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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297화 (297/385)

야안 297화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던 탓인지 그녀는 다른 엘프들과 달리 그 감정 표현이 다양했다. 특히 투명하고 맑은 붉은 입술 사이로 지어지는 그 싱그러운 미소는 꽃들마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 고개를 숙일듯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아름다운 여인과 함께 긴 여정을 떠나게 된 리트담과 야안, 그리고 제크 경은 그런 그녀의 아름다움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제크 경은 이미 그 고지식한 성정으로 검과 야안 이외에는 다른 것에 큰 관심이 없었으며, 야안은 이미 멜리나라는 부인이 그의 마음에 자리한데다, 뇌전의 정화로 인해 외적인 것에 현혹되지 않는 성정이었으니 그런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리트담의 그 같은 모습은 의외이다.

물론 탈인의 경지라는 놀라운 주술의 대가에 올라서게 되어 그 자제력이 범인을 넘어섰다고 하지만, 그 또한 피가 끓는 젊은 사내가 아니던가?

한데 푸른 들꽃과 함께 한 첫날 짧게 인사를 나눈 것을 끝으로 그는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다.

푸른 들꽃은 오랫동안 인간 사내들에게 시달렸던 터라, 오히려 그런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야안은 비록 자신은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푸른 들꽃의 외모가 얼마나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드는지 잘 알고 있었다.

문제가 있을 것 같아, 리트담에게 부탁을 하였고 외모를 변형시킬 것 같았던 리트담은 의외로 다른 주술을 펼쳤다.

그 외형은 그대로이나 그 존재감을 크게 낮추는 상당히 고차원적인 주술을 보인 것인데, 이 때문에 평소라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내지 못했을 사람들은 마치 길가의 어느 아낙네를 보는 눈빛으로 스쳐 지날 갈 뿐이다.

푸른 들꽃은 리트담에게 큰 흥미를 보이었다.

자신의 생의 반도 채 살지 못한 인간이 펼치는 주술은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마법의 지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거울을 보면 그 자신의 모습은 달라진 것이 없는데, 주위의 그 끈적거리는 인간들의 시선은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신기하여 다가가 주술에 대해 묻고자 했으나, 리트담은 자신과 말을 하기 싫은 듯 거리를 두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래도 다가가 묻고자 하면 단답형이나마 그 답을 해주는데 언제나 그 짧은 답변들은 그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었다.

처음에는 우연인가 싶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자 그녀는 이 무뚝뚝한 사내에게 호감을 가지게 되었고, 더욱 그와 가까이 있기를 원했다.

길이 잘 닦여 있었던지라 그들을 태운 마차는 빠르게 달려갔다.

마차는 제크 경이 몰았는데, 본래 수련기사로서의 생활을 할 당시 이런 마차를 모는 일을 많이 했던 터라 그는 능숙한 모습을 보였다.

야안이 말에게 회복마법을 걸어주고, 리트담이 주술로 그들의 체력을 안배하니 안 그래도 준마인 말들은 그 스스로 한계를 모르듯 달렸다.

셀리온 공작이 내어준 신분증은 빡빡한 느낌을 주는 치안 속에서도 어려움 없이 영지와 영지 사이를 넘게 해 주었다.

신분증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본래 그들의 신분증은 아니었다. 현재 이들은 다른 얼굴로 변모한 상태로 그 신분도 달랐다.

셀리온 가에 줄을 잘 서 대박이 난 귀족가의 철없는 자제들의 신분으로 위장되어 있었는데, 이는 다른 제국의 세작들로부터 자신들의 부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다른 이도 아닌 지난 전쟁들 속에서 큰 활약을 한 초인이 둘이나 모습을 감추는 것은 다른 제국에게 기회로 비추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쟁을 한다하여 이들이 두려울 이유는 없지만, 그들도 그렇고 자신들도 그렇지만, 지금은 군을 일으킬 때가 아닌 정비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였다.

