는 기병 때문인데, 오랫동안 준비한 마크 자작의 전술이 시작되면서 그들은 정신없이 당하고 있었다.
막아서려 움직이며 준비된 함정에 피해를 줬고, 그들의 기습을 예측하여 준비하면 생각지도 못한 다른 쪽에서 치고 들어왔다.
지난 챈들러의 기습과 달리 그들의 기습은 도저히 예측할 수 없는 무형식처럼 보였다.
하지만 어느새 정신을 차리면 자신들이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알게 되니, 그들의 수장인 데론 자작은 더 이상 군대를 진격하지 못하고 자리를 잡았다.
“빌어먹을!”
그간 많은 전쟁을 치렀으나, 이런 전쟁은 처음이었다. 함정들이나 적의 기병들에 움직임을 본다면 오랫동안 이곳에서 자신들을 맞을 준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상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기분이다. 지금 자신의 결정 또한 상대의 의도를 따르는 것 같아 그는 짜증이 치솟았다.
지휘관으로서는 더없이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데론 자작은 피해에 대한 보고서를 살피며 흥분한 마음을 다스렸다.
‘로칸 자작과 푸른 기병이 그렇게 잃게 될 줄이야.’
그 전투로 인해 데론 자작은 마크 자작에 대한 경계심이 바짝 올랐다. 그 또한 로칸 자작이 깨달은 것처럼 그의 무모하면서도 놀라운 전술 형식에 긴장을 한 것이다.
그 전투가 아니었다면 자신을 괴롭히는 그 기병들을 무리해서라도 잡았을 것이다.
데론 자작은 지난 라테온 경이 이끄는 군대가 왜 그처럼 큰 패배를 당했는지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었다.
라테온 경의 자질은 뛰어났지만, 이 괴물 같은 마크 자작의 전술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그 자신조차 압도적인 병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긴장을 하고 있을 정도였으니.
‘이들이 노리는 것은 무엇인가?’
안갯속에 자리한 것처럼 앞으로 전쟁의 흐름이 보이지 않았다.
한바탕 격렬한 전투를 벌이는 것이 아닌 지속적으로 기습을 당한 터라, 병사들은 어느 때보다 예민하였다.
경비를 쓰는 병사들은 어둠 속에서 금방이라도 그들이 모습을 보일 것 같아 등에서는 식은 땀이 흘렀다.
한쪽에서는 그들의 기습을 대비하여 기병들을 비롯해 여러 병과가 준비되었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불안은 지워지지 않았다.
카람 백작 가에서 내 보낸 기병들의 수준도 뛰어났지만, 테리라는 기사가 이끄는 이 기병대에 비한다면 손색이 있었다.
더구나 그 기사가 이끄는 철갑 기병대의 위용은 지난 전투 속에서 입증된 바가 있다. 거대한 정과 망치로 두들기는 듯한 그의 돌격은 막으려야 막을 수가 없었다.
만약 철갑 기병대인 푸른 기병들이 있었다면 막을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지만, 이미 그들은 지난 전투에서 산화되었다.
아니, 있었어도, 그들의 변화무쌍한 움직임에 대처하지 못할 것이다.
산새울음소리가 그치더니 어느새 요란하게 대지가 떨리더니 네 곳에서 기병들이 진지를 뛰어넘었다.
삼방 검진을 펼치는 기병들은 자신을 막는 기병들을 격파하고, 준비된 단창을 던져 자신의 진로를 방해하는 보병들을 치웠다. 이후 회오리치듯이 적진을 휘젓던 그들은 다시 하나로 합쳐져 물러섰다.
보병들과 기병들이 그들을 잡으려 했지만, 후미에 자리한 철갑 기병대에 의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순식간에 500에 달하는 병력을 잃은 것을 본 팔론은 욕지거리를 흘렸다.
“젠장! 빌어먹을. 그 녀석이 테리라는 놈인가?”
