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07화
25. 악사
셀리온 제국을 세우는 데 큰 일조를 한 이종족 연합은 제국의 양보를 얻어 인간들에게 계륵과도 같은 대지를 보상받았다.
리케하르산 공작 가의 영지는 권력이 모이는 중앙이 아닌 이들 이종족 연합과 가까운 변두리에 그 땅을 얻게 되었는데, 그곳은 물류의 중심지가 되었던 터라 현재 제국에서도 상당한 자금과 이권을 얻고 있었다.
이같이 리트담 공작이 그곳에 터를 잡은 것은 그가 이종족 연합과 친분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뭇 사내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올랐던 푸른 들꽃과 혼인을 하게 되면서 그 친분은 더 가까워졌다.
‘결국 혼인을 하게 된 것인가?’
그 곁에서 축하의 말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움을 보이던 야안은 다시금 자료를 살펴보았다.
셀리온 제국은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베론 제국이 말했던 약속들을 하나씩 지키기 시작했다. 두 제국 사이의 관계를 돋울 해상 무역을 크게 확대했으며, 물자의 교류 또한 높아졌다. 난세가 끝이 나면서 불필요해진 전선들이 이 해상 무역에 사용됐는데, 덕분에 제국 초기에 필요한 엄청난 자금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외 자료들을 통해서 셀리온 제국이 빠른 속도로 안정을 찾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야안은 마냥 안심할 수 없었다.
아니, 오히려 이런 상황이 불안할 따름이다.
너무 모든 것이 술술 잘 풀려가고 있었다. 이미 죽음의 지배자가 세상에 모습을 보였음에도 그처럼 일이 이처럼 잘 풀려간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야안은 마치 지금의 평화가 오히려 태풍을 앞둔 날씨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제국의 누군가로 모습을 감춘 그가 어딘가에서 또다시 무슨 혼란을 일으킬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게 개탄(慨歎)스럽구나.’
자신과 관계되는 소중한 모든 것을 저버릴 각오를 하고 준비를 하고 있지만, 만약 그것도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어떤 확신도 없었기에 머릿속은 혼란스럽고 가슴은 응어리가 진 듯 답답하다. 잠시 그 개탄스러운 심정에 빠지던 야안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을 다 짊어진다는 것은 너무도 오만한 생각이지.”
그리 말하며 마음을 잡던 야안은 그저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행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야 했다.
사색에 잠겨 있던 야안은 누군가의 방문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용이었다.
이미 야안의 곁에 남기로 한 그에 야안은 그 숨겨진 비밀들을 이야기해주었고, 그 후 모용의 태도는 더욱 공손하게 변했다.
범인으로서는 상상을 하기 힘든 고행의 길을 가는 야안에 흠뻑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크게 마음을 열고 다가선 그에 야안 또한 마음을 열어 그를 받아들였고, 이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은 어느 군신관계보다 더 끈끈한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초인의 경지에 올라선 모용은 야안의 지도에 따라 빠른 속도로 그 경지에 적응해 나가고 있었고, 지금은 검사를 일으키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모용은 예를 보이며 들어서며 말을 꺼낸다.
“준비를 끝냈습니다. 마지막으로 배춘만 상단주가 식사를 함께하고 싶다는군요.”
그 말에 야안은 미소를 보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바쁜 시기일 것이련만 그런 시간을 내어 주니 기쁘군요.”
그리 말하던 야안은 마지막 짐을 챙기고 모용과 함께 배춘만 상단주가 기다리는 식당으로 나섰다. 그들의 뒤로 리트담이 만든 볼란이 야안의 방문 앞에서 대기하다 이내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식사는 즐거웠다.
류 왕국 특유의 음식들은 저마다 자극적이지 않아 야안의 입에 맞았다. 오래전 배춘만이 직접 담갔던 술을 함께하며 그들과 그간의 정을 마지막으로 나누던 야안은 그렇게 이별을 고했다.
