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65화
16. 악의 씨 II
분신은 탄식을 감추지 못했다.
‘잘못 돌아가고 있다.’
그의 그 생각처럼 지금의 상황은 최악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생각지 못한 최악의 변수…… 대악마가 현신케 한 악마들을 상대로 분신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했다.
그가 해야 할 일. 그것은 대악마 이외 모든 변수를 치워야 하는 것이었다. 같이 싸우지 못할지언정 최소한 그 외의 변수들은 그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지금의 상황처럼 야안이 힘을 소비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본신이었다면 가능했을까?’
분신은 한탄 끝에 그러한 의문이 들었으나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라고 해도 어려울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두 개의 길의 정점에 올라선 야안마저 두 자리 수가 넘어간 악마들을 상대로 고전의 모습을 보였는데, 아무리 본신이라고 해도 어려울 것이리라 그는 생각했다.
“기적이…… 기적이 필요하구나.”
분신은 이제 둘밖에 남지 않은 악마들과 싸우는 와중 그리 중얼거렸다.
하다못해 지금의 상황을 그나마 나아지게 할 수 있는 본신이라도 불러들여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분신은 불가사의한 이유로 완전히 의사가 단절된 본신을 찾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분신이 생각하였을 때 이 같은 의사의 단절은 본신이 다른 세상에 있으면서 생긴 현상이라 판단했다.
그 옛날 야안이 찾은 거인족의 공간이나 혹은 황금 드워프가 일으킨 세상과 같은 차원이 다른 일종의 공간에 그가 있을 것으로 짐작하는 바였다.
차원을 넘어선다는 것은 일종의 시공간을 뛰어넘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야기라, 일반적인 방법이라면 그 의사를 전하기란 불가능하지만, 다행히 분신과 본신의 경우는 달랐다.
그는 리트담이 깨달은바 자신의 존재를 나눈 분신이었고, 이것을 이용한다면 최소한 의사를 본신에게 전달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가 이러한 의사를 이전에도 행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야안으로부터 대악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뒤 끝없이 리트담에게 의사를 전달했으나, 생각보다 본신인 리트담이 있는 곳의 결계가 강했던 것인지 아니면 모종의 일을 진행 중이었지 그는 단 한 번도 리트담에게서 그 의사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 다시금 의사를 본신에게 전달하는 것이 그다지 새로운 일이 아닐 수도 있지만 사실 이번 그가 마음먹은 것은 달랐다.
‘모험일 수 있다.’
모험. 그가 이번에 하려는 일은 말 그대로 모험이라 칭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실패한다면 그보다 더 최악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회귀(回歸) 그는 회귀하기로 마음 먹었다.
하나에서 분열된 존재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려는 일을 행하려는 것으로, 전과는 차원이 다른 강력한 의사의 전달일 터였다.
전의 그가 한 일이 거대한 성문을 두드리는 정도에 불과했다면 이번에 그가 행하려는 일은 그 성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차원과 차원 사이의 일은 변수가 많았다. 정립되지 않은 형태의 너머이기 때문으로, 운이 좋다면 회귀 즉시 리트담에게 돌아갈 수 있을 테지만 최악의 경우, 터무니없는 시간을 경계의 사이에 떠돌다 소멸될 수 있다.
이러하니 그로서는 그 방법을 알았음에도 실행치 못했는데, 지금은 그러한 것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당장 지금의 상황이 최악이라 여기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나나 그 차이는 사실 크게 없었다.
‘아리스 님이시여 부디…….’
결심에 이르러 마지막으로 아리스를 속삭이던 그는 이후 차원이 다른 전력을 보였다. 자신이 상대하는 두 마리의 악마 중 하나를 결국 불꽃과 바람의 손으로 찢어 버리더니 마지막 남은 악마마저 꽈배기를 꼬아 뒤틀어버리며 지워버렸다.
이후 법칙을 뒤틀어 야안이 상대하는 악마들의 공간을 뒤틀어 버리기에 이르렀는데, 덕분에 야안은 단숨에 한 마리의 악마를 베어내기에 이르렀다.
