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58화
야안의 가슴은 크게 두근거렸지만, 겉으로 표현하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성에서는 큰 피해가 없습니까? 괜찮다면 돕고 싶군요.”
리트담은 생각보다 이 초인의 성격이 다정함을 알고 감탄했다.
“야안 님 덕분에 큰 피해는 없습니다. 이미 대기 중이던 치료사들이 병사들을 치료하고 있고, 저처럼 사기가 높으니 성의 보수 또한 어렵지 않게 해낼 것입니다.”
야안은 리트담의 그 말에서 그가 본래 이 성의 사람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리트담 님께서는 이 영지에 거주하신 분이 아니셨군요.”
리트담은 자신을 높여 말하는 야안에 놀라 손을 저었다.
“야안 님께서는 편히 말씀하십시오. 짐작하신 것처럼 저 또한 잠시 이곳을 지나가던 중에 머물다 몬스터들의 침공에 나서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런 리트담의 말에 야안은 입가에 호선이 그어졌다.
‘생각보다 괜찮은 자로구나.’
이곳 영지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이가 그처럼 적극적으로 나서 도왔다는 사실에 야안은 그의 인격을 미뤄 짐작할 수 있었다.
리트담에 대해 잠깐의 담소를 나누던 야안은 어느새 성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는 호하스 영지의 사람들을 보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수많은 이들이 그들을 크게 환영했다. 누구는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 이도 있었고, 어떤 이는 몇 번이고 절을 하기도 했다.
기사들과 기사 단장은 물론 호하스 영지의 주인 호하스 자작 또한 피곤한 모습을 뒤로한 채 그들에게 경건한 자세로 예를 보였다.
“두 분이 아니셨다면 저희 호하스 영지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을 것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 영지가 마지막의 날이 올 때까지 두고두고 기억할 것입니다.”
야안은 그렇게 말하는 호하스 자작의 모습에서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훌륭한 군주에 훌륭한 영지민들이다.’
물질주의를 우선시하는 이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자였기에 더더욱 마음에 들었다. 곧 야안과 리트담은 호하스 자작과 기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성의 귀빈으로 초대를 받았다.
그의 성은 자작의 성이라고 보기에는 그 규모가 작은 편이지만, 그들이 묵게 된 방은 대단히 넓고 아늑했다.
이미 성의 집사는 야안과 리트담이 올 것에 대비해 입을 옷과 씻을 물, 식사를 준비한 뒤라 그들은 피로를 풀고 새 옷을 갈아입으며 배를 채울 수 있었다.
이후, 호하스 자작은 군량의 일부를 풀어 영지에 축제를 열었다.
야안과 리트담에 의해 큰 승리를 일구어내어 활기차기는 했으나, 죽은 이들도 상당했기에 그 활기참 뒤에는 짙은 슬픔이 자리했다.
하기에 그들의 지인들을 위로하고 한편으로는 우리 영지를 지킨 군사들과 두 영웅의 공에 감사의 뜻을 표하는 자리를 이 축제로 한 것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그들을 덮쳤던 탓일까?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얻은 마냥 생명력이 넘쳤고, 축제는 지금껏 열었던 그 어떤 축제보다 활기가 가득했다.
리트담과 야안은 이곳의 영지민들로부터 더할 수 없는 치하를 받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자신의 거처로 올 수 있었다.
야안은 자신의 방에서 이번 전투에서 얻은 바에 대해 정리하며 운기를 하다, 이내 가부좌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으로 가 문을 열었고, 그곳에서는 망설임이 가득한 리트담이 그의 방문 앞에서 어색하게 자리를 하고 있었다.
리트담은 버릇처럼 검은 지팡이를 두어 번 움켜쥐더니 이내 야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괜찮다면 이야기를 나누어도 되겠습니까?”
그런 그의 제안은 오히려 야안이 바라는 바였다. 그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그리고 지웠던 리트담이 지금 눈앞에 자리하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입니다. 좋은 와인이 있으니 그거라도 같이 하겠습니까?”
