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49화
10. 진실의 신전
그리고 그 라켄을 대신하여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타난 자는 다름 아닌 리트담 그였고, 그는 조금 전 했던 일 때문인지 힘겨워하는 표정이 얼굴에 가득했다.
하지만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악마는 죽음의 지배자의 또 다른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인 터라 그의 일부를 부정한 것이니 아무리 탈인의 경지에 오른 리트담이라고 해도 벅찬 작업일 터였다.
하지만 오랫동안 야안이 시간을 끌어 준 결과 그는 실로 놀라운 일을 해내고야 말았다.
갑자기 허공에서 자신의 기감을 속이고 나타난 리트담에 황제는 경악 어린 표정을 보인다.
악마 라켄이 사라진 것 못지않은 충격인데, 그만큼 리트담의 인지의 술이 완벽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걸로 놀라면 섭섭하지.”
씹어먹는 듯한 분노 어린 그의 말투가 사납기가 그지없다.
하기야 완벽함을 위해서라지만 주군이 몇 번이고 위기에 빠지는 것을 옆에서 그저 지켜보아야 했던 그의 심정이 결코 편안할 리 없었다.
“이걸 위해서 나는 속에서 천불이 일어나고 있음에도 참고 참아야만 했다!”
‘휙, 휙-’
그는 그 말과 함께 함루어를 읆었고, 이내 허공을 휘젓는 그의 손가락에서 엄청난 주술이 터져 나오기 시작한다.
‘우우우웅-’
대기가 일렁일 정도로 거대한 힘이 깃든 황금빛이 민들레의 씨앗처럼 휘날려온다.
하늘거리며 날아오는 그것에 황제는 섬뜩함을 느꼈다. 아니, 실제 섬뜩함을 느낀 것은 황제가 아니었다.
황제와 계약을 한 악마 베델은 그것이 무엇인지 단번에 깨달았다.
하여 계약을 물리기라도 하듯이 발버둥치며 황제에게 경고를 올렸고, 황제는 그 황금빛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이번에는 집요하게 밀려오는 야안의 공격에 그는 차마 벗어날 수 없었다.
‘아아아아악-’
결국, 황금빛은 황제와 맞닿고야 말았다.
이후 엄청난 악의 기운이 황제에게서 뿜어져 나오며 대기를 얼어붙어 버리게 한다. 겁먹었던 모습과 달리 상상 이상의 힘을 발휘한 것이다.
마치 리트담이 준비한 비장의 수가 실패로 끝난 것 같은 모습이다.
“하하하.”
하지만 호탕하게 웃는 리트담의 모습을 보노라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랬다.
검의 종주에 올라서기 위해 악마 베델은 지금까지와 다른 형태의 기생형 계약을 맺게 된다.
본래라면 자신의 분신을 내 주어 그를 통한 계약으로 인간의 한계를 끌어 올렸다면, 이번 황제와의 계약은 달랐다.
짧은 시간 큰 힘을 이끌어 내기 위해 본신이 움직인 것이다.
하기야 그렇지 않다면 초인도 아닌 황제가 그 짧은 시간 만에 검의 종주에 올라설 수 있을 리 없었다.
리트담은 이것을 꿰뚫어 보았고, 하여 라켄을 잡을 준비가 끝났음에도 이 악마를 잡기 위해 새로운 주술을 살핀 것이다.
이미 고대 시대에 라켄을 놓친 대가가 얼마나 쓴 것인지 이미 이 시대에서 맛본 그였다.
그러하였으니 주군인 야안이 핍박받고 있음에도 이를 악물며 악마 베델을 잡을 준비를 한 것이다.
만약 그가 악마 베델을 놓쳤다면, 제2의 제 3의 황제가 나타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니 그의 냉정하기 그지없는 판단은 참으로 잘한 것이라 하겠다.
대현자에 오른 야안답게 그는 지금의 상황을 단번에 알아차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화가 복이 된 것처럼 보였으나, 사실 그것이 아님을 리트담의 모습에서 알아차린 것이다.
야안은 지친 리트담을 향해 리젠과 더불어 ‘젠’을 이용해 그의 기력을 회복시켰다.
