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안 374화
18. 전설의 현자
하나 야안은 이 눈앞의 사내, 아니, 이 아흔 아홉이라 불리는 드래곤이 앞서 말한 것에 놀라 궁금했던 드래곤들의 근황에 신경 쓸 수 없었다.
어찌 아니, 그렇겠는가?
전설의 현자에게 있어 길잡이가 지닌 역할을 너무도 지대했다. 전설의 현자가 씨앗이라면 드래곤들은 그런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주는 자였으니 말이다.
최초의 인간인 카사블랑카의 탄생에 주신 아리스가 내린 축복. 길잡이의 등장을 야안 그 자신도 맞이하였다는 것에 야안은 감회가 새로웠다.
결국 야안은 자신의 아흔 아홉에게 말을 꺼냈다.
“정말 저의 길잡이가 맞으십니까?”
드래곤들이 거짓을 말하지 않는 존재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다시금 묻는 그에 아흔 아홉은 재미난다는 듯 큰 미소로 그 대답을 보였다.
어떤 말보다 확실한 답변이라 야안은 그의 그 미소 못지않은 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신이 전설의 현자임을 위대한 그들의 후예임을 다시 인정받는 기분이었다.
이러한 야안에 마주하던 아흔 아홉은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곧 주신 아리스가 그에게 내린 권능으로 야안을 살펴보았다.
야안이 전대가 꼬아 놓은 인과를 풀었다는 것을 짐작한 바 있으니 그가 대단한 경지에 올랐음을 아는 그였다. 하나 설마 드래곤의 혜안으로도 살펴지지 않으니 아흔 아홉은 그것에 대해 절로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는 야안 그가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경지에 올랐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못해도 하나의 길에 완성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가 본 야안은 마법만 아니라 검 또한 다룰 줄 아는 자였다.
대현자 테무드처럼 한 길만을 고집했다면 모를까? 야안은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길을 걷고 있는 듯하니 그런 그가 정점을 찍었을 리 없다 그는 판단했다.
하니 의문이 든 것인데, 그러한 그의 의문이 그의 상식이 곧 산산조각이나 버렸다.
아리스가 그에게 내린 권능에 의해 파악된 야안의 경지는 그의 상상을 아득히 넘어섰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마법에서 정점을 찍은 것을 넘어 검에서도 그 정점을 찍은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를 아는 그는 놀란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하나 야안이 이룩한 것은 그것이 다가 아니었다. 이 외에도 야안은 주술에서도 초인의 경지를 넘어섰으며 정령술 또한 그 못지않은 경지에 도달한 상태였다.
정령의 왕과 계약을 맺은 것을 안 것으로, 전설의 현자에게 있어 어쩌면 가장 까다로울 수 있는 과정을 이미 겪은 뒤였다.
어디 그뿐일까? 야안은 고위 신관을 넘어서는 엄청난 신력을 지닌 팔라딘이라는 칭호를 받은 성기사임을 알게 되자 아흔 아홉은 절로 탄성이 나왔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드래곤인 그로서는 처음 보는 ‘젠’이라는 기이하고 성스러운 힘을 야안이 다룬다는 점이었다.
아리스의 권능에 의해 아흔 아홉은 ‘젠’이라는 힘이 지닌 잠재력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알 수 있는 터라 그는 다소 흥분된 목소리로 야안에게 물었다.
“정말 놀랍네. 이미 그대는 완성을 앞둔 존재였군. 한데, 궁금한 것이 있네. 도대체 그 기이한 힘은 무엇인가?”
야안은 아흔 아홉이 자신을 살펴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권능을 일으키자 아리스의 성력이 야안을 휘감았기 때문인데, 젠을 다루는 야안답게 그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아는 것은 그에게 일도 아니었다.
또한 하나가 그랬던 것처럼 그가 자신이 이룬 것에 놀랄 것은 알았으나 설마 그가 놀란 지점이 다른 것임에 야안은 다소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주술을 생각했으나 길잡이인 그가 전설의 현자들이 다루던 힘들을 모를 리 없으니 그가 말하는 기이한 힘은 하나밖에 없었다.