이미 리트담이 만든 그들과 같은 모습을 한 가짜들마저 그들의 생활에 맞추고 있었으니 아무리 세작들이 재주가 좋다고 해도 이들의 부재는 알 수 없을 것이다.

마차 여행이라 하지만 성인 남성들이라도 지칠 강행군이었다.

초인인 야안과 리트담, 제크 경은 그 체력이 좋지 못한 현자이자 여인인 푸른 들꽃에게 너무 힘든 여정이 아닌가 배려를 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는 인간의 모습과 유사하나 초목을 뛰어다니던 엘프였다.

오히려 이 같은 강행군은 그녀에게 놀이와도 같았다.

마차를 이끄는 힘이 넘치는 말들은 그녀에게 벗이 되었고, 밤늦은 어둠 속에 피어진 모닥불은 옛 추억을 불러들인다. 들판의 꽃들은 아름다웠고, 바람은 시원하고 상쾌했다.

더구나 엘프 사회에서도 보기 힘든 뛰어난 경지에 오른 스승이 두 분이나 계시니 배움에 목마른 일이 없었다.

엘프의 성격은 그 살아갈 세월이 넉넉한 탓인지, 대체로 느긋하며 삶이나 배우고자 하는 데에 절박함이 없었는데 하프 엘프인 어머니의 생이 워낙 짧았던 것에 영향을 받았던 탓에 그녀의 학구열은 그녀가 살았던 부족에서 화제가 될 만큼 높았다.

물론 엘프로서 학구열이 높았던 것이지, 인간들로 치면 일반적인 수준 정도였다. 하지만 벌써 20년이 넘게 중급현자 마스터의 경지에 정체되었던 터라, 인간 같은 성정이 자리한 그녀로서는 다른 엘프들과 달리 갑갑함을 느껴야 했다.

야안은 자신이 만나본 엘프들과는 여러모로 다른 그녀에 야안은 흥미를 느꼈다.

진실의 눈을 통해 왜 그녀가 이 같은 성정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인간 같은 엘프는 예전 저주받은 숲의 부족민들을 상기하게 했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그 맑은 눈망울로 리트담을 바라보며 가르침을 받기를 원하는 푸른 들꽃에 리트담은 무심한 태도로 뱉듯이 말을 꺼낸다.

하지만, 야안이 들어도 그의 가르침은 자신도 생각하지 못한 그녀에게 딱 막는 조언들이라 절로 감탄을 사게 했다.

‘분명 저런 것을 보면 그녀를 싫어하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한데 왜 태도는 저렇게 꺼리는지 야안으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제크 경은 한때 귀족 사회의 사교장을 많이 다녔던 터라 그런 리트담의 태도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아 그저 작게 미소를 보일 뿐이다.

“통과 하십시오. 베폴란 영지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길을 막아서던 경비병은 야안이 보인 고위 귀족가의 신분증에 존경의 눈빛을 보이며 이내 물러서 크게 예를 보였다.

그도 그럴 만한 것이 이 신분증은 지난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가문에만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수고하시오.”

제크 경은 이들을 호위하는 기사로서 담담한 모습을 보이며 말을 몰았고, 경비병은 다시금 예를 보이며 길을 열었다.

베폴란 영지는 지난 1황자 측의 세력의 큰 자금줄이 되었던 항구 도시로 한때는 지난 셀리온 영지의 항구 도시 못지않은 세를 보였던 곳이었다.

난세로 인해 잠시 그 위세가 크게 꺾였지만, 셀리온 제국으로 편입된 뒤 다시 살아나고 있는 항구 도시였다.

잘 닦여진 길로 인해 수많은 상행이 성행하고 있었고,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파래로 인해 식량의 문제가 해결되자 전체적인 물자가 안정이 되었고, 제국에서 실행하는 공사들로 인해 일자리가 넘쳐 살아갈 방도가 생겼으니 희망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야안 일행은 이틀을 산중에서 지냈던 터라, 그곳에서 가장 좋은 여관에서 짐을 풀고 휴식을 취했다.

