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안-272화 (272/385)

야안 272화

15. 리치왕 케르몬

전쟁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여름의 뜨거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가을의 그 쓸쓸함만이 피로 얼룩진 평야를 위로 할 뿐이다.

단 두 세력이었다.

오대 세력 중 단 두 세력이 부딪혔을 뿐이건만, 그 피해는 천문학적인 것이었다. 물질적으로나 인적으로나 단 한 번의 전쟁이 낳은 피해는 그 전쟁을 겪은 자들에게 영원한 악몽을 선사할 것이다.

백에 달하던 핏빛 기사단은 절반도 채 남기지 못했고, 불타는 날개 또한 그 두 날개가 꺾이고 말았다.

일천에 달하던 현자들은 겨우 삼백만이 남았을 뿐이며, 엄청난 자금을 들여 만든 타이탄 또한 겨우 20%가 구동할 따름이다.

피해는 그뿐만이 아니다. 창병부터 마법병까지 모두 양측의 피해를 합산한다면 그 숫자가 40만이 넘었다.

말 그대로 죽음이 대지를 덮은 것이다.

영혼을 물어간다는 까마귀 떼들의 울음소리만이 대지를 뒤덮었다. 너무 많은 피해라 수습을 하기조차 어려울 지경이라 시체를 뜯어 먹는 까마귀들을 어찌하지 못했다.

그 어둡고 슬픈 그 날. 한 사내가 이곳에 모습을 보였다.

그는 말콤 공작 가의 가신으로 이번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현자였다. 이번 전쟁에서 중급 현자 마스터에 올라선지라 그 실력과 이번 전쟁에서 보인 공을 인정하여 말콤 공작 가 휘하의 마탑의 중책에 올라선 자이기도 했다.

이름은 베탄.

본래 현자들 사이에서도 그 성정이 밝은 그였지만, 자신과 관계된 인물 모두가 이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해서일까?

그는 매우 음침해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가 크게 비관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니다. 여전히 그 자신의 일에 충실했으며 예의 바른 면모를 보였으니 말이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그를 더욱 빛나게 했다. 분명 상상 이상으로 심적으로 힘들 것이 분명한데, 저처럼 자신의 관리가 철저하니 그에 칭찬을 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그런 모습과는 별개로 지금의 그의 모습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눈빛은 여전히 맑고 또 상냥하였고, 옷가지나 표정의 변화 또한 평소와 똑같았지만, 그에게는 위화감이 든다.

하지만 그가 행하는 일을 본다면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다.

들끓는 구더기를 짓밟으며, 고약한 피 웅덩이를 첨벙거리며, 두개골을 밟아 터뜨리는 그의 행보를 본다면 그 위화감의 정체를 알 수 있으리라.

그 끔찍한 걸음 속에서도 그의 모습은 다름이 없었으니 말이다.

한참을 그렇게 걸어가던 그는 어느 한 지점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요란스럽게 울어대며 시체를 먹어대던 수십만 마리의 까마귀들이 그의 걸음이 멈춤과 동시에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다.

단명의 비명도 없었다.

무언가에 충격도 없었다. 그 시체를 보노라면 마치 노화로 죽은 것 같은 모습이다. 그랬다. 수십만 마리에 달하던 까마귀가 생명력이 고갈되어 죽어 버린 것이다.

그 모든 생명력을 앗아간 그는 그것으로도 부족한 것인지 잠시 멈칫하더니 허리를 숙여 대지의 흙을 한 줌을 쥐었고, 그에 평야의 모든 흙이 고운 모래가 되었다.

다시 그가 흙을 한 줌 쥐자 이 평야 끝에 이어져 있던 거대한 수십여 개의 산에 자리한 초목이 죽음을 맞이했다.

마지막으로 그가 다시 흙을 한 줌 쥐니 산에 자리한 모든 생명체와 흙들은 물론 그 너머에 있던 수만 마리의 몬스터들이 맥없이 푹 쓰러지고 말았다.

그 놀랍고 믿어지지 않는 끔찍한 이적(異蹟)을 행했음에도 그의 얼굴은 여전했다. 눈빛은 깊고 맑고 밝았으며, 입가에는 상냥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이 잡은 흙을 바라보다 그제야 조금은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일단 아쉬운 대로.”

