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49화
9. 부르케산
야안은 거절을 하려다 셀리온 공작의 진심이 담긴 말에 이내 선선히 받아들였다.
“부족한 저를 이처럼 높게 보아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야안이 사양치 않고 패를 받아들이자 셀리온 공작은 어릴 적 처음 검을 잡았을 때만큼이나 기뻐하였다.
그런 셀리온 공작의 모습에 야안 또한 공간의 주머니에서 한 자루의 검을 꺼내어 셀리온 공작에게 내주었다.
“이건 저와 셀리온 공작님과 좋은 인연이 있기를 바람에 대한 작은 증표라 생각해 주십시오.”
투박한 외양의 모습과는 달리 검집에 자리하였음에도 검에서 일어나는 기세를 숨기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검에 대한 재능은 뛰어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명검을 보는 눈마저 없는 것은 아니다. 공작이자 대귀족의 후계자로서 어린 시절부터 받는 후계 수업 중 안목을 높이는 법은 대단히 중요했다.
하니 야안이 건네주는 검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를 그는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검에 대한 진정한 가치를 아는 이는 셀리온 공작이 아닌 존 크리스 단장이었다. 그는 단번에 그 검이 돈으로 살 수 없는 무가지보와 같은 신검임을 알았던 것이다.
실제 이 검은 예전 드워프에게서 수업을 받으며 만든 검 중 하나였다. 미스릴 뿐만 아니라 오리하르콘 금속 20g이나 혼합된 것으로 검기의 증폭률은 30%에 달했다.
검집에서 검을 뽑는데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으음. 대단한 명검이군요.”
셀리온 공작은 검집에서 검을 빼는 순간 신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는데, 이는 검집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보이는 검기 때문이었다.
온몸의 털을 세울 듯했다. 마치 수백 개의 검을 마주하는 느낌마저 들었는데, 범인이었다면 심력에 큰 타격을 입었을 것이다.
하지만 타고나기를 철혈의 심장을 지닌 셀리온 공작은 한 번의 신음을 흘릴 뿐. 야안이 건네어 준 신검을 보며 연신 감탄을 하였다.
그러고는 이내 검을 검집에 넣고는 야안에게 작게 예를 보이며 말했다.
“제가 감당할 수 없는 물건입니다. 괜찮다면 이 검을 수하에게 이양하여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그 말에 셀리온 공작은 서슴없이 존 크리스 단장에게 검을 내어주었다.
“보석도 그 가치를 모르는 이에게 있으면 길가의 돌멩이와도 다름없다. 그간 번번이 해준 것이 없어 미안했건만 이제야 체면을 세울 수 있어 기쁘구나.”
존 크리스 단장은 그와 같은 신검을 서슴없이 내어주는 주군에 감명받았다. 서둘러 예를 차리고 검을 받아들인 그는 다시금 충성을 맹세하였다.
“검밖에 모르는 필부에게 이리도 베푸시니 셀리온 공작님의 검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아리스 님에게 맹세하나이다.”
“하하하. 좋고 좋도다.”
야안은 셀리온 공작이 신검의 마력에 빠져들지 않고 오히려 수하에게 검을 내어주어 마음을 잡는 모습에서 감탄하였다.
이제 겨우 서른을 넘겼음을 상기한다면 그의 배포는 능히 비교할 이가 드물다 하겠다.
야안 일행이 합류하면서 뜻이 맞음에 분위기가 달아오르니, 지난 전투에 피곤함은 온데간데없이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가져온 술을 꺼내어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지던 그들은 다음 날 이른 시간 쿠락 자작 가를 향했다.
쿠락 자작 가에 도착한 그들은 그곳에서 하루를 더 같이 보내다 헤어지게 되었다.
야안은 셀리온 공작과 헤어지기 전 한 장의 서신을 그에게 건네어 주었는데, 잠시 그것이 무엇이냐고 보는 셀리온 공작에 이내 말을 꺼냈다.
“이 서신은 저의 스승님이자 베론 제국의 황제이신 하늘 산 님에게 전해 주십시오. 제가 잘못 본 것이 아니라면 셀리온 공작께서는 그 기회를 잡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신분과 더불어 왜 이 대륙에 오게 되었는지 말하지 않았던 야안이었기에 셀리온 공작의 놀람은 대단했다.
