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93화
이해되지 않는 힘이었다. 차라리 그보다 강한 힘으로 막은 것이라면 이해하려만, 마치 검기를 일으키지 않은 것처럼 아무런 파장 없이 지워졌으니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지만 망한 세력이라 해도 한때 육대 세력 중 하나였던 곳의 군주였다. 프로센은 작게 한숨을 내쉬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결코 자신의 밑에 있는 신하는 아니었다. 자신의 신하였다면 저처럼 꼿꼿하게 자세를 유지한 채 자신을 바라보지 못할 것이니.
프로센의 그 말에 사내는 생글생글 거리는 웃음을 얼굴에 가득 보이며 말한다.
“복수를 원하는가? 힘을 원하는가? 그대는 무엇을 원하는가? 권력, 재물, 명예?”
자신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이상한 이야기를 내놓는 그에 프로센은 다시 검을 들어 그를 베려 했지만, 어느 순간 그 의식이 뚝 끊긴다.
그리고 그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의 뇌리에는 그가 만났던 사내는 존재치 않았다.
그 또한 별다른 변화는 없어 보였고, 곧 다시 시작될 전장의 준비를 위해 그는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다.
벌써 오 일 째 지속되는 전쟁이었다.
야안이 가져온 하나의 수급에 의해 시간이 갈수록 북부 연합 측의 승리가 굳혀져 가기 시작했다.
잡은 포로의 수만 삼십만이 넘었으며, 그들이 벤 적군의 수는 무려 이십만이 넘었다. 그야말로 전력의 사 분의 일을 지워낸 것인데 그에 비해 북부 연합 측의 피해는 고작 3~4만에 불과했다.
이도 사망자는 그중 20%에 불과했다.
단순히 숫자로만 본 적의 전력 손실이 그렇다는 이야기였고, 실제로 전력의 손실을 생각한다면 페르난도 대장군을 제외하더라도 반 이상이 지워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큰 돌파력이 될 초인의 부재와 겨우 30% 정도만 남은 기사단과 억지로 끌어모은 몇 만 되지 않은 기마병으로는 다른 전쟁이라면 모르지만, 이 같은 총력전에서 큰 힘을 쓰지 못했다.
이미 셀리온 공작 가가 자랑하는 아홉 기사 군단 중 일부가 그들을 견제하는 만큼 아무리 전략을 짠다 해도 힘을 내지 못할 것이다.
그뿐인가?
리트담이 이끄는 비행선의 전력은 압도적인 상태라, 그들로서는 수비에 급급한 입장이다. 지금으로서는 저들이 필사적으로 물러선다고 해도 전력의 20%를 가져가면 다행일 것이다.
진퇴양난에 빠지게 된 것인데, 사 황자 측의 입장에서는 모르나 북부 연합 측 입장에서는 지금의 상황이 반가울 따름이다.
야안은 피로 얼룩진 전장을 허공 위에서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럴 때가 아닌데.’
거대한 적을 앞에 두고 저처럼 의미 없이 죽어버리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그저 답답할 뿐이다.
하지만 이종족과 달리 인간들은 복잡한 인과관계가 꼬여 있고, 그 권력에 대한 욕망도 거대해 제 뜻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이마저 이용할 것이 분명하다.
아니, 애초 믿지 않는 이들이 대부분일 터였다. 그 자신을 비판하고 모욕할 것이다. 그것이 아리스 님을 따르는 신관일지라도.
그들의 그런 태도는 어찌 보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1년, 10년 뒤도 아닌 무려 100년이 지나야 그 징조가 대륙에 나타날 것이니.
눈으로 보지 않으면 그 의심을 내려놓지 않는 것이 인간이 아니던가?
더구나 수백 년을 사는 일부의 이종족들과는 달리 인간은 백 년을 채 살지도 못하였고, 그 권력은 그에 반의 반도 지니지 못했다.
그러하기에 야안은 동맹을 한 셀리온 공작에게도 이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다만, 자신이 본 그라면 이후 그가 황제가 되어 막강한 권력을 얻게 된다면 이에 대해 조처할 것으로 그는 판단했다.
