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00화
58. 금빛 진주
그가 나서자,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먼저 나선 이는 잭슨이었다. 야안은 잭슨이 나서자 고개를 저으며 부족하다는 어투로 말을 꺼냈다.
“그 혼자로는 부족하오.”
잭슨은 자신을 무시한 듯한 그 말에 적지 않은 분노를 느끼며 소리쳤다.
“방금 그대의 말을 후회하게 해 주겠다.”
그러며 검을 꺼내는 잭슨에 야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 또한 검을 뽑았다. 단순히 검을 뽑았을 뿐인데 잭슨은 그 모습에서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뭐지? 이 느낌은.’
처음 느끼는 그 압도적인 기운에 잭슨은 잠시 놀랍지만 이내 마음을 추슬렀다. 어느새 조금 전 분노를 표하던 잭슨의 그 감정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곧 야안과 잭슨의 검이 부딪히기 시작했다.
그들의 대련은 첫 시작부터 탐색전 따위는 없이 격하게 흘러갔다. 야안의 이십사수검법은 물론 육대검식 또한 풀어놓기 시작한 야안의 검에는 대륙의 13강의 상위의 존재도 쉽게 받아낼 수 없는 힘이 자리했다.
당연하게도 잭슨은 야안의 검을 50초도 채 버티지 못한 채 밀렸고, 야안은 형편없이 뒤로 물러서는 잭슨의 검을 육대검식 중 그 변화가 가장 다변한 오식으로 압도하고는 이내 허공에서 재주를 넘으며 본래 자신이 자리한 자리에 내려섰다.
“크으윽.”
단명의 신음을 흘리던 잭슨은 지금의 결과가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얻은 고대 검술은 그 변화가 적고 무거움을 중시하는 중검인 만큼 방어에 용의했음에도 이처럼 압도적으로 밀리는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야안의 검은 마치 미지 속의 생물처럼 꿈틀거려 그 자신이 자랑하던 뛰어난 순간 기억력도 그의 검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누구보다 잭슨의 검을 잘 알았던 리안 경은 야안의 검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그 자리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야안의 검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알고 너나 할 것 없이 감탄을 흘렸다.
그의 검을 보고 나니 오만이라 생각한 그의 발언은 사실 오만이 아님을 그제야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살상의 위력은 담지 않았기에 잭슨은 곧 본래의 호흡을 찾을 수 있었고, 그는 야안에게 몸을 숙여 크게 사죄를 하였다.
“위대한 검을 지닌 당신을 모욕한 것에 대해 사죄드립니다.”
“받아들이겠습니다.”
야안은 잭슨의 사과를 받아들이며 이내 고개를 돌려 자신을 바라보는 다른 영광의 십 인에게 물었다.
“저는 괜찮으니 다음 도전하실 분들께서 나오셔도 좋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스틴 백작이 야안의 앞을 나섰다. 그리고 잠시 후 놀랄 일이 생겼다.
수호기사 또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내 스틴 백작의 옆에 자리했는데, 조금 전 야안의 검을 보았던 탓인지 자존심이 강한 스틴 백작은 잠시 미간을 찌푸릴 뿐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야안의 검은 그만큼 존중받을 만한 것이었다.
황자 피르망은 자신의 지형에서 가장 강한 영광의 삼 인이 검을 겨누게 되자 흥미와 기대 섞인 눈으로 바라보았다.
‘만약 폰 발리 경이 이 대련에서 이긴다면 나의 근심은 줄어들 수 있을지도.’
스틴 백작의 검은 준 13강의 실력에 자리했고, 수호기사의 검은 13강에 못 미치지만, 능히 상급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있다 할 수 있다.
그런 그 둘의 합공을 이겨낸다면 능히 13강의 수좌를 노려볼 만한 실력자라 할 수 있다. 상급 익스퍼트의 그 잘 짜인 검의 구의 합공은 웬만큼 훈련한 합격술 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었으니 말이다.
초인의 힘을 발휘한다면, 아니, 하다못해 주술이나 정령의 힘을 보인다면 그들을 제압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야안은 상급 익스퍼트 수준인 검 하나로 그들을 제압해야 했으니, 실상 상당히 어려운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간단히 말하자면 푸린 급의 괴물 2마리를 한꺼번에 상대한다고 생각해야 한다.