이십대 초반에 불과한 사내였다. 위풍당당한 기세를 보이며 자신과 수십 합을 겨루었던 그로 인해 이번에도 자신은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앞으로 십 년이 지나면 괴물이 탄생하겠구나.’
검을 숭상하는 제국에서나 볼 수 있는 존재였다. 이십 대에 기사라는 것은 천재라는 호칭이 아깝지 않았다.
팔론은 그의 검이 어떤 스승에게 배웠는지 모르지만 제대로 배웠음을 알 수 있었다. 모든 것이 균형이 맞춰져 있었다. 젊은 나이에 그 같은 경지에 오르면 패검에 빠지기 쉬운데 그는 그런 조짐이 보이지 않았다.
이대로 그가 계속 성장한다면 현재 마일드 왕국의 정세에 영향은 끼칠 존재가 될 것이다.
벌써 세 번째 그와 검을 나누었지만, 자신이 승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마나의 양도 자신보다 모자라지 않았고, 구의 발현도 자신 못지않게 촘촘했다. 그가 펼치는 검술은 그 자신이 익히고 있는 검술보다 상위의 것이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필히 제거해야 할 자가 있다면, 그자를 손꼽았다. 데론 자작 또한 팔론의 의견에 동감했다.
그 본신의 실력도 실력이지만 지금도 그 기병대를 다루는 전술 능력이 뛰어나건만, 연륜이 쌓인다면 후에 마크 자작만큼이나 무서운 존재로 떠오를지 모른다. 생각해서이다.
팔론은 자신의 진형을 휩쓸고 어둠 속에 사라진 그들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테리가 이끄는 이천의 기병들이 준비된 지형을 이용하여 전술을 펼치었지만, 카람 백작 측의 병력이 워낙 강병인지라 피해가 없을 수는 없었다.
보름간의 혈전 끝에 그들 또한 사백에 달하는 사상자가 생겼다. 다행히 응급치료가 잘 된 탓에 목숨을 잃은 이들은 반을 넘지 않았다.
사백을 잃었다지만 기존 목적이었던 카람 백작 가의 병력을 묶었으니 큰 이득이다. 더구나, 단순히 숫자상의 수치에 불과하지만, 천오백에 달하는 병력을 격파하였으니 이번 출정은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날 저녁, 만들어둔 퇴로에서 휴식을 취하던 그에게 전령이 도착했다.
전령의 내용에는 다음 단계로 돌입하라는 내용이었는데, 그와 함께 지도와 앞으로 그가 펼쳐야 할 전술 내용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었다.
테리는 지난 5년간 마크 자작의 옆에서 그의 전술을 보았던 터라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잠시 앞으로의 전장 상황을 머릿속으로 그리던 테리는 고개를 저었다.
‘로칸 자작을 잡았다 하지만, 과연 이것이 가능할까?’
성공한다면, 앞으로의 전장의 흐름은 자신들 측에서 이끌고 갈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몹시도 어려운 전쟁을 해야 할 것이다.
잠시 고민하던 테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마크 자작님의 전략이 실패한 적이 있었던가? 또한, 이번 전장에는 야안 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가? 그분이시라면, 힘겨운 상황에 처해도 일어설 수 있을 것이다.’
지난 그분의 지도 대련에서 테리는 야안이 지고한 경지에 올랐음을 알 수 있었다. 그 경지는 자신이 어느 정도 고련을 해야 그 같은 경지에 오를 수 있을지 짐작할 수 없을 정도로 차원이 달랐다.
그분 또한 자신 이상으로 고련을 하는 것을 알기에 매번 테리는 그런 야안에 감동할 수밖에 없었다.
노력을 하는 천재는 미지의 괴물이지만 그의 존재는 그 길을 가는 이로 하여금 시기와 질투를 넘어 깊은 감명을 준다.