리트담은 선선히 허락하는 야안이 술을 권하자 잠시 멈칫하다 이내 그러겠노라고 말했다. 술이 약하기는 하지만 와인 정도는 괜찮다 생각해서였다.
곧 좋은 목재로 만든 탁자에 마주 앉았고, 야안은 품에 자리한 주머니에서 와인을 꺼내었다. 그 와인은 그가 거슬러 오기 전 가져온 이제 몇 병 되지 않은 와인으로 귀하게 여기는 것이었지만, 리트담이라는 인물과 함께 나누게 된 것이 기뻐 선선히 꺼내었다.
마개를 열자 짙은 와인 향이 코를 내질렀고, 대귀족이었던 리트담은 그것이 보기 힘든 고급 와인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이 같은 와인을 마시게 되는 것도.’
물 잔으로 쓰이던 유리잔에 와인을 붓자 아름다운 빛깔을 내었고, 곧 입가에 들어서자 그 짙은 향이 혀끝을 맴돌았다. 잠시 눈을 감고 맛을 음미하던 리트담은 이내 눈을 뜨며 감탄사를 흘렸다.
“좋군요. 이처럼 짙은 향이라니. 끝 맛에 자리한 여운이 쉽게 가시지를 않는군요.”
야안은 리트담이 마음에 들어 하자 꺼낸 보람이 있다 생각하며 미소를 보였다.
“좋아하시니 다행이군요. 고향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혹시 라 대륙의 귀족이십니까? 바 대륙에서는 먹어보지 못한 와인인지라.”
대귀족의 후계자라면 제국의 고급 와인정도는 어렵지 않게 다 접해본 터라 하는 말이었는데, 야안의 답변은 아리송한 것이었다.
“라 대륙에서 건너오기는 했지만 어떻게 보면, 바 대륙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요.”
“그것이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기 어렵군요.”
그런 리트담의 말에 야안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저의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저의 이야기를 하자면 사실 매우 길고 놀라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사실 그대와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는 이야기이니 그대도 자격이 있다 생각하지만. 그에 앞서 그대가 살아온 이야기를 해주지 않겠습니까?”
점점 영문을 알 수 없는 야안의 말을 이해해보려 했으나 상상할 수 없는 배경을 지닌 야안의 이야기를 그가 짐작할 수 없는 노릇이다. 하여 리트담은 고개를 잘게 저어대며 말했다.
“초면인 야안 님과 제가 연관이 있다니 저로서는 이해하기 어렵군요. 저의 이런 궁금함을 풀기 위해서라도 야안 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술이 들어가서인 걸까? 아니면 이 대륙에서 자신 이외의 주술사를 만난 것이 오랜만이라서 그런 것일까?
본래라면 야안 그와 심도 있는 주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 했던 그였으나, 그는 천천히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리케하르산 가문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된 그의 이야기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 가문의 멸망과 복수를 다짐하고자 샤 대륙에 간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은 지팡이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힘을 얻게 되어 돌아왔다는 리트담의 이야기를 다 들은 야안은 절로 마음이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궁금증 따위로 들을 이야기가 아니었군요. 정말 죄송합니다.”
야안의 사과에 리트담은 놀라 손을 크게 저었다.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속에 담긴 이야기를 남에게 하게 되니 마음이 조금은 편안하군요. 감사합니다.”
리트담의 그 같은 태도에도 야안은 미안한 마음을 쉽사리 벗을 수 없었다. 그에게 그처럼 아픈 역사가 있었음을 짐작했다면 이처럼 물어보지 않았을 것이다.
야안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그의 이야기에서 많은 것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그 갈증에 대해 풀 수 있었다.
왜 그의 이름이 샤 대륙의 사람들과 형식이 달랐는지, 어째서 그가 테무드 대현자와는 거리가 먼 샤 대륙의 유목민들을 지키며 살게 되었는지, 또한 그 놀라운 리트담의 저서의 모태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도.