설마 베론 제국의 황제이자 세상에서 가장 강한 이들 중 하나로 뽑히는 하늘 산의 제자라니.
하지만 이내 그는 절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가 아니면 이 같은 분을 제자로 삼을 수 있는 이는 없겠지.’
셀리온 공작은 다시금 감탄을 표하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서신은 반드시 전해질 것입니다. 부디 하시고자 하는 일 잘되시기를 기원하겠습니다.”
이별을 고하는 말에 야안이 미소를 보였다.
“제 안목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는 머지않은 시일에 다시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며 다시금 이별의 예를 표하던 야안은 마토론산 일행과 함께 길을 떠났다.
쿠락 자작 가의 성문을 넘어섰을 때쯤 야안은 오가는 상인들로부터 쿠락 자작 가가 사라지고 셀리온 공작 가의 품에 들어섰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잠시 그가 있을 것이라는 곳을 바라보던 야안은 다시금 말고삐를 잡으며 길을 떠났다.
* * *
에렌이라는 산맥은 이 바 대륙에서도 그 명성이 높았다.
다만 그 명성이라는 것이 경치가 아름답거나 뛰어난 광물과 특산물이 많은 것으로 유명한 것이 아닌 강력한 몬스터들이 많은 것에 있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그랬다. 에렌 산맥을 두고 절망의 산맥이라 불릴 정도로 무수한 몬스터들이 터를 잡고 있었고, 초대형 몬스터들도 알려진 것만 다섯 마리가 넘었다.
더구나 이 초대형 몬스터들 중 곤도 라는 몬스터는 어지간한 초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힘을 지니고 있었고, 그 강대한 사기로 인해 그의 명령을 따르는 몬스터의 숫자는 쉽사리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실정이니 에렌 산맥에서도 곤도가 지배하는 북남쪽 지역은 넓은 초원과 큰 강줄기가 있음에도 생명체가 살지 않았다.
많은 몬스터들이 그러하지만, 특히 곤도는 자신의 구역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예민한 것도 그런 결과를 낳는데 한몫했다.
이런 위험 지대에 들어선 일말의 무리가 있었다.
겨우 스물에 불과한 이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이면서 이곳 일대를 살피어 보고 있었는데, 저마다 이룬 경지가 대단한 탓인지 기척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이들은 늦은 밤에 끊임없이 이곳을 돌아다니며, 낮이 되면 어두운 굴을 파고 들어가 자신이 살핀 지형을 그렸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는구나.”
지난겨울 도칸의 경지에 오르게 되면서 자랑스러운 대전사의 명예를 얻게 된 마코롬은 수하들이 가져온 그림들을 하나로 합치다 막막한 지금의 현실에 손을 멈추며 중얼거렸다.
벌써 두 달이 넘어가건만 목표의 40%도 채 도달하지 못했다. 겨울이 지나가기 전에 완수해야 할 것인데, 시간은 너무나 빠르게 흘러만 갔다.
마코롬이 이곳에서 지형을 파악한 일을 맡은 이유는 다름 아닌 내년 봄. 이곳으로 태양 종족의 이동이 있을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노화의 위기를 맞이하시던 칸께서 더 늦기 전 이곳을 정복할 것을 결정을 내린 것인데 본래 호전적인 태양 종족의 전사들로서는 크게 환영할 일이었다.
인간들이 분열되면서 그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한동안 번번한 전투를 벌이지 못했기에 그 소식은 더없이 기쁜 일이다.
정복에 성공만 한다면 이곳은 태양종족이 터를 내리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다.
이곳이라면 그 강대한 군대를 지닌 인간들도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다는 이점은 둘째 치더라도 드넓은 초원에서 거둘 수 있는 식량에 더 이상 배를 곪지 않아도 될 것이니 말이다.
또한, 에렌 산맥의 수많은 몬스터들은 호전적인 그들의 전투 상대가 되어 성장시켜 줄 것이니 그야말로 태양 종족을 위한 곳이라 해도 무방한 곳이었다.
