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36화
6. 카리엘 제국
“하! 녀석이 왔다고?”
결코 함부로 바다를 벗어날 녀석이 아님을 잘 아는 한스는 곧 시종에게 안내를 받고 그가 왔다는 곳으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육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였지만 젊은 시절 숱한 처자들의 가슴을 설레게 한 미모는 여전히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물론 초인에 올라서면서 육체가 새롭게 개조된 것이 큰 데 그 덕분에 미중년의 모습을 유지하는 그는 여전히 사교계에서 유명 인사였다.
지금도 뚜벅뚜벅 걸어가는 그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녀들이 한둘이 아니었으니.
사내라면 죽기 전에 받고 싶은 아리따운 여인들의 시선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으며 나아가던 그는 어느새 귀빈들을 위한 별장에 도착하였다.
그는 거침없이 마법을 펼쳐 제자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렸고, 이내 테라스에 내려섰다.
하얗게 일러진 실크 천들이 바람에 펄럭거리는 가운데 들어서는 그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과도 같았다.
한스는 천들 사이로 보이는 엘룬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엘룬? 무슨 일이지. 설마 이 늙은 스승이 보고 싶어 온 것은 아닐 테고.”
스승의 장난 어린 농담에 엘룬은 평소와 달리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스 그와 닮은 장난 어린 미소를 보이며 답했다.
“물론 스승님을 뵙고 싶었습니다만 오늘은 이런 저의 감정이 무엇 중요하겠습니까?”
평소와는 다른 제자의 모습에 한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엘룬이 몸을 비켜섰고 그제야 그는 또 다른 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순간 한스는 소름이 돋았다.
초인의 감각을 속일 수 있는 자가 있을 줄 몰랐기 때문인데, 이는 위대한 주술사로서 절정의 역량을 발휘하는 자이한이라고해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한 일을 벌이는 자였으니 냉정한 판단력으로도 유명한 그라 해도 당혹스러움을 쉬이 감추기 어려웠다.
하지만 정작 당혹스러워야 할 일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바로 엘룬이 비키며 모습을 보인 이의 정체 때문이다.
“아, 아!”
그의 입에서 절로 탄성이 나왔으며, 그는 자신이 본 것이 믿어지지 않아 아리스 님을 외쳤다.
이후 쉬이 말문을 열지 못하는데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존재 야안이 다가왔다.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구나. 정말 수고했다. 고맙구나.”
그 오래전 꿈속에서나 보았던 스승님의 미소를 다시 현실에서 볼 수 있게 된 것에 감격한 한스는 야안의 그 치하하는 말에 눈물을 왈칵 흘려댔다.
“어허헝. 스, 스승님.”
크게 울음을 터뜨리는 한스에 야안이 그의 등을 두드리며 안았다.
“정말이지 사제가 아니랄까? 엘룬도 그러더니 너도 참 울보로구나.”
그리 말하는 야안이었지만 정작 그 또한 눈물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이러한 성격은 그들 사제지간의 특징인 모양이다.
그 어리고 파릇파릇했던 제자가 이처럼 나이를 먹었다는 것에서 그는 가슴이 저리도록 아팠다.
못난 스승이 내버려 둔 탓에 그 긴 세월 속에서 얼마나 험난한 일을 앞장서 해야 했을지를 아니, 그저 그가 기특하고 또한 미안한 마음이 가득한 것이다.
적에게 얼마나 냉정한지 철혈의 사나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한 스승이 이처럼 약한 모습을 처음 보는 엘룬은 그 옆에서 또다시 흘러내리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한스와의 재회 이후 야안은 그날이 다 지나가기 전에 수많은 인연과 재회하였다.
가장 어색하면서도 반가웠던 만남이라면 바로 야안 제국 지존의 자리에 있는 황제 로뎅이었다.
첫째인 아론은 그래도 야안과 추억이 깃들어 있었으나 로뎅의 경우는 갓난 아기 때 헤어졌으니 사실상 로뎅으로서는 처음 보는 이인 것이다.
만약 그의 형이었던 아론과 한스를 비롯한 다른 칠대 초인이 그토록 그리워하고 추억했던 야안임을 말하지 않았다면 그는 쉽사리 아버지라 인정하기 어려웠을 터였다.
