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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179화 (179/385)

야안 179화

이후 미리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힌 그는 치료 전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인 주태를 볼 수 있었다.

얼굴에 사기가 자리해 낯빛이 어두웠던 그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비록 야위었지만 홍조와 함께 맑은 빛이 그의 얼굴에 보였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운 터라 본래의 기색을 회복하려면 못해도 반년 정도의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그가 깨어난다면 무리 없는 일상생활 정도는 당장에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야안은 방문 너머 기척에서 유율이 아직도 아리스 님에게 기도를 드린 것을 아는 터라 오물 따위가 자리한 옷을 챙기고 밖으로 나섰다.

‘끼이익-’

평소라면 듣기 싫었던 비음 소리였건만 그 소리가 반갑기는 처음이었다. 그녀는 힘든 기색이 자리한 야안을 바라보았는데, 야안은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라 이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아. 감사합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한동안 안정을 취해야겠지만 한숨 자고 나면 깨어날 것입니다.”

야안의 말에 그녀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는데, 곧 예전과 다른 건강한 기색을 찾은 남편의 모습에 그녀의 무릎이 크게 무너져 내렸다.

울먹거리는 그녀의 소리를 듣던 야안은 이내 뇌전으로 방 안에서 가져온 오물이 묻은 옷을 태워내었다.

워낙 뇌전의 화기가 강한 터라 옷은 순식간에 소각되어 검은 안개를 남긴 채 사라졌다. 한 생명을 살렸다는 사실 때문인지 새벽의 기운을 물리며 일이서는 태양을 바라보던 야안의 입가는 큰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뒤에야 야안은 주태와 독대할 수 있었다.

이는 자신의 생각과 달리 주태가 깨어나지 않았던 탓인데, 야안은 그 열흘간의 시간 동안 주태의 모습을 살피며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주태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정상으로 돌아가고 있었는데, 마치 그에게 있어 하루는 한 달과도 같아 보였다.

하지만 그의 놀라움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는데, 그의 몸의 근력이 불어나고 살이 붙어졌으며 군데군데 빠져버린 머리카락이 새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야안은 주태의 주술이 놀랍다는 것은 유율에게 펼친 진실의 눈에서 알고 있었지만, 이 같은 이적을 펼치는 수준일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야안은 낯선 사내가 모녀가 있는 곳에 있는 곳에 오래 머무는 것은 남들의 시선에 좋지 못한 것임을 알기에 처음 며칠을 제외하고는 촌장의 집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본래는 자경단의 숙소에 머무르려 했으나 현자가 자신의 마을에 왔다는 것에 놀란 촌장이 몇 번이고 권유하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윤 마을에 현자가 온 것은 마을 초장기 때 이외에는 없었기에 그들의 태도는 깍듯했다. 야안은 그런 그들에 보답을 할 겸 마을의 소소한 문제점들을 해결해주거나 그간 병을 앓는 이들을 치료해 주었다.

오 일이 지난 뒤 신성 마법을 펼칠 수 있게 된 터라, 그간 잘못된 민간요법으로 몸을 더 망치던 마을 사람들의 병을 고쳐 낼 수 있었다.

이방인의 자식이라는 점 때문에 동네 아이들과 섞이지 못했던 아리는 야안과 친분을 가진 것으로 인기인이 되었다.

아리가 옆에 있을 때면 야안이 마법으로 화려한 장관을 만들어주기도 했기 때문인데, 덕분에 요즘 아리의 얼굴에는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그날도 이른 정오부터 아리가 야안을 찾아왔는데, 아리는 입가에 묻은 음식 흔적을 보던 야안은 웃음을 흘렸다.

“하하. 얼굴에 이것이 무엇이더냐.”

그러며 소매로 입가를 닦아 준 야안에 아리는 잠시 부끄러움을 보이다 이내 고개를 젓더니 본래 자신이 이곳에 오려 했던 목적에 대해 말을 열었다.

“현자님. 아빠가, 일어나셨어요.”

그 말에 야안은 놀라지 않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래, 생각보다 이르게 깨어나셨구나.”

