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45화
9. 피의 군주 라켄
‘화아아악-’
그가 탄 괴조가 거대한 불덩어리가 되어 도칸들 중 하나를 집어삼킨다.
열기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던지 괴조가 노린 도칸은 별다른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지워져 버리는 것은 물론 주위의 일대를 용암지대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고도 남은 그 열기의 여파에 도칸들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몸을 주춤거리기 시작했다.
오직 칸만이 그 열기 앞에 자유로웠는데, 먼지 구름이 가라앉으며 나타난 존재는 그런 칸을 흥미로워하며 바라보더니 그것도 잠시 이내 고개를 돌렸다.
“이 중에 누가 한스인가?”
초인들조차 기가 질려버릴 힘을 보인 리트담의 물음에 넋을 놓았던 한스가 뒤늦게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 저입니다.”
평소의 냉정한 모습과 달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는 한스였으나, 곧 그는 냉정을 되찾기 시작했고 리트담은 그런 한스를 보며 미소를 짓더니 말했다.
“나는 리트담. 리트담 리케하르산. 과거 야안 님을 주군으로 모시던 이네. 다시 야안 님의 뒤를 따르기 위해 천년의 시간을 넘어왔지.”
“!”
예상치 못한 리트담의 그 말에 한스는 겨우 찾은 냉정을 다시 흩뜨릴 수밖에 없었고, 그것은 여타의 초인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
리트담 리케하르산.
그것은 야안의 주술의 근본이자, 그가 고대 시절에 만났던 위대한 자가 아니었던가?
특히나 자이한의 경우 그 놀라움과 반가움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주술 제국의 마지막 후예인답게 리트담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자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어쩌면 주술 제국이 이룬 주술의 수준마저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가 리트담이었으니 말이다.
그러한 이에게 주술 제국의 주술이 손에 들어갔으니 야안의 이야기에서 나온 리트담의 모습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 모른다.
하지만 천 년의 시간의 장벽은 높고도 또 높았으니, 그를 만날 수는 없음은 당연하다. 그저 그의 흔적을 바라보고 싶을 뿐.
그러하였건만, 지금 눈앞에 그가 나타났으니 자이한은 지금 격정에 휘말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무시무시한 괴음이 그런 그들 간의 대화를 끊었다.
다름 아닌 칸이 보인 힘으로, 그는 놀랍게도 리트담이 일으킨 열기를 순수히 힘만으로 재워버렸다.
“제법이로고.”
상상을 뛰어넘는 힘을 보인 칸이었지만 리트담은 두려워하기보다는 그저 재밌는 것을 보았다는 듯한 태도를 보일 뿐이다.
“귀찮은 것부터 떼어 볼까?”
그러며 발을 크게 대지를 내려치니 땅속에서 일곱 마리의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숫자가 지금 남은 도칸과 같았는데, 역시나 그 의도가 도칸을 상대하려는 것인지 괴수들은 도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당연히 칸으로서는 그런 괴수를 잡으려 했으나, 크게 손을 휘젓는 리트담에 그 뜻을 행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그의 주위로 중력이 백 배가 되어 그의 몸을 내 눌렀기 때문인데, 만약 칸이 아니었다면 그 엄청난 무게에 압살 당하였을 것이다.
“어딜. 나를 두고. 타락한 자여 오만하구나.”
엄청난 주술을 대수롭지 않게 펼치며 중얼거리는 리트담을 앞에 둔 칸은 그 들끓는 분노를 쉽사리 감출 수 없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그는 최고였다.
오크의 왕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역대 최고라 할 만큼 압도적인 힘과 지혜를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전대의 칸을 어린 나이에 제거하여 새롭게 칸에 올라섰다.
비록 황제의 밑으로 들어서기는 했으나, 이는 오크의 탄생과 관련된 계약 때문이 컸다.
그것이 아니었다면 오크로서의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그가 설사 황제에게 목을 베인다고 해도 결코 무릎을 꿇지 않을 터였다.
그만큼 그의 자존심은 저 하늘만큼이나 높고 높았다.
