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10화
저마다 깊숙이 두었던 동전을 꺼내어 이 놀라운 음악가의 앞에 놓인 모자에 돈을 넣기 시작했다.
어느새, 야안의 모자는 두 손으로 들기 무거울 정도로 돈이 쌓였다.
푼돈에 불과한 동전들이었지만, 그것이 쌓이니 제법 적지 않은 돈이 된 것이다. 야안은 그들의 호응에 감사의 인사를 보이며 아쉬움이 자리한 그들을 위해 짧은 연주를 보였다.
<활력에 대하여.>
이 곡은 야안에게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것이었다. 예전 그의 아버지이자 스승이셨던 쟌 단장에게 가장 많이 다루었던, 처음으로 완주한 곡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그때와 달리 능숙하게 연주하게 된 이 곡을 들은 사람들은 저마다 몸속에 활기가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마음이 밝아지고 만성적인 피곤이 사라져갔는데, 이 이해 할 수 없는 위대한 마법이라 불러도 무리 없는 일에 사람들은 경의에 찬 시선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그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안은 다시금 감사의 인사를 남기고는 작게 끙 거리며 돈을 챙기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난 여정의 고단함을 식혀줄 안식처가 필요했다.
멀지 않은 작은 여관에 방을 잡은 그는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한 피리를 손질하며, 그간 모아둔 돈을 정리해 보았다.
“배를 구할 수 있을까?”
배를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의 여정은 매우 줄어들 수 있을 것이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외지 마을에서부터 위대한 거장의 유산이 자리한 마을까지의 거리는 대륙의 끝과 끝이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로 멀었다.
나라로 치면 7개의 나라를 거쳐 지나야 하는 대여정인 것이다.
왜 그토록 외진 곳에 그분이 터를 잡은 것인지 그는 알 수 없었지만, 사실 그것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그 자신은 자신에게 많은 기대와 감당하기 어려운 사랑을 주신 아버지의 바람을 이루어 주어야 했다.
많은 거장이 결국 고개를 흔들었던, 결국 그 위대한 음악가가 남긴 유산의 가치를 깎아낼 수밖에 없었던 그것을. 감히 자신이 완성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었으나 그는 해내야 했다.
아버지의 바람이 아니어도, 그 자신은 이미 음악을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을 만큼 사랑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니만큼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이 무엇인지 이제야 조금씩 알게 된 그로서는 그 위대했던 자의 유산을 자신의 손으로 발휘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그곳 쟈칼 왕국에서 반년 가량을 연주하며 돈을 모았고, 그는 바람의 종족인 텐의 나라로 넘어가게 되었다.
쟈칼 왕국이 더 이상 야만적인 행동을 하지 않게 되면서, 이곳 텐의 나라 또한 더 이상 전쟁의 위험에 휘말리지 않았다.
형제의 나라인 무, 라의 나라에서처럼 이곳 텐의 나라도 평화의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다시는 만나지 못하는 죽음 이후에야 하나가 되는 그들 형제의 나라는 양보와 미덕 속에 교류를 통해 점차 성장하고 있었다.
국력이 크게 일어선 터라, 다시 전쟁이 휘말리게 된다 해도 걱정할 이유는 없었다.
텐의 사람들은 바람이 불 때면 잠시 멈춰 애도를 보이었는데, 야안은 그 이유를 알아 그 또한 잠시 멈춰 그들과 함께 애도를 보였다.
다투는 것을 싫어하는 유순한 성격의 이들 종족은 그나마 텐산 종족에 대한 배타적인 모습이 적었는데, 친절한 그들의 배려에 야안은 입가에 걸린 미소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오래전 이제 그 이름조차 알 수 없는 영웅이자 신학자로 인해 크게 뿌리 내린 이곳 텐의 나라는 유난히 종교의 활동이 활발했다.
변질된 문화가 되어버린 종교 활동이 아닌. 끊임없는 희생을 바탕으로 둔 신교 활동이었기에 이곳 텐의 사람들은 그 어떤 나라에서보다 인성이 뛰어난 자들을 많이 배출하고 했다.
