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12화
26. 각성
어느새 중천에 떠오른 해는 지기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하고 차가운 피가 강이 되어 흘러내렸다.
이번 공세는 별다른 전술도 없는 무리한 물량 공세였기에 히나타 군사들은 큰 피해를 보아야 했다.
시쳇더미 사이로 까마귀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지며 그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그와 반대로 켄이 이끄는 코란 종족은 사기가 끝없이 오른 터라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역으로 기습을 하며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 기습이 워낙 기민하게 잘 이루어진 터라 적장까지 큰 상처를 입힐 수 있었는데, 이로써 코란 왕국은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히나타 왕국은 강한 우두머리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니만큼 그들로서는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와아아아!”
“조국에 영광을!”
살아남았다. 승리했다. 그러한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기 시작했다. 켄은 물론 수하들도 그 기쁨에 벅차 눈물을 흘리는데, 병사 중 누군가 켄을 급히 찾았다.
“주군. 그분을 찾은 것 같습니다.”
병사의 그 모호한 그분이라는 명칭이었지만, 켄은 물론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누구를 말하는지 알았다.
“어서 모시어라. 아니, 내가 직접 가겠다.”
그러며 서둘러 천막을 나서는 그에 병사는 다급히 뛴 걸음으로 그를 안내해야 했다.
그렇게 켄은 이 전장에 승리를 이끌게 해 준 기적의 장본인을 만나게 되었고, 그는 그를 보자마자 왈칵 다시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야안. 그대가!”
야안이었다. 그 놀라운 기적을 만든 장본인은. 어린 시절의 그 짧은 인연으로 이어진 자신의 친우가 눈앞에 있음에 그는 놀라면서도 또한 이해가 되었다.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지만, 그 당시에도 이 같은 이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고맙네. 정말이지 고마우이.”
별다른 무위도 없는 그가 이 치열한 전장에 들어서기 위한 심정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진 터라 그는 그저 고맙다는 말만을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야안은 그런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껄껄 웃으며 자신의 두어 배나 되는 그를 안으며 말했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그대를 위해 연주하겠다고.”
그제야 그때의 약속을 켄은 상기할 수 있었던 그는 코끝을 찡하게 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신을 끌어안는 야안을 부둥켜안았다.
히나타의 침략을 막아선 켄은 코란 왕국의 영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나라 안팎으로 전복의 위기를 맞이하던 코벤 왕국이었으니, 그들에게 있어 이 영웅이 상징하는 것은 적지 않았다.
자연 그의 아래로 있고자 하는 세력들이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고, 결국 켄은 어지러운 전란을 정리하기로 했다.
유능한 인재들과 야안이 그를 도움으로써 승리의 행진을 하게 되면서 전란을 정리하던 그는, 반란에 성공해 왕성 수괴들의 목을 베어 스스로 왕의 자리에 올라섰다.
겨우 삼 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에 그 모든 과정을 해치우고 새로운 왕조를 새운 것인데, 야안이 없었다면 삼 년이 아니라 이십 년이 지나도 어려웠을 일이었다.
왕의 자리에 오른 그 또한 그 사실을 잘 알았던 터라 야안이 이제 다시 떠나기 위해 인사를 하러 오자 서둘러 그를 붙잡아 물었다.
“그대가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앉게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 터. 그대 원하는 것이 있는가? 원한다면 텐산 왕국의 건설을 도와줄 수도 있네.”
그의 말에 야안은 고개를 저었다.
“왕이여. 그 말씀은 감사하나 사양하겠나이다.”
“이유가 무엇인가?”
“지금의 그들은 책임 없는 자유만을 요구하니 이는 모래 위의 쌓은 성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켄은 야안의 말에 잠시 골똘히 생각하다 그 뜻을 이해하고 감탄했다.
“후에 그때가 오면 코벤 왕국은 텐산 종족의 왕국 건설을 도우리라.”
“왕의 은혜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리 말하며 물러서려는 야안에 켄은 서둘러 다가가 그를 안았다.
“부디 몸 성히 목적을 이루시기 바라네.”
왕이 아닌 종족을 넘어선 친우로서 하는 그의 인사에 야안은 그 희고 긴 귀를 쫑긋거리며 얼싸 안았다.
시간이 지나, 대륙에는 거대한 태풍이 휘젓기 시작했다.
진정한 자유를 밝히는 사상이 대륙을 강타한 것인데, 이 사상은 텐산 종족의 한 음악가에 의해 일어난 것이다.
번번이 전쟁이 일어나던 히나타 왕국에서 처음 모습을 보이던 그는 그들 내국의 전쟁을 막아서며 그 사상을 주입했고, 이 사상은 그 옆 나라인 자코 왕국에게로 넘어갔다.
이로 인해 위정자들은 함부로 움직이기 어려워지게 되었는데, 각 나라의 권력자들은 이 사상을 일으킨 음악가를 죽이기 위해 군대를 보냈으나 매번 그 군대마저 감화한 터라 더 이상 적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몇 십 년이 지나 자유에 책임을 다하는 사상이 보편화되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대륙에는 크고 작은 분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이 위대한 음악가를 따르는 텐산 종족들 또한 그 지난 세월만큼이나 늘어난 상태였다.
연주가로서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텐산 종족들이기에 그 위대한 연주를 듣는 순간 이들은 그에 흠뻑 빠져 경애의 대상으로 삼게 된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진 텐산 종족들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의 사상에 접한지라 자신들의 본질에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다.
본질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정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그들이 경애의 대상으로 삼는 그부터가 낮은 곳에서 자유에 대한 책임을 다하니 그를 따르는 이들이 그 책임을 다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
욕망을 누르는 그 과정은 고행 그 자체이나 그 과정은 너무도 아름다운 것이다. 불완전한 것이 완전한 것이 되어 가는 것이니 아름답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생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야안은 대륙을 떠도는 것을 그만두고 한 곳에 정착하기로 했다.