* * *
배춘만의 인맥으로 이미 바 대륙으로 가는 배편까지 구해진 터라 그들의 여정은 평화로웠다. 그 여정 속에서 야안은 4초식을 조금 더 체계적이게 다가서기 시작했고, 모용은 야안이 진실의 눈을 통해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세세하게 살펴 준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다.
류 왕국의 무역 중심지인 길란 성에 도착한 그들은 배춘만이 구해준 배편 소개장을 통해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배는 샤 대륙 특유의 풍미가 자리했다. 크고 웅장한 면이 자리했는데, 노골적인 화려함이 보이지 않고 은은한 멋이 담겨 있어 야안의 눈길을 끌었다.
‘이런 실용미가 있군.’
위대한 대장인의 눈을 지닌 야안이기에, 그 안에 자리한 실용성을 살린 아름다움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방을 배정받아서야 알았던 것이지만 배춘만이 구해 준 배편은 상당히 고가의 것이다. 그 배편의 소개장을 통해 안내를 받은 방은 여느 귀족들이 머물러도 부족함이 없는 크고 화려한 데다, 전용 하인까지 붙어져 있어, 앞으로의 배의 여정에 불편함은 없을 듯 보인다.
‘너무 무리하셨군.’
짧지만 좋은 인연이었다는 생각을 하던 야안은 같이 올라탄 볼란에게 하인은 경계하지 말라고 명한 뒤 하인의 도움을 받아 그간 미뤄두었던 리트담의 안배를 수련하기 시작했다.
곧 야안은 두루마리를 펼쳐 들었다.
두루마리 안에는 여우와 비슷한 몰골인 하얀 꼬리를 지닌 사내가 피리를 불고 있는 것이 그려져 있었다.
아무도 없는 벌판에 홀로 피리를 부는 그 모습은 쓸쓸해 보이기보다는 웅장한 면이 자리한다. 커다란 두루마리 중심에 작은 모습으로 자리하건만 공간이 가득 찬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했다.
이제 야안은 지난 처음 이 두루마리를 발견했을 때보다 배는 더 강한 자극을 받게 되었는데, 이제 더 이상 막힐 것이 없는 터라 그는 행운에 스탯을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스탯을 23개를 올리던 야안은 어느 순간 그림과 자신의 거리감이 사라진다는 착각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다 이내 눈빛이 몽롱하게 흐려지더니 곧 그의 의식이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텐산이라는 종족이 있다.
그들은 대륙의 종족 중 유일하게 나라 없이 떠도는 종족으로 여러 종족에게서 멸시와 천대를 받는 종족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유에 대한 갈망이 강해 속박받는 것을 싫어하며, 일은 겨우 배를 굶주리지 않을 정도만을 한 채 평생을 자유에 대해 노래하며 살아가니, 사회의 관념을 어지럽히는 그들을 곱게 보는 이들이 없는 것은 당연했다.
이들은 힘은 그리 강한 편은 아니나 동작이 민첩하고, 대부분 음감을 타고난 터라 음악을 사랑하고 즐긴다.
야안은 이런 텐산 종족의 떠돌이 삼류 악단 소속이었다.
본래 그는 고아로, 기억도 안 나는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텐산 종족에게 있어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이들 종족은 유난히 책임감 없는 자유가 의식 속에 자리한 터라 한 해에 이처럼 버려지는 아기들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통 이처럼 버려진 아기들은 짐승들의 먹이가 되거나 노예상들의 상품이 되기도 하는데, 야안은 운 좋게도 쟌 단장의 눈에 띄어 이 삼류 악단에서 클 수 있었다.
삼류라 해도 악단이라, 어린 시절부터 음악을 접할 기회가 많았던 야안은 그 본래 타고난 음감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쟌 단장은 어린 시절 야안이 음악을 어설프게나마 연주하는 것을 보고 야안이 특출난 재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아이도 음악가의 소질이 있구나.”
하지만 그런 쟌 단장은 야안이 본격적으로 음악을 배우기 시작하자 이내 자신의 생각을 수정하게 되었다.