마크 영지를 위해 자신의 힘을 숨기시고 있지만, 그 힘만으로도 이번 전술은 성공적으로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잠시 후, 테리는 쉬고 있는 기병들을 이끌고 약속된 장소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 전략의 요점인 로칸 자작을 유혹하여 다른 지점으로 묶어두기 위한 이 전술을 위해 마크 영지의 50%에 달하는 병력이 움직였다.
야안이 이끄는 별동대는 기습조로 분류되어 그들을 흔들어주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그 중요성은 이번 작전의 40%에 달할 정도였다.
이는 그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의 피해 범위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테리가 움직인 이틀째 되던 늦은 오후 챈들러는 마크 자작과 함께 남은 기병 4000기를 이끌고 테리가 묶은 카람 백작 측의 병력을 뒤흔들어 놓기 시작했다.
과연, 마크 자작이 직접 지휘하기 시작하자 그 전술은 테리 때와는 그 격이 달랐다. 테리로 인해 충분한 방비를 하였음에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만큼 그들을 뒤흔들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고대의 대마법이 부활한 듯, 밤과 낮을 바꾸어 놓기도 했으며 천천히 스며드는 압박감에 그들 스스로 자빠지게 하기도 했다.
그들뿐만이라면 좋으련만, 야안이 이끄는 별동대는 집요하게 그들의 식량을 노렸다. 기병들이라면 지축을 울리는 소리라도 낼 것이련만, 야안과 별동대는 지척을 지나감에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할 만큼 은밀했다.
그 수가 500에 불과해 큰 피해를 주지 못했지만, 이 또한 마크 자작의 계략이라 생각한 데론 자작은 더 이상 야안과 별동대가 노리지 못하도록 진형을 앞쪽으로 옮기었다.
이십일의 시간 동안 야안이 이끄는 별동대는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당하는 상대 입장에서도 그들의 모습은 사신과도 같았지만, 무리한 전투 진행으로 인해 그들의 심신 또한 크게 지쳐갔다.
사상자의 수도 이백에 달했는데, 야안이 리젠을 펼치며 그들을 구하지 않았다면 이미 그가 이끄는 별동대는 전멸하였을지 모른다.
그나마 리젠과 응급치료로 사망자는 50명에 불과했다. 물론 야안의 그 압도적인 무위가 아니었다면 이 일도 불가능할 것이다.
야안은 그 이십일이라는 시간 동안 카람 백작 측에서 검은 악마라 불릴 정도로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몇천에 달하는 병사들이 그를 포위하여도 그는 놀라운 신위를 보이며 포위를 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압박해 하며 베어나갔다. 마치 코볼트들을 사냥하는 오우거처럼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별동대의 기세는 2배 이상으로 올라섰다.
그의 손에 죽어나간 천인장이 둘에 달했고, 백인 장은 두 손을 넘었다. 또한, 몇백에 달하는 병사들이 그의 검에 죽음을 맞이했다.
그와 별동대의 손에 이천이 넘는 병력이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야안은 앞으로 남은 거리와 시일을 손으로 꼽으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이틀 거리.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말꼬리를 흘리는 야안은 피로 젖은 자신을 바라보며 이해하기 힘든 표정을 보였다. 아리스 님의 종인만큼 생명에 대한 귀중함을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한데 그는 살인에 대한 꺼림이 없는 자신이 기이하다 여겨졌다. 이는 아리스가 사실적인 게임의 환경에 유저가 트라우마를 생기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 같은 조처를 취한 것이지만 그를 모르는 야안은 스스로 정체성에 힘들어했다.
이번 이십일 간의 전장에서 자신의 손에 죽어나간 이들은 634명에 달했다. 태어나기를 살기가 짙게 태어난 자라 해도 그 같은 살인을 저질렀다면 버거웠을 것이련만, 자신은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았으니 다른 의미로 그가 힘들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 또한 아리스 님이 이방인에게 내린 축복이신가?”
야안은 그렇게 결론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이것이 축복일지는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확실히 축복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