한데, 저 갑자기 나타난 인간이 마치 자신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대하니 칸으로서는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날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앙”
엄청난 파장과 함께 그의 입에서 일갈이 터져났고, 동시에 리트담의 주술이 깨어졌다.
그렇게 그를 속박했던 중력 백배에서 벗어난 칸은 황제에게서 받은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진 대도에서 엄청난 강기들이 줄기를 이루더니 백 미르에 달하는 강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리 말하자면 그를 중심으로 백 미르에 달하는 지역이 그의 영역이 되어 버린 것인데, 그것만 보아도 어떻게 그가 다섯 초인의 합공에서 버틸 수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리트담은 여전히 그러한 칸을 대수로워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기운도 좋군.”
그는 짧게 그리 감상을 보이었는데, 마치 대수로워하지 않는 이유를 말하기라도 하듯 그는 강기의 영역 안으로 아무렇지 않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저벅, 저벅-’
초인이라고 해도 칸이 일으킨 영역 안에 저렇게 들어선다는 것은 손발을 묶이고 전쟁터에 들어선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만큼 상대의 검기나 강기의 영역 안에 들어선다는 것은 어려운 면이 많은데, 리트담은 그러한 상식에서 벗어난 듯 그러한 부담 따위는 그에게 없었다.
마치 산책을 하는 듯한 편안함이 그에게 있을 뿐이다.
이해되지 않는 그 현상에 초인들은 놀라다 못해 어이없어하는 가운데, 가장 미칠 것 같은 이는 역시나 칸이었다.
‘카가가강. 카가가강-’
요란한 강기가 그를 향해 내려치었으나 어떻게 된 것인지 강기는 그를 피해 주위를 내려칠 뿐이다.
자신의 기운이 자신의 의지를 넘어서는 모습인데, 칸의 그 영민한 머리로도 지금의 현상은 결코 이해하기란 어려움이 많았다.
“너는…….너는. 도대체!”
일갈을 터뜨리며 다시 강기가 그를 내려쳤지만, 역시나 비켜 흘러갈 뿐이다.
발광을 하며 자신을 공격하는 칸에 리트담이 고개를 저었다.
그가 펼친 주술은 바로 동화의 술이다.
인지의 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상대와 자신의 구분을 사라지게 하는 주술이었다.
달리 말하면 칸이 그였고, 그가 칸이었다.
하니 칸이 일으킨 강기가 그를 공격할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그가 자살을 하려 마음을 먹지 않은 이상 강기가 자신을 헤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어느새 리트담은 칸의 그림자를 밟을 거리까지 다가왔고, 그때까지도 요란하게 내려치는 강기의 다발 속에서 그가 손을 들었다.
‘툭-’
그의 손짓에서 섬뜩함을 느낀 칸은 뒤로 몸을 피하려 했으나 그의 의지와 달리 어느새 리트담의 손이 칸의 어깨를 접촉했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든 일이 끝이 났다.
주위 일대를 뒤엎어버리던 칸의 그 무시무시하던 강기는 그것으로 사라져 버렸으며, 그가 뿜어내던 엄청난 살기와 위압감도 그와 함께 사라졌다.
‘쿠우우웅-’
요란한 소리를 내며 3미르에 달하던 칸의 육신이 뒤로 눕혀지고 만다.
숨이 끊기고 만 것이다.
대륙을 뒤엎어 버리던 존재 칸의 죽음치고는 너무도 허망한 것이었다.
별다른 요란스러움도 없이 그저 칸에게 손을 잠시 대었다 떼어낸 것으로 칸을 절명케 한 리트담에 자이한은 숨이 콱 막혔다.
위대한 주술사로서 상당한 경지에 올라선 자이한만이 리트담이 무슨 일을 벌였는지 이해하고 있었다.
‘존재의 의의를 지워버렸다.’
단순히 힘으로 압살한 것과는 차원이 다른 주술이다. 자이한 또한 이와 비슷한 주술을 펼치는 것이 가능했지만, 전사 오크 정도가 한계였다.
강자일수록 존재의 의의는 드높아진다.