그간 모은 돈으로 배를 구하러 가던 야안은 다행히 그곳 마을과 가까운 곳까지 가는 배편을 구할 수 있었다.
지난 쟈칼 왕국에서 왕실과 귀족들의 부름을 받아 지체된 여정이 다시금 탄력을 받게 된 것으로 야안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 이른 새벽 떠날 준비를 마치던 선상에 올라선 야안은 그 바다 특유의 소금기가 자리한 냄새에 취하던 저 멀리 어디선가 불어오는 거대한 바람에 아찔한 충격을 받게 되었다.
“아! 이토록 청아한 바람이라니.”
바닷가의 그 짙은 내음조차 지워버리는 그 바람에 야안은 절로 마음이 울렁거렸다.
과연 고개를 돌리니 그 바람을 향해 대례를 올리는 이들이 적지 않았는데 야안은 그 거대하고 청아한 바람이 위대한 뜻을 품은 누군가의 죽음임을 상기할 수 있었다.
<위대한 죽음.>
야안은 피리를 품속에 꺼내어 그의 높은 뜻을 기리었다. 이름도 알지 못하고 면식도 하지 않은 존재였지만 텐산 종족으로서 드물게 고난 속에서 희망을 불태우고 진정한 자유에 대한 갈망을 깨달아가는 그였기에 그 같은 위치에 올라선 자가 얼마나 위대했는지 잘 알아 절로 그의 마음이 움직여져 행하는 행동이었다.
곧 그의 피리 소리가 선상을 가득 채워갔다.
거대하고 청아한 바람 또한 그의 피리소리에 감명한 듯 곡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무르다 이내 야안이 곡을 끝내자 그의 머리를 쓰다듬고 지나쳤다.
마치 고맙다는 칭찬을 하는 것 같은 터라 야안은 자신도 모르게 부끄러운 듯 작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이후 그는 뛰어난 번식력과 단결력을 자랑하는 쥐와 유사한 생김새를 지닌 코벤의 나라를 지나, 무를 숭상하는 원숭이와 크게 닮은 종족인 자코의 나라에 들어서게 되었다.
대륙에서 무력으로 따져 볼 때, 첫손에 들지 못하면 서러워할 만큼 이곳 자코의 사람들은 뛰어난 체력을 자랑했다.
무사들간의 실전적인 대련이 많은 만큼 은원의 관계가 복잡하기도 했으며, 현재 거칠고 피를 보는 것을 즐기는 잔인한 성격의 히나타 종족과 오랜 앙숙인 코벤과의 전쟁이 끊이지를 않아 나라 안팎이 시끄러웠다.
하지만, 워낙 그 성정이 용맹한데다 뛰어난 무사들이 많은 터라 이 어려운 시기도 극복할 것으로 여겨졌다.
어지러운 시기였고, 호전적인 자코의 국가에 맞게 야안은 하루도 채 되지 않아 가진 돈들을 빼앗겨야 했다.
강도를 당한 것인데 이런 비슷한 일들은 그간의 여정에서 번번이 있었던지라, 야안은 그 와중에도 피리를 가져가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른 곳과는 달리 연주를 들을 정도의 한가로운 자들은 없었다. 그런 것을 알아서인지 이 같은 대도시에 간혹 보이던 텐산 종족들도 발견할 수 없었다.
기나긴 전쟁에 도둑들도 많았고, 산적들도 많았던 터라 홀로는 여정을 갈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구나 돈을 강도에게 빼앗긴 터라, 여비도 없어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재주라고는 피리 부는 것 정도인데, 이곳에서 그 재주를 살릴 수가 없었던지라 그는 이래저래 돌아다니며 허드렛일을 찾아다녔고, 다행히 어느 한 용병단의 말들을 돌보는 일들을 얻을 수 있었다.
말은 고가의 상품이라 일반인들은 감히 접하기 어렵지만, 예전 악단에서 그가 하던 일 중 하나가 말을 돌보는 일이라 숙달자 정도는 못해도 대충 관리자를 도와줄 정도는 되었다.
야안은 그곳에서 두 달여를 지내며 자신과 동갑인 켄이라는 애송이 용병과 친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켄은 오래전 자코 왕국의 명성을 뒤흔들었던 명문가의 후손이었다.