전력의 배분 따위를 하지 않은 힘을 사용한 결과인 것으로, 분신은 조금 전 엄청난 힘을 뿜어낸 존재라 믿기 어려울 만큼 노쇠하기 시작했다.
검은 머리카락은 회색이 되었다, 백발이 되었으며, 탄탄했던 피부 또한 쪼그라지다 갈라지기 시작했다.
‘푸스스슥-’
결국 흙으로 돌아가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지고 말았는데, 야안은 그의 그 같은 모습에 눈길을 주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사실 상대가 너무 최악이었던 것이지, 분신은 자신의 기대 이상의 역할을 해 주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악마를 3마리나 동시에 상대하여 승리한 것은 사실 과거의 야안이었다면 쉽지 않았을 일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것은 어쩔 수 없군.’
곁에서 같이 싸우는 자가 있는 것과 홀로 싸운다는 것은 전력을 논외로 심리적인 부담이 커지게 마련이다.
사기에 큰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나약한 자는 그것으로 무너질 수 있는 일이었으나, 야안에게는 해당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흥분하지 않고 침착하게 힘을 분배하며 악마들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분신의 활약으로 이제 그가 상대하는 악마는 고작 7마리에 불과했다.
플로메티아로 인해 스탯의 소모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직은 여유가 있었다. 대악마를 상대하는 앞서 어느 정도의 전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아주 작은 희망마저 꺾으려는 듯 대악마가 다음으로 보인 수는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크르르륵-’
요란한 짐승의 울음소리와 함께 악마가 등장했다.
전보다 너무도 긴 시간을 허용한 끝에 등장한 악마의 등장인 것인데, 다만 이 악마는 앞서의 악마와 달랐다.
전의 악마들은 전설의 시대에 존재했던 초기의 악마들로 어딘가 투박한 모습이 주였다. 야안이 전에 상대했던 악마들에 비해 나약한 존재들인 것으로 그에 반해 이번에 나타난 악마는 아예 차원이 달랐다.
불순한 형태의 마기에서 정제된 마기로 승격한 존재를 보는 듯한 것으로, 그 지닌 힘 또한 마치 악마 둘을 합친 것 같은 모습이다.
상상키 힘든 끔찍한 괴물로 대악마가 불러들인 악마는 이 말도 안 되는 힘을 지닐 만했다.
전의 악마들이 기존에 존재했던 악마들이라면 이번에 등장한 악마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악마였으니 말이다.
죽음의 지배자가 세상의 인과를 뒤집어 예약해 둔 신 악마인 것으로, 대악마는 손대지 말아야 할 영역까지 손대고 만 것이다.
죽음의 지배자와 같은 존재이기에 가능한 일인 것으로, 지금의 야안에게 있어 이 신 악마의 등장은 최악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짐승의 울음과 함께 등장한 신 악마의 생김새는 인간과 매우 유사했다. 마치 그 옛날 인간들과 최악의 상성관계인 뱀파이어의 왕 악마 라켄을 보는 듯 매력적이며 우아했다.
“흠. 아직 때가 아닌데?”
신 악마는 약속한 시간과 달리 이른 시간에 자신이 세상에 현신하자 그것에 큰 의아함을 보였으나, 이내 자신을 불러들인 대악마를 발견하고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했다.
그리고 그는 그 크고 흰 손을 들어 자신의 이마를 잡더니 골치 아프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거 일이 꼬였군. 주인님께서 골치 아프시게 되었구나.”
그저 현신케 한 것만으로 대악마에게 충성을 보였던 다른 악마들과 달리 신 악마는 자아가 강한 듯 그는 자신을 불러들인 대악마에게 굴복하지 않았다.
오직 주인은 죽음의 지배자 그 하나뿐이라는 듯 그는 주인의 계획이 꼬인 것에 신경을 쓸 따름이다.
하나 고민도 잠시 신 악마는 곧 악마들과 싸우고 있는 야안을 바라보더니 이내 흥미로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현자라……어쩔 수 없지. 차선이라도 선택할 수밖에.”
