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72화
52. 베론 장원
야안이 아니었다면 로칸 자작은 물론 팔론 경을 잡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지난 수해 작전으로 무리하게 물의 정령을 운영한 탓에 회복에 바빴던 제코가 복귀하게 되면서 이제 데론 자작을 잡는데 망설임이 없어졌다.
자신은 그가 도망칠 수 없는 자리를 만들어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를 잡음으로서 얻는 것은 세 가지이다.
우선 힘들게 키운 군사들의 목숨을 아낄 수 있었다. 야안이 고르고 고른 자 중에서 뽑은 자인만큼 그 성장 가능성은 최하가 중급 유저였다.
그것을 생각한다면 시간이 흐를수록 마크 자작 가의 병력은 눈덩이가 굴러가는 것과도 같은 기세를 보일 것이다.
다음으로 그렇게 그들의 병력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이번 출정에 쓰인 물자를 어느 정도 복구할 수 있을 것이다.
최정예 병사들과 농노들이라 해도 고르고 고른 존재들이라 힘이 좋은 만큼 성을 짓는 큰 힘이 필요한 공사에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카람 백작 가의 침공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카람 백작 가의 중심인 그가 사라짐으로써 그들은 티온 백작 가를 막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또한 이번 일의 대가로 쿠엔 후작 가에서 그들에게 여러 가지 요구를 할 것이니 그들은 그것을 맞춰주기 위해 힘을 비축할 여지를 잃게 되었다.
이는 자신이 죽기 전 카람 백작 가를 지워버릴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질 수 있다. 불가능할 것이라는 복수가 눈앞에 성큼 다가온 것이다.
테리는 야안의 이미지 마법과 노련한 솜씨를 지닌 사육사의 도움으로 지난 로칸 자작의 애마였던 블리자드의 새 주인이 될 수 있었다.
비록 그 경지가 로칸 자작보다 낮았지만, 그에게 없는 젊음이 있었기에 전 주인으로 눈이 높아진 블리자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블리자드라는 명마가 같이하자, 그의 탁월하게 발달한 하체 덕분에 테리의 무위는 지금보다 배는 더 무서워졌다.
지금까지는 말의 체력을 생각하여 애써 참았던 기술들이 서슴없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앞서 익스퍼트의 경지에 올라 이제 끝자락에 다다르는 챈들러라 해도 그와의 마상 전투에서 이길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말들을 배불리 먹이고, 병사들 또한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 한 마크 자작은 해가 중천을 지날 때쯤 총공격을 실시하였다.
점차 더워지는 날씨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점차 바람을 가르며 움직이는 그들의 열기는 뜨거워졌다.
저 멀리서 데론 자작 또한 예상한 듯 그는 배수의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크 자작은 그런 배수의 진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군대의 이동을 멈추지 않았다.
현란한 그의 지도에 따라 군대는 살아 있는 괴물처럼 꿈틀거리며 배수의 진을 친 카람 백작 병사들을 비집고 들어가 이리저리 정신없게 만들더니 어느새, 데론 자작과 일부 병력이 덩그러니 남았다.
동시에 마크 자작 가의 군대에서 테리의 철갑 기병대와 더불어 일부 병력이 화살처럼 튀어나오더니 그곳에 자리한 병력들을 휘감아 전투를 벌였다.
데론 자작은 저 멀리에 자리한 왜소한 체격인 마크 자작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어댔다.
“카람 백작 가는 정말 무서운 자를 적으로 돌렸구나.”
보지 않았으면 믿지 못했을 것이다. 무언가 특별한 전술을 고안한 것도 아닌 단순히 병력의 응용능력으로 배수의 진을 이처럼 어이없게 무너뜨리다니 괴물이라 할 만했다.
그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 이내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네 명의 검사들에게로 눈을 돌렸다.
데론 자작은 그들 중 새로 투입된 제코에게 눈이 잠시 멈추었는데, 이는 제코의 옆에 물의 정령이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하~ 정령사까지!’
젊은 나이로 보이는데 하급 정령 마스터에 이른 것을 보면, 중급 정령 마스터를 넘어 상위 정령까지 노려볼만한 재목임을 말한다.