하기야 그 자신보다도 젊어 보이는 야안이었으니 그의 복잡한 심상은 오직 그만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색한 가운데도 역시나 피가 이어졌기 때문인지 그들은 서로가 이끌리고 있었고, 로뎅은 한참의 시간이 지나서야 야안에게 아버지라는 말을 꺼내었다.
가장 뒤늦게 도착한 지인은 다름 아닌 그와의 인연을 잊지 않고 야안 제국을 세우는데 초석이 되었던 자이한이었다.
그의 주술은 이미 위대한 주술사에서 다시 반걸음 나아가고 있었는데, 이는 주술 제국에서 남긴 주술과 더불어 야안이 그에게 가르친 리트담의 주술이 함께 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주술 제국의 특색이라고 할지 그는 주술로 만든 인형을 다루는 것을 즐겼는데, 실제로 그가 황실로 온 방법에는 그가 만든 비조 덕분이다.
바람과 불로 이루어진 비조는 그 자체만으로 와이번과 천적이었는데, 어찌나 빠른지 한 번 날갯짓을 하면 몇 백미르를 이동하곤 했다.
환상 마법 따위를 이용한 수정 구슬로 통신했던 몇몇 초인들과 달리 하루도 채 되지 않아 천 키로미르가 넘는 거리를 넘어서 직접 야안과 재회한 것이다.
자이한은 그때 헤어졌을 때와 별다른 모습의 변화가 없었는데 이는 주술의 특징이기도 했다.
절정기의 육체로 항시 유지할 수 있음인데, 물론 세월의 흐름을 막지 못해 결국 죽음을 앞두게 되면 노화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자이한은 위대한 주술사에 오른 이답게 야안 그 또한 위대한 주술사에 올랐음에 놀란 눈빛을 보여댔다.
“정말 자네는…….”
자이한은 야안이 나이가 들지 않은 것이 주술 때문이라 생각했지만, 곧 지인들과의 모든 재회가 되자 야안은 그제야 엘룬에게 꺼냈던 그간의 이야기를 꺼내었고, 자신의 예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고대 시대에서 그야말로 기상천이한 경험들을 한 뒤에야 대현자가 되어 돌아온 야안의 이야기가 끝이 나고 한동안 침묵만이 그 대전을 잠식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그간 자신들의 40년의 행적도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다지만 야안의 지난 10년에 비한다면 오히려 모자람이 있었으니 이는 당연한 것일 터였다.
그들의 놀란 모습들을 잠시 바라보던 야안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온 뒤의 이야기를 이었다.
바로 바다의 악마를 잡았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신화시대의 종족 피오를 부활한 이야기까지 이어졌는데, 갈수록 기상천이한 이야기인 터라 그 놀란 심정을 쉬이 가라앉히기 어려워하였다.
오랜 침묵 속에서 말을 꺼낸 것은 자이한이었다.
“무엇부터 먼저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사람이 너무 놀라면 말문이 막힌다더니. 그래. 정말 자네는 대현자에 올라선 것인가?”
마법의 끝에 올라섰냐는 말과도 다르지 않는 그의 질문에 야안은 인벤토리에서 현자의 지팡이를 꺼내었고, 이내 하나의 마법을 펼쳐 보였다.
대현자만이 펼칠 수 있는 마법 바로 ‘카라민주’를 펼쳐 보인 것인데 그 엄청난 룬의 폭풍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특히나 고위 현자 익스퍼트에 올라선 한스의 경우 그 놀람에 다시금 말문을 잃어야만 했다.
‘차원이 다르구나.’
단순히 한 단계의 차이가 아니다. 하늘과 땅 그 사이보다도 아득하리만큼 넓은 간격이 자리했다.
자신이라면 수많은 마법진을 비롯해 최상급 마정석들을 동원해야 가능할 마법을 현자의 지팡이의 도움을 받았다지만 저처럼 빠르게 영창을 끝낼 줄 몰랐다.
신의 금속이라 불리는 오르하르콘으로 변한 야안의 육체답게 자이한이 시험을 위해 펼친 그의 주술은 흠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그라졌다.
