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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안-311화 (311/385)

야안 311화

다행히 일조량이 긴 터라 먹고 사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는데 낮에는 쉼 없이 일을 하는 그들은 밤이 되면 음악회가 열린 듯 음악을 연주하는 시간을 가졌다.

조그마한 어린아이, 풍만한 아주머니, 살집이 두툼한 아저씨 등 이곳 마을 주민들 모두가 텐산 종족임을 증명하듯 저마다 악기를 연주하는데, 그 솜씨가 하나같이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다.

보기가 드물 만큼 매우 뛰어난 것이었는데, 다만 이들 중에서도 눈에 띄는 이가 있었으니 눈처럼 하얀 털이 인상적인 텐산이었다.

그는 본래 이방인으로 특이하게도 이곳 마을에 들어선 지 10년이 되었음에도 한 번도 연주를 한 적이 없었다. 그의 눈은 언제나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멍했는데 마을의 아이들은 그를 멍한 아저씨나 바보 삼촌이라고 불렀다.

한 달에 한 번 음악회가 열리는 날에도 바보같이 가만히 다른 사람들의 연주만을 듣기만 하니 아이들에게는 악기나 음악을 모르는 자로 보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워낙 성실한 터라, 부지런한 이곳 텐산들도 그의 부지런함을 따르지 못했다.

이곳에 마을을 만들었을 때 처음 자리를 잡았던 최고 어른들 몇 명만이 그의 사정을 안다는 듯 복잡한 눈빛으로 그를 살펴보곤 했다.

겨울은 마을 곳곳에서 음악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농사로 먹고사는 그들로서는 겨울에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시간에 자신의 솜씨를 갈고닦는데 주력을 했는데, 아이들에게 바보 삼촌이라 불리던 텐산은 그 시간 마을의 중앙에 있는 비석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내곤 했다.

텐산은 그 보슬보슬한 털 덕분에 추위에 강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게 가능한 것일까?’

야안은 비석에 남겨 둔 그 위대한 음악가의 악보를 보며 깊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10년을 내리 살펴보던 야안이 최근 깨달은 것이 있다면 악보라고 하는 이것이 사실 악보가 아니라는 것이다.

수많은 거장이 이 어렵고 복잡한 악보를 연주하고 치를 떨고 욕지거리를 했는데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음악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한 점의 감정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그저 고난이도 테크닉만이 자리한 연습용 악보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 악보를 위해 자신의 모든 일을 팽개치고 세상의 끝자락과도 같은 이곳에 온 것을 생각한다면 거장들로서는 너무도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히 하나둘씩 침을 뱉으며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그들 중 위대한 음악가를 크게 따르는 소수만이 남아 지금의 마을이 형성되었다.

당시 그들 거장 대부분이 노화로 죽음을 맞이한 지 오래였다. 지금은 초기 스승과 함께 찾아왔던 어린 제자 몇 명이 노인이 되어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야안은 처음 이 위대한 음악가가 남긴 악보를 보고 감히 연주를 할 수 없었다.

악보가 고난이도의 테크닉을 요구하는 것도 있었지만, 선천적인 재능으로 마음을 연주하는 법을 타고난 그로서는 무건조 한 사막과도 같은 악보를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그는 이 마을에 들어선 지 10년이 지났음에도 이 악보를 연주하지 못했다. 그저 마음으로 악보를 마주할 뿐이다.

그러다 최근 들어서야 그는 이 무건조한 악보에도 무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를 깨달아 시선을 달리하게 되자 야안은 이것은 악기로 연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진실에 부딪히게 되었을 때 야안은 큰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이것이 가능한 것인지 말이다.

악보는 사람 자체를 하나의 악기로 잡았다. 몸 전체를 악기로 만들어 목을 통해 내뱉는 것이다. 다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이것으로 과연 그 복잡한 악보를 다 표현할 수 있는 것인가에 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났다. 봄을 앞둔 추위는 어느 때보다 거세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에 매일 아침이면 눈을 치우는데 마을 사람들은 고역을 치러야만 했다.

야안은 내리는 눈을 맞으며 그 비석을 마주하다 천천히 입을 모아 열었다.

‘휘이이이익-’

몸의 힘을 빼고 천천히 진동을 시켜 일으킨 휘파람 소리는 야안의 피리소리보다 맑고 고운 것이었으며, 듣는 이로 하여금 정신을 몽롱하게 했다.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목소리라 보기 힘들 정도로 다양한 음들이 흘러나오며 중첩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는 감히 어떤 명기로도 낼 수 없는 천상의 소리가 세상을 뒤덮었다.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그 신성한 소리는 작지만 힘 있게 널리 퍼져 나갔다.

그리고 기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을의 여기저기서 수북이 쌓인 눈과 추위에 알랑곤하지 않은 채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아니, 꽃들만이 아닌 봄이라도 온 것처럼 여기저기서 생명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는데 시간을 빠르게 돌린 것처럼 그 과정이 대단히 빨랐다.

겨우 한 곡이 끝날 때쯤에야 화사하게 다 피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역시나 세월을 거스르며 탄생된 생명들은 그 대가를 치러야 만했다.

거센 눈보라에 묻히거나 추위에 얼어 붙어간 것인데 그 과정이 안쓰러우면서도 아름다웠다. 야안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모습들을 살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인다.

곧, 어디론가 움직이던 그는 점차 거세어지는 눈보라에 모습을 감추었다.

자코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힘든 전쟁을 치루고 있었다. 코벤 왕국과의 그 치열한 전투를 끝나기 무섭게 히나타 왕국과 전쟁을 치러야만 했기 때문이다.