야안이 가진 신분증으로 인해 배편도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새롭게 떠오르는 실세라 생각해서인지 사람들의 태도는 매우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나흘이라, 생각보다 운이 좋았군.”

난세로 인해 샤 대륙과의 물류교류는 뜸하였는데, 다행히 가는 배편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시일도 가까우니 야안으로서는 만족할 일이다.

강행군으로 인해 그간 대부분 이론적으로만 수련하였던 제크 경을 살펴보아 준 야안은 스스로 수련을 하기 시작했다.

푸른 들꽃과 리트담은 그간의 긴 여정 속에서도 여전한 관계를 보였지만, 지금의 그녀에게 자신보다는 리트담이 더 도움이 될 것 같았기에 크게 가르치려는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우우우웅-’

출발을 뜻하는 뱃고동 소리가 저 멀리 바다까지 울려 퍼진다.

8,000톤이 넘는 이 거대한 철선은 본래는 전쟁에서 쓰이던 전선이었으나, 동력기관이 크게 손상되면서 상선으로 변모하였다.

그래도 유사시에는 비행을 유지할 수 있는 성능이 자리했으며, 지난 전쟁에서 큰 활약을 떨쳤던 마법 포신이 자리해 해적들 따위는 어렵지 않게 퇴치할 능력이 자리했다.

상선이라 하지만, 워낙 큰 거래를 맞는 터라 만남의 장이 있는 연회장은 물론 숙식의 구조도 상당히 고급화된 것이 특징이었다.

푸른 들꽃은 바다로 떠나는 것은 물론, 배를 타는 것조차 처음이었던지라 여러 가지로 큰 흥미를 보이었다.

대외적으로 귀족가의 영애로 되어 있는 그녀였기에 그 신분증만으로도 충분히 배의 중요기관 이외 출입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것을 둘째라 하더라도 리트담이 그녀에게 펼친 존재의 의의를 상당히 낮춘 터라, 그녀에게 시선을 돌리는 이들은 없어 문젯거리는 나타나지 않았다.

상당한 돈을 내었던 만큼, 그 음식들은 하나같이 훌륭했다. 엘프의 그녀를 위해 말린 과일 따위를 가져온 것이 민망할 정도로 나오는 채소나 과일들은 그 싱그러움을 자랑했다.

“마법으로 보존하는 것인가?”

전선이라 하더니, 그런 마법처리가 가능한 공간이 자리하는 모양이다. 야안도 그런 마법 물품을 만들 수는 있었으나, 문제는 그것에 드는 비용이 적지 않게 든다는 점이었다.

전선이 돈을 잡아먹는 괴물이라 하더니 확실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오물오물 거리며 과일을 씹어 먹던 푸른 들꽃은 리트담이 주술을 부리지 않았다면 진흙 속에 핀 한 송이 꽃 같은 존재감을 보였을 것이다.

그녀의 밝은 피부 톤과 어울리는 초록색의 드레스는 그녀의 미모를 한층 빛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와 마주 앉게 된 리트담은 잠시 푸른 들꽃을 말없이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저어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욕이 많지 않은 터라 이만 선실로 돌아가려던 것인데, 그런 그의 손을 누군가 붙잡았다. 이 세상의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 같은 너무나 부드럽고 따뜻한 것으로 리트담이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니 푸른 들꽃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람을 쉬러 가는 거면 같이 가요. 리트담 님.”

그 맑은 눈빛으로 빤히 바라보며 하는 말에 리트담은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고, 야안과 둘만 남게 된 제크 경은 그런 그들의 모습에 작게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제크 경의 모습에 의아한 듯 야안이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인가?”

야안의 그 말에 제크 경은 이번에 주군으로 모시게 된 분은 참으로 연애사에는 눈치가 없는 분이시구나. 싶어 속으로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모르시겠습니까? 리트담 님께서 푸른 들꽃 님을 좋아하시는 것을 말입니다.”

“음. 좋아하시는 것은 아네만.”

마음에 들어 한다는 의미를 다른 식으로 받아들이는 야안에 제크 경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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