‘시골의 자작 가에 이처럼 많은 인재가 숨어 있다니.’
데론 자작은 이 일이 지난 전투에서 자신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눈빛이 비범한 이 젊은이 때문임을 알고 있었다.
사람을 보는 안목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는 그가 아니었다면 이 같은 인재들을 발굴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거운 중압감도 없었다.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데론 자작과 야안을 비롯한 삼인은 서로의 영역에 부딪히기 무섭게 검을 나누었다. 데론 자작의 검은 중급 익스퍼트 수준이라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카롭고 무거웠지만, 삼방 검진을 펼치는 그들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야안 그의 검 앞에서 힘을 쓰지 못했다는 말이 맞을 것이다.
이는 지난 전투와 달리 데론 자작이 무너져야 적아를 넘어 이 전쟁이 끝이 남을 알았기에, 건곤대나위의 그 놀라운 묘용이 조금씩 그의 검에서 흘러나왔던 탓이다.
그 검의 묘용이 너무 적절하고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터라 상대하는 데론 자작조차 수십 초식이 지난 뒤에야 이를 깨달았다.
‘이 괴물은 도대체.’
그는 직감했다. 눈앞의 야안이 자신의 상식을 뛰어넘는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
지난 전장에서 보았던 힐튼 공작을 보는 듯하다. 그 절대적인 존재감 앞에 그는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동요하기 시작하자 곧 그 상황에서도 절제된 형태를 보이던 그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하더니 자잘한 상처를 입기 시작했고, 초조한 그의 강력한 일격을 비틀어 흘리던 야안에 허점을 놓치지 않은 테리와 챈들러가 그를 압박하기 시작하더니 어느새 다가온 야안이 그의 심장에 일격을 가했다.
‘카강-’
비틀거리던 그의 손에서 검이 떨어져 내렸고, 이내 입에서 선혈을 흘리더니 요란하게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제국과의 거대한 전쟁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운 자의 죽음치고는 초라했다.
챈들러는 죽음을 맞이한 그의 목을 베어 창대에 꽂아 들어 올리며 소리쳤다.
“마크 자작 가의 베론 야안 공이 데론 자작을 베었다. 모두 항복하라!”
그 소리에 악착같이 버티던 카람 백작 가의 군사들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무기를 쥔 손에서 조금씩 힘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그들은 쥐고 있던 무기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마크 자작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들을 공세를 취하기보다는 압박하는 형식을 취한 터라 별다른 피해를 보지 않은 채 4700에 달하는 포로들을 고스란히 잡아들일 수 있었다.
말없이 흘러내리는 피 웅덩이를 저벅저벅 걸어 데론 자작의 목을 받치는 야안에 마크 자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으로 최소 삼 년간 마크 자작 가는 전쟁에 휘둘리지 않아도 되었기에 야안은 씁쓸해하면서도 작게 만족을 보였다.
데론 자작을 베어냄으로써 기존의 경험치에 힘입어 2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보기 드문 뛰어난 인물이었다는 점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기쁘지는 않았다.
그는 다시금 밀려오는 상념에 고개를 저어 털어버리더니 수하들을 지휘하여 전장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 전장에서 얻은 전리품에는 4,684명에 달하는 포로들과 더불어 다양한 병과에 맞는 무구들이 있었고, 짐말 400두, 전투마 800두, 마차 200대를 수확할 수 있었다.
이로ㅆ 전쟁으로 인해 마크 자작 가가 입은 피해를 30% 정도 보상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마크 자작은 밀려오는 보고들을 들으면서 아들과 그 당시 죽음을 같이 한 기병들을 생각했다. 감상에 젖어들던 마크 자작은 긴 한숨을 흘리며 일어섰다.
‘아직, 아직이다. 이것으로는.’
이것으로는 그들의 한을 달랠 수 없다.
천막을 나서자 긴 노을과 함께 복귀 준비를 하는 전장을 볼 수 있었다. 힘든 여정이었음에도 누구도 불편을 보이지 않았던 제 군대를 바라보던 그의 입가가 올라갔다.