몰락 귀족인 셈인데, 우연히 야안의 연주를 들었던 그는 그의 재주가 이미 일가를 이루었음을 짐작했다.
하지만 정작 야안의 재주에 감탄을 한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때였다.
어느 정도 자금을 모았던 야안이 켄이 소속된 용병단과 함께 길을 떠나게 되었는데 여정을 떠난 지 보름도 채 되지 않아 그들은 악명 높은 도적들을 만나게 되었다.
전력은 백중지세였으나, 도적들과 달리 용병들은 지켜야 할 것이 많았고 또한 도적이 점한 위치가 좋아 위험한 고지에 맞이하게 된 것이다.
말이라도 지치지 않았다면 해볼 만 한 데, 아쉽게도 그 보름간의 여정에 말들은 제대로 전력을 보이기 어려웠다.
그야말로 꼼짝할 수밖에 없는 대치상황이 놓여 진 것인데, 그때 야안이 놀라운 일을 보였다.
돌연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더니 연주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피리에서 나는 소리가 보기에는 기이한 성질의 것이었는데, 나중에야 안 것이지만 그것은 행진곡을 편곡한 것이다.
야안이 연주에 지친 기색이 완연하던 말들이 갑자기 콧바람을 크게 불어대며 발굽 질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보기 어려운 생생한 모습을 보인 것인데, 켄은 야안으로 인해 무언가 신기한 일이 벌어졌음을 알고는 재빨리 용병 대장에게 신호를 주어 서둘러 물러서기를 요구했다.
켄의 빠른 눈치를 이미 익히 알고 있던 용병 대장으로서는 그의 의견을 받아들여 재빨리 정비를 마치고 물러서기 시작했다.
도적들은 대치하던 이들이 갑자기 내빼버리자 비웃음을 흘리며 그들을 쫓았으나, 어떻게 된 일인지 시간이 갈수록 거리는 멀어져만 갔다.
어이가 없어 욕지거리를 내뱉는 도적들을 멀리서 훔쳐보던 켄은 경이적인 눈빛으로 야안을 바라보았다.
‘기인이구나. 피리로 이 같은 일을 벌이다니.’
용병대장은 켄으로부터 이 같은 놀라운 일을 행한 이가 켄의 부탁으로 데려온 텐산의 아이 때문임을 알게 되었다.
하여 켄의 부탁을 받아 야안이 가고자 하는 길로 가는 상단과 연결시켜 주었는데 이로 인해 야안은 목적지에 한층 더 가까워질 수 있게 되었다.
떠나는 야안에게 켄은 그간 모은 돈의 상당 부분을 그의 여정에 보태기를 바라며 주었는데, 야안은 몇 번이고 사양했으나 결국 켄의 뜻을 꺾지 못했다.
짧은 시간의 만남이었지만 종족을 넘어 친우가 된 이에게 이처럼 큰 신세를 지게 되니 야안은 고마우면서도 미안함이 가득했다.
“이 신세를 어찌 같아야 할지 모르겠네.”
그런 야안의 마음을 아는지 켄은 야안을 꼭 안으며 말했다.
“다시 만나게 되는 그날. 나를 위해 음악을 연주해 주게. 그것이면 족하다네.”
존경을 담아 말하는 그에 야안은 단호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만나는 날. 반드시 그대를 위해 연주하겠네.”
그리 말하며 켄을 다시 안았던 야안은 아쉬운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확실히 상단과 함께하게 되면서 다시 올라선 여정의 길에 큰 곤란함은 없었다. 켄에게서 받은 돈은 적지 않은 터라, 상단과 헤어진 뒤에도 코벤 왕국을 거쳐 히나타 왕국을 넘어서는 데 문제는 없었다.
작은 마을이 있다.
한때 많은 이들이 찾아들었던 크게 부흥했던 흔적이 자리한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찾는 이가 없어 자급자족한 삶을 사는 마을이었다.
특이하게도 이곳에 사는 마을 주민들은 텐산 종족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떠돌이 특성을 지닌 그들이 이처럼 마을을 만든 것은 참으로 이례적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