회복 속도를 보았을 때 이맘때쯤에 깨어날 것임을 알았던 야안이었기에 담담한 표정을 보였다.

완전한 회복을 위한다면 이틀은 더 지나야 할 것인데, 아무래도 그러기에는 가족에 대한 걱정이 커 보여 서둘러 깨어난 것이리라 본 야안은 아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더니 이내, 그녀와 함께 그의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야안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 이미 그와 그의 부인이 주술을 푼 본래의 모습으로 몸을 정갈히 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간 본래의 신색을 되찾았던지 그는 지난번에 본 그라 여기기 힘들 정도로 얼굴색이 좋아 보였다.

체구는 지난번에 보았을 때보다 한 배 반이 더 커보였고, 정기를 되찾은 그의 눈은 청정한 하늘 위에 자리한 구름 같았다.

주태와 유율은 야안의 다섯 걸음을 남기며 다가오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땅에 머리와 팔을 붙여 삼배를 하였다.

“은인에게 큰 신세를 지었습니다.”

낮은 저음에 실린 주태의 그 말에 야안은 서둘러 다가가 그들을 일으키며 말했다.

“아리스 님의 뜻을 따르는 종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이러지 마십시오.”

야안의 말에 주태는 짧지만,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십년…… 십년 입니다. 막연한 희망을 품에 안은 시간이. 은공이 아니셨다면 저는 그 희망을 쥐지 못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절망적인 현실에서 저를 구해 준 이에게 남은 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한 바가 있습니다. 하니 부디 은공께서는 거절치 말아 주십시오.”

야안은 이 같은 사내가 세운 결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잘 알기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했다.

“알겠습니다. 다만, 대외적으로 해야 하는 일이 있어 그러니 호칭만은 바꾸어주시겠습니까?”

영특한 그인지라 야안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물론입니다. 저의 무리를 받아 주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깨끗하게 치운 방 안으로 야안을 모셨다. 오래전에 담은 술과 그가 일어나 잡은 짐승 고기가 안주로 나왔는데, 저 벽 너머로 오랜만에 먹는 고기에 들뜬 아리의 감탄사가 야안의 귓가를 간질거렸다.

그런 아리의 모습이 상상이 되는 터라 잠시 속으로 미소를 짓던 그는 이내 마음을 바로 하며 주태를 바라보았다.

야안은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이내 그에게는 진실의 눈이 통용되지 않을 것임을 짐작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 말은 주태 그가 자신 못지않은 힘을 지닌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야안의 경지는 그 모든 힘이 하나로 모여 상승의 효과를 이룬 터라, 초인과 그 밑에 자리한 경지 그 사이에 자리한다 볼 수 있다.

상급 익스퍼트 검사 급 경지에 오른 존재에게 진실의 눈을 펼칠 때 그 낌새를 눈치챌지언정 그 마법이 통할 수 있을 것이다.

한데, 그는 그런 틈을 주지 않는다.

야안은 그의 그 힘이 이해되지 않았다. 주술이라는 것이 과연 그처럼 강력한 힘을 지닌 것인가? 라는 의문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야안의 의문보다 더 놀라워하고 있는 것은 주태였다. 그는 그 자신이 익히고 있는 주술의 특성상 상대의 경지에 대한 이해도가 남달랐다.

그것이 검이든 처음 보는 형태의 힘의 종류이든 간에 그는 상대의 약점과 장점을 순식간에 파악하고 그를 상대하는 방법을 찾았다. 또한,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가 자신의 경지가 윗줄인지 아니면 아래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그런데 야안은 짙은 연기에 가려진 존재였다.

아니, 저 하늘 위에 쉴 샘 없이 변하는 구름과도 같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 때문에 그의 장점과 약점은 파악할 수가 없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단 하나.

바로 그가 자신 못지않은 힘을 지녔다는 것. 그것이 주태 그가 야안을 바라보며 느낀 점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야안이 놀라웠다.

이제 이십 대 중반에 들어선 자이건만, 그런 경지에 올라섰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그 자신이 서른에 대주술사의 경지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는 이기의 힘에 기대어서였다.