대수롭지 않게 말을 하더니 이내 뿌리듯이 처음 쥔 흙을 허공에 날렸다. 마치 어린아이가 장난 치듯한 행동이었는데, 그 결과는 결코 장난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처음 쥔 흙은 이리저리 허공을 떠돌더니 이내 뭉쳐 커지기 시작했고, 곧 그것은 인간의 뼈대가 되었다.

다시 그가 두 번째 쥔 흙을 뿌리자 해골 머리가 생겨났고, 세 번째 쥔 흙을 뿌리자 검은 심장이 그의 가슴에 들어섰다.

마지막으로 지난 전쟁에서 죽은 이들에게서 거둔 영혼을 단 한 번의 숨결로 해골에게 뿌리자 해골의 눈에서 불이 일어났다.

동시에 끔찍한 기운이 해골에게서 퍼져 나왔다. 그 사이함은 생명체와 상극 그 자체였으며, 또한 이 넓은 전장 너머에 자리한 군대 진영이 있는 곳까지 다다를 파장을 보였다.

만약 그를 깨운 베탄이 손을 저어 막지 않았다면 양측 진영에 비상이 걸렸을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깨어난 그 기이한 존재는 이내 눈앞의 이가 누구인지 알고는 서둘러 몸을 숙였다.

“케르몬이 주인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는 너무도 황송하다는 듯 악령의 그것과 같은 음성으로 예를 표하자 사내, 베탄이 말문을 연다.

“미흡하구나. 완성을 보이라. 그리고 존재하지 말아야 할 자를 멸하라.”

그의 말은 두서없는 혼란 그 자체였으나, 케르몬은 그에게서 나온 자. 그는 주인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다.

“모든 것은 주인님의 뜻대로 될 것입니다.”

다시금 공손히 답하는 그에 베탄이 손가락을 젓자 그와 함께 케르몬이 그 자취를 감추었다.

그렇게 일만 년 만에 악마가 세상에 모습을 보였다.

연합전선은 성공적으로 구축되었다.

지금도 끊임없이 몬스터들이 무로딘 산맥으로 들어서고 있었지만, 완벽하게 구축된 전선에 의해 그들은 맥없이 죽음을 맞이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 지난 석 달 동안 그들은 지독한 전쟁을 이어가야만 했다.

그 중심에 자리한 거인족이 아니었다면 결코 불가능할 전쟁이었을 것이다. 그랬다. 카사들의 불은 모든 것을 녹일만했고, 모롤타 종족은 용감하여 뒤로 물러설 줄 몰랐으나 그들로는 부족함이 있었다.

모든 것을 깨부수고 나아가는 거인들의 힘은 마치 신의 거대한 철퇴를 보는 듯했으니 말이다.

물론 야안과 리트담 또한 그 후미에서 같이 하지 않았다면 시간은 더 걸렸을지 모른다. 단둘이었으나 그렇다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전투 능력은 놀라웠다.

특히 리트담의 경우 이제 열 마리의 강철 괴물을 부릴 수 있었고, 마음만 먹는다면 그 이상도 가능한지라 수성에서의 그의 능력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드워프들은 거인족과 땅의 엘프들의 도움을 받아 무로딘 산맥에 두고두고 자리할 명작을 만들어내었다.

4,000km에 달하는 거대한 성을 구축한 것이다.

그간 포신의 숫자도 크게 늘어났고 또한 발전의 과정을 겪어 그것만으로도 상당한 숫자의 몬스터들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연합전선의 안전을 다지는 과정이 자리할 뿐이건만 정작 야안의 표정은 어두웠다. 바로, 지난 두 달 전 그에게 내려진 퀘스트 때문이었다.

[리치왕 케르몬을 멸하라.

등급 : S+

전설의 시대에 모습을 보였던 악마 리치왕 케르몬이 부활하였다. 죽음의 현자라 불리던 그는 수많은 금지의 마법들을 특기로 가지고 있다.

그는 죽은 현자를 부활시켜 자신의 수족으로 삼으며, 그들로 하여금 불사의 군단을 일으켜 세상을 어지럽혔다.

* 리치왕 케르몬의 힘은 드래곤과 필적하다.