상급 익스퍼트 수준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합공은 단순히 하나에서 하나를 더해 둘이 되는 것이 아닌 셋이나 넷이 되기도 한다.
그렇기에 잘 짜여 진 상위 경지에 자리한 강자들 다섯이 모이면 초인을 막아설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절대적인 경지의 차이가 있기에 제압하는 것이 아닌 겨우 막아서는 것에 그칠 뿐이지만 그것이 어디 인가?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구존을 막아선다는 것으로도 충분히 합공의 가치가 있다. 여하튼 이 대련은 야안의 입장에서도 상당히 까다로운 것임이 틀림없었다.
곧 검을 꺼낸 세 검사의 검이 번쩍이더니 이내 요란한 굉음이 연무장을 어지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움직임은 매우 놀라웠다.
두 개의 검의 구가 발휘하는 그 힘의 상승효과에 야안의 검은 구는 그것을 막기 위해 더 조밀하게 움직여야 했다.
지난 가을 축제의 폭죽 터지는 소리 못지않은 굉음이 울릴 때마다 땅이 푹 파이고, 벽이 부서져 내렸다.
만약 딘 후작이 정령으로 연무장을 보호하지 않았다면 그보다 열 배는 더 큰 피해가 있었을 것이다.
야안은 극성에 달한 육대검식은 물론 붉은 실 또한 선보이기 시작했고, 그럼에도 밀리자 조금씩 힘의 묘용을 검에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제야 야안은 그 둘을 상대로 겨우 평수를 유지할 수 있었다.
야안의 그 이해되지 않는 의 묘용에 수호기사와 스틴 백작은 정신이 아찔해지는 충격을 받아야 했다.
그들이 그처럼 충격은 받는 것은 당연했다.
그들의 검의 구의 합공이 야안의 검의 구와 부딪히는 순간 자신의 의지를 미묘하게 벗어나버리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검의 기세를 지워버리기 시작하면서 완벽한 통제권을 가지기 시작한 자신의 검의 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는 것은 비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만큼이나 기이한 일이었다.
물론 그렇다 하여 충격이 없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10의 힘에서 6이 사라지고 4만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 둘의 합공에서 얻는 이득이 사라졌음을 말한다.
하기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흐름은 야안에게 넘어가기 시작했다.
반나절에 달하는 그들의 그 긴 대전은 야안이 스틴 백작의 검을 제압함으로써 끝이 났다. 이는 수호기사가 자신보다 건재함을 보이는 야안에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섰기 때문이다.
운이 좋으면 평수를 아니면 야안이 패하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한 그들의 입장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순간이었다.
그 충격에서 가장 빨리 깨어난 것은 황자 피르망이었다. 황제를 넘보는 그릇인 만큼 그는 야안의 그 대단한 무위에 놀라워하며 찬사를 보냈다.
“정말 대단하군. 그대의 검에 깊은 찬사를 보내네. 자네 같은 이가 나에게 온 것은 아리스 님의 축복일세.”
곧 그의 말을 이어 딘 후작은 물론 그 자리에 자리한 모든 이들이 격한 찬사를 보냈다. 패배를 한 스틴 백작은 그들 중에서 가장 큰 찬사를 보이기도 했다.
이로써 야안이 첫 번째 자리에 있는데 의문을 가진 자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었다.
* * *
늦가을이 지나 여김 없이 겨울 축제가 시작되었다.
겨울이라 해도 워낙 넓은 제국이었기에 눈을 구경도 하지 못하는 지방도 많았다. 카이엘 제국의 중심에 자리한 황성 도시는 사계절이 뚜렷한 곳이라 겨울 축제가 시작될 때쯤 이면 여김 없이 하늘에서 눈이 내리곤 했다.
지난밤 내린 눈으로 인해 황성 도시 중심에 자리한 수십 개의 거대한 대로는 수북한 눈이 쌓였었지만, 북적이는 제국시민들의 안정을 위해 이미 성문이 열리기도 전에 마법과 군인들로 인해 치워진 상태였다.
