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299화
“기왕이면 여성이면 좋겠네.”
제크 경은 무슨 뜻인지를 알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제크 경은 길잡이를 찾기 위해 여관을 나섰고, 야안은 여관 직원이 가져온 서적들을 살펴보았다.
20권 정도의 책들이 자리했는데, 대부분의 내용이 사막을 오간 여정을 담은 것이 주였다. 중요한 물 등은 주술이나 마법으로도 만들어 낼 수 있었던지라, 큰 짐을 꾸릴 필요도 없었다.
다만 말을 팔고 도롱이라 불리는 동물을 사야 했다.
도롱이라 불리는 이 동물은 더운 사막에 살아가는 순한 성격의 짐승으로 초급자도 길들이기가 쉬웠다.
말보다는 느린 편이지만, 워낙 생명력이 끈질기고 몸속에 지방을 저장해 두어 오랫동안 먹지 않아도 움직여 사막을 사는 이들에게 필수품이라 할 수 있었다.
제크 경이 데려온 수란이라는 길 안내를 맡게 된 여인에게 상등품의 도롱을 사도록 부탁하였는데, 도롱이라는 동물이 워낙 비싼 동물이라 그녀는 몇 번이나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었다.
상등품의 도롱 한 마리면 명마 다섯 필을 살 수 있었으니 그런 그녀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야안이 적지 않은 자금을 보여주자 안심하더니 이내 막상 거래를 할 때는 억척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수란은 처음 겨우 네 명으로 사막을 건너겠다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이 귀하게 자라 철없는 생각이 자리한 호족의 자제라 판단해 빠져나갈 궁리를 하였는데, 막상 제크 경이 상급 검기를 보여 주며 간단한 무위 시위를 보이자 더 이상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상급 익스퍼트 경지에 올라선 자들은 소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류 왕국을 통 털어도 스물이 채 되지 못했다.
그 정도 실력이면 이곳 류 왕국의 어느 대문파의 수장과도 일전을 보일 만한 자였으니, 수란이 안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포의 대상인 사막의 초대형 몬스터의 위협에서도 막설 수 있었으니.
실제 제크 경의 경지는 현재 상급 익스퍼트의 끝자락에 자리해 초대형 몬스터라 해도 홀로 그 일전을 다투어볼 만했다.
수란은 그 이외에도 저마다 어느 정도 실력이 있으니 사막을 건너겠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판단했기에 최소한 목숨은 건질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더구나 이 무리의 수장의 인심이 후해 생각보다 큰돈을 만질 수 있었는데, 선금도 적지 않게 내 주어 가난한 살림에 폐를 끼친 형부를 도와줄 수 있었다.
그녀는 그중 돈의 일부를 풀어 필요한 해독제 등의 물건을 사들이거나, 엄청난 자금을 들여 산 도롱들을 보살피는 일을 했다.
이들 무리가 가야 할 길이 평범하지 않은 것임을 들어 알았기에 상당한 시간을 사막에서 보낼 것이라, 도롱들의 체력을 미리 안배해주어야 했다.
도롱들도 앞으로의 여정에 대해 알듯이 상당한 양을 먹어대며 지방을 비축하였다.
이들 일행이 사막에 들어선 지 나흘이 지났다.
제크 경이 걱정한 것과는 달리 하나에게서 받은 야안의 나침반은 걱정 없이 잘 작동이 되었다.
다만, 문제라면 나침반의 방향이 가르킨 곳이 사막 지대 중에서도 상당히 험난한 곳이라는 점이다.
겨우 나흘이 지났을 뿐인데 만난 몬스터의 숫자만 수백이 넘었고, 그 무시무시하다는 모래 폭풍도 만나야 했으니.
만약 다른 상행이었다면 엄청난 피해를 있었을 일이었지만, 누구 하나 비범하지 않은 이가 없는 야안일행에게는 이 정도의 고비는 고비라고 부르기도 어려웠다.
