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25화
2. 바다의 악마
새하얀 망토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쓴 이로, 저 시골의 현자들이나 쓸법한 오래된 마법의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후두둑, 후두두둑-’
요란한 빗소리가 마치 노크를 하듯 그의 후드 모자를 두드려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잠시 후드 모자 너머를 바라본다.
‘이거 잘못 나왔던 모양이군.’
아무래도 처음 행하는 마법이다 보니 계산이 잘못된 모양이다.
본래라면 그의 고향인 마크 자작 가 쪽에 도착해야 할 것인데, 난데없는 바닷가라니?
‘그것도 태풍이 부는 시점에. 그것참.’
난데없이 태풍의 중심에서 공간을 가르며 나타난 사내, 야안은 머리를 긁적거리다 이내 손을 펼쳤다.
동시에 그의 손에서 네 개의 룬이 소용돌이 치더니 이내 투명한 막이 모습을 보였다.
실드.
내부와 외부를 가로막는 기본적 형태의 방어막인 것인데, 현자 초급 마스터에 오른다면 어렵지 않게 펼칠 수 있는 마법이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다고 할 수 있는 이 마법이었으나, 대현자에 오른 그가 펼치게 되자 놀라운 이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저벅, 저벅-’
바로 실드를 유지한 채 자유롭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인데, 마법에 대한 상식이 조금이라도 있는 자라면 그 같은 현상을 감히 상상하지 못했을 터였다.
여하튼 야안은 실드를 유지하며 태풍의 그 거친 비바람 속에서 자유로워졌다.
‘일단 쉴 곳을 찾아야겠군.’
야안은 그렇게 생각하며 불이 꺼진 마을에 들어섰다. 태풍이 불기 때문인지 건물 내에는 잠이 들지 않은 사람의 인기척들이 많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라 할 수 있어, 그는 그중 제법 규모가 크고 그 태풍의 준비가 철저해 보이는 큰 여관의 문을 두드렸다.
요란하게 울리는 문 두들기는 소리를 태풍의 바람 소리로 이해하던 사람들은 천천히 다시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그제야 사람이 두드린 것임을 알았다.
곧,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끙끙거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어머! 정말 사람이네.”
태풍이 온 것을 알리는 종을 친 것이 한나절 전이었으니, 설마 마을에 사람이 있을 것으로 생각지 못한 여급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리친다.
그런 소녀가 귀여웠던지 야안은 미소를 보이다 말했다.
“괜찮다면 들어가도 되겠니?”
야안의 그 말에 그제야 자신의 실태를 깨달은 여급은 서둘러 몸을 틀어 야안이 들어오도록 자리를 만들었다.
‘타다닥-’
망토를 벗어 가볍게 물을 털어내던 야안은 곧 문을 다시 봉인한 여급에게 물었다.
“방 하나와 음식을 좀 먹고 싶은데. 지금 준비가 되는지 궁금하구나.”
여급은 야안의 그 어딘가 예스러운 말투에 놀란 모습을 보인다.
‘정말 귀족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분이로구나.’
예전 상거래 때문에 배를 타고 왔던 귀족이라 뻐기기만 한 그자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어린 시절 이야기꾼에게 듣던 귀족의 모습이라 여급은 얼굴을 붉히며 조심스럽게 예를 보였다.
“네. 지금 준비해드리겠습니다. 다만 음식은 제대로 된 것을 나오게 하기는 어려워요.”
어설프게나마 예의를 차리는 여급이 귀여운지라 야안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따뜻한 수프와 배를 채울만한 약간의 빵이나 고기면 충분하단다.”
그러며 5실버 짜리 무게의 은화를 꺼내어 내어주자, 여급은 야안이 매만진 머리에 손을 올리다 깜짝 놀랐다.
이처럼 큰 실버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역시나 귀족은 귀족이다 생각한 여급은 곧 긴장한 모습을 보이며, 가장 좋은 여관 방에 그를 안내했다.
“그럼 식사는 곧 올려보낼게요.”
야안은 그런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기대치 이상의 여관의 방에 짐을 풀었다.
