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87화
19. 북부의 패자
아니, 입 안이 바싹 말랐다.
그런 그의 심정을 아는지 넷은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 자이네. 자이웅이 펼친 인과의 법칙의 그물에 걸려 버린 죽음의 지배자가 그 같은 자를 부활시킨 것인데. 다행히 이자를 물리쳤다고 하니 우리로서는 희망이 생긴 것이지. 그 말은 드래곤 중 한 분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것이니.”
그 자신의 본래 목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지라 야안이 물었다.
“그 말씀은 드래곤을 만날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넷은 고개를 끄덕인다.
“앞서 흘려 이야기했으나, 자이웅께서 펼친 인과의 그물에 걸린 것은 비단 죽음의 지배자뿐만이 아니네. 드래곤들도 그러하지. 아니, 실상 전설의 현자의 등장에는 드래곤들이 없으면 나타날 수가 없으니.”
야안은 그런 인과의 그물을 이용할 수 있었던 3대 전설의 현자조차 상대하지 못했다는 죽음의 지배자의 힘이 과연 어떠했을지 상상키 어려웠다.
그렇게 잠시 고민하는데 넷이 말을 잇는다.
“그래, 케르몬이라. 어쩌면 고룡 중 한 분이 모습을 보일지도 모르겠군. 그래야 격이 맞으니. 음~ 서둘러야겠구나. 죽음의 지배자가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 천 년 만의 집회인가.”
그리 말하던 그는 조금 전 야안이 건네준 페어리의 돌을 붙잡고 오색 빛깔의 숨결을 부여 넣고는 다시 야안에게 건넨다.
“이것을 지니고 있으면 훗날 드래곤께서 그대를 부르실 것일세. 그날 다시 만나기로 하세. 유피테르 님도 다음에 만났을 때 더 완성된 모습으로 뵙기를 바랍니다.”
다급한 듯 그 말을 끝으로 넷은 모습을 감추었다.
야안은 그에게서 알아내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그의 말대로 무엇이 선이고 후인지를 알기에 애서 아쉬움을 감추었다.
유피테르 또한 자신의 기척에서조차 느껴지지 않고 사라진 이 페어리라는 종족에 혀를 내두른다.
“결국 저 녀석, 자신의 종족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군.”
유피테르의 그 말에 야안은 피식 웃음을 흘린다. 생각지 못했던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만족합니다. 넷 분 덕분에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되었군요. 어쩌면 그런 인과의 법칙에 물려 있기에 지난날 죽음의 지배자가 자신이 이끄는 어둠의 종족을 희생하여 이종족을 지워내었을지 모를 일입니다.”
야안의 말에 유피테르는 미소를 보인다.
“고룡이 깨어난다면 아는 녀석일지도 모르겠군.”
유피테르의 그 말에 야안이 놀란 듯 고개를 돌린다.
“드래곤들의 수명이 그렇게 깁니까?”
아무리 위대한 종족이라 하지만 생명체인 이상 그렇게 오래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묻는 것인데 유피테르는 오히려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질문이냐는 듯 대답했다.
“그들을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드래곤은 단순한 생명체가 아니네. 이 세상의 질서의 축을 잡기 위해 아리스 님께서 축복을 내린 존재들이지. 시간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다는 말이네. 그러니 생명체로서 그렇게 터무니없이 강해질 수 있었던 것이지. 뭐~ 그렇다고는 해도 결국 생명체라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하다고는 해도 만년을 넘게 사는 것이니. 인간의 입장에서는 영원하게 사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만큼 그 정신의 영역이 고차원적이다 라는 말이 되는데, 야안은 이내 그들이 상대하는 악마들을 상기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애초 악마들은 드래곤들을 상대하려 만들어낸 존재인 만큼 그 상대가 되는 드래곤의 힘이 그 못지않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곧 주술을 펼쳐, 리트담에게 연락을 하였고 이내 한줄기 바람이 불며 리트담이 그 모습을 보였다.
“일은 잘되었습니까?”
“덕분에 이야기가 잘 되었습니다.”
리트담은 야안의 그 답변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자리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어느새 해는 중천에 자리하였고, 곧 야안과 리트담은 자신의 흔적들을 지운 후 다음 일정을 위해 움직였다.
* * *
델몬 제국 시절, 셀리온 공작 가는 모든 북부인의 희망이며 상징이었다.
제국의 북부는 오지라 할 수 있을 만큼 그 기후가 변덕스러운 곳이다. 더구나 황권 중심에서 멀며 주위 환경으로 인해 그 예법이 실리를 우선시하다 보니 무시를 받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북부인들을 차별하는 농담도 많았다.
대부분 멍청하다거나 예의가 없다는 야만인 취급의 농담이 주로 그것을 보아도 북부인들의 일반 평이 어떠한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여 같은 제국 사람이어도 북부인들은 다른 지역의 제국 사람들과 친분이 가깝지 않았다.
중앙과 멀어지자 북부는 자연스럽게 강력한 황권에서도 그 입김이 강한 셀리온 공작 가가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셀리온 공작 가는 북부의 패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위로는 기사도를 따랐고, 밑으로는 자신의 사람들에게 부족함 없이 챙겨주며 그 인덕을 보인 것이다.
북부의 모두가 셀리온 공작 가를 찬양하던 그때의 시절을, 그 향수를 그리워하는 자는 적지 않았다.
난세로 인해 전대의 셀리온 공작이 죽고 많은 병력이 잃어버리자, 북부의 각 영주는 더 이상 셀리온 공작 가를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크고 작은 전쟁이 무수히 일어났기 때문이다.