그의 핏줄에게만 가능한 이기의 공능에 그는 그 놀라운 성장을 보일 수 있었다. 하지만 야안은 그 당시의 자신의 경지가 아닌 지금 현재 새로운 경지를 두드리고 있는 자신에 못지않다는 것이 그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는 지난 5년간 놀라운 성장을 보였다. 역설적이게도 움직일 수 없는, 아무런 것도 하지 못하는 암흑의 공간에 잡힌 그 시간은 그에게 가파른 성장의 시기였다.

놀라운 일이지만 생사의 가운데에서 삶을 유지하는 주술에 기대면서 자연스레 벽 하나를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결과를 만든 것에는 그의 노력뿐만이 아닌 이곳 윤 마을에 자리한 이기의 공능 때문이기도 했다.

당시 융 제국과 전쟁을 벌이던 위대한 주술사의 힘의 파편과 그들 대부족의 보물인 하얀 깃털의 기운이 남아서인데, 그 기운의 영향 때문에 이곳 윤 마을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건장한 체격과 주술의 재능을 타고나게 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알았기에 십 년 전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이라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서이다.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는 하얀 깃털의 기운과 위대한 주술사의 파편의 힘 덕분에 당시 1년 정도밖에 남지 않은 그의 목숨을 연장할 수 있었다.

더불어 주술이 한층 깊어지기도 했지만, 만약 야안이 이 마을에 오지 않았다면 그는 결국 그 삶과 죽음의 사이를 오가다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니 그가 은공에 대해 그 같은 결심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야안과 주태는 서로에 대해 감탄을 보이다 이내 술잔을 기울였다. 술은 융 제국이 주 곡식인 쌀을 발효하여 만든 곡주였다.

유율이 만든 이 곡주는 그 맛은 뛰어난 편은 아니었지만, 도수가 강해 술에 강한 야안과 주태에게 알맞았다.

목구멍을 타는 듯한 느낌을 내는 곡주와 직화로 구운 고기는 상당히 잘 어울렸다.

말이 없는 침묵 속에서 순배를 돌리던 그들 중 먼저 말을 꺼낸 이는 주태였다. 그는 부인에게서 이유가 있어 자신을 찾았다는 말을 들은 뒤라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야안 님께서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어떻게 저를 찾게 되었는지 알 수 없군요. 괜찮다면 물어보아도 되겠습니까?”

저 멀리 서쪽에 자리한 거대한 대륙의 사람이 어떻게 다른 대륙의 변방의 소수 부족인 자신과 연관이 있을 수 없음을 말함이다.

야안은 주태의 뜻을 아는 터라 이미 정리한 말을 꺼내놓았다.

잠시 후, 야안이 전설의 현자를 추종하는 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그간의 일들과 연결 지어 왜 자신이 그를 찾아올 수밖에 없는지에 대해 알게 주태는 말없이 비워진 술잔에 술을 채우며 잔을 기울였다.

그는 잠시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자이웅의 후손.

그 태산보다 무거운 굴레의 속박이 다시 시작된 것이다. 소수 부족들 사이에서 자이의 성의 의미는 신과 동격이다.

그 씨족이 있었기에 소수 부족이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온 것이었다. 마법과 검을 능히 상대할 수 있는 주술을 완성한 씨족이 자이 씨족이기 때문이다.

전설의 시대에 회자되어 온 최초의 위대한 주술사인 자이웅으로 인해 한때는 소수부족들이 모여 융 제국보다 더 광활한 땅을 차지한 제국이 이 땅에 자리해 천 년의 명맥을 이루기도 했었다.

당시 그 제국의 명성은 현재의 카이엘 제국보다 그 격이 높았으며 그 지닌 힘 또한 위대하였다.

하지만 성한 것은 쇠하는 법이라 결국 제국이 망한 뒤 수많은 왕국으로 갈리고 다시 대부족으로 나뉘더니 결국 몇 천 년의 시간이 지나 그 찬란한 역사를 자랑했던 후손들은 원시적인 수준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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