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75화
53. 주태
마크 자작은 야안이 영지를 벗어나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잠시 아쉬움을 보이다 이내 허락하였다.
“그렇게 하시게나. 부디 무사히 돌아와 주길 바라네.”
그는 야안에게 어떤 일로 떠나야 하는지에 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는 신관으로서 그의 인품을 인정한 바였고, 마크의 성을 따르었으나 그의 자식이기도 한 아론이 후계이기도 한 이곳 영지를 중히 여기지 않을 일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 마크 자작은 처음 그에게 총관직을 내주고 전쟁을 떠났을 때부터 이미 그에게 큰 믿음을 준 뒤였다.
야안은 마크 자작의 그 마음을 알았던 터라 크게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 그의 집무실에서 물러났다.
집무실에 나서니 아론이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똘망똘망 한 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아들의 눈은 젖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한스가 이야기를 한 것 같았다.
“아빠. 그럼 언제 돌아오는 거예요?”
후계자 직위에 걸맞게 행동하려던 아론이었지만 이때만큼은 여타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을 보이자 야안은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그는 아들을 품에 안아 들며 대답해 주었다.
“빠르면 2년 안에 돌아올 것이란다. 그때까지 네가 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잘 보호해 드려야 한다 알겠지.”
야안의 말에 아론은 입술을 꾹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어느 대답보다 큰아들의 대답에 야안은 대견하다는 듯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야안은 아들을 품에 안은 채 석양이 지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돌아올 그때쯤이면 아들의 성장력을 볼 때 진리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준비가 끝이 날 터였다. 물론 그것은 검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마나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니, 본격적으로 검을 수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전 자신이 그 나이 때 검을 수련하였을 때처럼 아들 또한 같은 길을 걸어갈 것으로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눈가를 붉힌 채 잠시 야안의 품에 안기던 아론은 곧 그의 품에서 내려 수업을 위해 떠나갔다.
성을 나서자 하늘에서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올해 첫눈이었다. 하얗게 서린 하얀 눈에 동네 아이들은 겨울 놀이터가 생긴 것에 좋다며 뛰어다녔고, 어른들은 눈을 치울 생각에 한숨을 흘려 놓았다.
야안이 타고 있던 검은 야쿤은 오랜만에 내리는 눈에 기쁜 듯 얼굴을 사납게 구기더니 이내 크게 콧바람을 불어댔다.
그런 검은 야쿤의 갈기를 긁어주던 야안은 저 멀리서도 보이는 자신의 장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목책으로 크게 감싼 장원의 입구에는 지난 자신과 함께 한 별동대원들이 지키고 있었고, 그들은 이내 야안에게 경례를 보이며 서둘러 문을 열었다.
도로공사는 끝이 난 뒤라 늦은 시간에도 마차들이 오가고 있었으며 이제 막 생성된 시장은 인구밀도가 높은 탓인지 목등잔에 불을 붙이며 환하게 거리를 밝혔다.
저마다, 베론 장원의 주인인 야안에 잠시 하는 일을 멈추고 인사를 건넸고, 야안 또한 작게 목례를 하며 그들의 인사를 받아 주었다.
내 장원과 멀지 않은 곳에 지은 수련장에서는 이번에 뽑은 별동대원들의 기합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있었다.
장원의 크기가 크지 않은 터라 야안은 기병보다는 보병 위주의 훈련을 선호하였는데, 아직 장원에는 기병을 키울 훈련장은 만들지 않은 상태였다.
장원 공사가 끝이 나자 예전과 달리 녹봉을 받던 야안은 대신 장원의 수입의 30%를 제외한 남은 수입을 녹봉으로 받고 있었다.
물론 그가 받는 70%의 수입은 장원을 관리하는 데 쓰일 것이니 실제 그에게 들어설 금액은 일반적인 장원의 경우를 생각한다면 10~20%정도였다.
한데, 지금 수준으로 장원이 성장한다고 가정한다면 앞으로 4~5년 안에는 여타의 남작 영지 수입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야안은 큰 부를 이루기보다는 그 수입의 대부분을 복지로 돌리기로 했다. 자신이 생각하는 영지의 복지 수준을 올리려면 우선 자신의 장원부터 본보기로 시작해야 할 것이니 말이다.