* 그대를 멸하기 위해 리치왕 케르몬은 그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대 준비하고 또 준비하여 그를 막아라.]

그 퀘스트를 받았을 때 그는 순간 이해하지 못했다. 리치왕 케로몬이라니. 고대에 모습을 보인 악마는 파란토 그자 하나뿐만이 아니었던가?

아니, 그 이전에 죽음의 지배자의 영향이 벌써 모습을 보인다는 것에 야안은 의문을 보였다.

고대에 남겨진 역사를 본다면 죽음의 지배자의 영향력은 못해도 지금부터 70~80년 이후에나 등장할 터였다.

한데 그것이 아닌 모양이다. 남겨진 역사 배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숱한 의문들이 줄을 이룬다.

지난 상대했던 파란토가 그 힘을 회복하지 못했음에도 그는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두려운 존재였다.

스승께서 목숨을 바친 마법이 아니었다면 결코 멸하지 못했을 것이다.

한데 그 가진 능력을 보아하니 그야말로 이 악마는 모든 힘을 회복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상상할 수 없는 삿되고 괴기한 군대를 이끌 모양이다.

퀘스트에서 악마의 능력이 드래곤에 준하다고 하니, 지난 드래곤을 상대했던 야안으로서는 앞이 캄캄했다.

당시의 드래곤과의 전투는 실상 마법이 주가 아닌 육체로서의 그 강함이 주였다. 본래 드래곤이 마법의 종주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본래 그 지닌 힘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만 년 전, 마지막에 모습을 보인 악마 죽음의 현자의 존재는 막강한 힘을 지닌 드래곤들에게도 골칫거리였다.

죽음의 지배자에게는 여러 악마가 자리했지만, 이 죽음의 현자만큼 까다롭고 강력한 존재가 어디 있을까?

당시 드래곤들 중 가장 현명하고 나이가 많은 붉은 드래곤이 나서야 이 죽음의 현자를 상대할 수 있을 만큼 이 리치왕의 힘은 막강하였다.

단순히 그 리치왕의 힘도 대단했으나 죽음의 지배자가 그에게 준 권능의 공포는 그 못지않은 것이었다.

타락한 현자들이 리치로 부활하였을 때, 그들은 그 살아생전의 경지를 넘어섰으니.

하여 그가 일으킨 현자 중 초인에 달하는 리치들의 숫자는 결코 적지 않았다. 더구나, 그와 그들이 일으킨 불사군단은 어떠하던가?

죽음의 기사는 지칠 줄 몰랐으며, 그 죽음의 기사가 지휘하는 스케렐톤은 머리가 부서지지 않는 한 끊임없이 움직였다.

또한 시체더미가 모여 만들어진 괴물 어보미의 힘은 어떠한가? 10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신체에서 터져 나오는 힘과 지독한 시독은 부딪히는 모든 것을 병들게 하며 무너뜨렸다.

이 불사의 군단을 막기 위해 당시 강대한 이종족 중 하나가 멸망 직전에 갔을 정도였으니 그것만으로도 그 힘을 예측할 수 있을 터이다.

본래의 역사였다면 부활하지 말았어야 할, 악마가 야안의 등장으로 인해 부활하게 되었고, 그는 지난 인간들이 보였던 전장과 무덤을 떠돌며 죽음으로 돌아간 현자들을 타락하여 불러들이고 있었다.

붉고 검은 어둠의 망토를 감싸고, 움직이고 있음에도 그 누구도 그에 대해 이상하다고 여기지 못했다.

그 어둠의 망토 너머에 검게 물든 해골 속에 붉은 두 죽음의 불꽃만이 자리할 뿐이건만 사람들은 마치 신분이 높은 자를 보는 듯 피할 뿐. 이상하다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로서는 이곳 영지를 순식간에 죽음의 영지로 만들 저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로서 자신의 주군이 하는 일을 방해할 것을 알기에 이처럼 마법을 펼쳐 움직이고 있었다.

마을을 지나, 영지의 중심 도시에 들어선 그는 다시 걸음을 움직여 영주 성에 도착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를 막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치 홀린 듯 그가 하는 행사는 당연하다는 듯이 공손하게 머리를 숙이며 그가 하고자 하는 바를 도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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