애초 바 대륙의 대귀족의 후예였으니 리트담의 이름은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그가 샤 대륙에 있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바가 아니다.
아마도 그는 이 난세의 패자 중 가장 큰 세력을 지닌 이 밑에 머물렀을 것이다. 복수를 하려면, 또한 가문을 일으키려면 그 방법이 가장 빨랐을 것이니.
하지만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 세력이 다른 세력에게 밀려 잡아 먹혔을 수도 있고, 토사구팽이 되었을 수도 있다. 다른 피부색의 그는 오랫동안 귀족들에게 멸시를 받았다고 하니, 그 복수가 두려워서라도 기존의 귀족들이 크게 부추길 가능성도 높다.
하여 그는 염증이 났었을 수도 있고, 쫓겨났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위대한 주술사로서 유목민족들을 모아 거대한 왕국을 설립할 생각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랬기에, 그는 죽음의 지배자에 의해 세상이 어지러울 때도 세상에 들어나지 않고 그 자신의 세력만을 지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이를 생각하니 야안은 참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처럼 뛰어난 자가 당시에 있었음에도 그를 알아본 이가 없어 그 치열한 전쟁에서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니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그는 조금 전부터 리트담의 저서와 유사한 점이 많은 검은 지팡이를 보며 생각을 이었다.
‘저것이 바로 이 리트담의 저서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구나. 하지만, 듣자니 그저 당시의 경험을 환각으로만 보여주었다는 검은 지팡이에 비한다면, 이 리트담의 저서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아니, 당시의 리트담이 얼마나 놀라운 주술을 부렸는지 알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맞겠구나.’
한때 제국을 뒤흔들었던 위대한 주술사조차 저 검은 지팡이를 만드는 것이 고작이었다. 한데, 이 리트담의 저서는 그런 것을 초월하여 하나의 인생을 걷게 하고 그에서 파생된 경험과 지식을 사용자가 얻게 해 준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으로 리트담의 주술을 알려주는 것은 물론이고, 한계에 자리한 상황을 넘어서게 해주는 신비로운 묘용이 자리한다.
현재 야안의 주술은 큰 주술사에 근접한 상태인데다 아직도 그가 보아야 할 것은 네 개나 남은 상태였으니, 이 끝에는 무엇이 있을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어쩌면 그는 주술의 끝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던 야안은 곧 자신을 말없이 바라보는 리트담의 눈길을 느끼고는 이내 한손을 뻗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움켜쥐었다.
‘부르르르-’
그저 손을 들어 단 한 번 쥐었을 뿐이건만 방 안이 크게 요동을 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지진이 이 방에서만 일어난 것처럼 보였는데, 야안과 리트담이 자리한 곳만은 거짓말처럼 그 진동이 자리하지 않았다.
물건이 깨지고 방 안의 장식이 다 부서질 듯하자 야안은 이내 쥐었던 손을 풀었고, 곧 지진은 그를 기점으로 사라졌다.
“아!”
리트담은 야안이 보인 주술에 단명의 비명을 흘렸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그는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야안의 주술이 자신의 주술의 근원과 같다는 것을 말이다.
“어떻게?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현재 그의 주술의 근원과 같은 자는 존재할 수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애초에 이 주술은 로케하르산 가문의 주술과 샤 대륙에서 얻은 위대한 주술사의 유물을 통해 합쳐 만들어낸 것이었으니 그것을 창조한 자신 이외에 사용한 자가 있다는 것은 인과의 법칙을 무시하는 행위이다.
혹시나 자신이 잘못 파악한 것이 아닐까? 싶어 다시 생각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결론은 하나였다.
“어떻게 그대가 나의 주술을 알고 있는 것입니까?”
그의 말에 야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인벤토리에서 전설의 검을 꺼내어보았고, 리트담은 야안의 행동을 바라보다 더욱 놀라움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할 수 가 없구나.’
야안이라는 이 초인이 감히 자신이 범접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나, 지금 행한 모습은 자신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