국가를 건설하기로 한 것인데, 그가 만드는 국가에는 왕과 귀족이 없었다. 자유사상을 다듬어 만든 민주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국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오래전 죽음을 맞이한 코란 왕국의 다음 대의 왕은 선대의 약속을 잊지 않고 그 국가를 만드는 것을 도왔고, 그들을 돕는 것은 이들 코란 왕국만이 아니었다.
대륙 각지에서 성자로 불리는 이 위대한 사상가에게 도움을 받은 여타 왕국에서도 지원을 하기 시작한 것인데 이 덕분에 텐산 국가는 그 어느 왕국 못지않은 강성한 나라로 완성되었다.
‘휘이이익-’
그날의 겨울은 그 어느 때보다 춥고 사나웠다.
대륙의 성자가 자리한 텐산 국가의 주민들은 어느 때보다 세차게 불어대는 눈보라에도 자신의 일을 끝까지 마무리 하려 했다.
추위에 강한 그들로서도 이 눈보라는 곤혹스러운 것이나 참지 못할 정도는 아니기 때문이다.
저 멀리 지어진 민주의사당의 높은 곳에 올라선 야안은 그런 주민들의 모습을 보며 웃음을 흘렸다.
이상하게도 오늘따라 몸이 가벼웠고, 갑갑한 숨도 열린 상태였다. 기이하다 생각하던 야안은 이내 오래전 어린 시절의 한 때를 상기하고는 미소를 보였다.
‘아~그랬었지.’
그날도 그랬다. 아버지를 잃고 길고 긴 여정을 시작하게 되던 그날도 이처럼 눈이 내렸다.
슬프고 혼란스러웠던 당시의 그 기억이 노년이 되어 죽을 시기를 앞두자 어떻게 그처럼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인지.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연주를 했던 것처럼 그 또한 자신을 따랐던 이들을 위해 마지막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휘이이이익~”
낮지만 길고 긴 여운이 남는 휘파람 소리가 중첩을 이루다 이내 거센 눈보라를 뚫고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그 무엇도 묶을 수 없다는 듯 소리는 한없이 퍼져 나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도시를 넘어서 왕국 저 끝 너머에 닿았다.
텐산 종족들은 그 신령한 소리에 하던 일을 멈추고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만권의 책보다 더 짙은 여운이 담긴 소리가 그들의 심장을 새겼던 것인데, 이들은 직감적으로 위대한 음악가이자 성자이신 야안의 죽음을 깨달았다.
그 해는 기록적이라 할 만큼 많은 눈이 내렸지만, 그에 아랑곳하지 않은 발자국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늘어만 갔다.
* * *
텐산의 야안의 의식은 붕 떠오르다 어느새 야안의 의식과 부딪혀 하나가 되었다. 야안은 그 의식과 마주함에 그의 그 뜨겁고 위대한 영혼이 그의 뇌리를 달구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파삭’ 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의식은 무의식의 문을 열기 시작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소통의 그 꽉 막힌 문이 열리게 된 것인데, 이로써 그는 위대한 주술사의 경지에 올라서게 된 것이다.
한데, 그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겼다.
바로 그의 품속에 둔 금빛 진주와 뇌전의 구슬이 공간의 주머니에서 빠져나와 모습을 보이더니 강렬한 빛을 자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중 금빛 진주의 변화가 놀랍다. 처음에는 금빛을 다음에는 초록빛을 띄우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붉은빛을 일으키다 사라졌다.
그렇게 일어난 빛들은 위대한 주술사에 올라선 야안의 머리에 스며들기 시작했고, 야안은 입고 있던 옷을 태워버리더니 피부는 금이 가득 쩍 갈라지다 재로 환해 사라졌다.
환골탈태를 한 것인데 두 차례나 그 과정은 반복이 되었다.
이 과정에 일어난 기운의 여파에 그 큰 배가 몇 차례 뒤흔들리고 말았는데, 모용은 그 기운의 근원지가 주군임을 알고는 서둘러 수습에 나섰다.
선단의 사람들에게 사정을 이야기한 그는 야안의 방문 앞을 지켰다. 마치 돌조각이라도 된 듯 그는 꼬박 나흘을 먹지도 자지도 않은 채 호위를 서는 그에 몇몇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그렇게 다섯째 날이 되어서야 야안은 의식을 차릴 수 있었다. 찬란한 지혜의 빛이 그의 눈에서 일렁이다 사라졌고, 야안은 그간의 깨달음을 곱씹다 이내 미소를 지어 보인다.
‘설마 이 같은 기연이.’
위대한 주술사의 경지에 올라서게 되면서 그간 많은 도움을 받았던 봉인된 금빛 진주의 봉인이 풀리게 되었다.
이로써 이 예측하지 못한 기연이 모습을 보인 것이다.
봉인된 금빛 진주가 봉인이 풀리면서 그는 자이웅이 남긴 주술의 정화를 가지게 되었는데, 과연 전설의 현자답게 그의 정화는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강제적으로 무의식과 의식 사이의 문을 열어 재끼는데, 그 법칙을 무시하는 무중유의 힘은 그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이룬 주술 또한 그의 뇌리에 각인시켰다.
아니, 뇌리에 각인시킨 것으로 모자라 체화하게 했는데, 이로써 야안은 리트담이 이룬 탈인의 경지의 코앞까지 다가갈 수 있었다.
예전 그의 주술이 의식하여 복잡한 과정을 걸쳐 이루는 것이라면 지금의 그는 숨 쉬듯 자연스럽게 주술을 펼치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