서로 협력하던 두 영지는 아비와 자식을 잃게 한 원수사이가 되었으며, 자연 들끓는 몬스터들을 제때 토벌하지 못해 피해를 보는 영지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제국인들이 농담처럼 얘기하던 신뢰를 모르고 예의를 모르는 야만인들만이 자리한 것 같은 상황이 되어 버렸다.
오대 세력에 떠밀려 버린 다른 세력들마저 북부를 노리기 시작했고, 자연 서로를 시기하던 북부의 영지들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크게 고통에 신음하던 시절이었다. 지독한 폭정에 피눈물을 흘리며 징병으로 가족들이 생이별을 해야 하는 끔찍한 현실에서 북서쪽에서 기회를 노리며 바라보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그닥, 다그닥-’
요란한 말굽 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댔고, 대지는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땅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등장한 군대는 무서운 속도로 북으로 올라온 세력들을 베어내기 시작했다.
그 힘은 예전이었다면 모르지만, 약탈에 젖어 군기를 잃은 세력이 막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한 때는 천하를 노리던 자들이라 저마다 비수를 지니고 있었지만 어떻게 된 것인지 그마저 준비된 수에 막혀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
‘파바박, 콱-’
지난 이 영지를 지배한 세력의 깃발이 꺾임과 동시에 거대한 깃발이 요란한 바람소리와 함께 펄럭거리며 땅에 박힌다.
그 깃발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지 모르던 어린아이는 그저 말없이 보았을 뿐이지만, 아이의 부모와 그 시대를 함께한 사람들은 저마다 눈물을 흘리었다.
셀리온 공작 가 그 위대한 가문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움츠린 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지 3달.
고작 3달 만에 그들은 예전 자신의 위세가 닿은 곳까지 정복을 마쳤다. 전선으로 전쟁물자를 나르며, 그들은 전진, 전진을 계속하였다.
강철의 군대.
그 군율은 난세에서 찾아보기 힘들 만큼 엄하기 그지없었으며, 단순히 숫자 늘리기가 아닌 그 하나하나가 정예병들이었다.
자연히 피 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적이 악독한 수를 부리면 끝까지 쫓아 추살을 하였으며 그 어떤 적도 이들을 부딪치기 무섭게 부서져버렸다.
그러면서도 정복한 영지의 영지민에게는 한없이 자애로우니 그야말로 북부인들로서는 만세를 부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중부에서 올라온 세력에게서 갖은 모욕을 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뒤라 진정한 북부의 주인이 나타나니 숨었던 인재도 모습을 보이며 등용되기를 원했다.
그것은 오히려 셀리온 공작이 원하는 바, 그들은 크게 등용문을 열었으며 그 인재에게 맞게 적재적소의 배치를 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남부에 타이탄이라는 것이 있다면, 북부의 군대에서는 그와 유사한 폼팜이라는 마법머신이 있다.
그 형태는 매우 단순한 편이다. 동그란 강철 원형을 중심으로 동물과 같은 네 개의 발이 자리하여 움직이는데, 산악이 많은 북부에서 많이 쓰인다.
무게는 비교적 가벼운 0.7t 정도이나, 두 앞발이 채찍처럼 늘어져 칠 수 있거나 추 형태 역할을 보이여 몬스터들을 결박하는 능력을 지닌다.
복잡한 구조를 지닌 타이탄에 비해 생산 비용도 70% 정도 저렴한 편인데다, 2대일 경우 1대의 타이탄을 상대할 수 있는 효율을 지니었으며, 그 병법에 따라 무궁무진한 이득을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 이점에도 제국에서는 널리 쓰이지 않았는데, 우선적으로 넓은 평야에서 큰 힘이 되는 타이탄의 강력한 돌파력이라는 이점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한 필요시에 구조상 다른 잡다한 일에도 쓰일 수 있었으며, 전장의 군수물품을 옮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물론 폼팜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는 있지만, 출력이 약한 만큼 타이탄에 비해서는 그 힘이 부족했다.
그러나 같은 병력이라도 누가 운용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니 무엇이 더 좋고 나쁘고는 이야기하기가 어렵다.
셀리온 공작 가는 이런 폼팜을 일만이나 만들어 전투에 투입했다.
북부를 휩쓸어버리는데 소모된 폼팜은 1,300대에 달했지만, 구조가 단순한데다, 이미 준비된 부품들이 자리해 곧 다시 망가진 폼팜들 대부분이 부대에 합류하게 될 터였다.
지금도, 해상 무역으로 얻은 이득으로 폼팜 부대를 만들어내고 있으며, 강을 따라 거슬러가는 전선은 이미 비행선으로 변형할 수 있다.
비행선 전환 시에 필요한 막대한 마정석이 문제였지만, 그 또한 이미 샤 대륙과 라 대륙과의 해상 무역에서 상당한 자원을 모은 상태였다.
북부를 뜨겁게 달구었던 그 열기는 그렇게 지난날 셀리온 공작 가를 따르던 영지를 모두 정복하면서 멈추었다.
이 소식은 바 대륙의 저 끝 너머로 빠르게 퍼져갔다.
이로써 오대 세력은 육대 세력으로 바뀌게 되었으며, 셀리온 공작 가와 마주한 사황자 측은 이 새로 떠오른 신흥 강자를 견제하기 위해 모든 전력을 끌어모으고 있다.
간첩들을 통해 얻은 소문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태도는 적절했다. 이번 대 셀리온 공작은 지난 셀리온 공작과 비교할 수 없는 맹장이자 난세의 군주이기 때문이다.
강철 같은 심성을 보이며 그야말로 파죽지세의 기세로 끝낸 전쟁의 면목들을 자세히 살펴본다면 얼마나 치밀하게 구성되었던 전쟁인지를 알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단순히 한 명의 뛰어난 신하가 있다고 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많은 인재의 의견을 하나로 통합해 그들을 적재적소로 통치하는 군주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