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47화
‘셀리온 공작의 수단이 뛰어나구나.’
야안은 전선의 형태나 병사들의 군기를 살펴보며 감탄을 보였다. 군기가 워낙 대단한 탓에 진실의 눈을 펼쳐 살펴본 이들은 저마다 셀리온 공작 가에 깊은 충성심을 보이고 있었다.
또한 군자물자도 풍부하였는데 이는 무역거래에서 얻는 이득의 대부분을 군비로 충당하였기 때문이다.
셀리온 공작 가는 베론 제국의 10대 물자지역이었던 만큼 상당한 부를 자랑하는 곳이었지만, 무인의 길을 숭상하는지라 상당히 검소했다.
그래서인지 전체적으로 셀리온 공작 가 휘하의 귀족들은 대부분이 무장 출신이라 군부의 힘이 대단했으나 여러 시행착오를 거쳐 행정과 군부를 나눈 터라 부정부패에 대한 피해는 크지 않았다.
거리는 전란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활기찼다. 특히나 시장의 규모는 대단했는데 이는 베론 제국의 다른 곳에 비해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안정적이었기 때문이다.
전쟁으로 소비되는 물자는 엄청난 수준이기에, 제국의 중심지로 들어갈수록 영지에서 상인에게 요구하는 세금이 컸는데, 대상인들인 경우는 감당할 수 있으나 이를 중소상인들은 그 등쌀에 밀려 외지라고 할 수 있는 여기까지 밀려오면서 생긴 변화였다.
셀리온 공작 가 또한 전란의 시기이기에 평소보다 걷어 들이는 세금의 양은 높았지만, 앞서 영지에 비하면 상당히 양호했기 때문이다.
특히 대외적으로 외교정치를 펼쳐 전쟁의 요소를 줄이고 안으로는 전쟁 물자를 끊임없이 모았기에 야안은 어쩌면 이 대륙에서도 왕국의 탄생이 가능할지 모른다 판단했다.
“하지만, 오래는 버티지 못하겠지.”
그랬다. 야안의 말처럼 건국은 가능할지 모르나, 전란의 끝자락에서는 결국 통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가 정보 상인에게서 받은 이 대륙인의 특징은 대단히 호전적인데다, 베론 제국의 예가 있으니 하나로 통합되었을 때의 이점을 포기할 수 없을 터였다.
더구나 다시 베론 제국이 통일이 된다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되니 칼을 머리에 둔 형세인 셀리온 공작 가를 그냥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하니 전란의 끝자락 하나로 다시 합쳐진다면 셀리온 공작 가를 노리는 것을 불을 보듯 뻔한 순서였다.
셀리온 공작 가 또한 그때를 생각하여 전력을 다해 군사력을 키우고 물자를 비축하는 것이겠지만, 그 성공률은 10%도 되지 않을 것으로 야안은 판단했다.
“셀리온 공작 가에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니.”
자신처럼 생각을 하는 이가 있을 터. 다만 문제는 이번에 가주에 오른 셀리온 공작의 선택이다. 자신의 생각한 바를 밀고 나갈 것인가? 아니면 전란의 중심에 합류할 것인가?
아직 전란의 초기이기에 황가의 자손이라는 이점은 무시할 수 없지만, 전란이 길어진다면 그 가치도 바닥을 칠 것이다. 하니 셀리온 공작이 야심이 있는 자라면 제왕의 자리를 노려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선택이다.
이도 아니라면 다른 세력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느 정도의 인물일지 궁금하군.’
야안은 잠시 그런 생각에 빠지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런 것에 연연하기보다는 마토론산의 일행들과 함께 태양 종족을 방문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후 이들의 신임을 얻은 뒤, 그들을 중심으로 다른 이종족과 동맹을 맺어야 할 터였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그들 중 건국할 왕국에 합류할 뜻있는 이종족 부족들을 모아야 했다.
앞으로 몇 달 뒤면 베론 제국의 사신들이 이들 세력 측에 사신을 보내어 그들의 잠재력을 평가할 것이고, 그들 중 한 세력을 낙점하여 지원할 것이다.