수란은 말로만 들었던 주술을 처음으로 겪게 되었는데, 주술에 문외한인 그녀가 보아도 그 펼쳐진 주술이 결코 예사로운 수준임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손짓 한 번에 모래 속에서 일어난 괴물이 그 흉측하고 포악한 사막의 몬스터들을 지워내었을 뿐만 아니라, 모래 폭풍 당시 자신들과 도롱들을 통째로 보호하던 그의 주술 결계는 경이로운 그 자체였다.
단순히 그것뿐이던가?
스스로 안이라 밝히던 수장이 건네준 작은 목걸이를 건 뒤부터는 그 타는 듯한 열기는 봄날의 날처럼 포근했을 뿐이었고, 쉬이 지치지도 않았다.
하지만, 야안이 내어준 물건은 수련이 생각한 것보다 더 고귀한 물건이었다.
그것은 보호의 목걸이로 야안이 이번 사막 행을 위해 만들었던 물건인데, 무려 C급에 달한 물건이었고, 그것은 현자의 활동이 비교적 적은 샤 대륙에서는 큰 가치를 가질 물건이었다.
하급 마정석으로 만들어낸 것이기는 하지만, 야안의 경지가 경지인 만큼 룬 조각 능력도 놀라울 정도로 상승되었던 터라 C급에 달하는 물건이 나올 수 있었다.
그뿐이던가?
예전 길잡이 일을 배우기 위해 허드렛일을 하던 중, 부호들에게 보았던 공간의 주머니는 얼마나 비싼 것인지, 뛰어난 보존능력도 자리했다.
이 더위에도 썩지 않은 막 잡은 것 같은 고기나 싱싱한 과일, 채소 등이 나올 때면 두 눈을 의심할 정도이다.
하지만 그래도 꺼리는 것이 있다면 뒤늦게 자신이 생각지 못한 금지된 구역으로 가는 것에 있다.
사막에도 금지된 구역이 자리했고, 그곳으로 갈수록 나타나는 몬스터들의 숫자나 급은 높아졌으니 그녀가 꺼리는 것은 당연했다.
리트담의 경지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모르는 그녀로서는 충분히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칠 일째가 되던 때, 그런 꺼림을 지워낼 수 있었다.
야안이 검을 뽑아들고 처음으로 나선 것인데, 그의 검에서 샤 대륙의 칠대 초인이나 다룬다는 검강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술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그녀도 검을 잡은 터라, 기운이 유형화되어 만들어진 검강이 얼마나 막강한 위력을 발휘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사막에 들어서면서 슬픈 기색이 자리한 여인은 어떠한가? 기이하게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같은 여자가 보기에도 질투가 날 만큼 아름다운데, 전체적으로 보면 조화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건만 그 아름다움을 느낄 수가 없었다.
검을 다루지 않은 그 골격이나, 행동 말투 등을 보며 대단한 지식을 쌓은 학자를 보는 것 같았는데 지난 독충에게 물려 고생을 하던 시기 그녀가 보여준 마법에서, 그제야 그녀가 말로만 듣던 현자임을 그는 알게 되었다.
현자는 이름난 문파의 수장이라 해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 힘은 둘째라 하더라도, 그 지식이나 다른 마법의 유용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샤 대륙의 모든 현자가 지혜의 탑이라는 현자의 탑 아래 활동하기에 더욱 그러하기도 했다.
대문파들이나 귀족들의 세력 다툼에 희생되지 않기 위해 모여든 만큼 그 단결력이 뛰어나 명성이 높은 자들도 웬만하면 현자들과 부딪히는 것을 꺼렸다.
그 마법의 수준도 놀라웠는데, 특히 회복 마법에 특화된 그녀가 나서자 독충에 물린 그 상처가 반나절도 되지 않아 위험 수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이후 수란이 푸른 들꽃을 더욱 조심스럽고 정성스럽게 대하는 것은 뻔한 일이다.
이들의 여정은 길고 길었다.