이미 한스에게 말해 앞으로 베론 장원이 어떻게 흘러가야 할지 계획을 짠 상태라 그 실행 과정의 어려움은 없었다.
예전 자신의 집을 지나 어느새 도착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새로운 자신의 집을 바라보던 야안은 가족들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꺼낼까 싶어 긴 한숨을 흘리다 곧 안으로 들어섰다.
휘날리는 눈 속으로 그의 입김이 녹아 사라지기 시작했다.
* * *
윤 마을은 융제국의 변방 쪽에 자리한 마을로 외지라는 점 때문에 나라에서도 그들을 관리하는 것을 애를 먹고 있었다.
처음 융 제국이 건설된 당시만 했어도 윤 마을의 지리 특성상 관리와 상당수의 병사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았는데, 시간이 지나 점차 그 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그 관료들이 있던 시기보다 없는 시가가 더 길어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윤 마을은 자체적으로 살아남아야 했는데, 마을 사람들을 모아 자경단을 만들어 마을을 지키고, 몬스터의 부산물 따위를 모아 작은 상단을 꾸려 가까운 영지에 그것을 팔아 생필 물품을 구했다.
그렇게 구한 물품들로 융 제국 너머에 자리한 소수 부족과의 거래를 하기도 했는데, 그 중간 거래에서 얻는 이득이 상당한지라 나라의 지원 없이 어렵게나마 삶을 꾸려 나갈 수 있었다.
이 윤 마을은 융 제국이 일어난 당시 거대한 대부족이 자리하였던 터로, 당시 강성했던 융 제국조차 그들을 상대하는 데 큰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는 당시 대부족의 족장은 위대한 주술사였기 때문인데 그자로 인해 하마터면 융 제국은 건설되지 못할 뻔 한 위기를 겪기도 했다.
다행히 당시 초인 중의 하나였던 제국의 황제가 그를 상대하여 멸할 수 있었는데, 그때 입은 상처로 초대 황제는 비참한 말년을 보내야 했다.
당시 이곳의 지리는 수많은 소수 부족이 모일 수 있는 중요 접선지였던지라, 제국은 무리하게 군대를 일으켜 이곳에 마을을 건설하게 하였다.
새로운 대부족이 만들어질 가능성이 많은 이곳을 애초에 봉쇄하겠다는 작전인 것이다.
애초 대부족이 살았던 곳인 만큼 이곳은 사계절이 뚜렷한지라 사람들이 부지런히 일을 한다면 최소 굶주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윤 마을이라는 그 이름처럼 이곳에 사는 이들의 대부분이 윤씨 성을 쓰고 있었다. 아무래도 토박이들이 오랫동안 모여 살다 보니 그들 중 가장 강력한 씨족인 윤씨 성으로 굳어진 모양이었다.
마을은 그 수가 천이 조금 넘는 상당한 크기로 그들 중 십 분의 일이 자경단을 만들어 꾸려 나가고 있었다.
쌀이나 옥수수와 같은 상당한 수량을 얻는 것들 위주로 키우고 있었는데, 다행히 가까운 곳에 강이 있어 물을 구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봄이라 일손이 부족한 터라 자경단들의 대부분이 농사일을 돕고 있었다. 자경단 중 가장 고참인 윤자는 지금 시기에 가장 편한 업무인 마을 입구의 초소에서 자리를 잡은 채 늘어지게 하품을 흘리고 있었다.
“하~ 지겹군. 작년 코볼트 토벌 이후로는 몬스터도 보기 힘든 시점이니.”
소형 몬스터인 코볼트라 해도 위험성이 없는 것이 아니건만, 그는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거론했다.
이는 그가 중급 유저에 달하는 무위를 가진 덕분이었다.
예전 위대한 주술사가 나왔던 대부족의 기운이 남아서인지 대대로 윤 마을의 사람들은 근골이 뛰어난 편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감이 뛰어나 빠른 판단력으로 생존 능력 또한 뛰어났다.