뭐 짐이라고 해 보아야 지팡이 하나와 대충 털어 낸 망토 정도였지만.
불의 주술을 펼쳐 눅눅한 방 안을 정화한 그는 정말 얼마 지나지 않아 식사를 가져온 여급에게 물었다.
“우연히 길을 잘못 찾아온 것이라. 미안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묻고 싶구나.”
여급은 조금 전만 해도 눅눅했던 방 안이 뽀송뽀송해진 것에 신기해하다 곧 야안의 물음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간간이 날씨 때문에 자신의 마을에 찾아 온 이들이 간혹 있었기에 그녀는 별다른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에쿠 왕국의 마롱 백작 가 영지예요. 저희 마을은 마롱 백작 가의 여러 항구 중 하나이죠.”
야안은 에쿠 왕국이라는 말에 낮은 한숨을 흘렸다.
에쿠 왕국은 마크 남작 가와 끝과 끝에 있다고 해도 무방할 거리이기 때문이다.
‘이상하구나. 이 정도로 계산이 맞지 않다니.’
야안은 어쩌면 자신의 좌표 계산이 잘 못 된 것이 아니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래도 돌아오기 전과 후가 달라진 점이 있는 듯한지라 야안은 고민어린 모습을 보이다 곧 어색한 모습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여급에게 물었다.
“오늘 날짜가 어떻게 되지?”
그러자 여급은 보편적 대륙력의 날짜를 대었고, 야안은 예상과는 다른 그 대답에 긴 한숨을 토해냈다.
‘이거 정말 곤란하군. 구십 여섯께서 정해진 시간에 오지 못하였다 했지만.’
그러했지만 생각한 것보다 자신은 너무도 많은 세월이 지난 뒤에야 도착하고야 말았다.
“저기……저.”
그러다 야안은 자신의 눈치를 바라보는 여급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는, 이내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으로 여급의 이마를 툭 쳤다.
잠시 후 멍한 눈빛을 보이는 여급은 곧 눈을 깜빡거리더니 이내 인사를 보이고 방을 나섰다.
조금 전 그가 보인 수법은 다름 아닌 마법과 술법을 섞어 만든 신마법이다.
대상의 무의식에까지 자리한 정보를 살펴볼 수 있는 마법인데 예전 그가 애용했던 고대 마법 진실의 눈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러한 마법을 어촌의 어린 여급에게 펼쳤으니 야안은 그녀가 옆집의 소년을 좋아한다는 시시콜콜한 정보까지 얻고 말았다.
어촌가의 어린 여급이라 하지만 역시나 무의식적으로 뱃사람들로부터 보고 들은 것이 많은 터라, 야안은 그것으로 자신이 얻고자 하는 지식을 충분히 얻어 낼 수 있었다.
‘40년……. 정말 너무도 긴 시간이었구나.’
잔인하리만큼 시간은 흘러가버린 뒤라 그는 자연스럽게 긴 한숨을 토해내고야 말았다.
* * *
‘짹짹짹-’
요란스러운 참새 울음소리가 아침을 일깨웠다.
그 지독한 태풍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그 작디작은 새들의 울음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잠시 미소를 지어 보이다 곧 두 팔을 걷고 마을 복구에 나섰다.
다행히도 준비를 철저하게 했던 덕분인지 어젯밤 있었던 태풍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여급 또한 여관 주인어른을 따라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여관 이곳저곳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고슬고슬 땀이 흘러내릴 때쯤에야 여급을 허리를 폈다.
그리고 걱정 어린 눈빛으로 저 이층 끝에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그 자상해 보이는 귀족은 방에 들어선 지 오후가 되었음에도 방을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니, 방을 나설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가져간 음식들을 먹지 않은 채 돌려보냈는데, 그때 본 귀족의 얼굴에는 그 어린 그녀가 보기에도 짙은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무슨 일 때문일까?’