매력적인 미소를 보이며 그리 말하던 그는 곧 그 전투에 뛰어들었다.
‘콰아아앙.’
요란한 힘의 파동이 야안을 노렸다. 수백 개의 거대한 칼날이 야안을 분쇄할 것 같은 형태라 야안은 노리던 악마를 죽이지 못하고 손을 물려야 했다.
그리고 자신을 향해 날아오는 힘의 파동을 상대로 몸을 한 차례 흔들었다. 본래라면 검을 다루어 흩뜨려야 했겠지만, 봉인이 풀린 플로메티아가 그의 몸을 보호하는 지금 단순히 그것으로도 힘의 파동을 흩뜨리기에 충분했다.
신악마의 기습이 무안할 만큼 놀라운 신위를 보인 야안이었지만 정작 신음을 흘린 것은 야안이었다.
그도 안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악마가 현신한 것을 말이다.
“반갑네. 설마 이렇게 일찍 만날 줄은 몰랐어.”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거친 목소리가 신악마에게 흘러나왔고, 야안은 안색을 굳히며 묵묵히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한 야안의 모습에 신악마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이번 전설의 현자는 매우 과묵한 모양이군. 그나저나 이방인이라더니 확실히 주인님께서 걱정하실 만해.”
신성을 얻지 않았음에도 신성과 같은 신력을 다루는 야안의 모습이 믿어지지 않는 듯 신 악마는 그리 말하다 곧 자신을 노리는 야안의 검에 맞서 그 또한 어느새 검을 뽑아들었다.
자신의 갈비뼈에서 뽑은 온통 회색으로 점칠 된 그의 검은 놀랍게도 전설의 검을 상대로 이 하나 상하지 않았다.
어디 그뿐인가? 회색의 검은 놀랍게도 다섯 개의 환영을 일으켜 야안을 노리기에 이르렀는데, 분명 그것은 환영이었으나 또한 실제로 공격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거기까지만 놀라운데, 신 악마는 그 검 못지않은 놀라운 검술을 펼쳐내기에 이르렀다. 그 수준이 놀랍게도 그 옛날 야안의 손에 죽어간 황제 피르망을 연상케 할 정도라 만약 예전의 야안이었다면 고전을 할 수밖에 없었을 터였다.
물론 진짜와 가짜가 다르듯 검의 종주에 미치지 못하는 신 악마의 검은 야안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 부족함을 신 악마가 일으킨 환영의 검과 더불어 아직 살아남은 여섯 마리의 악마가 협력하여 야안을 노리니 야안으로서는 쉽사리 해결책을 놓기 어려웠다.
그래도 수많은 전투를 치렀던 자답게 야안은 그 와중에도 악마를 하나 제거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렇다고 해도 상황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언제 등장했는지, 또 다른 신악마가 그 전투에 참여하였기 때문이다.
‘우드득, 우드득-’
리트담은 거대한 주술을 준비 중이었다.
드래곤 하나가 모든 것을 담은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것으로, 단순히 경계를 부수는 것이라면 리트담이 고전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 그는 단순히 무너뜨리는 것을 넘어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루어진 이 안의 모든 것을 현실로 가져가려 하였으니 고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 혼자였다면 불가능했겠지만, 다행히 그 옛날 하늘 산과 비교할 만한 하이 엘프 푸른 하늘이 있었고, 리트담에 의해 깨어난 위대한 전설을 남긴 거인족의 왕 붉은 노을이 부활한 지금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더불어 이 세계를 지탱하는 세계수가 그 자신의 뜻을 돕고 있으니 그의 주술의 준비는 이제 그 끝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아니, 이미 주술은 완성된 뒤였다. 다만 그는 두 공간의 충돌에 의한 부작용을 없애고자 했고, 이로 인해 시간이 길어졌다.
눈을 감고 자신의 주술을 모은 세계수의 가지를 내려놓은 그는 마지막으로 필요한 세계수의 가지를 꺾으려던 중 멈출 수밖에 없었다.
‘우우우웅-’
자신이 찢은 공간의 틈 사이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와 그에게 들이 닫혔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