호후도칸 정도만 되어도 엄청난 수준이라, 자이한은 감히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하물며 격이 달라도 너무도 다른 칸이라면.
그러한 강자의 존재의 의의를 지워버렸으니 자이한은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지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분은 주술의 끝에 도달하셨구나.’
자이웅이 만들었으나 결국 후예들은 그 끝을 보지 못했다.
그것이 한으로 남아 대를 이어 자신까지 왔고, 리트담의 주술이라는 엄청난 선물이 그에게 주어졌지만 그러함에도 그는 막막함을 느꼈다.
한데, 이제 그 한을 시간을 뛰어넘은 존재. 리트담이 이루고야 말았으니 주술 제국과 자이웅의 후예인 자이한은 그것이 기쁘면서도 또한 씁쓸했다.
칸이 죽자 그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자이한이 만든 괴수들을 겨우 상대하던 도칸들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 밑에 자리하던 오크들의 경우 전의를 상실해 버렸다.
그러한 오크들을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리트담이 읊조린다.
“어둠에 물들었던 태양의 후예여. 이제 불길했던 과거와 함께 역사의 뒤로 사라질지어다.”
그와 함께 그의 손길에서 수십 개의 불길이 일어나더니 그들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도칸들을 결국 죽이는 데 성공한 괴수들은 그 불길을 타고 오크들을 휘저어대기 시작했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크 공작이 소리쳤다.
“마지막이다. 진격하라!”
그 일갈과 함께 그곳에 있는 다섯 초인이 다섯 방향으로 나뉘었고, 그 뒤를 이어 인간들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왕을 잃고 전의를 상실한 오크들은 그야말로 도살되어 갔다.
마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가축의 꼴을 보는 듯했다.
피가 강을 이루는 그 전쟁의 속에서 그렇게 악으로 물들여졌던 오크는 역사의 뒤로 사라져가기 시작했다.
* * *
1전장의 소식은 빠르게 대륙 곳곳에 전해져갔다.
오크의 왕 칸이 죽은 뒤, 1전장은 더 이상 전쟁이 아닌 도살장으로 바뀌어 버렸다.
칸의 존재는 오크들에게 그만큼의 큰 의미가 있었다.
그들에게 있어 칸은 왕을 넘어 신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은 의미였다.
이러한 현 상황은 이곳만이 아닌 다른 곳에서도 벌어지고 있었다.
오크의 왕 칸이 죽음을 본능적으로 느낀 오크들이 전의를 상실하며 꼬리를 만 것인데, 이 덕분에 오크들로 골치를 아파했던 야안 제국은 빠르게 이들을 정리해나갔다.
아예 씨를 말려버린다는 각오로 그들을 주살하였는데, 실제로 그들을 잡기 위한 특수 부대를 창설하기도 했다.
오크들이라면 지난 천 년간 질리도록 그 위험을 느꼈던 인간들로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하겠다.
연맹을 맺었던 오크가 그렇게 무너지자 단번에 그 승세는 야안 제국으로 기울어졌다.
초인들의 숫자만 보아도 야안 제국이 압도하고 있는데다, 저주받은 숲의 동맹 이후 그 전력 또한 큰 차이가 없었다.
그뿐이던가?
바다에서는 초인의 경지에 오른 엘룬과 그와 마찬가지로 고위 익스퍼트에 오른 물의 정령사 제코의 활약으로 전승 중이었다.
현재 카이엘 제국의 해안 영지는 완전히 쑥대밭이 되어 버린 상태이기도 했다.
시간이 갈수록 연패의 소식이 들려오는 가운데 카이엘 제국 황제의 미간에 주름이 점점 깊어져만 갔다.
“설마 칸이 그렇게 죽을 줄은.”
알려진 소식에서는 예상치 못한 또 다른 초인의 개입에 의해 칸이 그들의 합공을 이겨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다고 전해지고 있었다.
실제로 애초 그들의 전투의 파장을 이겨내고 가까이서 볼 수 있는 이는 많지 못했으며, 그러한 여유도 이들에게는 없었다.
하니 리트담의 존재를 카이엘 제국이 알 수 있을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