“젠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야안은 그 말과 함께 신력을 일으켜 ‘젠’을 다루기 시작했고, 이에 아흔 아홉의 그 검은 눈동자는 크게 확장이 되었다.
짐작한 것과 직접 본 것의 차이가 컸기 때문으로 아흔 아홉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 힘을 어디서 얻은 것인가? 에 대해 물었다.
혹시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전설의 현자가 남긴 또 다른 유물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 야안의 답변은 그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은 것이었다.
바로 드래곤들이 탄생되기 이전 신화시대의 유물이었던 것으로, 바다의 신 세이란이 남긴 힘이었으니 말이다.
아흔 아홉은 짧지 않은 자신의 생을 합해도 오늘처럼 놀란 적은 없었던 터라 그는 이번에도 말문을 잃다 곧 신중한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어쩌면 그대가 익힌 ‘젠’ 이라는 힘은 큰 변수가 될지 모르겠네.”
큰 변수를 말하는 그의 말에 야안이 궁금증을 보이며 물었다. 제 생각 이상으로 ‘젠’ 이라는 힘의 잠재력을 높이 사는 그의 모습이 실로 궁금했기 때문이다.
“큰 변수라면 어떤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혹여…….”
혹시나 자신의 예상이 틀릴지 몰라 짐작되는 것이 있음에도 섣불리 말하지 않는 그에 아흔 아홉이 그의 예상이 맞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렇네. 죽음의 지배자와의 싸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네.”
“……!”
자신의 예상이 맞자 야안은 놀란 듯 동공이 확장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은 ‘젠’이라는 힘을 그리 높이 평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젠’은 본래 바다의 종족 피오들이 다루는 힘이었다.
세이란이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 준 힘인 것으로 그럼에도 야안이 이 ‘젠’의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은 바다의 신 세이란보다 그 격이 높은 주신 아리스의 힘을 그가 가지고 있어서였다.
또한 대현자로서 진리의 문을 두드린 자였기 때문으로, 이 둘 중 하나의 조건도 충족되지 않았다면 ‘젠’의 힘을 결코 그가 가져오지 못했을 터였다.
그만큼 이질적인 힘이라 그는 이 한계성을 일찍 바라보았는데, 아흔 아홉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그런 야안의 생각을 짐작하는 듯 아흔 아홉이 입을 열었다. 그의 입가에 큰 미소가 보이는 것이 야안이 이 힘을 얻었다는 것이 여간 기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자네는 최초의 인간이며 또한 최초의 현자 카사블랑카의 탄생 비화를 아는가?”
그 물음에 야안이 눈에 이색을 띠며 답했다.
“물론입니다.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당시 모든 종족이 모여 그분을 탄생시켰다 들었습니다.”
인간의 탄생 비화를 말하는 야안에 아흔 아홉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말 대로네. 우리는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로 인간을 탄생시켰지. 그리고 그대가 알다시피 인간은 놀랍게도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로 벌써 세 차례나 그의 진격을 막아섰네.”
정확히는 모든 종족이 이룬 결과였지만,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한 것은 전설의 현자였으니 그의 말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아흔 아홉이 말을 이었다.
“어째서 인간만이 죽음의 지배자를 상대할 수 있었는지 아는가? 그것은 인간이 가진 특성 때문이네.”
“인간의 특성……. 그것이 무엇입니까?”
야안의 물음에 아흔 아홉이 답했다.
“인간은 혼돈의 특성을 지니고 있네. 빛도 어둠도 아닌 존재인 것으로, 가장 아리스 님과 닮은 존재라 할 수 있네.”
아리스 님과 닮은 존재라는 말에 야안이 믿기 어려운 듯 놀라자 아흔 아홉이 자신의 주장을 받칠 증거를 꺼내었다.
“다른 종족들과 달리 어째서 인간만이 아리스 님의 신관이 될 수 있다 생각하는가?”
그의 물음에 야안은 머릿속이 번쩍였다.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던 것으로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던 야안으로서는 아흔 아홉의 말은 진리의 속껍질을 벗긴 기분이었다.
결국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하는 야안에 아흔 아홉이 말을 이었다.
