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191화
56. 레필 공작
또한 아직 완전히 동화되지 않은 여타 부족의 쟈칼들의 탐욕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군대가 치안을 맡아야 했다.
쟈칼 왕국이 만들어지자 생산직의 쟈칼들 사이에서도 변화가 생겨났다. 작은 스승들이 모여 큰 스승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 큰 스승의 권위는 상위 대전사 못지않았다.
오직 실력과 인품만으로 만들어진 자리였기에 어떤 점에서는 더 큰 권위를 보이기도 했는데, 그로서 과거와 달리 생산직이 최하급 쟈칼들이나 하는 비천한 일이라는 개념이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신의를 가르쳐 주고 제 일에 자부심을 깨닫게 해준 것은 차인 야안이었으나, 그는 스스로 자신이 한 일을 나서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보다는 여러 방면에서 성과를 올린 다른 쟈칼들을 치하하여 그들의 명예를 드높이도록 노력했는데, 그렇게 다시 십 년의 시간이 지나자 쟈칼 왕국 내에 차인 야안을 이야기하는 이들이 사라졌다.
그의 놀라운 업적을 기리는 기념비라고는 작은 동상들이 몇 있을 뿐이었다. 그 마저도 나라에서 만든 것이 아닌 오래전 야안의 부족에게서 은혜를 입은 소수 부족이 만든 것에 불과했다.
야안을 존경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어이가 없었지만, 야안은 오히려 이런 상황을 반기었다.
“아주 좋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구나. 우리 종족에게도 이 같은 날이 오다니.”
그랬다. 지금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그것은 자신의 종족이 자신의 본능을 억제한다는 말이다.
강자지존의 관습이 희석되었다는 것을 말하기도 했는데, 확실히 권력의 가장 꼭대기에 자리한 야안이 지금처럼 존재감을 보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다.
자신이 있는 듯 없는 듯 왕국이 유지되게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지만, 야안은 적절한 인재의 배치와 미케로 학자들을 초대하여 그들로 하여금 쟈켈에 맞는 법령을 만들게 하였다.
다시 십 년이 지나 마란이 죽고 야안 또한 적지 않은 나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나라에 큰 변고가 생겼다.
본래 쟈칼 종족과 사이가 유난히 좋지 않은 히나타 종족 또한 통일을 하게 되면서, 남아도는 군사력을 소비하기 위해 쟈칼 왕국에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평화스러운 나날을 보내던 쟈칼 왕국의 입장에서는 재앙과도 같은 일이었기에 수많은 이들이 혼란에 휩싸였지만 오직 한 존재만이 그 혼란에 휩쓸리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는 그 존재감을 보이지 않았지만, 위기가 오자 그 누구보다 빛이 난 쟈칼들의 위대한 왕 차인 야안이었다.
그는 노구를 이끌고 군사를 재정비하여 직접 전쟁에 나섰다. 나이가 들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의 무위는 예전보다 더 뛰어났다.
이는 단순한 육체로서의 수련보다는 운기행공을 통한 마나 수련법을 통해 그 균형을 맞춘 수련 덕분이었다.
그 스스로 비교 대상이 없어,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 방도는 없었지만 어떤 존재를 상대해도 자신이 쉬이 패배할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히나타 종족은 쟈칼 종족 못지않은 강한 힘과 탐욕이 자리한 존재였다. 다만 쟈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 성장시기가 길고 가족애가 강하다는 점이다.
또한 금속을 정련하는 기술이 대단해 무기의 품질이 높았는데, 예전의 경우라면 히나타 종족의 전사 한 명이 쟈칼 전사 세 명을 상대했었다.
성장시기가 길다는 것은 배움의 흡수시기가 길다는 말이 된다. 하니 자신의 강한 힘을 어떻게 이용하는 것인지 자연히 잘 알게 된다.
그들 전사 한 명 한 명이 강한 전사들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히나타 왕국을 건설한 왕은 야안과 달리 자신만의 왕국을 만들었다. 절대 왕권을 위해 수많은 수하를 죽이기도 했으며, 비합리적인 세금으로 폭리를 취해 100만이 넘는 군대를 유지하기도 했다.