저번 전쟁에서 당한 치욕을 복수하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한 만큼 히나타 왕국의 전력은 대단했다. 당연히 전쟁의 규모도 달랐고, 덕분에 수많은 자코의 영웅들이 이 전쟁에서 허무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본래는 수석 천인장이었으나 앞선 선발대가 무너지고, 지휘관들이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서 어느 순간 켄은 이곳 3차 방어선의 지휘관이 되어 있었다.

본래라면 왕국에서 다음 책임자를 보내야 했지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현재 왕국은 반란군이 일어나 그것을 수습하는 것으로 벅찼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히나타 병사들이 약탈을 일삼은 터라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귀족 출신답게 켄은 병서에 능했고, 오랜 용병 생활로 전장에 익숙했다. 여기저기 흩어진 병사들을 수습하여 모으고, 근처의 마을과 도시에서 전쟁 비품을 강제로나마 가져왔다.

그것으로 방어선의 성벽을 보수하고 병사들을 조련하여 사기를 끌어올리는 데 필사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준비를 무색할 만큼 히나타 왕국의 전력은 무시무시했다. 적은 악랄한데다 또한 그간의 승리로 대단히 사기가 올라선 터라 몰아치는 그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전쟁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야말로 버티는 것이었고, 그 또한 켄의 뛰어난 전쟁수행능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화살은 물론, 성벽에서 긴 창대에 여러 명이 붙어 사다리나 올라서는 적들을 찔러 죽이며 준비한 뜨거운 물과 돌들이 쏟아져 내렸다.

하루, 이틀, 어느새 나흘의 시간이 지났고 그동안 수차례 성이 함락될 위기가 찾아왔지만 켄의 임기응변에 겨우겨우 이를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다섯째 날이 되어 그것도 장담할 수 없게 되었다.

차륜전으로 몰아치는 적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전장 수행을 하던 병사들이 지쳐 쓰러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적병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공세는 그 어느 때보다 사나웠다.

전쟁이 시작되기 무섭게 부상자들이 속출하기 시작했고 사망자의 숫자가 매우 늘어났다. 켄과 수하들이 한마음이 되었던 터라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지만 이대로라면 해가 중천에 뜨기도 전에 함락당할 것이다.

“빌어먹을 이대로…… 이대로 끝인가?”

함락. 그것이 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의 기량 이상을 보여준 병사들의 저 헛된 죽음이 너무도 슬프고 괴로웠다.

나라가 망하는지 모르고 권력 다툼을 하는 왕과 귀족의 형태는 너무도 보기 역겨운 것이었다.

“아! 신이시여.”

그렇게 조용히 읊조리던 그는 더 이상의 지휘는 무의미하다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조사님의 거대한 철봉을 들고 그 전장에 뛰어들었다.

일개 병사에서 무위로 수석 천인장에 올라선 만큼 과연 그의 무위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어느새 성벽 위로 올라서 장악하려는 히나타 병사들을 단번에 쳐 버리는 데, 타고난 신력에 한 번 봉이 움직일 때면 두세 명씩 피떡이 되어 날아갔다.

피곤과 무수한 동료들의 죽음에 점차 사기가 떨어지던 병사들은 자신을 지휘하던 켄 장군이 전장에 뛰어들어 적들을 휘젓고 다니자, 그에 감명하여 다시 사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켄은 의지할 곳 없는 전장에 하나의 불씨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미 그것을 예상하였듯 적장의 장수들이 켄을 상대하기 시작하면서 그의 손발이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평소의 그라면 그 정도의 장수들은 어렵지 않게 상대했겠지만, 그 또한 휘하의 병사들처럼 지난 사흘간 제대로 된 휴식을 취하지 못해 크게 쇠약한 상태였다.

“아~ 조국이여.”

흘리는 피의 양이 많아지며 점차 눈앞이 어두워지고 들고 있는 철봉이 거대한 태산같이 느껴졌다.

절망적인 현실에 비통하며 장수들의 공세를 겨우겨우 막아서는 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났다.

‘휘이이이익-’

처음은 바람 소리인지를 알았다. 그도 아니면 적진에서 일어나는 사기를 끌어올리는 군악인가 싶었다.

하지만, 그따위와는 격이 다른 신성한 소리임을 아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소리는 감히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그저 가슴을 벅차게 하는 것 이상의 것이었다.

그것을 느낀 것은 켄만이 아닌 듯 그 잔악한 히나타의 종족들조차 붉게 물든 살기 어린 눈자위가 차분하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복잡하게 끓어오르던 머릿속이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마치 긴 휴식을 취한 듯 피로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날카로운 금붙이에 찢어진 상처가 봉합되기 시작했고 마음속에는 뜨거운 조국애가 일어났다.

<조국의 아침.>

켄은 뒤늦게 이 신성한 음이 부르는 곡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 조국의 아침은 잃어버린 조국을 찾기 위해 투쟁을 한 이들을 기려 만든 곡이다.

지금 조국을 잃게 될 처지에 놓인 그들로서는 당연히 마음이 동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피로가 사라지고 힘이 솟아오르며 뜨거운 조국애가 일어나기 시작하자 불리한 전세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죽어가던 이는 거동이 가능해져 자신의 몫을 하기 시작했고, 부상자는 그 어느 때보다 뛰어난 기량으로 적을 베어나갔다.

그것은 켄도 마찬가지라, 그는 자신을 거추장스럽게 만드는 적의 장수들을 한 합에 깨부수더니 지금의 호기를 놓치지 않고 병사들을 수습해 다시금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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