마치 금지된 그 넓고 넓은 사막을 건너겠다는 태도를 보이는지라 아무리 여러 가지 혜택 속에 자리한다고 해도 지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런 여정 속에서도 리트담과 푸른 들꽃의 관계는 더 깊어져 갔다. 아직 누가 먼저 고백을 한 것은 아니지만, 말하지 않음에도 그들 서로가 큰 호감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는데 어려움이 없을 터였다.
리트담은 모든 것이 죽어버린 사막 속에서 힘들어하는 그녀를 위해 사막의 일부에 임시적으로 오아시스를 만들었는데, 그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그 어떤 현자도 하지 못하는 오직, 주술가이면서 또한 미개척의 영역을 홀로 넘어서고 있는 탈인의 경지에 자리한 리트담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놀랍다. 정말이지.”
사랑하는 한 여인을 위해 저 같은 일을 하는 것을 보면 리트담이 생각보다 낭만이 있는 모양이다.
야안은 위대한 주술가를 코 앞에 두고 있는 큰 주술가이기에 리트담이 행하고 있는 주술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들인지를 잘 알았기에 매번 그 광경을 보면서도 감탄을 감추지 못했다.
모래가 밀려나며 물이 솟아올라 작은 호수를 보였고, 고운 입자로 흩어지는 땅은 질 좋은 흙이 되었으며 그 위로 이곳 사막에서도 그 생명력을 보이는 식물들이 시간을 뛰어넘어 성장했다.
말로만 듣던 오아시스를 실제로 눈앞에서 만드는 모습에 수란은 그가 혹시 신이 아닌가 싶었다.
‘이런 경이로운 광경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미쳤다는 이야기를 듣겠지.’
수란은 어쩌면 세월이 흘러 자신이 보고 겪었던 이 일들이 꿈처럼 느껴지던 날이 올지도 모를 것이라고 예견하였다.
오아시스에 손을 넣어 그 시원한 감촉을 즐기던 푸른 들꽃은 언제나 말없이 자신을 지극히 바라보는 리트담의 시선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수치스러움이 자리한 그런 부끄러움이 아닌 가슴이 설레는 부끄러움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연애 이야기는 어린 시절 자신이 좋아하던 이야기였다.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몰라도 인간과 달리 무미건조한 엘프들의 관계는 멀게만 느껴졌는데, 마치 자신의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연애 이야기를 상기하게 하는 상황이 자신에게도 생기니 그녀는 마치 어린 시절 그 자신이 상상하던 상상 속에 있는 착각을 느낄 정도이다.
마음이 크게 설렌다.
리트담은 자신이 만든 오아시스를 만족해하는 푸른 들꽃의 모습에 복잡했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마치가 바보가 된 것처럼 모든 번민이 뇌리에서 사라졌다. 그것은 마치 중독된 자의 그것과도 같았다.
결국 사막의 석양 속에 물들던 그는 그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해 나지막한 목소리로 푸른 들꽃에게 그 마음을 고백했다.
“그대를 사랑하오.”
무뚝뚝한 그 다운 사랑 고백에 푸른 들꽃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의 진심 가득한 그 깊고 맑은 눈빛을 마주한 푸른 들꽃은 마치 빨려들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얼굴에 홍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푸른 들꽃은 커지는 자신의 심장 소리에 놀란 모습을 보였고, 그런 그녀의 모습을 오해한 리트담은 씁쓸한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그러며 일어서는데, 그런 그를 다급히 푸른 들꽃이 말을 뱉었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그 한마디가 마법이 되어 그를 묶었다. 지난 리치왕 케르몬을 상대하여 놀라운 신위를 보이던 그 누구도 그를 막지 못할 것 같은 리트담이 한 여인의 그 짧은 말 한마디에 무너진 것이다.
환각이 아니었던가 싶어 섣불리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리트담에 마음이 조급해진 푸른 들꽃이 물기에 젖은 손으로 그를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