“인간은 혼돈의 존재. 그렇기에 진리의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존재들이기도 하지.”
그는 그 말을 마침과 동시에 용언을 일으켰다. 그가 일으킨 용언에 야안과 그 사이에 뿌연 안개가 일어나더니 곧 그 옛날 드래곤이 카사블랑카에게 마법을 전수했을 때를 영상이 안갯속에서 일어났다.
대대로 드래곤들로부터 전승되는 것 중 하나로, 야안은 그렇게 최초의 현자 카사블랑카를 볼 수 있었다.
카사블랑카는 야안이 막연히 그렸던 모습과는 달랐다. 무언가 신비롭고 고귀할 것 같은 모습들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보다는 그가 어릴 적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아저씨 같은 생김새였던 것으로 야안으로서는 인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야안은 그가 전설의 현자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별을 담은 듯한 그의 눈 때문이다.
고요한 심야의 호수와 같은 그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그가 지닌 지혜가 절로 보여지는 듯했다. 그런 그의 생각이 다르지 않은 듯 카사블랑카는 드래곤의 마법을 놀라운 속도로 익혀나갔다.
인간인 그 자신에게 변형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 과정에서 엘프들 또한 그에게 마법을 배우기 시작했다. 본래 엘프들은 자연에 친숙한 특성을 바탕으로 나무나 땅을 노니며 활을 다루었을 뿐이었는데, 드래곤의 전용이었던 마법을 그가 변형시켜 익히자 자연 엘프들 또한 마법을 익힐 수 있게 된 것이다.
결국 카사블랑카는 마법으로 그 끝자락에 도달했다. 드래곤들의 전용이었던 마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으로도 모자라 결국 그들을 뛰어넘은 것이다.
영상은 거기서 끝이 났다.
안개가 사라지고 모닥불의 그 환한 불길 너머로 아흔 아홉의 미소가 야안의 눈에 새겨졌다. 그리고 야안 또한 아흔 아홉처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았던 것이다.
“그렇군요. 저는 당신이 무엇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알겠습니다. 저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야안의 말에 아흔 아홉은 그 특유의 나지막한 저음으로 답했다.
“나는 전설의 현자를 이끌 길잡이네. 나는 나의 일을 했을 뿐이네.”
그의 말에 야안이 웃었고, 아흔 아홉 또한 낭랑한 웃음을 흘려 보였다.
* * *
“이제 몇 남지 않았군.”
드래곤의 수장 하나는 이제 깨어날 시기가 얼마 남지 않은 몇몇 동족들을 생각하다 곧 동굴의 입구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반가운 기색과 놀람이 가득했는데 그만큼 자신의 동굴을 찾은 손님이 의외였기 때문이다.
하나답게 그의 육신이 자리한 이 동굴은 엄청난 크기를 자랑했고, 당연히 그 동굴의 입구 또한 거대했다.
드래곤 특유의 능력인 폴리모프를 하지 않고 나갈 수 있는 크기의 입구인 것으로, 이 거대한 입구에 맞지 않게 하나에게 온 손님은 아주 작은 존재들이었다.
두 명의 인간이 그가 있는 곳으로 온 것으로, 하나는 그들을 보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 생각보다 빠르구나. 이처럼 일찍 나를 찾을 줄 몰랐도다.”
그를 찾은 두 명의 인간……. 정확히는 드래곤 아흔 아홉과 야안이 그의 거처에 방문하자 그는 크게 환영했다. 또한, 놀람이 자리했는데 이는 아흔 아홉이 그를 찾는 것은 드래곤들의 유산이 필요로 할 때였고, 그것이 벌써 쓰일 줄은 몰랐던 하나로서는 당연했다.
드래곤의 수장답게 하나는 아리스 님의 가호가 없음에도 야안이 이룬 성취를 어느 정도 짐작했고 이에 감탄했다.
“하나라 하네. 이렇게 만나 반갑군.”
전대의 하나에 이어 이번 대의 하나 또한 만날 수 있었던 야안은 잠시 기묘한 감정을 느끼다 자신을 소개하며 인사를 나누었다.