하지만, 그런 많은 이점에도 애초 이곳을 노리지 않은 것은 역시나 곤도라는 괴물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가 부리는 몬스터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일정한 체계가 잡혀 있는 탓에 상대하기 까다로운 면이 적지 않았다.
웬만한 기사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태양 종족의 전사들이라 할지라도 꺼려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태양 종족의 칸인 부르케산이 곤도를 처리할 수만 있다면 해볼 만한 상대인 것은 틀림없었다.
하기에 마코롬의 작업은 대단히 중요했다. 부족의 다섯밖에 없는 대전사인 그에게 일을 맡겼을 만큼.
이 지형을 자세히 조사함으로써 전쟁의 피해를 현저하게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칸인 부르케산이 곤도를 향해 갈 길 또한 최소한의 피해로 만들 수 있었다.
곤도만 잡는다면 그의 강렬한 사기에 정신이 제압되어 있던 몬스터들의 군기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군기가 무너진 몬스터들 따위는 상대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전장에서의 살기는 환희와 같은 태양종족의 특성을 생각한다면 전장의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의 광기에 몬스터들마저 물러서고 말 터였다.
‘봄까지 두 달. 어떻게든 그때까지 완성을 해야 할 것인데.’
잠시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그는 짧은 벌레소리와 함께 부스럭거리며 기척을 내며 다가오는 누군가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곧 그의 토굴로 수하가 모습을 보였다.
경솔하게 움직인 것에 대해 질책을 하려던 그는 이내 그 수하가 위험도가 높은 동쪽을 담당하던 자임을 상기하였다. 위험도가 높은 만큼 신중한 성격인 그를 뽑았던 것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가?”
자신의 물음에 수하는 다급히 말문을 열었다.
“조금 전 7왕자께서 귀환하셨습니다.”
마코롬은 수하의 말에 잠시간 반응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답변이었기 때문이다.
수하는 더 말해주어야 할 것이 있었지만 침착한 성격의 소유자답게 대전사가 자신에게 물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곧 마코롬은 이래저래 생각을 하다 이내 자신의 짐작을 지워내고 물었다.
“언제? 아니지. 왜 굳이 이런 길로 오셨는가? 대전사님들과 7왕자께서는 무사하신가?”
마음이 급해서인지 그의 질문은 다급했지만, 수하는 침착히 대답했다.
“도착하신지는 1타콤(2시간)이 지났습니다. 이 길로 오신 것을 보면 본래 가신 길이 아닌 셀제국의 북서쪽을 지나오신 것 같습니다. 또한 대전사님과 7왕자께서는 무사하셨습니다. 또한, 그분들 이외 동행이 있었습니다.”
“동행? 누군가?”
“그는 젊은 인간사내로 검을 든 것을 보면 검객인 것 같습니다. 뛰어난 자인 것은 분명한데 저로서는 짐작할 수 없는 자인지라 그가 어떤 실력을 지녔는지는 말씀드리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그 신분이 예사롭지가 않습니다. 7왕자께서 그자에 대해 말씀하시기를 베론 제국의 황제이신 하늘 산 님의 제자라 하셨으니 말입니다. 또한 칸께서 그분에게 주신 권한으로 그를 가휘지의 직위를 주신 것 같습니다.”
마코롬은 너무나 많은 정보에 잠시 정신없어하다 이내 7왕자께서 성공하셨다는 것을 짐작하고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하하하. 역시나 영민하신 7왕자다우시군. 이걸로 후계의 자리는 그분에게로 굳혀질 것이 분명하군. 좋은 일이다.”
현재 다음 대의 칸으로서 2왕자와 4왕자 또한 함께 거론되고 있었지만, 이번의 공으로 7왕자께서 다음 대의 후계자리를 굳히는데 불만을 품는 자는 없을 것이다.
전란의 시기를 맞아 힘을 모아야 하는 지금 이는 진정 기쁜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웃음을 흘리다, 수하가 가휘지로 모시는 사내의 무위를 측정하지 못하다는 말에 큰 흥미를 보였다.
“자네가 파악하지 못할 정도의 실력자라? 대단히 흥미롭군. 최소 대전사 밑은 아니라는 말이 되는데.”
잠시 중얼거리던 그는 석양이 질 때쯤 토굴을 나와 7왕자께서 계시는 곳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