* * *
이번 전쟁에서 가장 많은 공을 세운 이를 뽑는다 한다면 베론 야안을 지목할 것이다. 로칸 자작의 수급을 베어낸 것도 그였으며, 그가 이끈 500의 별동대의 전공이 아니었으며 그처럼 유리한 흐름을 이끌어내기에 어려움이 컸다.
또한 마지막 데론 자작에게 결정적인 일격을 가하여 피해를 크게 줄이었으니 능히 일등 공신이라 할 수 있다.
마크 자작은 힐튼 공작 가에 부탁하여 야안을 남작으로 승격시키고, 이번 전장의 공과 기존의 전쟁물품을 준비한 공을 적용하여 그에 합당한 장원을 내렸는데 기존 생각한 것보다 더 큰 장원이었다.
그 크기는 마크 자작 가의 내성보다 40% 정도 컸다.
규모에 맞게 마을 17곳이 베론 장원에 포함되었다. 야안 때문에 사람들이 모여 이제는 대 마을이 된 베론 마을을 중심으로 장원이 꾸며졌는데, 그 인원이 일 만에 달했다.
여타의 남작 가의 반 정도의 세력이었다.
마크 영지에 유례가 없는 규모의 장원이 내려지자, 자연히 영지민들의 관심이 이곳에 집중되었다.
현 마크 자작 가를 만들게 한 총관의 장원이라는 소문이 돌자, 이곳에 작은 시장을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이곳 장원에 고용되려는 인부들이 줄을 이루었고, 장원에 포함될 병사들을 뽑는다는 말에 수많은 이들이 이곳을 지원했다.
영지에서 지원된 자금으로 장원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야안은 우선 급한 큰 공사들이 있기에 약식으로 꾸리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의 장원으로 몰려드는 영지민들 때문에 그 생각은 무산되었다. 인구밀도가 높아지면서 사람들의 불편을 덜 공사들이 급해졌기 때문이다.
남작으로 신분이 승격되면서 여러 곳에서 축하 인사와 함께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그 양이 대단해 그것만으로도 이 장원을 꾸릴 정도였다.
야안은 자신의 재산을 풀어 베론 마을의 중심가에 거대한 장원을 만드는 공사를 실행했다. 마크 자작이 건장한 농노 500을 풀어 야안에게 선물로 준 덕분에 공사에 쓰일 인부의 부족은 없었다.
그간 많은 공사가 마크 영지에 있었던 만큼 이제는 숙련된 솜씨를 지닌 일꾼들로 인해 올해 겨울이 지나지 않아 공사가 완료될 것으로 예측했다.
야안의 아버지 베론 가한은 지난 두 달간의 그 변화에 정신을 못 차렸다.
비록 알고 있었지만, 아들이 남작이 되자 그의 마음은 하늘에 뜬 구름과도 같았다. 베론 가문에 새로운 역사가 일어선 것이다.
이로써 후대에는 야안처럼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남작의 직위에 달하는 귀족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후계가 아닌 베론 성을 지닌 이들도 귀족으로서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으니 두고두고 기억될 영광이었다.
그뿐이던가? 공을 인정하여 받은 장원의 크기는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예전 마크 남작 가의 약 30%에 달하는 크기인 것이다. 또한, 인구는 일 만에 달했으니, 여타의 영지가 있는 남작 가와 비교해도 크게 부족함이 없었다.
번창해 나가는 마크 자작 가의 중심지에 자리를 잡았으니 오히려 여타 시골 남작 가와의 수입을 비교할 수 없었다.
“이것이 꿈인가? 생신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늘어뜨리던 베론 가한은 절로 입가에 터져 나오는 미소를 감추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아들 덕분에 그 자신도 꿈에서도 바랐던 귀족이 되었다. 자신의 옆에서 뒷바라지해 준 그의 아내 또한 귀족 부인이 되었으며, 묵묵히 아들 옆에서 힘이 되어준 며느리도 남작 부인이 되었다.
정말이지 이것이 꿈이라면 깨어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마리는 내내 장원이 지어지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는 남편에 웃음을 흘렸다. 허영심이 없는 그녀는 아들 덕분에 귀족이 되었다는 것보다 무사히 아들이 전쟁에서 돌아왔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