하기에 겨우 천명에 달하는 이 마을에는 상급 유저만 해도 스무 명이 넘었고, 중급 유저는 이백에 달했다.
그 이유는 이곳에 사는 사내들 대부분이 자경단 출신인 탓이다.
윤자는 봄날의 햇살을 받으며 무료한 시간을 보내다 어느새 눈가가 무거워지더니 이내 잠이 들고 말았다.
얼마나 잠을 잤을까?
달고 단 낮잠에 흠뻑 취해 있을 때쯤 누군가 자신의 어깨를 흔들며 그를 깨웠다.
“저기, 실례지만 좀 묻겠습니다.”
귓가를 앵앵거리는 그 목소리에 그는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아~ 좀. 깨우지 말라고.”
그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시 그를 깨우던 사내는 잠시 난처해하다, 이내 털썩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사내의 외모는 전형적인 융 제국인의 모습이었는데, 보기 드물게 키가 크다는 점 이외에는 특이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심심한 얼굴이라 할 수 있고, 달리 보면 순박해 보이기도 했다.
그는 품에서 꺼낸 한 주머니에서 한 줌의 가루를 꺼내어 조금 전 강에서 떠온 물이 든 가죽 주머니에 그것을 넣었다.
곧, 주머니의 물이 걸쭉하면서도 고소한 향기가 일어나는 음식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는 근처에 자리한 나뭇가지를 꺾어내어 그것을 떠먹기 시작했는데, 식사를 끝낼 때쯤 그 고소한 냄새를 이기지 못해 윤자는 깨어나고 말았다.
“윽. 도대체 이 냄새는 뭐지?”
낮잠을 자느라 점심도 거른 터라 저도 모르게 배를 매만지던 그는 이내 낯선 복장을 한 한 이방인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일어섰다.
급한 탓에 의자가 넘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일으켰지만, 상당히 놀란 탓인지 그런 것은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다급하게 묻는 그의 모습에 이방인은 주섬주섬 주머니를 챙겨 넣더니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저는 장두준이라 합니다. 이 마을에 사람을 찾고자 해서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다가오는데, 윤자는 기이하게도 그가 왠지 친숙하게 느껴져 이내 경계를 느슨하게 늦추었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가온 이 이방인에게 사과를 하며 물었다.
“죄송합니다. 한데. 찾는 사람이라면 누구를 말씀하시는지요?”
그 말에 장두준이라는 이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답했다.
“이름은 모릅니다. 다만, 단서가 있으니 그것을 바탕으로 찾아볼까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에 윤자는 그제야 이 외지 마을을 찾기 위해 그가 얼마나 험난한 여정을 했는지 그 허옇게 먼지가 일어난 외투나 짐 보따리를 살펴보며 알게 되었다.
그는 예전 상행을 떠난 적이 있었던 터라 그때의 고생이 생각나 그의 일이 남 같지 않게 느껴졌다.
“나중에 필요한 일이 있으시면 부탁하십시오. 제가 이곳 토박이라 웬만한 분들은 다 안면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신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하는 그에 윤자는 작게 웃음을 보이며 오랫동안 주인을 만나지 못해 먼지가 뿌옇게 쌓인 작은 패를 꺼내어 그에게 건네었다.
“이것은 마을의 임시 신분증 같은 것입니다. 없어도 되지만, 혹시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이것을 보이면 자경단 단원들이 도와줄 것입니다. 마을에 여관이 없는지라 자경단 숙소에서 생활하시면 될 것입니다.”
장두준은 그의 호의에 감사해 하며, 건량의 일부를 그에게 건네어 주었다.
“시장하신 거 같아 드립니다. 만든 지 오래 되지 않아 맛은 괜찮을 것입니다.”
그 말에 윤자는 너털웃음을 흘리며 건량을 받아들였다. 사양하려고 했지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는지라 거부할 수 없었다.
과연 그의 말대로 건량은 적당하게 씹히는 감칠맛이 났다. 씹을수록 고소한지라 그는 매운 만족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건량을 씹다 이내 그가 타고 온 짐승을 보며 놀랬는데, 검은색 털이 온몸을 뒤덮은 그 덩치는 말보다 더 큰 험상궂은 외모 탓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