자신의 이야기를 믿던 믿지 않든 어렵게 일군 제국이 겨우 100년을 고비로 멸망할 것이라 한다면, 만약을 대비해서라도 준비할 터이니.
그는 어느새 까마귀 떼들이 몰려 시체를 쪼아 먹는 것을 바라보다, 이내 눈을 돌렸다. 아리스 시스템으로 이런 주검들에 꺼림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 세계가 진실임을 믿는 야안으로서는 답답한 일이었으니.
“이곳에 계셨군요.”
“아, 리트담 님.”
야안은 리트담의 등장에 반기다 이내 그의 어투나 몸짓에서 자신을 다급히 찾음을 알고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그 말에 리트담은 안색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잘못 느낀 것인지 아닌지 확신을 하지 못하겠지만, 아주 짧은 순간 괴이한 힘이 모습을 보였다 사라졌습니다.”
야안은 리트담의 말에 크게 궁금증을 보이며 물었다.
“리트담 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정도라면 보통의 힘은 아닐 터. 도대체 그것이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것은……지난 이종족 연합과 함께 맞이했던 리치왕 케르몬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는 짙은 어둠이었습니다. 아니, 그것이 어둠이라고만 해야 할지.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런 것이고, 마치 모든 마이너스적인 힘들의 집합이라 하는 것이 더 맞을지도.
물론 그 가진 힘 자체는 뛰어나지는 않은 것 같았지만. 그 힘은 그런 것을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잠시의 기억을 되새기며 끄집어내던 리트담의 말에 야안은 자신도 모르게 한 존재를 기억했다.
“죽음의 지배자…….”
그가 이곳에 나타난 것이다.
모든 이종족을 지워버리고, 자신을 번번이 막았던 전설의 현자를 탄생치 못하게 배경을 만들게 한 그가 모습을 보인 것이었다.
지난 페어리 종족의 넷에게서 들었을 때, 이미 죽음의 지배자가 다른 형태로 이 대륙에 있을 것으로 예감했었지만. 이 전장에 모습을 보였다고 하니 그 자신도 모르게 몸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리트담 또한 그런 야안의 심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이처럼 급하게 야안을 찾은 것이었으나, 실제 야안에게서 그 이름을 듣자 그의 안색이 더 굳어져 갔다.
“내일 전장에 무슨 일이 날지 예상할 수 없겠군요.”
야안의 말에 리트담 또한 공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면 계획과는 달리 자신들의 힘을 더 끌어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들의 눈길이 어둠 속에 잠긴 전장의 잔혹한 곳에서 쉬이 떠나질 못한다.
사 황자 측의 지휘부는 지난날보다 더 좋지 못했다.
다름 아닌 자신의 군주인 프로센이 직접 전장에 나아가겠다고 고집을 피웠기 때문이다. 물론 마흔의 나이에 중급 익스퍼트에 오른 그의 재능은 놀라울 정도로 뛰어난 것이나, 이 같은 거대한 전쟁에서 그의 존재감은 가을 산의 낙엽과도 같았다.
최소 상급 익스퍼트 정도가 아니면 홀로 전장에 들어가 살아나올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이성이 남아 있는 듯 포픈 후작을 대신해 자신이 기사단을 이끌겠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 위험성이 낮아질 리가 없다.
현재 셀리온 공작의 기사단들이 그를 견제하고 있었으니 오히려 더 위험할 지도 모른다.
그런 상황임에도 기어이 프로센은 그 기사단을 이끌고 출정을 결심했다. 마치 그것이 자신의 마지막 사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런 그를 맞이하는 기사들은 충성 어린 모습으로 프로센을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그런 모습은 마치 자신의 죽을 자리는 스스로 결정하려는 고독한 절대자처럼 비추어졌기 때문이다.
누구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 전쟁이 자신들이 지키려 했던 성역의 마지막임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안타깝도다. 주군의 마지막을 보고 달려야 한다는 것이.”
지난 포픈 후작의 죽음 이후 제 2조장이었다가 이제 기사단장직을 맡고 있는 라톨 경은 그렇게 넋을 흘리며 중얼거린다.