하지만 그도 얼마 가지 못해 정오가 되지 못한 시간에 하늘에서는 다시 눈이 펑펑 내리기 시작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이 불어대었지만, 다른 때의 겨울 축제 때보다 배는 더 모인 시민들로 인해 축제의 열기는 가실 줄 몰랐다.
특히나 그 열기는 바루시티움의 다가갈수록 더욱 뜨거워졌다.
이는 당연한 일이다. 자신의 생에 다시없을 거대한 대회가 열리는 날이었으니 겨울의 삭풍도 그 열기를 막아서기는 어려웠다.
이번 검술 대회의 주체가 제국의 수호 가문인 두 공작 가인 만큼 그 뜨거운 열기를 통솔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제국에 있어 황제 다음으로 권력을 유지한 그들의 가문은 검을 든 자라면 누구나 숭상하는 가문이기 때문이다. 아니, 수백 년의 시간 동안 수호 가문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는 그들의 그 고고함은 검을 든 자가 아니라도 제국의 백성이라면 존경을 받을 만했다.
특히 두 가문 중에서도 레필 공작 가문은 신비의 대상이었다. 텔 공작 가의 경우 소드마스터가 나타나는 시기가 몇 세대에 걸쳐 한 번씩 나타난다면 레필 공작 가의 가주는 언제나 소드마스터로서 모습을 보였다.
검의 극의를 넘어선 자가 매 세대에 나온다는 것은 확실히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다. 하여 누구는 이기에 의해 그런 것이 아닌가 말하는 자도 있었지만, 그런 그 주장은 우스꽝스럽기 그지없다.
검을 아는 자라면, 그 세계에 조금이라도 상식이 있는 자라면 그것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연유로 사실상 두 가문 중에서도 진정한 수호 가문은 레필 공작 가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텔 가문 또한 인정하는 것이기도 했다.
현재 텔 공작이 소드마스터에 오를 수 있게 된 것도 전대의 레필 공작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크게 따지고 본다면 현재의 텔 공작과 레필 공작은 사형지간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초인의 경지에 올라 검으로는 대륙의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는 레필 공작이었지만 그의 하루는 수련에서 시작하여 수련으로 끝이 났다.
물론 그의 수련이 일반적인 것과 그 차원이 달랐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육체로서의 수련이 아닌 의념을 다듬고 기운을 활성화하며 관조의 눈으로 세상 속의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그의 수련이었다.
레필 공작이 자신의 연무장에서 나서자 준비된 시종이 그에게 천을 건넸다. 굵은 땀방울을 내 닦던 그는 조용히 읊조리듯이 말을 하며 나아갔다.
“오늘이군. 그날이.”
드디어 지난 세 세력의 검사들이 모습을 보이는 날이었다.
이날을 위해 세 황자측은 상당한 거금을 투자하였고 이로써 새로운 강자들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이들 서른 명의 강자 중에서도 가장 화제가 된 발군의 인물은 1황자 측에서 상당한 거금을 투자하여 데려온 발란시타 왕국의 젤롬 공작이라 할 수 있다.
십 년 전 젤롬 공작은 준 13강의 실력을 지니었다 알려진 인물로 제국의 전쟁 보상금을 반으로 줄여준 대신 데려온 이이기도 했다.
발란시타 왕국은 지리상 나라 간의 교류가 어려워 재정이 힘들었고, 지난 전쟁으로 인해 역병이 퍼져 상당한 인명피해가 있었다.
젤롬 공작은 현 발란시타 왕의 장인이며 또한 왕국의 수호가문였기에 다소 치욕스러운 이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데려온 젤롬 공작의 무위는 놀라웠다. 그저 여타의 영광의 십인 정도를 생각한 것을 넘어 그는 강자가 많은 1황자 측에서도 수좌를 노릴 실력을 보였다.
기존의 13강 중 3번째 자리를 차지한 켈론 후작과 겨루어 그 승부가 결론이 나지 않았을 정도인 것이다.
의도한 것인지 몰라도 그 사실이 퍼지기 시작하면서 자연스럽게 귀족의 움직임도 1황자 측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레필 공작은 그런 강자의 탄생을 매우 즐기는 편이었다.
강자의 여유라 할 것인가? 아니면 강자의 고독이라 할 것인가? 텔 공작이 소드마스터의 경지에 올라섰다지만 그에게서 레필 공작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