좋게 말하면 전형적인 패왕이라 할 수 있는데, 확실히 모든 공을 수하들에게 돌린 야안과는 극명할 정도로 비교되는 왕이었다.
전쟁을 선포한 지 몇 달이 채 되지 않아 곧 두 왕국 간의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다.
히나타 왕국에서 동원된 병력은 100만이었고, 쟈칼 왕국에서 동원 된 병력은 70만이라 예전을 생각한다면 그 숫자나 질에 있어 쟈칼 왕국의 패배는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예상과 달리 전쟁의 행방은 백중지세였다. 숫자는 상대적으로 적어도 최정예 군대가 쟈칼 군대였고, 또한 쟈칼 왕국의 대영웅이자 위대한 왕 차인 야안이 강력한 창이 되어 사기를 이끌어 올리니 아무리 기세가 등등한 히나타 왕국의 군대도 그들을 어찌하지 못했다.
결국 전쟁은 긴 시일을 끌게 되었다.
무려 5년을 넘게 치열한 전쟁을 하게 된 그들은 서로에 대한 감정의 골이 많이 상한 지라 휴전을 제안할 수도 없는 상태였다.
‘그의 목숨을 끊어야 이 전쟁을 끝낼 수 있겠구나.’
자신은 늙었고, 히나타의 왕은 젊었다. 마나로 인해 육체의 노화가 느려지고 있지만 이대로 몇 년의 시간이 지난다면 본래 여타 종족보다 수명이 짧은 쟈칼인 만큼 이 전쟁을 감당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양패구사라도 그를 잡아야 한다.’
이번 고비만 잘 넘어간다면 쟈칼 왕국은 더 이상 외세에 휩쓸리지 않을 것이다. 히나타 왕국은 절대 왕권으로 세워진 만큼 왕이 죽으면 그 왕권의 권세만큼 쉽사리 무너져 내릴 것임을 예상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야안은 처음 자신과 함께 한 이제 뛰어난 장수가 된 수하들에게 제 생각을 이야기하였고, 그들은 하늘과 같은 왕이신 야안이 그 중대한 일을 자신들과 함께 한다 하자 웃음을 흘리며 받아 들였다.
“늙어 이제 걱정만 많아진 저희에게 그 같은 영광을 주신다니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합니다.”
그들의 그 말에 야안 또한 미소를 보였다.
‘보았는가? 그대여. 부족하나마 그대의 뜻을 이룬 것 같군.’
야안은 처음 자신에게 충정을 보인 최초의 수하를 생각하다 이내 제 뜻을 따르는 삼천의 최정예 군사들을 이끌고 기습을 위한 작전을 짜기 시작했다.
열흘이 지나 야안과 삼천의 군사들은 애초 계획대로 히나타의 왕의 목숨을 끊어낼 수 있었다.
히나타의 왕의 호위병들을 뚫기 위해 삼천의 군사 중 200명만이 살아남았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번 기습이 자신의 마지막임을 알고 있었기에 이 같은 피해에도 담담한 모습을 보였다.
야안 또한 이번 무리한 기습으로 인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다친 사실을 알리게 되면 사기가 떨어질 것을 예상하여 무리하게 마나를 운용하여 자신의 건재함을 보였다.
그로서 전쟁은 일찍 끝날 수 있게 되었지만, 야안은 제때 치료를 하지 못해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뒤늦게 야안의 그 같은 사실이 알려지며 백성 중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을 코앞에 둔 야안은 자신의 손자 중 가장 영민한 왕자를 불러 그에게 유언을 남겼다. 아니, 마치 자신의 인생철학을 넋두리하는 듯했다.
“우두머리란 무엇인가? 우두머리는 수하들의 소망을 함께하는 자이다. 같은 곳을 바라보며 수하들을 이끌고 나아가는 존재인 것이다. 평화로울 때는 가장 필요 없는 존재이나 위험에 처하면 가장 큰 힘을 보이는 자이기도 하다. 희생의 대가로 수하들의 안전과 행복을 산다면 웃으며 희생해야 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 우두머리란 그런 존재이다.”
야안은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기고 천천히 숨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두며 문득 예전 지금의 자신을 만들게 한 그 이상한 생김새의 종족의 사내를 떠올리게 되었는데 그는 그제야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곧 미소를 짓는 그에게 환한 빛이 일렁이더니 그를 휘감았다.