이로 인해 단순히 육체를 넘어 그의 주술력마저 일부 회복되는 모습을 보였는데, 리트담은 알면 알수록 그 끝을 알 수 없는 야안에 그저 크게 감탄을 보일 따름이다.
“하하. 정말이지 주군께서는 저를 언제나 놀라게 하는군요.”
리트담은 다시금 웃음을 흘리며 말했고, 야안은 그런 그의 웃음에 미소를 지어 보인다.
마치 두 악마가 완전히 융합되어 버린 듯한 존재를 눈앞에 두고 있음에도 리트담과 야안의 얼굴에는 조금의 걱정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이제 황제도 악마 베델도 아닌 그 어떠한 존재가 분노를 일으킨다.
“네놈들을 여기서 죽이리라.”
힘을 얻었으나 자신의 본질을 잊은 그 상실감과 분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존재는 이 두 존재를 지우기 위해 사활을 걸었고, 그야말로 죽을 각오를 하고 검과 함께 마법을 퍼부어대었다.
그리고 터져 나오는 힘은 실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일순간 그들뿐만 아니라 이 넓은 전장마저 그 힘에 먼지가 되어 사라져 버릴 듯했으니 말이다.
‘우우웅-’
하지만 그 엄청난 힘은 허공에서 앞으로 발을 내디디며 나아간 리트담에 막혀 버렸다.
아니, 막혀 버렸을 뿐만 아니라 그의 엄청난 공격들이 무위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악의가 담긴 존재의 엄청난 초마법들은 리트담의 손짓에 산들바람이 되어 버렸으며, 상상을 뛰어넘는 오의가 담긴 존재의 검은 엉뚱한 대상을 목적으로 하며 흐트러진 모습을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여유가 있어 보이는데, 실로 이것이 탈인의 무서움이었다.
리트담은 스스로 마법, 검보다도 완성한 주술의 힘을 첫째로 보았는데 이는 그가 주술에 대해 자부심이 과해서가 아니라 이 하나의 주술 때문이다.
고대 시절 리치왕 케르몬이라는 악마와 싸우던 당시 그가 발휘하던 하나의 주술.
야안이 리치왕 케르몬을 잡기 위해 시간이 필요할 때 그는 이 주술을 펼쳐 보였다.
다름 아닌 인지의 술이 그것이다.
뇌를 가속화시켜 주위의 시간을 느려지게 하는 효과를 가지게 하는 주술로, 그는 당시 70배의 인지의 술을 펼쳐 보였다.
그리고 그것으로 리치왕 케르몬의 방어 마법을 깨뜨렸고, 그것으로 붉은 노을은 어둠의 망토를 벗어버리게 할 수 있었다.
그 인지의 술이 다시 여기서 펼쳐지고 있는 것인데, 실로 놀라운 일이지만 이미 그의 뇌는 20배의 속도로 돌아가고 가속화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그의 얼마 남지 않은 주술력으로도 존재가 펼치는 모든 공격이 무위로 돌아가고 있었다. 마치 열 개의 주술이 한순간에 펼쳐지며 서로 보완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인지의 술을 100배까지 끌어올릴 수 있었으니 당연히 그는 스스로 만들고 이루어낸 이 탈인의 경지에 자부심을 가질 만했다.
그리고 현재 리트담은 점차 주술력이 고갈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그 여유를 잃지 않고 있었다.
“하하하. 주군 아십니까?”
그가 말했고, 야안은 고개를 돌렸다.
“저는 너무 그리웠습니다.”
그립다는 말을 하는 리트담에 야안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도 그리웠었네.”
나지막한 그의 말이 들렸던 것일까? 리트담의 입가에 자리한 미소는 크게 번져가는 가운데, 야안의 신형이 흐릿해지며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화르르륵-’
바란탄 그 신성한 기운이 담긴 검은 리트담에 의해 묶여진 존재를 베어냈다.
그렇게, 악마도 인간도 아닌 그 어떠한 존재는 부정함 속에서 그렇게 사라져 버렸다.
“어째 허무하군요.”
지친 목소리로 저 불타는 존재를 바라보는 리트담에 야안은 그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전장을 돌아보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네.”