비록 최선을 다한 것은 아니라지만 자신의 주술이 이처럼 맥없이 힘을 쓰지 못하자 자이한은 허탈한 웃음을 흘려댔다.
“허허허. 자네 정말 인간이긴 한 건가?”
농담 어린 친우의 말에 야안은 그저 빙긋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마법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잠시 기다려 보라는 말을 하더니 곧 공간을 가르고 사라졌고, 이내 수정 구슬 너머에서 자신을 지켜보던 첫째 아들 아론과 마주하였다.
놀라 당황하는 아론을 데리고 다시 공간을 가르던 야안은 이후 그의 또 다른 제자 테리와 처음 자신의 밑으로 들어왔을 때처럼 눈물을 흘리는 챈들러 마지막으로 너무도 멀리 있어 차마 오지 못했던 자이한의 제자 로스를 마주한 야안은 그렇게 그들을 데리고 황성에 다시 모습을 보였다.
실로 오랜만에 야안 제국을 지탱하는 일곱 기둥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된 것인데, 그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보다는 야안의 그 초월적인 대마법에 감탄을 늘어놓을 따름이다.
황제 로뎅은 야안이 돌아왔음을 제국에 널리 알리는 것과 동시에 이를 축하하는 축제를 열기를 명하였다.
그렇게 야안은 수많은 이들의 축하 속에서 멀고도 긴 여정을 돌아 그리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 * *
‘휘이이잉-’
바람 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진다.
따스로운 봄날의 기운만큼이나 평화로운 마을에 한 무리의 인영들이 모습을 보였다.
마을을 지키는 경비원들은 이미 앞서 간 자들에 의해 어려움을 표하며 몸을 숙였고, 그런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그들은 다시 바쁜 걸음을 옮겨댔다.
이들은 이제 아무도 살지 않는 오래된 집에 도착하였는데, 이 중 세 명이 나와 그 집을 한참이나 살펴본다.
누군가 관리를 하는 듯 먼지 하나 없는 그 빛바랜 오래된 목조 건물을 살펴보던 그들 중 가장 젊은 사내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이곳에서 나는 깨어났었지.’
어린 시절 자신의 모든 불행이 끝나고 행복이 시작되었던 그 작은 침대를 바라보던 사내는 곧 손때 묻은 침대를 한참이나 만져댔다.
‘아직 자는 거니. 어서 일어나렴. 네가 좋아하는 옥수수 수프를 해놓았단다.’
‘거 자게 놔두게. 어제 공부한다고 늦게 자던데 말이오.’
‘아휴. 그래도 나중에 일어나서 배가 고프면 어쩌려고요.’
‘커험. 그거야 그때 많이 먹으면 될 일이지.’
‘당신도 참. 아들하고 같이 먹으려고 일부러 식사 시간도 미뤄놓고서는.’
‘크흠. 뭔 그런 흰소리를…….’
자신에 관한 일에는 별것 아닌 것으로도 투닥투닥 거렸던 부모님에 사내는 그저 부끄러워 일부러 못 들은 척 하곤 했다.
힘들만큼 벅찬 그 행복이 그저 고맙고 또 무서워서 눈물을 흘릴 때면 어머니는 사내를 그 따스한 품속에 안아 주었으며 아버지는 그저 무뚝뚝히 사내의 어깨와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그러한 감정의 표현이 아버지에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았던 어린 시절의 사내는 그 흘러나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쉽사리 끊기 어려워 부모님의 걱정을 다시 사곤 했다.
그랬다.
그 수많은 행복과 추억들이 깃든 집이었고, 그는 터무니없을 만큼 긴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곳에 오게 되었다.
‘뚝. 뚝-’
흘러나오는 눈물 몇 방울이 바닥을 적시던 가운데 사내는 고개를 돌리며 아쉬움이 남은 말을 이었다.
“고맙구나. 이렇게 보존해주어서. 이제 가자꾸나.”
그렇게 사내와 그 일행들은 그 오래된 집을 나서 다시 멀지 않은 곳에 자리를 잡았던 그의 또 다른 보금자리에 머물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