자신은 그동안 이룩한 세력으로 그 세력과 동맹을 맺어 이종족들의 구역의 안전을 보장받게만 한다면 자신이 해야 할 기본적인 일들이 끝이 날 터였다.
큰 그림이 그렇다는 것이고, 이런 과정의 결론에 도달하려면 부가적인 세세한 사항은 끝이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지원할 세력에 대한 이해관계를 조사하고 낙점된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지원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이득도 생각해야 할 터.
특히나 강력한 황권 주의가 아닌 베론 제국이기에 사공이 많은 터라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그에 대해서도 유의해야 했다.
하기에 야안은 셀리온 공작의 인물에 대해 호기심을 지워내며 마토론산 일행과 함께 정해진 일정을 위해 서둘러 움직였다.
일찍 만날수록 더 많은 이종족을 세력에 끌어들일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다그닥, 다그닥-’
요란한 말굽 소리와 함께 먼지바람이 일어나며 대기를 어지럽힌다.
그 요란한 소리의 주인공들은 상품의 말을 탄 열네 명의 사내들로 그들은 저마다 비범하기 그지없는 기도를 보였다.
특히 그들 중 가장 선두에 자리한 아직 서른도 채 되지 않은 사내는 그들 중에서도 단연 독보였다.
풍기는 기운은 그와 같이 달리는 이들에 비해 미약했으나, 감히 범인은 마주할 수 없는 강렬한 눈빛은 그런 부족한 점을 채우고도 남았다.
한참을 달리던 그들은 말이 지친 기색이 보이자 수풀이 자리한 곳에 자리를 잡아 휴식을 취했다.
이 사내는 묵묵하게 자신의 말이 좋아하는 풀들이 있는 곳으로 안내하며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고, 말은 사내의 손길이 좋은 듯 요란한 울음소리를 흘렸다.
잠시 말을 살피던 그는 같이 말을 타고 온 한 사내가 마련한 거처에 앉아 휴식을 취했다. 형형로운 눈빛으로 시리도록 맑은 겨울 하늘을 바라보던 그는 누군가의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인기척의 주인은 조금 전 자신의 왼쪽에서 자리를 잡고 달리던 중년의 사내였다.
용병들이나 있을 법한 경갑주와 허름한 망토를 걸쳐 있지만, 그 풍기는 딱딱한 기세를 보건대 전형적인 이야기 속의 기사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목에서부터 얼굴을 가르는 긴 흉터 자국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사선을 넘나들었는지 짐작이 갈 정도였다.
그의 눈은 평소 공허하고 슬픈 기색이 자리했으나, 사내 앞에서의 그의 눈은 젊은 날과 같은 뜨거운 패기가 자리했다.
사내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무거운 입을 열었다.
“이제 반 정도 온 것인가?”
그 말에 중년의 기사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답하였다.
“지금 속도라면 나흘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흘, 나흘이라. 너무 멀군.”
그는 혼잣말하듯 작게 속삭이다 다시금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번 일만 잘 성사된다면 우리는 강력한 전선을 구축할 것이네. 그리고 그것을 기반을 삼는다면 최소 십 년의 시간은 벌 수 있을 테지.”
그는 감정이 고조된 듯 이내 자신의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한 번의 기회를 잡을 수 있을 것이야. 웅크린 힘이 터지는 그 시기를.”
오랫동안 쥐고 있던 활시위가 놓인다면 단숨에 어지러운 전선을 갈라 거대한 세력을 구축할 터였다.
제왕을 노릴 수 있는 세력을 말이다.
그랬다. 이 범상치 않은 사내는 북서쪽 지역의 패자 당대의 셀리온 공작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그를 모시고 있는 이 중년의 기사가 바로 셀리온 공작 가의 1기사단장인 존 크리스였다.
존 크리스는 제국의 수많은 강자을 나열할 때 반드시 열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뛰어난 검객으로 벌써 셀리온 공작을 3대 째 모시고 있는 노년의 기사이기도 했다.
올해 90을 바라보는 그가 이제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이유는 초인의 벽을 넘어선 자인 탓이다.