그 말과 함께 야안이 몸을 날리려는 데 리트담이 지친 몸을 이끌며 일어섰다.
“저 정도는 제가 처리하지요.”
그러며 남은 주술력을 끌어올리는데 야안이 말리기도 전에 그의 신형은 이미 저 전장의 중심에 자리했다.
그리고 그 호언장담한 것을 지키기라도 하듯이 그의 몸에서 뿌려지는 반짝이는 것들이 지나칠 때면 뱀파이어들이 사그라지고 마는데 그 모습이 참으로 놀랍고 경이적이다.
그러한 리트담의 모습은 어딘가 어린아이처럼 신나보이기까지 하다.
야안은 잠시 그런 그의 모습을 보며 낮은 웃음을 흘리다 이내 본진으로 몸을 날렸다.
리트담의 합류로 곧 이 지겹고 힘겨웠던 전장이 끝을 볼 듯하니, 이제 그는 아리스의 뜻을 따르는 신관으로 돌아가 지치고 아픈 자들을 보살펴야 했다.
푸른 하늘이 일러지는 가운데 그렇게 대륙을 뒤흔들던 전쟁은 끝이 났다.
* * *
아리스의 신전의 형태는 여러 가지이다.
각 국가를 대표하는 신전에서부터 부정한 기운을 지우기 위해 그 영지의 영주나 혹은 부호들의 도움을 받아 만들어 놓은 약식 형태의 신전까지 그 종류만 여러 가지였다.
이렇게 지어진 신전에는 앞서 말한 바대로 부정의 기운을 누르거나 지우기도 했으며, 일정 범위 안으로는 부정적인 존재는 다가오지 못했다.
오크들이 강세하던 시절 인간들의 왕국을 넘보지 못했던 것에는 이러한 신전의 힘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신전은 일부의 힘만을 발휘하는 약식 형태의 신전이라고 해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아리스의 뜻을 따르는 신관을 초빙해야 함은 물론이고, 그것을 만들기 위해 드는 재료가 결코 만만한 형태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공사를 마치는 내내 끊이지 않는 기도를 드려야 했으니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일단 완공만 하면 그 대가가 놀라우니 사람들은 약식이나마 신전을 짓고자 했다.
그렇게 대륙에는 수많은 신전이 있었으나, 그중 가장 최고로 치는 신전을 꼽는다면 다름 아닌 바로 진실의 신전을 말할 것이다.
오직 고위 신관만이 이 진실의 신전을 찾을 수 있으며, 그 신전을 방문할 수 있다.
허락되지 않은 자는 들어서기는커녕 보지도 못하는 곳이기도 하다.
전설에 의하면 이 진실의 신전은 최초의 신관이자 최초의 성자로 올랐던 베호카라는 신관이 만들어내었다고 한다.
인간은 가장 큰 가능성을 지니었으나 또한 수많은 종족 중에서 가장 나약한 종족이기도 했다.
하여 아리스는 이 진실의 신전을 짓는 것을 허락하였으며, 훗날 대륙이 위기에 처할 때 이 진실의 신전에 숨긴 힘을 이용해 그 위기를 막게 하였다.
세상에 죽음의 지배자의 그림자가 물들어지기 시작한 지금 당연하게도 이 진실의 신전의 힘이 세상에 나타나야 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도 진실의 신전의 힘이 발휘되었다는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 유일하게 그 진실의 신전을 열 수 있는 존재 성자 제론은 세상이 어지러워지기 전 사라져 버렸다.
언제가부터 세상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성자의 존재에 수많은 소문이 그 뒤를 따랐다.
대다수가 성자 제론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 대다수가 그의 노화를 의심하였다.
성자 제론 그가 사라지던 당시의 나이는 80세로 초인의 나이치고는 노화를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으나 40년이 지난 지금 그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는 대륙에 악마가 모습을 보였다는 소문이 도는 가운데 그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을 리 없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부 지식인들은 달리 생각했다.
이미 진실의 신전의 문은 열렸다고 말이다.
그리고 성자 제론은 그 진실의 신전의 힘을 이용해 어떠한 악의를 막고 있을 것으로 그들은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