이제 76밖에 남지 않은 기사들은 그런 라톨 경의 한탄에 그저 침묵으로 동의하였고, 기사들을 따르는 이제 2만하고도 3천밖에 되지 않은 기마병들은 그런 기사들을 따르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전장의 불이 밝혀졌다.
‘쾅. 쾅. 쾅-’
언제나 그랬듯 이번 전쟁에서 처음 선보인 드워프들의 마법 포신의 공격부터 시작 되었다. 마법으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웬만한 성은 그대로 밀어버릴 것 같은 그 파괴력에 맞서 마법 병단이 그들을 맞이했다.
마법 방패를 겹쳐 막기 시작한 것인데, 다섯이 한 조가 되어 붙여 막아섰음에도 워낙 포신에서 터져 나오는 화기의 힘이 대단해 마법방패가 찌그러지거나 박살이 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숙련된 병사들이 신병들을 이끌며 방패들을 새롭게 교체하며 나아가기 시작했고, 곧 두 진형이 마주쳤다.
역시나 거인들의 돌파력에 진형이 갈라지기 시작했고, 카사들의 불의 벽이 나아가는 적진을 태워 나아갔다.
그 같은 혼란 속에 셀리온 공작 가의 병사 중 일부는 갈라져 나온 적진을 감싸 그들을 무장 해제하여 포로로 잡았고, 그 외의 병력들은 나아가는 이종족 부대들의 곁에 함께 하여 적진의 진형을 어지럽혔다.
거인들을 이끌며 나아가는 야안은 다른 때와 달리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였는데 이는 그가 전장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황금 심장에게도 말을 한 터라 그가 해야 하는 역할은 황금 심장이 대신하고 있었다. 다행이라면 거인족을 막을 만한 병력의 구성이 맞춰지지 않아 어느 정도 그 몫을 해 주고 있었다.
이렇게 전쟁이 이어진다면 큰 변수가 없는 한 못해도 나흘 안에 전쟁은 끝이 날 것이다.
잔병의 처리만이 남을 것이며, 대군은 갈라져 사 황자 측의 비워진 성들을 잡아먹는 일만이 남을 터.
하지만, 그런 북부 연합 측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변수가 생겨났다.
‘다다다닥-’
그 일은 프로센이 이끄는 기사들을 막아섰던, 3,4,5 기사단과 3만의 기병들이 무너져 내리며 일어났다.
정령사들로부터 기사들을 이끄는 자가 사 황자임을 알게 되자 놓치지 않기 위해 두텁게 포진했건만, 질주하며 달려오는 그들을 결국 막아서지 못했다.
아니, 막아서지 못한 것만이 아니라 그들 중 절반 이상이 몰살되었고, 그 남은 절반도 그들이 하고자 했다면 꼼짝없이 몰살당했을 것이다.
믿어지지 않지만, 그것은 단 한 존재 프로센에 의해 일어난 일이기도 했다.
겨우 중급 익스퍼트 정도일 것으로 평가 받는 사 황자 프로센은 대륙에서 찾아볼 수 없는 초인이었던 것인데, 다만 기이한 것은 마치 인성을 상실한 것처럼 그의 눈에는 오직 붉은 핏빛만이 흘러내릴 뿐이다.
짙은 검붉은 검강을 일으키며 앞에 가로막는 모든 것을 베어내며 달려가는 프로센과 어느 순간부터 그와 같은 몰골을 보이며 배는 강해진 기사단들은 몬스터들보다 더 기이한 기운의 파장을 흘렸다.
용감무쌍했던 북부 연합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그들을 막지 못했고, 결국 아홉 개의 방어선 중 다섯 번째의 방어선이 무너져 내렸다.
이대로 달려간다면 지난 그들이 당했던 것처럼 지휘부가 당했을 수도 있을 일이지만, 어찌 된 것인지 가장 앞서 이들을 이끌던 프로센이 크게 각도를 꺾더니 가장 막강한 전력이 자리한 중군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한다.
“길을 열라!”
마나를 이용해 크게 외친 야안의 목소리에는 제왕지기의 위엄이 자리해 죽음을 도모하고 막아서려던 병사들이 저도 모르게 갈라지기 시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