그저 어느 정도 소질이 있다고 표현하기에는 야안의 지닌 재능이 너무도 탁월한 것이었다. 아니, 역사상 이 같은 소질을 가진 이가 있기나 할까?
그러나 그것은 악단에서 오직 쟌 단장만이 그리 생각할 뿐 다른 단원들의 생각은 달랐다. 야안의 목소리는 탁해 노래를 부르기에 적합하지 못했고, 악기를 다루는 방법을 배우는 것도 매우 더디었다.
귀는 밝은 편이었지만 그것뿐, 정작 행사로 연주를 할 때 보탬이 되지 않아 청소나 무대시설을 갖추는 데 필요한 인력 중 하나가 되는 것이 고작이다.
12해가 지나서야 그나마 쟌 단장이 어린 시절부터 가르쳐 준 피리를 이제야 조금은 불 줄 알게 되었을 뿐이다.
쟌 단장은 여타의 텐산 종족들이 그러했듯 유난히 술과 도박 따위를 좋아했다. 하지만, 야안의 재능을 깨달은 뒤부터는 그는 술과 도박을 멀리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야안을 가르치는데 모든 것을 바쳤다.
마치 그것이 자신이 숙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텐산 종족에게서 보이기 어려운 헌신을 야안에 보인 것이다.
야안은 그런 쟌 단장에 의해 여타 텐산 종족과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도 보일 수 없는 쟌 단장의 그 뜨거운 헌신에 여러 차례 가슴이 울렸던 야안이었다. 그는 그로 인해 헌신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었고, 자제심을 기르게 되었다.
그의 놓인 상황상 자제심은 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 또한 텐산 종족의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있었고 재능이 있는 단원들로부터 쓴소리를 들으며 스스로 악사로서 재능이 없음에 하루 수십 번 악사의 길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그러기에는 쟌 단장이 그에게 보인 헌신의 마음은 너무도 큰 것이었다.
텐산 종족의 위치상 삼류 악단의 악사라도 살아가게 되면 어느 정도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그 또한 악사가 되기 위해 노력을 하였지만 돌아서면 까먹기를 반복하는 멍청한 머리 탓에 간단한 피리도 제대로 마스터하지 못했다.
그래도 지난 세월의 고생이 헛되지는 않은 듯 짧은 곡 몇 개 정도는 연주할 수 있게 되었는데, 쟌 단장은 그런 야안의 연주를 즐겨 찾았다.
쟌 단장도 이제 노쇠의 시기를 걷게 된 터라, 근력이 줄어들고 눈도 침침해지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귀는 밝아 야안의 연주를 듣는데 무리가 없었다.
그는 자기 전 야안에게 대륙에 널리 알려진 ‘희망에 대하여’를 청했는데, 그렇게 야안의 연주를 듣고 잠에 이를 때면 기침이 심해지고 병색이 완연한 평소의 모습과 달리 숨도 가늘고 길어지는 모습을 보이곤 했다.
어느새 잠이 든 쟌 단장을 보던 야안은 그의 옆에 자리한 담요를 꺼내, 겨우내 쌓인 먼지를 털어버린 뒤 몸을 감싸고는 쟌 단장 옆에 쪼그려 앉았다.
꺼지려 하는 화로를 이리저리 뒤지며 불씨를 살린 그는 손때에 반질반질해진 피리를 꺼내었다. 연습을 하려는 것인데, 잠이 든 쟌 단장이 깰까 싶어 소리를 내지 않고 그저 손가락만이 이리저리 까닥거릴 뿐이다.
‘어렵다. 정말.’
손가락이 얼얼해질 정도로 연습하던 야안은 그리 생각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곧 생신을 앞둔 쟌 단장을 위해 그는 희망이라는 찬송가를 완성하려 했으나, 생각보다 진행되지 않는다. 악기를 연주할 때면 그 자신은 어느새 정신을 잃고 엉뚱한 음들을 넣고 있는 것이 문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