여관 주인은 큰돈을 내어 준 그 귀족의 심기를 건드리지 말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이런 시골에 그처럼 많은 돈을 선뜻 쓴 것을 보면 예사 귀족이 아니라 판단해서였는데, 이 때문에 여급은 평소 그 많은 호기심을 꾹 참는 중이다.
‘아~ 청소. 청소.’
여급의 평소 성격을 알았기에 여관 주인은 오늘따라 그녀에게 많은 일을 내어 준 터라 그녀는 하루가 부족하다 할 만큼 바빴다.
그런 그녀의 호기심 어린 대상이 된 야안은 그날 해가 질 무렵에서야 천천히 그 굳은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계단을 타고 내려와 자신을 보며 반기는 여급에게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다시 음식을 내 주겠니. 하루를 굶었더니 배가 많이 고프구나.”
장난 어린 야안의 말투에 여급은 히히거리는 모습을 보이다 이내 큼큼거리며 예의 바른 모습으로 주문을 받아들였다.
그런 어린 여급을 웃으며 바라보던 야안은 곧 가까운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작은 창가가 그 옆에 있어 마을이 한눈에 보이는 곳인데, 한적한 마을의 모습이 지친 야안의 마음을 달래 주었다.
곧 어제와 달리 제법 잘 차려진 음식들이 나왔고, 야안은 생각보다 훌륭한 맛을 내는 음식에 짧은 감탄을 보이며 천천히 식사를 즐겼다.
식사를 마치고 ‘척’ 이라고 불리는 이곳 지방의 도수 높은 술을 시켰는데, 여관 주인의 우려와 달리 야안은 두 병이 넘도록 끄덕없는 모습을 보이며 다시 한 병을 시켰다.
술을 기다리는 동안 안주로 나온 콩을 까먹던 그는 전 날 자신을 고민케 했던 것들을 다시금 상기하였다.
그가 여급으로부터 얻은 정보들은 두서가 없는 것들이었으나, 그것을 정리하고 이어내는 것은 그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40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바뀐 대륙의 현황을 바라보았다.
가장 큰 변화는 다름 아닌 대륙에 카리엘 제국 이외 또 다른 제국이 생겨났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제국은 야안 그와 가장 연관이 깊은 제국이었다. 실제로 그 이름부터가 그랬다.
제국의 이름은 야안 제국.
과거로 돌아가기 전 그가 남긴 인연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이었다.
야안 제국에는 새로 떠오르는 초인이 무려 일곱이나 있었다.
우선 야안의 친우였던 위대한 주술사 자이한과 그의 제자 로스가 있었다.
리트담의 저서를 야안에게 내 주었던 야율수의 아들 로스가 자이한의 제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야안은 놀랐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도 뒤늦게 깨달았지만, 로스의 주술에 대한 재능은 자이한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았으니 자이한이 그를 제자로 삼은 것은 당연했다.
그렇게 두 명의 위대한 주술사 이외 두 명의 고위 익스퍼트 현자가 있었는데, 바로 그의 제자인 한스와 야안의 첫째 아들이자 현 야안 제국의 대공의 자리에 있는 아론이었다.
그리고 이 외에도 세 명의 검의 마스터가 있었다.
바로 그에게 처음으로 충성을 맹세하였던 테리와 자신과 깊은 연을 맺었던 챈들러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의 둘째 아들이자 현 야안 제국을 이끌고 있는 로뎅이었다.
아마도 첫째 아들이 아닌 둘째가 황제가 된 것에는 아론이 마크 자작의 뜻을 유지하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직 그 정보가 부족하여 모르나 아마도 아론은 마크 가의 성을 잇고 있을지 모른다.
어릴 적부터 고지식한 면이 있던 아들이었으니.
그렇게 일곱 명의 초인들이 있는 야안 제국의 시작은 다름 아닌 자이한으로부터라고 한다.
위대한 주술사의 힘을 각성하면서 자이한은 단숨에 마크 자작 가의 힘을 열 배가 넘게 키워나갔다.
또한, 새로운 왕권을 노리는 마일드 왕국의 혼란 속에서 우뚝 서기 시작했고 결국 그 혼란스러운 전쟁에서 마지막 승자가 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