오 년 전 이황자의 세력이 몰살되던 그 위기의 순간 그 또한 전대의 셀리온 공작의 곁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화살 비와 검은 불꽃을 다루는 전투 현자들, 수백에 달하는 기사들의 검기가 물결을 칠 때면 그가 속한 그들의 진형은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져 내렸다.
그것만이라면 좋으련만 초인 중 하나였던 밸론 공작이 그 중심에서 몰아붙이자 미처 방비를 하지 못한 이 황자의 세력은 파죽지세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 전투에서 친우이자 주군이기도 했던 셀리온 공작이 죽음을 맞이했고, 그는 그곳에서 스스로 나약함에 대한 분노와 회한에 몸을 맡기다 초인의 벽을 넘어섰다.
만약 전대의 셀리온 공작이 자신의 아들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다면 그는 그곳에서 장렬히 전사하였을지 모른다.
존 크리스는 그 유언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집요하게 쫓던 밸론 공작에게서 생사를 넘나들며 도망쳤다.
생사를 확신할 수 없는 치명상을 입으며 다행스럽게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회복하자마자 자신의 힘을 보이며 주군의 아들을 공작위에 올렸다.
이는 대외적인 모습인 그에게 충성을 한 것이 아닌 그저 자신이 모신 주군과의 의를 행하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한데 주군의 그늘 밑에서 그의 지시에만 따르던 그분의 아들의 행보가 놀라웠다. 마치 자신의 몸을 묶은 쇠사슬을 떼어낸 듯 전란에 병들었던 부분을 과감히 쳐 버리며 혁신과 함께 놀라운 전략을 보이며 영지를 다스리기 시작한 것이다.
‘난세의 제왕.’
존 크리스는 이제 자신의 새로운 주군이 된 그를 그렇게 평가했다.
난세가 아니라면 지방의 뛰어난 영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 수완이 뛰어난데다 인덕이 있어 사람들을 잘 이끄니 말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피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그 성정이 매우 치밀하였다. 타고난 심력이 대단했으며, 타당하다면 수하들의 의견도 따랐다. 게다가 결정한 것을 쉬이 바꾸지 않았다.
하니, 지금과 같은 난세에 그의 기질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그런 그에게 존 크리스라는 날개까지 주어버리니 한 지방의 패자가 아닌 제왕의 자리를 노려볼 만 한 최소한의 조건이 갖추어졌다.
그에게는 가문 대대로 셀리온 가문을 모신 용맹한 맹장들이 적지 않았으니 전쟁을 두려워하여 기피할 이유도 없었다.
셀리온은 자신의 말에 뜨거운 눈빛을 보이는 존 크리스와 제1 기사단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머금었다.
‘이들이 있어 다행이다. 이 전력이라면 쿠락 자작 가를 함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중요 상거래의 요지가 되는 쿠락 자작 가는 셀리온 공작 가에게 있어 닭의 가슴살과도 같았다.
그들을 친다 하여 상거래에서 얻는 이득은 크지는 않으나, 이 길이 트여야 훗날 병력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탓이다.
하지만, 섣불리 병력을 움직였다가는 외교로 휴전을 선언한 다른 패자들의 신경을 거스를 수가 있다.
자신들이 아무리 쿠락 자작 가를 치려고 병력을 일으켰다 할지라도, 지금과 같은 난세에 그런 말을 고이 믿을 자들은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셀리온 공작은 최정예로 구성된 1기사단을 이끌고 그들을 치기로 했다.
물론 이는 존 크리스라는 초인이 있기에 가능한 전략이기도 했다. 최소한의 피해로 그들을 제압할 계획인지라 잠행을 방법으로 들어가 그 중심부를 칠 그는, 이미 많은 재물을 풀어 핵심 귀족들을 포섭한 상태였다.
그들이 할 일은 쿠락 가문과 그들을 따르는 세력의 머리만 쳐 버리면 될 일이었다.
‘사아아악-’
날카로운 겨울바람이 맞이하던 셀리온 공작은 말들이 체력을 회복한 듯하자 다시 여정을 계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