* * *
향해가 시작된 지 벌써 열흘이 지났다.
도착하려면 아직 한 달하고도 보름의 시간이 더 걸려야 할 것이지만, 사실 이 향해 시기는 융 제국과 카이엘 제국과의 거리를 생각한다면 놀라울 정도로 짧았다.
금가상단의 배가 그만큼 우수한 덕분인데 바람이 잘 불지 않을 시일 때도 마법으로 일정 속력을 항해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배수량이 3,000톤에 달하는 만큼 야안 일행이 머물고 있는 방들은 지난 그들이 묵었던 여관만큼이나 넓고 쾌적했다.
배가 큰 덕분인지 흔들림도 잘 느끼지 않았는데, 가끔 파도가 요란할 때가 되어서야 자신이 배에 있음을 인지할 정도였다.
아리한테 이 배는 그녀의 호기심을 가득 채워 줄 모험 섬과도 같았다.
반질반질한 바닥이 자리한 선박 아래층에는 마법으로 강화된 유리가 자리해 바닷속 세상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강에 사는 물고기와 달리 바다의 물고기는 눈도 크고 비늘도 두터웠으며 수많은 생명체가 숨 쉬는 바다 세상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 모습에 넋이 나간 채 상상의 나래를 펼치던 아리는 이내 여기저기를 구경하며 다녔는데, 거친 사내들만이 자리한 곳에 예쁘장한 꼬마 아가씨가 모습을 보이자 사람들은 저마다 하는 일을 멈추고 먹을 것을 주거나 귀여워 해주었다.
선객 중에서 귀한 층에 자리한 곳에서 온 아이임을 알기에 아리의 방문에 나무라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아리가 다칠까 싶어 걱정하는 기색이 완연했는데 다행히도 아리는 호기심은 많아도 또래 아이들보다 침착한 성정이라 우려할만한 일은 없었다.
“꺄하하. 숙부 이것 보세요. 제 보물이에요.”
야안은 아리가 핑크색 산호들을 자랑하며 내보이자 웃음을 흘렸다. 뛰어서인지 얼굴이 붉게 물든 아리와 핑크색 산호는 잘 어울려 보였다.
“그래, 산호가 아리와 참 잘 어울리는구나.”
그러며 잠시 ‘어디 보자.’ 하던 야안은 이내 공간의 주머니에서 실크 실을 뽑아내더니 이내 아리가 보여 준 산호들을 이리저리 엮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마법 물품을 만들고 있어 대장인의 칭호로 바꾼 덕분에 이런 산호를 다루는 것은 그에게 있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곧 그의 손이 현란하게 움직이더니 금세 아름다운 산호 목걸이가 뚝딱 만들어졌다.
그 모습에 ‘와’ 하며 감탄사를 흘리던 아리는 이내 야안이 목에 걸어주자 부끄러운 듯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감사합니다.’ 하며 소리치고는 서둘러 자리를 옮겼다.
아무래도 엄마에게 자랑하고 싶어 그런 것으로 보여 야안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선실을 나섰다.
이제 늦여름의 열기도 꺾인 듯 가을 특유의 날씨가 자리한 갑판 위에는 자신 말고도 이 배에 머물고 있는 선객들이 여럿 자리했다.
그들 중에는 지난 이곳 선장을 통해 인사를 한 카이엘 제국의 반론 남작도 있었다. 검에 대한 재능이 없지만 대신 상재가 있어 자신의 대에 상당한 부를 이루었다는 이였다.
올해로 쉰이 넘은 중년의 신사였는데 여행만큼이나 사람 만나는 것을 즐기는 자라, 젊은 나이에 초급현자 마스터라는 경지에 오른 야안을 매우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비록 검을 숭상하는 곳이 카이엘 제국이라 하지만 현자 또한 중히 여기기에 여타의 왕국보다 뛰어난 대우를 해주었는데, 초급현자 마스터라면 남작의 직위라 할 수 있었다.
아니, 야안의 젊은 나이를 생각한다면 고위 현자 비기너까지 무난하게 오를 것이니 자신과 비교할 수 없음을 알기에 반론 남작은 야안을 살갑게 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